# 45
꿈 속 퀘스트 보상은 현실에서 045
19. 친구와 옛 동료들 (2)
갑작스런 제안에 정우와 인식이는 말을 잃고 머리를 긁적였다.
선뜻 받아들이기 힘든 내용.
분명 본인들은 일탈을 꿈꾸겠지만.
각자의 인생이 걸려 있는 만큼, 친분과 관계없이 고민하는 것이 당연했다.
더구나 사회적으로 봤을 때 잘나가고 있는 녀석들이 아닌가.
“같이 일을 하게 된다면 정우는 돈을 굴리고 난 무슨 일을 하는데?”
정우가 내게 줄 수 있는 도움은 지구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다.
경제에 대한 조언은 뮤 대륙까지 이어질 수 있으니.
반면 인식이는 만약을 대비한 의료진이다.
인간의 목숨이 언제 날아가도 이상하지 않은 상황이 된다면 인식이와 같은 의사의 존재는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보물이 된다.
내게 힐이라는 마법이 있긴 하지만, 이것은 결코 만능이 아니다.
오히려 의료기술에 힐이 더해진다면 더 큰 효과를 만든다 볼 수 있다.
때문에 인식이는 당장 수익창출을 위해 나서서 할 게 없었다.
녀석이 할 일은 만약을 위해 의약품과 의료도구들을 사재기하여 벙커 안에 작은 병원을 만드는 일이었다.
“일단 다음 이야기는 이곳이 아니라, 조용한 곳에서 하자. 2차로 우리 집이나 너희 자취방을 가는 것도 나쁘지 않겠네.”
“대체 뭘 숨기고 있는 거야?”
“조금 있다가 말해 줄게.”
내가 하는 일들은 어디까지나 대비.
이런 대비책들을 사용하지 않고 끝나는 게 가장 좋지만, 반드시 사용하게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 게 문제다.
“뭐 좋아. 대신 우리 비쌀 거다. 이만한 고급 인력을 빼내려면 그에 맞는 대우를 해줘야겠지?”
인식이가 씩 웃으며 내게 고기를 밀었고, 나는 남은 고기를 마저 구웠다.
그렇게 한우 2㎏을 질릴 때까지 모두 구워 먹은 우리는 정우네 자취방에서 2차를 갖기로 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 선배님?”
정우와 인식의 것이 아닌 다른 남성의 목소리.
누굴 지칭하는 건지 몰라도, 그 물음이 우리에게 향하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등을 돌리니, 슈트 차림의 남성이 똑바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한때는 제법 친하게 지냈지만, 직장을 관두면서 잊었던 얼굴.
“성훈씨구나. 오랜만이네요.”
그는 바로 전 직장 동료이자, 내 1년 차 후배인 최성훈이었다.
그런 그가 이곳에 있다는 것은?
혹시나란 생각에 그의 뒤를 살폈고, 식당의 안쪽 단체룸에서 익숙한 얼굴이 대거 나오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어! 이게 누구야? 조지훈이 아냐!?”
달큰하게 취한 목소리와 함께 박장대소를 터뜨리며 다가오는 사내.
내 직속 상사이자, 박 팀장의 심복이나 다름없는 한 차장이었다.
자연히 내 얼굴이 일그러지고, 대충 돌아가는 분위기로 보아 어떤 상황인지 눈치챈 친구 두 명도 눈살을 찌푸렸다.
“어? 진짜?”
“이런 데서 만나네.”
한 과장을 필두로 내 전 직장 동료들이 우르르 다가왔고, 역시 박 팀장 또한 무리에 끼어 있었다.
“이야! 오랜만이네, 조지훈씨. 직장은 구하셨나?”
지난번에 은행에서 그렇게 헤어져 놓고, 상큼하게 인사를 건네오는 모습에 헛웃음이 난다.
“덕분에 개인 사업 시작했습니다.”
“사업? 흐음, 그래?”
내게 굉장히 관심이 많았던 입사 동기인 여성도, 툭하면 일을 밑에 직원에게 떠넘기던 만년 과장도 흥미롭단 표정으로 나를 위아래로 훑었다.
‘다행이네, 오기 전에 백화점 들러서.’
친구들을 만나기 전에 시간이 남아서 백화점에 들러 많은 옷들을 트랜스폼 슈트에 등록해두었다.
덕분에 복장은 제법 고가의 브랜드로 걸쳐져 있는 상태.
또한 손목에도 그렇게 꿇리지 않는 태그호X어 시계가 걸려 있어서 행색은 그들이 기억하던 모습보다 좋으면 좋았지 나쁘지 않았다.
“전 이만 가보겠습니다. 기분 좋게 얼굴 맞대고 이야기할 만큼 유쾌한 관계는 아니니까요.”
두 친구에게 가자는 사인을 했고, 고개를 끄덕인 인식이는 씨익 웃으며 말했다.
“거지 같은 회사에서 잘린 덕분에 대박 친 거잖아? 그럼 고맙다고 해야 하는 거 아니냐?”
뜬금없지만 웃긴 물음에 나는 피식 웃음을 흘렸고, ‘거지 같은 회사’란 말에 팀장을 비롯한 전 직장 동료들의 얼굴이 하나같이 일그러졌다.
나와 나름 친하게 지냈던 후배는 안절부절못했지만, 여기서 그에게 친한척해 봤자 직장 생활에 도움이 되지 않으니 그대로 잔금을 계산했다.
“레인지로버 차주시죠?”
“네.”
“차량이 많아서 이중 주차를 해놨거든요. 그래서 조금 기다리셔야 하는데…….”
“괜찮습니다. 나가서 기다리고 있을게요.”
사장과의 짧은 대화엔 많은 의미가 함축되어 있었다.
나는 뒤에서 기다리고 있던 박팀장에게 자리를 비켜주며 유유히 식당을 벗어났다.
“쪼개는 게 존나 마음에 안 드네. 개새끼들.”
밖에서 주차장이 정리되는 것을 기다리던 인식이가 한마디 했다.
그에 성격 좋은 정우도 동의한다며 고개를 끄덕였고, 때마침 밖에 나온 전 직장 동료들도 이중 주차 때문에 발이 묶여서 함께 기다려야 했다.
어색한 침묵이 감도는 공간.
아닌척해도 모두의 시선이 내 차에 꽂혀 있었다.
“설마 애처럼 자기 잘사는 모습 보여주려고 여기 온 거야?”
담배에 불을 붙인 박 팀장이 연기를 후 내뱉으며 이죽거리자, 인식이가 발끈해서 앞으로 나서려 했다.
나는 그런 인식이를 말리며 혀를 찼다.
“제가 왜요?”
“일종의 복수심이지. 요즘 애들은 이런 걸 사이다라고 하나?”
정말 사람 비꼬는 재주가 있다니까.
어깨를 으쓱인 나는 여유로운 표정으로 말했다.
“예전에 힘들 때는 팀장님 생각이 참 많이 났는데, 바쁘게 사니 떠올릴 여유가 없더라고요.”
그리고 그에게 영업용 미소를 보냈다.
“그런데 오랜만에 보니, 왜 그렇게 안쓰러워 보이죠.”
예전엔 정말 짜증 나던 표정과 말투도 모든 게 가소롭게 느껴졌다.
그래서 툭툭 건드리는 팀장의 말투에도 화는커녕 동정심이 피어올랐다.
누가 그러지 않았나.
가장 통쾌한 복수는 성공이라고.
비록 이 성공이 온전히 내 능력이라 볼 순 없지만, 그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그 말이 100% 공감이 됐다.
“이제 차 빼셔도 됩니다.”
주차장 직원이 크게 손을 흔들자, 굳어 버린 박팀장과 그런 팀장의 눈치를 살피는 직원들에게 인사를 건넸다.
“잘들 지내세요.”
이어서 차에 탑승하며 시동을 걸자, 뭐가 그리 분한지 재떨이를 걷어차는 박 팀장의 모습이 보였다.
“술 취해서 저러나?”
조수석에 앉은 정우가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듯 고개를 내저었다.
아마 정우도 화내야 할 사람은 나라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꼴 좋네.”
뒷자리의 인식이는 그런 팀장을 보며 조소를 흘렸고 나는 별생각 없이 차를 돌렸다.
***
정우의 자취방에 도착한 우리는 심도 깊은 대화를 나눴다.
“아, 머리 아파.”
확실한 협업을 위해선 정우와 인식이도 현 상황을 인지할 필요가 있다.
그래서 나는 1회차 드림워커라면 모두가 알만한 기본지식과 미래정보를 오픈했다.
다른 드림워커들도 은연중에 퍼뜨렸을 지도 모르는 일.
어쩌면 정부에서도 파악하고 있을 수 있는 내용이다.
“네가 허튼 소리할 놈은 아니지.”
황당하면서 믿기 힘든 이야기.
하지만 신뢰성을 높이기 위해 마법을 보여주고, 컴퓨터를 켜서 퀘스트 보상으로 얻은 안전가옥의 등기부 등본도 보여주었다.
사실 이렇게까지 안 해도 내가 이유 없는 농담을 할 성격이 아니라는 것을 알기에 정우와 인식이는 마음을 열고 이야기를 받아들였다.
“돈보다 생존이 우선시되는 상황이 발생하더라도. 만약 모든 것이 불필요한 대비로 끝나더라도 우린 충분히 잘살 수 있어.”
다만 내가 뮤대륙에서 행한 일이나, 전투 능력은 면밀하게 알려주지 않았는데, 이는 두 사람이 알아도 좋을 게 없다고 판단해서다.
내가 뮤대륙에서 행한 극단적인 방식은 많은 이들의 반감을 샀고, 적이라 할 수 있는 존재를 양산한 만큼 괜한 지식은 위험에 노출 시킬 뿐이라 생각했다.
“어쩔 수 없네.”
“내가 보기에도 지금 직장에 눌러앉아 있을 때가 아닌 것 같다.”
“대신 계약금을 5억씩 챙겨 줄게. 너희에게도 확실한 명분이 필요할 테니까.”
“……. 내일 바로 사표 쓴다.”
긴 설득이 필요 없었다.
이야기를 모두 들은 두 사람은 내 손을 잡았고, 우린 한참 동안 머리를 맞대고 계획을 정리했다.
정말 천군만마를 얻은 느낌이다.
***
20. 사제
카라스마을 여관 식당.
“또 오고 말았어.”
사치코가 손으로 얼굴을 감싸며 고개를 숙이자, 태영은 묵묵히 그녀의 등을 두드렸다.
식당에는 많은 용병들이 자리 잡고 있어서, 자연히 그런 두 사람의 모습이 눈이 띠었다.
용병들은 입꼬리를 말아 올리며 사치코와 태영을 재밌다는 표정으로 관찰했다.
“어떡하지? 쇠뇌를 사고 이제 돈도 얼마 안 남았는데. 우리 이대로라면 여관에서도 쫓겨나고 말 거야.”
“…….”
태영도 머리가 아픈지 관자놀이를 주무르며, 고민하다가 어렵게 입을 열었다.
“다시 퀘스트를 수행하러 가야지.”
“뭐? 진심으로 하는 소리야? 그 꼴을 당해 놓고?”
“결론적으로 죽지 않았잖아. 그리고 그땐 사냥 중이던 고블린에 정신이 팔려 지도를 자세히 살피지 못한 잘못이지. 주의하면 충분히 대비할 수 있었어.”
무언가를 다짐하듯 주먹을 말아 쥐는 태영의 모습에 사치코는 흔들리는 눈으로 떨어져 나갔던 어깨를 만지작거렸다.
“나, 난 못해.”
완전히 공포에 마음이 빼앗긴 모습.
태영은 속으로 한숨을 내쉬며 물었다.
“그럼 어쩌게? 이 뮤대륙에서 허무하게 시간만 보내게?”
“그것도 나쁘진 않지.”
어깨를 움츠리니 더욱 체구가 작아 보이는 사치코.
태영은 그녀는 내버려 두지 않고 끈질기게 설득했다.
“실은 현실에서 나와 같은 상황에 놓인 사람들을 만나 봤거든?”
“뭐?”
“사치코 넌 일본에서 잘사는 편이야?”
“그건 아닌데. 왜?”
“이번에 만난 사람 중에 우리보다 먼저 뮤대륙에 들어선 사람이 있었어, 그 사람이 그러더라고 퀘스트를 수행하면서 보상으로만 30억원 넘게 벌었다고. 현실 시간으로 겨우 17일 동안 말이야.”
놀란 표정으로 자신을 올려다보는 사치코의 모습에 태영은 진지하게 말을 이었다.
“우리도 노력만 하면 충분히 그렇게 벌 수 있어. 아니 시간이 흐르면 더 많은 재산을 얻을 수도 있지. 그리고 이곳에서 죽어도 현실에는 아무런 이상이 없대, 단지 더 이상 이 꿈을 꾸지 않게 될 뿐 이미 얻은 스킬과 보상은 그대로라고.”
마른 침을 삼키는 모습을 보니, 사치코의 공포심이 돈이란 한 글자에 흔들리고 있음이 느껴진다.
“하, 하지만…….”
그러나 사치코는 좀처럼 방향을 정하지 못했다.
어차피 죽어도 진짜 죽는 것이 아니라고 했음에도 지난날의 공포가 너무도 강하게 뇌리에 각인된 모양이다.
덕분에 태영은 슬슬 짜증이 밀려오는 것을 느끼며 차라리 혼자 싸우는 게 나을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태영?”
태영의 안색을 살피던 사치코는 점차 식어가는 그의 눈빛에 크게 당황하며 손을 붙잡았다.
“차라리, 그 사람에게 도와달라고 하자.”
“그 사람?”
“저택의 마법사 말이야. 지훈이랬나? 그 사람한테 사정하면 도와주지 않을까? 나, 나도 싸우고는 싶어. 돈도 벌고 싶고. 하지만 쇠뇌 하나만 믿고 숲속에 들어가기가 너무 무서워서 그래.”
지훈이란 이름에 태영의 어깨가 크게 움찔거렸다.
그의 도움을 얻을 수만 있다면 더할 나위 없겠지만, 지훈은 자신들에게 관심이 없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현실에서 만났던 그 막강했던 드림워커가 어쩌면 지훈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확신은 없지만 느낌이랄까?
은연중에 풍기는 분위기가 비슷했다.
“어떤 도움을 받고 싶은데요?”
갑자기 옆에서 들려온 목소리.
주변이 조용해진 것 같다는 느낌과 함께 고개를 돌리니, 얼굴에 복면을 하고 있는 사내가 차갑게 자신들을 내려보고 있었다.
그는 바로 자신들이 거론한 지훈이라는 인물.
귀족처럼 여러 기사들을 끌고 다니는 특수한 존재였다.
호랑이도 제 말하면 온다는 말이 있지만 이건 그 수준이 아니다.
태영과 사치코는 마치 도둑질이라도 하다가 들킨 것마냥 당황해야 했다.
“아, 아니. 그게…….”
크게 손을 내저으며 열심히 변명거리를 찾는 사치코와 자신들을 내려보는 차가운 눈동자를 말없이 바라보는 태영.
사치코는 태영에게 무슨 말이라도 해보라며 손을 잡고 흔들었다.
잠시 말없이 지훈을 바라보던 태영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부탁이 있습니다.”
크게 인연이 없는 사람에게 부탁하는 상황이 우습지만, 지금 그에게 손을 벌리지 않으면 앞으로 기회가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염치불구하고 고개를 숙이며 부탁이란 단어를 입에 올렸지만, 차갑게 가라앉은 주변 분위기에 쉽게 다음 말을 꺼내기가 힘들었다.
“두 분을 도와 달라는 거죠?”
하지만 이야기를 들었는지, 지훈이 먼저 말뜻을 이해하고 반문했다.
“네, 네. 그렇습니다.”
“두 분을 도와드리면 제게 뭘 해줄 수 있죠?”
그러나 자신을 관찰하듯 뚫어져라 바라보며 가치를 따지는 지훈의 모습에 쉽게 답을 하지 못했다.
지훈은 이어질 태영의 답을 기다렸는데, 의외로 답을 한 것은 어리바리하게 우왕좌왕 대던 사치코였다.
“무엇이든지요!”
“무엇이든?”
태영은 사치코의 대답에 놀랐지만, 이내 동감한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말을 잃고 그런 두 사람을 바라보던 지훈은 작게 실소를 흘리며 등을 돌렸다.
“어? 가시나요? 자, 잠시만요.”
확실한 명분을 제시했어야 하는가?
딱 봐도 그는 추상적인 대답을 좋아하지 않을 것 같다.
하지만 이어진 지훈에 말에 두 사람의 표정이 밝아졌다.
“따라오세요.”
“네!”
태영과 사치코는 얼른 자리에서 일어나 그의 뒤를 졸졸 쫓아갔고, 침묵에 물들었던 여관 식당은 금세 시끄러워졌다.
“능력이 사람을 만든다는 건가? 이젠 똑바로 바라보기도 힘드네.”
“호위기사들 때문 아냐?”
“그런가?”
그리고 자연히 용병들의 대화 주제는 지훈으로 옮겨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