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5
꿈 속 퀘스트 보상은 현실에서 035
15. 선점 (1)
“뭐? 갑자기 그게 무슨 말이냐? 홍차 사업을 대대적으로 확대하자니. 그러다가 자칫 제조법이 새어 나가면 어쩌려고.”
“조심하는 것도 상관없지만, 차라리 한 번에 크게 터뜨려서 아예 자리를 선점하는 것이 낫다고 생각되었습니다.”
홍차는 크리스토퍼 남작의 노력에 의해 며칠 사이 적지 않은 양을 팔 수 있었다.
물론 그래 봤자 10㎏도 안 되는 양이지만, 값이 워낙 비싸다 보니, 그것만으로 상당히 많은 돈이 들어왔다.
홍차의 가격은 50g 한 병에 5골드.
평민은 절대 구매할 수 없는 금액이지만, 귀족에겐 전혀 부담스럽지 않은 가격이다.
마법사나 기사들도 사치품이라 생각하면 얼마든지 구매할 수 있을 정도.
현재 홍차는 마탑의 고위마법사와 크리스토퍼 남작과 친분이 있는 귀족들을 중심으로 호평 속에 알음알음 퍼지고 있는 상태였다.
아마 순조롭게 시간이 흐르면 홍차 하나만으로 이름을 알리게 되는 것은 꿈도 아닐 터.
“하지만 일을 너무 크게 벌리다간 손쓰기 힘든 사태가 벌어질 수도 있다. 나와 사숙의 힘만으로 어떻게 할 수 없는 사태가 말이다.”
현재 홍차는 ‘조든 크리스’라는 상표를 달고 판매되고 있다.
대충 예상이 되겠지만, 나와 고든, 크리스토퍼 남작 세 동업자의 이름을 따서 만든 상표이다.
그리고 앞으로 내가 진행할 사치품 사업의 간판이 될 이름이기도 하다.
“생각해봤는데, 저희의 안전을 확보하면서 상품을 안정적으로 유통할 수 있는 거래처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거래처는 사숙조님의 도움이 있으면 연결이 가능한 곳이기도 하죠.”
“너…….”
고든은 미간을 찡그렸고, 나는 아마도 그가 예상하는 것이 맞을 거라며 고개를 끄덕였다.
“왕립 마탑입니다.”
왕립 마탑의 주인은 다름 아닌 케일론 왕국의 국왕이다.
마탑을 통해 홍차를 유통한다면 이는 우리 사업에 국왕이 끼게 되는 것이나 다름이 없다.
그럼 감히 이 나라에서 누가 우릴 해하겠는가.
“애초에 홍차는 우리들의 힘만으로 지켜낼 수 있을 만한 물건이 아니었습니다. 제가 너무 안일하게 생각했죠.”
홍차의 값어치를 생각하면 크리스토퍼 남작 이상의 권력자가 언제 손을 뻗어와도 이상치 않다.
그런데 나라의 모든 것을 가진 국왕이 자신의 세력이라 할 수 있는 마법사들의 재산을 가로채려 할까?
내가 봤을 땐, 마탑을 끼는 편이 안전과 사업확대 두 마리 토끼를 잡을 수 있는 유일한 방안이었다.
내 의견에 고든은 한숨을 내쉬며 물었다.
“갑자기 그런 말을 하는 이유가 무엇이냐?”
이유?
이유야 간단하다.
박성이 ‘드림워커’라 지칭한 나와 같은 존재가 대륙 곳곳에 퍼져 있으니.
홍차의 제조법을 지킬 수가 없다고 판단한 것이다.
그래서 생각한 것이 선점이다.
케일론 왕립 마탑을 등에 업게 되면 케일론 자체는 말할 것도 없고, 해외수출 또한 쉽게 이뤄질 테니.
그렇다면 뮤대륙에 이미 존재하는 홍차로 돈을 벌겠다고 나서는 사람은 없을 것이라 생각했다.
“앞서 말씀드렸듯이, 스승님과 저의 안전을 위해서입니다.”
이는 선점을 위해 지어낸 말이 아니다.
충분히 가능성이 있지만, 어떻게든 해결할 수 있을 것이란 믿음으로 묵인했던 사실이다.
“그렇게 되면 왕립 마탑에 독점 판매권을 내줘야 할 것이다.”
“폐하께서 홍차 레시피가 저희의 재산임 인정하시어 독점 생산권을 내려주신다면 크게 문제 될 게 없다고 생각합니다.”
독점 판매권을 주는 대신 독점 생산권을 얻게 된다면 나야 편해서 좋지.
굳이 생산에 참여하지 않고 지시만 내리면 되니까.
“허, 허허.”
내 제안에 내내 표정이 좋지 않던 고든.
하지만 그가 갑자기 실소를 흘리며 말했다.
“대단하구나.”
“네?”
갑작스런 태도 변화.
영문을 모르겠단 내 반응에 고든은 우려놓은 홍차를 잔에 따르며 마법으로 차갑게 식혔다.
“말을 어떻게 꺼내야 할지 고민이었는데, 사실 네가 한 말을 이미 사숙께서 하셨다.”
“네?”
“안정적인 생산을 보장해주는 대신 홍차의 독점판매권을 달라고 마탑주께서 직접 제안을 해왔다고 하더구나.”
크리스토퍼 남작이 마탑주에게도 홍차를 전달했나?
그의 말이 사실이라면 반응이 지나치게 빨랐다.
“흥정은 해봐야 아는 것이지만, 탑주께서 안정적 생산을 거론한 만큼, 독점 생산권을 얻는 것도 충분히 가능할 것이다.”
“폐하의 공증으로요?”
“마탑주란 위치가 폐하의 대리인이다. 제안은 탑주께서 했지만, 결재는 어차피 폐하의 손을 거치게 되니 같은 것이지.”
예상외.
하지만 내가 바라던 상황인 만큼, 길게 고민할 이유가 없는 내용이었다.
“스승님께선 괜찮으시겠어요?”
“결정은 네가 하는 거다. 홍차의 주인은 너니.”
그럼 결정.
홍차뿐만 아니라 시가를 비롯해 제작될 여러 사치품도 같은 방식으로 납품하게 된다면, 빠른 속도로 사업을 키울 수 있을 것이다.
독점이란 말에 거부감이 들지만, 지금은 도리를 따질 생각이 없었다.
***
홍차는 바라던 대로 마탑을 통해 판매키로 했다.
더불어 독점 생산권을 얻게 되면서 안정된 성공가도를 달릴 수 있는 기반을 손에 넣었다.
독점 생산권은 차의 이름이 다르더라도 제조 방식이 같으면 우리의 권리를 침해한 것이 되어버린다.
때문에 케일론 왕국 시장은 무조건 보장이 되고, 나라의 공증을 거친 만큼 추후 타국에서 홍차를 생산하더라도 베낀 것밖에 되지 않으니, 상표에 오리지널리티가 부여된다.
이렇게 마음이 편할 줄 알았으면, 꽁꽁 싸매기보다 진즉 같은 방법을 취할 걸 그랬다.
이 정도면 충분히 성공적인 선점이라 볼 수 있다.
“어서 오십시오.”
물론, 이건 선점을 기본 개념으로 두고 열심히 머리를 굴려서 나온 결과지만, 지적재산권이 존재하지 않는 세상에서 국왕이 인정한 독점권은 엄청난 가치를 지니고 있었다.
만약 우리측에서 마탑을 상대로 사업을 제안했다면 쉽지 않았겠지만, 천운인지 저쪽에서 먼저 알고 제안해 준 덕분에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아마 지금의 내 행동을 다른 드림워커들이 알게 된다면, 지구의 지식을 활용한 상품 선점 경쟁이 번질 수도 있다.
하지만 이건 그들이 나와 같은 수준의 배경을 지녔을 경우의 이야기지만 말이다.
“정보를 사고 싶은데요.”
마탑과 홍차의 독점계약을 위해 아드리안 시를 방문한 나는 부탑주와 계약이 끝나자마자 정보 길드를 찾았다.
정보 길드라고 해서 도적길드같은 은밀한 것이라 생각했는데, 중심 상권에 큰 간판을 달고 당당하게 영업을 하고 있었다.
“처음 오셨군요. 지불 가능한 금액이 어느 정도죠?”
정보를 얻기도 전인데 얼마를 낼 거냐는 말에 살짝 고민해야 했다.
이 말은 분명 내가 내는 금액에 따라 내가 접할 수 있는 정보의 수준이 달라진다는 의미일 것이다.
현재 내 전 재산은 백금화 3개에 금화 2개.
상회의 돈을 털면 더 확보할 수 있긴 하지만, 가뜩이나 고든과 크리스토퍼 남작의 투자에 의지하고 있는 만큼 신뢰를 위해 해선 안 될 짓이라 생각했다.
일단 지금은 있는 돈으로만 정보를 사는 수밖에.
“백금화 3개입니다.”
“그러시군요.”
백금화는 분명 일반인은 구경도 못할 거금이다.
내 대답에 창구 여직원은 의외라는 반응을 보이며 웃었다.
확실히 엄청난 돈인데, 이게 적다고 생각하는 것 보면 나도 참 배포가 커지긴 한 것 같다.
여직원은 나를 안쪽 방으로 안내했다.
그리고 들어선 방에는 한 글레머러스한 여성이 노출도 있는 의상을 입은 채 차를 마시고 있었다.
“이야, 이게 누굽니까. 지훈 님이 아니십니까?”
이어진 여성의 인사와 방안 가득한 익숙한 향기에 나는 표정을 굳혔다.
“아무리 정보길드라지만 이름을 숙지하고 있을 만큼 유명인사가 아니라 생각하는데요.”
“얼마 전까지만 해도 그랬죠. 하지만 지금은 지훈 님의 주목도가 꽤 높아졌답니다.”
방안에 감도는 홍차 향기.
그녀는 여유롭게 홍차의 향을 즐기며 찻잔을 입에 가져갔다.
“정말 대단한 물건을 개발하셨습니다. 저 완전 이 녀석에게 매료되었다니까요?”
설마 정보길드의 담당자가 홍차를 즐기며 맞이할 거라곤 상상치도 못했다.
나는 침착함을 유지하며 그녀 앞에 놓인 의자에 앉았다.
“혹시 정보길드에서 홍차의 제조법도 알고 있나요?”
“그렇진 않습니다. 하지만 알아내기로 마음먹으면 얼마든지 알아낼 수 있죠.”
대부분의 케일론 인들이 흑발에 짙은 갈색 눈동자를 가진 것과 달리, 그녀는 흑발에 붉은 눈동자를 소유하고 있었다.
“그런데 팔지 못할 정보는 굳이 수집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어차피 홍차는 지훈 님의 상회에서밖에 생산하지 못하잖아요?”
이걸 놀랍다고 해야 할지.
불쾌하다고 해야 할지.
이쪽은 방금 독점계약을 마치고 온 상태인데.
“참고로 저흰 왕국의 공증을 받은 정보 길드로, 결코 폐하의 의중에 반하는 짓은 하지 못합니다.”
과연 그럴까?
정보길드하면 뱀같은 이미지밖에 안 떠오른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전 케일론 정보 길드의 1급 정보원, 클로이라고 합니다.”
“지훈입니다.”
뒤늦게 인사를 건네온 그녀는 찻잔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홍차의 영향도 있지만, 솔직히 저는 지훈 님에게 관심이 아주 많습니다. 무엇을 의뢰하든 정해진 값 이상의 서비스를 해드리죠.”
“감사한 말씀입니다.”
그리고 그녀는 의뢰내용을 밝히라며 손짓을 했다.
“외곽 마을에 갑자기 나타난 이방인들에 대해 조사해 주시기 바랍니다.”
내가 정보길드를 찾은 이유.
그것은 다른 드림워커들의 정보를 손에 넣기 위함이었다.
“아아, 지훈 님처럼 마법 신분증을 가진 과거 행적을 알 수 없는 사람들 말씀하시는 거죠?”
“뭐…….”
“그들에 대한 정보라면 이미 파악하고 있습니다. 수상한 게 한두 가지가 아니라서요.”
할 말 없게 만드는 그녀의 대답에 더 이상 놀랄 것도 없다는 생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케일론 왕국에 23명, 미드랜드 전체로 봤을 땐, 300명 정도가 있었죠.”
300명이라.
생각보다 숫자가 많다.
“처음 이들의 처리 방안에 대해 고민이 많았습니다. 하지만 신전으로부터 지정된 마을의 방문자들이 위협하지 않는 이상, 해하지 말라는 신탁이 전달되어 방관하게 되었죠. 신께선 지훈 님 같은 분들이 세상을 잇는 가교가 될 것이라며 평범한 자국민으로 대하라고 하셨습니다.”
신탁? 세상을 잇는 가교?
그녀의 이야기 속에 포함된 심상치 않은 단어.
나는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지금까지 일어난 기이한 일들, 눈치가 있다면 느낄 수밖에 없는 부분들.
지구와 뮤대륙의 접점이 점점 많이지고 있으며, 앞으로는 더할 것이다.
그리고 쌓이고 쌓인 문제는 언젠가 폭발할 터.
결코, 듣기 좋은 말은 아니었다.
“우린 그런 여러분을 수행자라 부르고 있습니다.”
수행자라…… 퀘스트를 진행하는 우리의 상황에 잘 맞는 명칭이었다.
이들은 퀘스트에 대해 모르겠지만 말이다.
“다행히 수행자 여러분은 몬스터를 사냥하는데 열을 올리시더군요. 그리고 신의 보살핌 속에 빠르게 능력을 키워가고 있습니다. 물론 그 과정에서 많은 사람들이 죽어 버렸지만 말이죠.”
“지금은 몇 명이나 살아남았습니까?”
“이젠 52명밖에 안 남았습니다. 우리 케일론 왕국은 지훈 님을 포함해 4명의 수행자가 있죠.”
이 꿈을 꾸기 시작한 건 16일째지만, 뮤대륙에서 활동한 기간은 80일이다.
그 사이에 어떤 변수가 발생했을지 알 수 없지만, 생존율은 겨우 17%.
고개를 절로 갸웃 거리게 만드는 낮은 수치다.
“그 52명 중 주목할만한 인물이 딱 3명 있습니다. 그중 한 명이 바로 지훈 님이시고, 나머지 두 사람은 각각 어제와 그제 오러 익스퍼트 초급에 올라섰죠.”
오러 익스퍼트 초급.
용병으로 치면 상급이고, 기사면 정규, 마법사면 3서클에 해당되는 위치다.
마음만 먹으면 기사가 될 수 있는 위치인 만큼 나보다 계급이 위에 있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전투 능력에선 익스퍼트에게 밀리지 않을 자신이 있다.
일단 내겐 마법이 있으니.
“저처럼 마법과 오러를 겸하는 사람은 없나요?”
“살아남은 수행자 52명 중 스승을 갖지 못한 인물이 대부분입니다. 스승을 모시고 있어도 지훈 님처럼 마법을 배운 사람은 단 둘뿐이죠. 하지만 주시할만한 수준은 아닙니다.”
그녀는 비단같은 머리카락을 손가락으로 둘둘 말며 말을 이었다.
“사실, 익스퍼트 초급을 달성한 두 사람도 지훈 님과 비교할 수준은 아니죠.”
“네?”
“지훈 님께선 이미 귀족과도 깊게 인연을 맺고 있고, 국왕 폐하의 허가를 받은 유망사업의 독점 생산권까지 갖고 계십니다. 개인 능력을 종합평가한다면 잠재력에서 지훈 님의 발끝에도 못 미칩니다.”
실력도 그들에게 밀리지 않을 거라고 자신하지만, 확실히 인맥과 상업적 배경은 놀랄 만큼 잘 가꾸고 있다.
다른 사람들은 나처럼 무언가를 시도하려 않고 그저 내려오는 퀘스트만 깨는 모양이다.
당장 내가 인맥을 이용하거나 돈을 풀어 그들을 해하려 한다면 제거되는 것은 순식간이다.
뮤대륙에서 우리 정도 강자는 매우 흔했으니.
“혹시 수행자끼리 서로 만난 적이 있나요?”
“네, 있습니다. 만난 적이 없는 사람들이 사전에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다른 수행자가 있는 지역으로 이동했었죠.”
나처럼 탐색 스킬로 상대방을 찾아낸 후 뮤대륙에서 재회하기로 약속을 한 것 아닐까?
“그래서 어떻게 됐는데요?”
“죽었습니다.”
죽다니?
내가 자세한 설명을 요구하자 그녀는 씩 웃어 보이며 차갑게 말했다.
“이 부분이 아주 흥미롭습니다. 수행자가 다른 수행자를 죽였거든요.”
“…….”
“수행자끼리 마주하게 되면 거의 무조건 칼부림이 났고 반드시 어느 한쪽이 목숨을 잃고 말았습니다. 덕분에 경비대에서 이들의 처벌에 대해 골머리를 썩였었죠. 결과적으로 수행자들끼리의 다툼엔 관여 안 하는 것으로 결론이 내려졌지만, 많은 의문을 낳은 부분입니다.”
그게 무슨.
“다만 딱 한 팀, 예외가 있었습니다. 그들은 다른 이들과 달리 싸우지도 않고 서로 협력하며 잘 지냈죠. 비록 지금은 몬스터 밥이 되었지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