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
꿈 속 퀘스트 보상은 현실에서 020
9. 안개 (1)
기습공격의 표적이 된 오크는 주변을 어슬렁거리다가 오히려 내 쪽으로 다가왔다.
덩달아 녀석을 향한 석궁의 조준 도는 높아질 수밖에 없고.
오늘따라 유독 커 보이는 대가리를 향해 방아쇠를 당겼다.
-크아아악!
석궁을 떠난 볼트가 오크의 왼쪽 눈에 틀어박혔다.
이왕이면 뇌에 구멍을 내는 편이 좋았을 텐데, 살짝 빗나가고 말았다.
하지만 이 정도만으로도 충분하다.
비명을 내지르는 오크는 거의 무방비 상태였고, 나는 도약 스킬을 사용해 섬전처럼 달려들며 창을 찔러넣었다.
녀석의 남은 오른쪽 눈이 내게 향했을 땐 이미 창은 목젖에 파고든 후였다.
-컥!
몬스터라도 인간형이면 목을 꿰뚫리고 무사할 리가 없다.
바로 창을 뽑아든 나는 머리를 바닥에 처박으며 바둥거리는 오크를 뒤로하고, 글레이브를 꺼내 들며 달려드는 두 번째 녀석에게 몸을 날렸다.
“라이트.”
-큭!
마법을 배경으로 한 만화나 소설에서 흔히 사용되는 전법.
일명 ‘눈뽕’이다.
라이트는 두 가지 방법으로 사용할 수 있다.
하나는 구슬형태로 만들어 지속성을 띠게 하는 것과 또 다른 하나는 일시에 빛을 터뜨려 섬광탄처럼 사용하는 방식이다.
동료들이 있다면 절대 못 쓰는 기술이지만, 나는 솔로다 보니 누군가를 신경 쓸 필요가 없었다.
-푹!
방심한 상태에서 눈을 당한 녀석이 당황하며 뒷걸음질을 쳤지만, 도약으로 순식간에 거리를 좁혀오는 나를 피할 수는 없다.
이번에도 내 창은 정확하게 목을 꿰뚫었고, 무기를 떨어뜨린 채 켁켁 거리는 녀석에게서 물러났다.
어차피 저 상태론 오래 못 산다.
괜히 근처에서 알짱거렸다가 발목이라도 잡히면 아작날 수 있으니 조심했다.
언제나 방심은 금물, 안전제일이다.
[오크 처치 2/30]
녀석들은 그렇게 2분을 못 넘기고 움직임이 줄어들었다.
고든에게 받은 아공간 팔찌에 오크 사체를 담았다.
오늘은 딱 15마리만 잡을 것이다.
그리고 일주일 동안 마법 수련을 한 후, 나머지 15마리를 사냥할 예정이다.
“8일 만에 뮤 대륙에서 쫓겨나진 않겠지.”
예전엔 무조건 현실로 돌아가기 위해 노력했는데, 이젠 어떻게 해서라도 이쪽에 길게 남고 싶었다.
***
11일 차, 뮤 대륙 56일째.
나는 일부러 오크 사냥 퀘스트를 단 한 마리만 남겨둔 채, 눈치 싸움을 벌이듯 은근슬쩍 마법을 수련했다.
[마법에 대한 이해도가 상승했습니다.]
[마력이 1 향상됩니다.]
그런데 이런 내게 마치 허튼수작 말라는 듯 잠에서 깨버렸다.
분명 예전에는 10일 이상도 머무르곤 했는데…….
아무래도 퀘스트를 내려주는 시스템(아마도 신)은 퀘스트 수행 의사를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것 아닐까 싶다.
그래서 이 기회에 확실히 선을 그어 버린 거고.
퀘스트를 수행하지 않고 머물 수 있는 기간을 알게 된 것은 좋지만, 뭔가 내 뜻대로 되는 것 없이 꼬이는 느낌이라 앞으로 시스템을 상대로 잔머리 굴리는 짓은 하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래도 앞으로는 8일이라는 기간을 중심으로 일정을 짜면 되니, 필요한 시행착오인 것 같다.
그나저나 쫓아내면서 꾸준히 마력을 보너스로 주는 것을 보면 웃기다.
혹시 마법훈련을 안 한다면 어떤 항목으로 쫓아낼까?
궁금하긴 하지만 더 이상 시험해볼 필요는 없어 보인다.
-켁!
[오크 처치 30/30]
그리고 12일 차, 8일을 가득 채워 마법을 수련한 후 오크 사냥을 나선 나는 현실 시간으로 6일 만에 퀘스트를 완료했다.
[퀘스트를 완료했습니다.]
[완벽한 전투. 압도적인 승리. 모든 능력치가 1 향상됩니다.]
[보상으로 신체 내구력이 증가합니다.]
[앞으로 체력 수치에 따라 신체의 강도가 높아집니다.]
이후 마을로 돌아와, 고든이 내어준 방에서 잠이 든 나는 그대로 현실에 돌아왔다.
원룸에서 눈을 뜨자 가장 먼저 느껴진 것은 퀴퀴한 냄새.
이거 어째 운동을 시작한 후로 방안에 홀아비 냄새가 더욱 강해진 것 같다.
디퓨저라도 사다 놔야 하나?
“현실에서 하루 머물고, 뮤대륙에서 8일을 머무니, 뭐가 현실인지 모르겠네.”
뮤대륙에서 돌아오면 언제나 컨디션이 최상으로 조정이 된다.
가벼운 몸으로 기지개를 켠 나는 오랜만에 손에 들어온 보상카드를 바라보며 입꼬리를 올렸다.
그래, 역시 이 시간이 있어야지.
이번에 오크 퀘스트를 완료하고 얻은 하급 보상카드 3개를 집어 들었다.
[하급 보상]
언제나처럼 검은색 카드에 금색의 글귀가 새겨지고.
[카드를 사용하시겠습니까?]
눈앞에 메시지 창이 떠오른다.
‘사용한다.’
이어서 내가 사용 의사를 밝히면.
새하얀 빛이 폭사하며 눈이 내리는 듯한 이펙트와 함께 보상이 나타난다.
[민첩이 2 증가합니다.]
[태그호X어 까레라 칼리버5 데이데이트를 획득했습니다.]
[액티브 스킬 관통을 습득했습니다.]
민첩이 2 오른 것도 나쁘지 않지만, 나머지 두 개 보상도 왠지 좋은 것 같다.
딱 봐도 공격 스킬로 보이는 관통은 사용법을 연구할 필요가 있어 보인다.
조금있다가 공원에서 몰래 실험해 봐야지.
“그런데 태그호X어는 시계 말하는 거 맞지?”
나는 유일한 현물보상으로 허공에서 유유히 내려오는 검은색 가죽 상자를 잡았다.
그리고 내용물을 확인하니.
“진짜 시계네.”
은색 바디에 검정 판, 금색의 지침이 고급스러움을 뽐내는 스위스제 고급시계가 들어있었다.
“이젠 보상으로 별게 다 나오네.”
시계 끈은 가죽이어서 따로 조정할 필요 없이 바로 착용 가능했다.
나는 별생각 없이 그것을 왼쪽 손목에 채웠고, 나머지 구성품을 살펴보다가 보증서가 눈에 띄었다.
[S백화점 본점 2020.05.24]
그것엔 파란색의 스탬프와 사람의 손길이 느껴지는 필기체로 날짜가 적혀 있었다.
“설마 신이 개런티 카드에 도장 찍고 날짜까지 직접 기재한 건 아니겠지?”
가치로만 따지면 미래 신문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이건 사람을 즐겁게 해주는 보상이었다.
누군 태그호X어가 명품시계가 아닌 고급시계 라인이라고 하는데, 내 입장에서는 명품 중 명품이었다.
친구들은 하나씩 비싼 시계를 갖고 있지만, 나는 이런 걸 쓸데없는 돈 낭비로 여겼기에 살 생각 자체를 안 해봤다.
그런데 막상 차보니 기분이 나쁘지 않다.
품격이 올라간 느낌이랄까?
운동을 나서기 위해 트레이닝복을 입으면서 괜히 소매를 걷었다.
“근사하네.”
참고로 내가 투자한 T화학의 주식 가치는 4배 가까이 불어난 상태인데 누구에게도 자랑하지 않았다.
원래 자랑과 거리가 먼 성격이지만 시계란 녀석은 아무래도 남자의 감성을 자극하는 마력이 있는 것 같다.
각종 장비가 담긴 무거운 백 팩을 짊어진 나는 운동을 위해 집을 나섰다.
출근하는 시민 사이를 역행하여 공원으로 향하는 것도 완전히 익숙해졌다.
그리고 항상 같은 시간에 출근을 하는 시민들도 내가 뭐하는 사람인지 궁금하단 표정이다.
매일 이 시간이 되면 트레이닝복 차림으로 공원을 향하니, 눈에 띄는 것이 당연했다.
-지잉.
그렇게 까치산 공원에 도착해 막 산행을 시작하려는데, 태그호X어에 시계 포지션을 빼앗긴 스마트폰이 모처럼 존재감을 나타냈다.
[오늘 치맥 ㄱ?]
그건 얼마 전 내게 2천만 원을 선뜻 빌려주었던 정우의 메시지였다.
모처럼 친구들을 만나서 술 한잔하는 것도 나쁘진 않지만, 지금은 운동에 전념하고 싶다.
친구들은 나중에 주식을 정리하고 돈을 갚으며 감사함을 전할 때, 만나는 것이 나을 것 같다.
[미안 다음 달 10일까지는 힘들 듯. 대신 10일 날 만나면 내가 거하게 쏠게. 빌린 것도 갚고.]
[아쉽네. 알았다. 대신 그때 단단히 뜯어 먹을 거다.]
[ㅋㅋ 그래]
[뭘 하는지 모르겠지만, 너무 무리하진 말고.]
[ㅇㅇ]
어째 당부가 부모님 같다.
미소를 지으며 스마트폰을 주머니에 찔러 넣은 나는 무거운 가방을 멘 채 까치산 공원의 길게 이어진 계단을 뛰어 올라갔다.
***
그건 아침 운동을 마치고 식사를 위해 공원을 내려오던 중 발생한 일이다.
-스스스
새로 얻은 관통 스킬의 효율성에 만족감을 드러내며 콧바람을 흥얼 거리던 나는 정신을 차려보니, 어느새 새하얀 안개 속에 갇혀 있었다.
“미친.”
기겁한 나는 얼른 가방을 내려놓으며, 보조 기능 활성화했다.
‘지도.’
[사당동 까치산 공원 입구]
이번에도 역시 현실에서 사용 불가능했던 지도가 눈앞에 떠오르고 주변에 적을 표시하는 붉은 점이 없는 것을 확인하며 얼른 가방에서 창을 꺼내 조립했다.
10여 초 만에 뚝딱 완성된 창을 쥐고 방검복과 방탄 헬멧, 방검 장갑까지 착용했다.
트레이닝복 위로 해당 복장이 갖춰지니 꼴이 우습게 되었지만, 지금은 멋을 따질 때가 아니었다.
“말도 안 되는 괴물만 나오지 마라.”
나는 긴장하며 주변을 살폈는데.
예상치 못한 사태가 벌어졌다.
“누, 누구 없어요!”
“여기요! 여기 사람 있습니다!”
“갑자기 무슨 안개가 이렇게.”
여기저기서 인기척이 느껴지고, 분명 아무것도 표기가 되지 않던 지도에 갑자기 흰색 점 5개가 찍혔다.
“…….”
나 말고도 말려든 사람이 더 있다는 뜻.
이어서 그 다섯 명은 서로 소리치며 한데 모이기 시작했다.
“어떻게 한다.”
지금 이 꼬라지로 나서면 괴한 취급 받기 딱 좋다.
그렇다고 방치 하자니, 지난번처럼 이들도 몬스터에게 공격을 받을 가능성이 있다.
“마음 같아선 무시하고 싶지만…….”
혹시라도 저들의 신변에 이상이라도 생긴다면, 이 시각 산행을 했던 모든 사람에게 의심이 닿을 수밖에 없는 노릇.
또 그렇게 되면 가장 큰 의심을 받을 만한 인물로 내가 지목될 것만 같은 느낌이 든다.
그리고 아니나 다를까.
“꺄악!”
“뭐, 뭐야, 씨발!”
최악의 사태가 벌어졌다.
-크아아악!
시민들 근처에 돌연 붉은 점 두 개가 생겨난 것이다.
들려온 피어를 봐선 오크가 분명하다.
‘젠장!’
결국, 나는 도약 스킬을 사용해 달릴 수 있는 최고 속도로 그들에게 다가가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