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
꿈 속 퀘스트 보상은 현실에서 017
8. 마법 (1)
“분명 고블린이었어.”
내가 지금까지 잡은 고블린이 몇 마리인데, 그것도 모르겠는가.
하지만 나를 공격하고 또 내게 반격을 당한 고블린은 안개와 함께 사라졌다.
고블린의 피가 묻은 당구채를 바닥에 꽂은 나는 이마를 짚으며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나에게만 일어나는 일인지, 아니면 이 세상에 뭔가 이상이 생기는 건지 알 순 없지만, 지금 이 순간 내가 느낀 위기감은 말로 헤아릴 수 없을 정도다.
뮤대륙에서의 모험이 위험하단 것은 알고 있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 꿈속의 세상이야기였다.
그런데 그 위협이 꿈을 넘어 현실에까지 닥친다면, 지금까지 고수해온 삶의 방식이 바뀔 수밖에 없다.
이거 아무래도 한가하게 면접에 신경 쓰고 있을 때가 아닌 것 같다.
앞으로는 현실에서도 만약을 대비할 필요가 있었다.
“제대로 된 무기를 갖춰야겠어.”
여유를 잃은 나는 도검소지증이나, 불법 무기 개조 같은 것을 따질 생각을 안 했다.
총이나 폭탄 같은 것을 얻을 수 있으면 좋겠지만, 한국에선 개인이 구하기란 불가능한 물건들.
굳이 총이 없더라도 내겐 스킬이란 능력들이 있으니 제대로 된 냉병기만 주어진다면 스스로를 지킬 수 있다고 생각한다.
어느새 주머니에서 스마트폰을 꺼내든 나는 서울에 있는 대장간을 검색하고 있었다.
“내가 유난을 떠는 걸까?”
아니, 우연으로 치부할 수 없는 상황에 이것은 지극히 당연한 대응이었다.
뭐든지 신중해서 나쁠 것은 없다.
그것이 신변의 안위와 관계가 있는 것이라면 더욱.
“방금 중턱에 희뿌연 연기 같은 게 껴있지 않았나?”
“그러게, 그새 없어졌네?”
빠르게 산을 내려가던 중 들려온 두 중년인의 대화.
산책을 온 것으로 보이는 그들의 대화를 통해 방금의 이변이 나에게만 통용되는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만약 그 안개에 다른 사람이 말려들었다면 분명 큰 인명피해가 발생했을 것이다.
***
“손잡이에서 나사 형태로 분리할 수 있는 양날 검?”
“네, 그리고 중심은 5밀리 정도의 두께감이 있으면 좋겠습니다.”
의외로 서울엔 지금도 맞춤 제작이 가능한 대장간이 꽤나 남아 있었다.
그중 규모가 작지만 주인의 솜씨가 좋기로 유명한 곳을 찾아간 나는 사람 좋은 미소를 띠며 주인에게 물었다.
“제작 가능할까요?”
“이런 걸 어디에 쓰려고?”
“캠핑용이요.”
내 대답이 수상하게 느껴졌는지, 그는 눈을 가늘게 떴다.
하지만 주문의뢰를 무시할 생각이 없는지 별다른 말없이 답했다.
“요리와 토목용 외에 칼은 날 길이가 14센치를 넘길 수 없네. 그래도 괜찮겠나?”
마음 같아선 30㎝ 이상으로 만들고 있지만, 확실히 선을 긋는 그의 태도에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카라스 마을의 대장간 주인이라면 반갑게 웃으며 응대를 할 텐데, 서울에선 두 눈 가득 의심을 품고 바라보니 기분이 썩 좋지만은 않았다.
뭐, 그의 입장에서도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한다.
내 요구가 평범치 않은 데다가 대답도 수상쩍으니.
“대신 똑같은 규격으로 두 개 만들어주세요. 칼의 나사 부분은 길게 만들어주시고요.”
“날을 양쪽으로 세워야 하고, 두께와 특수한 형태 때문에 값이 조금 나가네. 개당 30은 받아야겠어.”
비싼 건가?
싼 것 같기도 하고.
“우리 대장간이 자랑하는 강철은 아무리 험하게 다뤄도 부러지지 않고 이도 잘나가지 않지. 대충 만든 무쇠 칼과 같다고 생각하면 안 되지.”
그의 안색을 보니, 가격을 깎긴 힘들어 보였다.
“좋습니다. 혹시 오늘 중으로 제작 가능할까요?”
“아무리 빨라도 내일까지밖에 안 되네만.”
“그럼 내일까지 부탁드립니다. 튼튼하게 만들어주세요.”
“맡겨주게나.”
창을 만들고 싶다고 대장간에 말하면 만들어 줄 리가 없다.
내가 그것으로 사고라도 치면 제작자도 곤란해질 수밖에 없으니까.
그래서 생각 한 것은 대장간에서 칼날 제작하고 창대는 아예 카본공업사를 찾아가 만들어 달라고 할 생각이다.
이렇게 하면 값이 비쌀 수밖에 없으나, 이왕이면 제대로 된 창을 만들고 싶었다.
계약금으로 20만 원을 걸고 대장간을 나선 나는 호신 장비를 판매하는 업체를 찾아가 방검복과 방검장갑, 방탄모를 구매하고 삼단봉과 경찰 허가 없이 구매할 수 있는 가스총도 구했다.
가뜩이나 없는 생활에 부담스런 지출이지만, 고블린의 단검이 눈앞에 나타나는 것을 경험한 덕분에 이런 행동이 오버라는 생각은 전혀 안 들었다.
차라리 이렇게 구매한 장비들을 쓰지 않고 허튼 소비로 끝나는 것이 나를 위한 것이었다.
그런데 직감 스킬이 작용한 건지, 단순한 추측인지는 몰라도 절대 이걸로 끝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후 카본을 다루는 공업사에서 삼단으로 분리할 수 있는 1.7m 길이의 튼튼한 봉을 만들어 달라고 의뢰했다.
아마 모르긴 몰라도 뮤대륙에서 사용하던 것보다 튼튼한 창이 만들어지지 않을까 싶다.
***
8. 마법
여러 장비를 마련하고 무에타이 도장과 주짓수 도장에서 강도 높은 운동을 마치니 어느새 하루가 끝이 났다.
거칠게 움직이고 나서야 느껴지는 충족감.
위기감을 땀으로 씻어낸 나는 어느새 면접에 대한 것을 완전히 잊고 있었다.
밤늦게 침대에 눕기 전 어머니에게 면접 잘 봤냐는 전화가 와서야 그것을 떠올릴 수 있을 정도였다.
나는 어머니께 잘 모르겠다는 애매한 대답을 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실망하는 기색이 역력한 어머니를 안심시키고자 말했다.
‘걱정 마세요. 지금 제가 따로 준비하고 있는 게 있으니, 기대하셔도 좋을 겁니다.’
그에 어머니는 무리하지 말라며 작게 웃으셨으나, 목소리엔 걱정이 가득 담겨 있었다.
자식을 향한 부모 마음이 다 그렇겠지만, 지금껏 속 한 번 썩인 적이 없는 아들의 불합리한 상황이 매우 안쓰러우신 모양이다.
이번에 T화학의 주식을 무사히 정리하면 주변에 자랑할 수 있게 뭐라도 해드려야겠다.
똑똑.
현실에 대한 생각은 이만 접어놓고…….
오늘도 뮤대륙으로 돌아온 나는 카라스 마을 외곽에 위치한 저택으로 향했다.
그 저택은 마을의 규모와 어울리지 않을 만큼 훌륭한 외견을 갖추고 있었는데, 내가 노크를 하자 시녀로 보이는 여성이 나왔다.
“어떻게 오셨습니까?”
“고든님을 뵙고 싶어서요. 전에 고든님께서 언제든 찾아오라고 하셨거든요.”
“아, 혹시 지훈 님이십니까?”
“네.”
고든이 말을 해놓은 건지 아니면 단순히 마을에서 유명세를 타고 있는 덕분인지는 몰라도, 시녀는 내 이름을 알고 있었다.
“들어오시지요. 응접실로 모시겠습니다.”
그리고 그녀는 반갑게 웃어 보이며 나를 저택 안으로 안내했다.
내게 아무렇지 않게 금화를 건네줄 때 알아봤는데, 역시 마법사란 족속은 돈이 많은 모양이다.
어쩌면 지난 퀘스트로 얻은 가장 큰 보상은 금화가 아닌 고든이란 상류층의 인맥일지도 모르겠다.
“주인님께 지훈 님의 방문 소식을 알려드리겠습니다.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나는 시녀가 내온 차와 쿠키를 마시며 고든을 기다렸다.
차도 그렇고 쿠키도 그렇고, 소금이 아까워 고기에 간도 제대로 안 하는 카라스 마을에선 좀처럼 맛보기 힘든 고급품이었다.
물론, 이곳의 고급품이라고 해봐야 한국의 기성품에 비해 좋다는 느낌이 없지만 말이다.
“오, 지훈군! 어서 오게!”
시녀가 사라지고 오래 걸리지 않아 고든이 바로 나타났다.
그는 더없이 밝은 표정으로 나를 맞이했다.
“반갑습니다. 고든님.”
“자네가 방문해주길 손꼽아 기다렸는데, 왜 이제야 왔는가. 안 그래도 서운해서 오늘 직접 자넬 찾아가 볼 생각이었네.”
그땐 그냥 예의상 한 말인 줄 알았는데, 그는 진심이었던 모양이다.
하긴 퀘스트 보상으로 그의 친밀도가 걸려 있었으니, 평범한 것은 아니겠지만.
또 내가 찾아온 것도 그 친밀도를 활용해 무언가를 실험하기 위함이었다.
“실은 고든님께 부탁을 드리고 싶은 것이 있어서 찾아왔습니다.”
“부탁? 무언가, 너무 무리한 것만 아니라면 들어주지.”
“무리한 것일지도 모릅니다.”
진지한 내 태도에 그는 자신의 밋밋한 턱을 쓰다듬다가 이내 어깨를 으쓱였다.
“일단 들어보지.”
오늘 내가 실험해볼 것.
그건 바로.
“제게 마법을 가르쳐 주실 수 없을까요?”
“마법을?”
스킬을 퀘스트나 보상이 아닌 자의로 익힐 수 있는가다.
“음…….”
어차피 꿈속에선 퀘스트를 깨지 않는 이상 현실로 돌아가지 않고 계속 머무를 수 있다.
그 점을 이용해 자신을 단련하여 강해질 수 있다면, 현실에서의 안정성도 더욱 높아질 것이라 생각한 것이다.
하루의 현실을 위해 꿈속에서 수일, 수십 일을 머무르는 건 주객전도가 되는 것 같지만, 이보다 빠르게 현실의 안전을 확보하는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자의로 내 안전을 지킬 수 있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스스로가 강해지는 것이었으니까.
“부탁드립니다!”
나는 곤란해 하는 그의 입장을 고려치 않고 부탁을 밀어붙였다.
만약 그가 마지 못 해 허락을 한다면 성공이고, 끈질긴 부탁에 불쾌함을 드러내며 거절을 해도 손해 보는 것은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생명의 은인이란 점과 이 세계의 시스템이 인증한 친밀도란 게 있으니, 기대해 볼 만 하지 않을까?
“마법은 마탑의 허가 없이 함부로 알려 줄 수 있는 것이 아니네.”
고든의 대답은 기대와 달랐다.
“그렇습니까?”
그런데 인생 선배들이 많이 그러지 않나.
사람의 말은 언제나 끝까지 들어야 하는 법이라고.
“대신 자네가 정식으로 내 제자가 된다면 손쉽게 해결되는 일이기도 하지.”
나는 눈을 크게 뜨며 고든을 바라보았고, 검은 머리에 회색 눈동자가 인상적인 그는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내 제자가 되겠는가.”
당연히 거절할 이유가 없다.
나는 속으로 환호하며 낼름 그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물론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