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
꿈 속 퀘스트 보상은 현실에서 005
2. 카라스 마을 (2)
“윽…….”
허겁지겁 도망칠 땐 몰랐는데, 지금 보니 발바닥이 상처투성이였다.
이왕이면 신발도 줄 것이지.
나를 이 상황으로 몰아넣은 게 어디 사는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인심이 꽤나 야박하다.
마을을 향해 다가가니 수염을 산적처럼 기른 덩치 좋은 중년인이 다가와 물었다.
“어쩌다 그런 꼴이 된 것인가?”
“저도 잘…….”
어정쩡한 대답에 그는 ‘흠’ 소리를 내며 수염을 쓰다듬었다.
“미안하지만 신분증을 볼 수 있겠나? 신분을 확실히 확인해야 우리가 도움을 줄 수 있을 것 같네.”
그는 미간을 찌푸리며 나를 위아래로 훑었다.
하긴 내가 봐도 수상해 보이는데 그의 입장에서 신분증 요구는 지극히 당연한 일이었다.
[퀘스트를 완료했습니다.]
[보상으로 신분증 기능이 활성화됩니다.]
[적절한 판단력, 지능이 1향상됩니다.]
적절한 타이밍에 떠오른 퀘스트 완료 메시지.
이번 퀘스트 보상에 신분증이란 것이 끼어 있었기에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그런데 보상카드처럼 주변에 떨어진 물건은 없었다.
혹시 이것도 지도와 같은 방식일까?
메시지에서도 ‘신분증’이 아닌, ‘신분증 기능’이라 적혀 있었다.
나는 속으로 신분증을 떠올리며 손을 들었고, 손등위로 국기로 보이는 황금 사자기와 함께 여러 문자들이 홀로그램처럼 떠올랐다.
[케일론 왕국 신분증]
이름: 지훈
성별: 남자
계급: 자유민
생년월일: 1076년 5월 25일
출생지: 국왕령 카르디아
범죄경력: 없음
[+]
신비로운 관경에 방금까지 눈을 가늘게 뜨며 내 반응을 살피던 중년인이 작게 감탄사를 터뜨렸다.
“마법 신분증이라니, 실제로는 처음 보는군. 이거 의심해서 미안하네. 마을의 안전을 위한 어쩔 수 없는 요구였으니 이해해 주면 좋겠어.”
내겐 한글로밖에 보이지 않는 신분증.
자동으로 번역이 되는 건지 아니면 이들의 사용문자가 한글인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크게 놀라지 않고 어색한 웃음을 흘렸다.
이미 이들과 나누는 대화부터가 내겐 한국어였으니, 그저 설정 같은 것이라고 치부하기로 했다.
“아닙니다. 제가 봐도 의심스런 인물인데요.”
“그렇게 말해주니 고맙군. 반갑네 지훈, 나는 이 마을의 촌장인 토레스라 하네.”
이 사람이 촌장이었구나.
“저야말로 도와주신 덕분에 살았습니다. 반갑습니다. 토레스 촌장님.”
나는 사람들의 시선을 잡아끄는 쓸데없이 화려한 신분증을 없애려고 했는데, 신분증 하단 부근의 ‘[+]’표시를 발견하곤 고개를 갸웃 거렸다.
그리고 별생각 없이 그것을 눌렀더니.
[-]
힘: 5 체력: 3
민첩: 3 지능: 23
마력: 1 운: 1
게임처럼 스테이터스가 등장했다.
따로 레벨은 없었지만, 수치화된 능력치를 보니 이곳이 정말 게임속이 아닐까란 생각이 들었다.
“지능이 엄청 높구만, 어디 행정관으로 일했나?”
“네?”
“아, 미안하네. 함부로 봐선 안 되는 걸 아는데, 자네가 너무 대놓고 능력치를 보여줘서 불가항력이었어. 그나저나 능력치까지 표기해주다니 역시 마법 신분증은 좋구만. 우린 3년에 한번 지방행정청에서나 확인하는 게 다인데.”
나는 능력치를 함부로 봐선 안 된다는 그의 말에 허공에 떠오른 신분증을 없앴다.
“아무래도 어떤 사건에 휘말린 모양이군. 여관으로 안내하지, 그곳에서 좀 쉬시게.”
“죄송하지만 제가 지금 돈이 없어서.”
그는 몹시 호의적인 태도로 답했다.
“걱정 말게나 우리 카라스 마을은 그리 야박하지 않으니. 그냥 마음 놓고 쉬도록 하게.”
“감사합니다.”
나는 거절하지 않고 그의 제안을 받아들었다.
어제만큼 오래 걸리지 않았지만, 퀘스트를 깼으니 이제 슬슬 꿈에서 깨어나지 않을까?
그의 뒤를 따르며 슬쩍 카라스 마을의 상태를 살폈다.
건물 대부분의 지붕과 골조는 목조지만 벽면은 황토벽이다.
판타지의 기본 요소인 중세시대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마을.
그리고 겉에서 봤던 것과 달리 마을 내부가 제법 컸다.
작은 시장에 상점들도 갖춰져 있고, 촌장이 안내한 여관도 제법 규모가 있어서 외부인의 출입이 잦은 마을이란 것을 알 수 있었다.
“우리 카라스 마을은 용병들이 자주 찾는 몬스터 사냥터 중 한 곳이지. 주변엔 고블린 뿐만 아니라, 오크와 놀도 등장하는 만큼 자네가 무사히 숲을 빠져나온 것은 운이 좋았다고밖에 할 수 없네.”
“꽤나 오래 숲속을 이동했음에도, 인기척을 느낀 적이 없는데요?”
“그럴 수밖에. 그 숲으론 용병들이 들어가지 않거든. 자네가 들어온 곳이 마을의 서문인데, 용병들은 주로 동쪽의 협곡으로 사냥을 간다네. 그곳이 더 안전하고 사냥효율이 좋거든.”
슬쩍 눈을 돌려 지도를 살피니, 카라스 마을 동쪽에 켄트협곡이란 곳이 위치해 있었다.
여관 주인장이 길어온 물에 피범벅이 된 발을 닦고는 약초를 으깨 만든 약을 상처부위에 발라 주었다.
이 마을과 아무 연고도 없는 나에게 이렇게 잘 대해주다니.
이것도 게임 같은 현재 상황에서 나를 실험하는 무언가가 스토리를 진행시키기 위한 상황일까?
“일단 이걸 신고 있게나.”
그가 건넨 것은 나무판에 지푸라기를 엮어 만든 흔히 쪼리라고 부르는 형태의 슬리퍼였다.
더불어 상의는 둔기로 개조했던 티셔츠를 건네받아 입었는데, 다행히 구김만 심할 뿐 형태는 그대로여서 입는데 문제는 없었다.
그나저나 이번엔 언제 꿈에서 깨어나는 거지?
쉬라고 안내 해준 방에 앉아 얌전히 있던 나는 주인장이 나갔음에도 가만히 자리를 지키고 선 촌장을 바라보며 고개를 갸웃 거렸다.
“자네 혹시 셈법할 줄 아는가?”
“네, 뭐…….”
“역시! 높은 지능으로 봐서 분명히 가능할 것이라 생각했네.”
갑자기 셈법을 논하는 그의 모습에 촌장이 무언가 부탁할게 있다는 것을 알아챘다.
“올해 영주님과 관할 행정청에 진상할 상품 목록을 작성해야 하는데, 양이 좀 많아서 애먹고 있네. 괜찮다면 도움을 주지 않겠는가? 보상도 섭섭지 않게 하겠네.”
그리고 이어진 상황에 나는 미간을 좁혔다.
[퀘스트 발생]
등급: 하
내용: 진상품 목록작성
보상: 하급 보상카드, 은화 5개
두 번째 퀘스트 발생.
부탁이라고 해서 간단한 건지 알았는데, 설마 한 번 더 퀘스트가 발생할지는 몰랐다.
혹시 시간제한이나, 하루 할당치가 있는 걸까?
“마을에 시장이 있던데 상점 운영하시는 분들은 모두 셈법을 할 줄 알지 않나요?”
“그렇지. 하지만 그들은 덧셈 뺄셈이나 할 줄 알지. 곱셈 나눗셈같은 고급셈법은 못하거든. 진상품의 분배는 영주성에 7할, 관할 행정청에 3할이네.”
곱셈 나눗셈을 고급셈법이라며 거창하게 말하는 것을 보니 대충 이곳의 교육 수준을 알 수 있었다.
내 반응에 촌장은 다시금 눈을 가늘게 뜨며 물었다.
“혹시 어려운 부탁인가?”
그때서야 나는 촌장이 신분 확인 이후로 호의적인 반응을 보인 이유를 깨달을 수 있었다.
세상에 이유 없는 호의는 없다.
그는 내게 부탁할게 있으니, 살갑게 행동한 것이었다.
“아, 아닙니다. 하죠. 하겠습니다.”
이번 퀘스트는 처음으로 하급으로 분류 되는 것이 나왔는데, 최하급과 어떤 차이가 있을지 궁금하기도 했다.
최하급 보상카드가 만 원이었으니, 이건 3~4만 원쯤 하려나?
아니, 처음에 분명 급수에 따른 아이템과 능력치를 얻을 수 있다고 했으니, 상식적으로 이해가 되지 않는 무엇을 얻을 가능성도 있다.
보상을 기대하는 것 보니, 겨우 이틀 사이 이 현상에 익숙해지기 시작한 모양이다.
“오오! 고맙네!”
[퀘스트를 수락했습니다.]
사람을 통한 퀘스트 여서 그런지 거절이 가능하긴 한 모양.
그런데 거절을 한다면 어떤 결과로 이어질지 예측할 수 없다는 것이 함정이다.
“원랜 마을에 거주 중이던 마법사 분께서 도와주셨는데, 여행을 떠나셨거든. 사설 행정원을 고용하려 해도 시기가 시기다 보니, 금액이 너무 비싸서 어렵더군.”
결론은 생명의 은인이란 이점을 이용해 싸게 부리고 싶다는 뜻이다.
이 세상은 곱셈 나눗셈만 해도 먹고 사는데 지장이 없겠는걸?
나는 억지웃음을 지으며 물었다.
“일을 바로 시작할 수 있을까요?”
“지금? 하루 정도 쉬고 하는 게 낫지 않겠나?”
“괜찮습니다. 별로 어려운 것도 아닌데요.”
“참 든든한 말이로군.”
이어서 촌장은 잠깐 기다리라는 말을 남기고 사라졌고, 약 10분후 목탄과 얇은 나무판을 가져왔다.
그곳엔 이들이 진상할 물품이 적혀 있었다.
-밀 20㎏, 335포대
[총용량: / 영주성: / 행정청: ]
-보리 20㎏, 127포대
[총용량: / 영주성: / 행정청: ]
곡물부터, 약초, 가죽까지 이런 느낌으로 30여개 품목이 적혀 있었는데, 내겐 토끼를 잡는 것보다도 훨씬 쉬운 퀘스트였다.
초등학교 수준의 문제.
그럼에도 퀘스트 등급이 더 높다니, 사람을 바보 취급하는 게 아닐까 쉽다.
그리고 마을 촌장 정도면 이 정도는 할 줄 알아야 하는 거 아닌가?
아무래도 그는 지적 능력이 뛰어나 촌장이 된 게 아닌 모양이다.
“빈칸을 채워 주면 나중에 양피지로 옮겨 적겠네. 그리고 앞서 말했듯이, 영주성과 행정청의 비율은 7:3이네.”
그는 계산에 필요할 것이라 생각했는지 여분의 나무판자를 수북이 가져왔지만, 암산만으로도 충분한 문제였다.
내가 5분이 지나지 않아, 빈칸을 전부 채워 건네주자 촌장은 멀뚱히 서서 바보처럼 눈을 껌벅였다.
“이게 뭔가?”
“계산 다했습니다.”
“계산을 언제 했다는 거지? 내 눈엔 바로바로 빈칸을 채워 넣은 거로 보이는데?”
“이 정도는 머리로 계산 가능합니다.”
숫자와 문자, 단위 모두 한국에서 쓰던 것과 같아 막힘이 없었다.
나는 촌장의 인상이 점점 굳어지는 것을 보며, 어쩔 수 없이 수식을 포함해 설명을 곁들여야 했다.
그때서야 그는 내 말을 믿기 시작했는데, 바로 이해하진 못했지만 그냥 푼 게 아니라는 것을 느끼긴 충분했다.
“양피지를 먼저 행정청에 올리면 그곳에서 옳고 그른지를 판가름 해줄 테니, 일단 자네의 말을 믿도록 하겠네.”
이상이 있을 수가 있나.
이미 검토까지 한 번 더 한 건데.
태연하게 고개를 끄덕이는 내 모습에 그는 돈 주머니에서 은화 다섯 개를 꺼내 건네주었다.
“약속했던 보수네.”
은화가 하나에 어느 정도의 가치를 지녔는지는 모르겠지만, 빈털터리 입장에선 너무도 감사한 상황이었기에 웃으며 은화를 받았다.
[퀘스트를 완료했습니다.]
[보상으로 은화 5개를 획득했습니다.]
[지혜를 활용한 퀘스트 완료. 지능이 1 향상됩니다.]
“그런데 만약 목록이 잘못 되었다면 자네를 신고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아주게나.”
“알겠습니다.”
“부탁을 한 사람이 엄포를 놓다니, 염치없는 짓을 할 수밖에 없군.”
그의 입장에선 확인을 할 수 없으니 내뱉은 엄포일 것이다.
“그럼 쉬게. 나는 이만 돌아갈 테니.”
촌장은 기분 나빠하지 말라는 듯 내 어깨를 두드렸다.
그가 방을 나선 후, 나는 지푸라기를 덮어 만든 침대에 누웠다.
그리고 촌장에게 받은 은화를 살폈다.
제법 잘 만들어진 매끈한 은화.
야금기술이 중세 배경치곤 상당히 좋은 듯하다.
“이제 슬슬 깨어날 때 되지 않았냐?”
오늘만 두 번째 퀘스트 완료.
촌장의 의뢰는 날로 먹은 느낌이 없잖아 있고 시간도 어제에 비해 얼마 걸리진 않았다.
하지만 현실과 다름없는 피로감과 통증에 오늘은 이만하고 싶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나는 여관 천장을 바라보며 이 상황을 초래한 무언가를 향해 불만을 담아 말했는데, 그것이 통한 건지 목표를 달성한 건지, 세상에 이변이 생겼다.
-팟!
꿈속에 들어설 때처럼 어둠에 물드는 세상.
잠시 후 눈을 뜨니, 익숙한 천장의 벽지무늬가 나를 반겨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