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
꿈 속 퀘스트 보상은 현실에서 004
2. 카라스 마을 (1)
정처 없이 숲속을 배회하길 5분여.
나는 심각한 표정으로 입술을 씹었다.
설마 이 말도 안 되는 꿈을 어제에 이어서 다시 꾸게 되다니.
그저 꿈일 뿐이라며 단순하게 여기기엔 보상으로 주어진 만 원과 꿈속으로 넘어오는 과정이 너무도 기이해서 가볍게 여길 수가 없었다.
나도 사람인지라 내심 비일상을 바랬을지 모르지만, 설명 하나 없는 불친절한 상황은 기대감보다 불안감을 일으켰다.
“혹시 외계인?”
비상식적인 기현상에 대해 공상으로 접근하는 것은 당연한 일.
외계인 또는 신적인 존재의 장난이라고밖에 여겨지지 않았다.
혹시 나 말고 이런 황당한 일을 경험하는 사람이 또 있을까?
[퀘스트 발생]
등급: 최하
내용: 카라스 마을로 향하라.
보상: 최하급 보상카드, 신분증.
“아…….”
그리고 이 꿈이 어제의 연장선임을 확신케 하는 메시지가 떠올랐다.
덕분에 머릿속은 더욱 복잡해졌다.
“어쩔 수 없지.”
어제의 경험을 통해 퀘스트를 착실히 이행해야 잠에서 깰 수 있다는 것을 깨달은 만큼 내키지 않아도 지시에 따라야 한다.
목적도 영문도 모르지만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장기 말로서 역할에 충실히 따르는 것뿐이다.
“음.”
하지만 문제가 하나 있다.
이 숲이 어딘지도 모르는데, 카라스 마을이란 곳을 어찌 찾겠는가.
잠시 서서 고민하던 나는 잊고 있던 한 가지를 떠올렸다.
“맞다.”
오늘 퀘스트의 보상이 두 가지인 것처럼, 어제의 보상도 두 가지였다.
‘보상으로 지도기능이 활성화됩니다.’
지금 매우 필요할 것으로 보이는 보상에 나는 열심히 눈동자를 굴렸다.
혹시 게임처럼 시야 한구석에 지도기능이 포함되어있는 것 아닐까 생각하며.
그런데 아무리 눈을 굴리고 주변을 두리번 살펴도 지도의 ‘지’자도 보이지 않았다.
하긴 지금까지 계속 주변을 배회했는데, 시선에 거슬리는 것이 있으면 진작 알아챘을 것이다.
그래서 ‘혹시나’란 생각에 지도를 떠올리며 입으로 내뱉었더니.
“지도.”
[지도가 펼쳐집니다.]
눈앞에 반투명한 A4용지 크기의 지도가 떠올랐다.
이로써 이 꿈엔 규칙에 따른 시스템이 존재함을 깨달을 수 있었다.
[평온의 숲]
현재 내가 위치한 장소는 평온의 숲.
지도상으로 베르트 산맥이란 곳 초입에 위치한 작은 숲으로 카라스 마을이란 곳까지 그리 멀어 보이지 않았다.
친절하게 현재 위치가 지도에 표기된 덕에 어렵지 않게 방향을 잡은 나는 묵묵히 걸음을 옮겼다.
-졸졸졸
-짹짹
밤에 봤던 으스스한 분위기와 달리, 햇볕이 내리쬐는 숲속의 풍경은 감탄사가 절로 나올 만큼 아름다웠으며 생명력이 넘쳤다.
피톤치드 가득한 숲속을 거니니 복잡했던 머릿속이 맑아지는 것 같다.
그동안 잊고 살았던 자연의 푸르름.
대학을 졸업하고 부턴 계속 콘크리트 건물 속에만 처박혀 있던지라, 모처럼의 하이킹은 영문 모를 상황이 꼭 나쁘지만은 않다고 생각 들게 했다.
“지도상으론 꽤나 가까워 보였는데.”
숲속을 이동해서 그런지 제법 걸었음에도 거리 줄어드는 속도가 지지부진했다.
이대로라면 1시간은 더 걸어야 할 것 같다.
아무리 숲이 아름답고 하이킹 기분으로 걸어도 길 없는 울퉁불퉁한 숲속을 이동하기는 쉽지 않았다.
더구나 지금의 나는 맨발이어서 한걸음 내딛는데 조심할 수밖에 없었다.
“응?”
그렇게 걷고 걸어 출발지에서 카라스 마을까지 3분의 2지점을 이동했을 때.
게임의 미니맵처럼 시야 한구석에 펼쳐놓은 지도에 이상이 생겼다.
-부시럭
멀지 않은 곳에서 찍힌 붉은 점.
이어서 해당 방향에서 인기척이 느껴지는 순간, 자신도 모르게 반사적으로 몸을 숨겼다.
“…….”
그리고 모습을 드러낸 무언가를 발견한 나는 더없이 눈을 크게 부릅떴다.
[고블린]
1.2m정도의 신장과 인간에 가까운 외형.
다만 코와 귀가 얼굴에 비해 지나치게 크고 뾰족했으며, 듬성듬성 불규칙하게 자란 머리카락과 곰보투성이의 녹색 피부는 혐오감을 일으키기 충분했다.
흔히 RPG에서 슬라임과 함께 기본 몬스터로 분류되는 고블린의 등장이었다.
평범한 꿈이라면 호기롭게 달려들겠지만, 이 꿈은 절대 평범하지 않다.
생생한 감각은 몬스터에게 공격을 받는다면 엄청난 고통을 선물 할 게 분명하다.
더구나 녀석이 맨몸이라면 모를까 손에는 조잡하긴 해도 날카롭게 벼려진 단검이 들려 있었다.
아무리 어린애라도 손에 날붙이를 들고 있으면 위험하다.
또한, 이 꿈이 현실에까지 영향을 미치는 만큼 어떤 이상이 발생할지 모르는 일.
지금은 이렇게 몸을 숨기고 있는 것이 정답이라고 생각한다.
-킁킁.
큰 코가 장식이 아니라는 듯, 녀석은 동물처럼 냄새를 맡으며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그러나 무언가가 이상한지 고개를 갸웃거리고는 슬쩍 뒤로 물러났다.
고블린은 그대로 서서히 지도에서 멀어졌다.
나는 가슴을 쓸어내리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꼼짝없이 걸린 줄 알았는데?”
잠깐이었지만, 손바닥은 땀범벅이 되었다.
앞으로는 지도를 더욱 자세히 살피면서 이동해야겠다.
하지만 이번 일로 꿈의 배경이 판타지 세계라는 것을 알게 되었으니, 작은 소득이라면 소득.
이러다가 나중에 몬스터 토벌 같은 퀘스트가 나오는 것은 아닌지 걱정이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나는 무기로 쓸만한 것을 찾았다.
그러나 적당한 크기의 나무가 형편 좋게 떨어져 있진 않았다.
땅에 떨어진 나무 조각이라곤 툭 건드리면 부러질 것 같은 게 전부.
마음 같아선 날카로운 돌을 이용해 나무라도 베고 싶었지만 한 장소에 오래 머무르는 것은 좋은 생각 같지 않았다.
그래서 티를 벗어 주먹 크기의 짱돌을 넣고 묶어서 둔기를 만들었다.
이런 무기를 뭐라 부르는지 모르겠지만, 손에 쥐고 휘휘 돌리면 다가오기 힘들만큼 위협적으로 보였다.
이어서 티셔츠로 만들어진 끈이 날붙이에 쉽게 끊어지지 않게끔 물을 적시고는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갑자기 종목이 하이킹에서 서바이벌로 바뀌어 버렸다.
“그러고 보니, 잠들기 전엔 정장 차림이었는데?”
이곳에서의 복장은 흰색 면 티에 검정색 트레이닝 바지.
더구나 무기화되어 있는 티셔츠는 어제 토끼 잡는다고 걸레로 만든 것이었다.
이게 기이한 꿈속에서의 기본 복장인 걸까?
뭐, 복장이야 아무렴 어떠하겠는가.
지금의 당면한 문제에 비하면 그건 사소한 일이었다.
[카라스 마을]
그 후 조심하면서 이동하다 보니 목적지까지 예상보다 오랜 시간이 걸리고 말았다.
고블린을 만나고 1시간을 더 이동하고 나서야 숲의 끝에 다다를 수 있었는데, 평온의 숲보다 지대가 약간 높은 언덕 위로 나무 방책이 둘려진 마을이 눈에 들어왔다.
“다행이네.”
더 이상 몸을 사릴 필요가 없어진 나는 마을을 향해 냅다 달렸다.
그런데.
-키에엑!
등 뒤에서 가래를 끓는 포효와 함께 무언가가 달려오는 기척이 느껴졌다.
뭔가 싶어 뒤를 돌아보니, 어느새 고블린 세 마리가 내 뒤를 바짝 쫓아오고 있는 것 아닌가.
“이런!”
숲 안에서만 해도 지도를 잘 살폈었는데, 마을이 눈에 들어오면서 방심한 게 이사태를 초래하고 말았다.
그중 유난히 한 마리가 눈에 익었는데, 아무래도 처음에 발견했던 그 고블린인 것 같았다.
후각이 좋아 보이는 녀석이 어째서 물러났나 싶었는데, 동료를 부르기 위해 돌아갔던 모양이다.
게임에선 잔몹으로 취급되는 고블린이지만, 이곳에선 신중하고 상대하기 까다로운 것 같다.
한 마리만 해도 주춤거리게 만드는데, 맞서 싸우기엔 숫자가 너무 많다.
내가 진짜 게임 속의 캐릭터도 아니고, 무기를 지닌 몬스터 3마리를 동시에 상대하기란 불가능한 일이었다.
나는 달리는데 방해가 되는 짱돌을 뒤로 던졌다.
-켁!
운 좋게 한 마리가 그 돌을 맞고 자빠졌다.
충분히 힘이 실리지 않은 만큼 목숨을 위협할 정도는 아니지만, 한 마리를 떼어 놓은 것만 해도 큰 성과라 생각한다.
“여기요! 사람 쫓기고 있어요!”
방책이 둘려져 있고 멀지 않은 곳에 몬스터가 활보하는 것을 보면 분명 마을을 지키는 군인 같은 것이 있을 거다.
나는 크게 소리를 지르며 마을을 향해 달려갔고, 짧은 다리로 열심히 쫓아오며 단검을 휘두르는 고블린은 약이 올랐는지 시끄럽게 소리를 질러댔다.
현실과 다름없는 감각의 꿈은 내 체력까지 정확하게 구현했는지, 서서히 무릎에 힘이 빠지기 시작했다.
이대로라면 마을에 도착하기도 전에 따라잡히고 말 것이다.
-끼익
그때였다.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던 마을의 육중한 방책이 열리고, 손에 긴 창을 쥔 청년 5명이 나를 향해 달려왔다.
아무래도 내 운이 다하지는 않은 모양이다.
덕분에 기세등등하던 고블린들은 언제 그랬냐는 듯 바로 등을 돌려 줄행랑을 쳤다.
“사, 살았다.”
그리고 나와 녀석들의 거리가 벌어지자, 마을 쪽에서 무섭게 화살이 날아왔다.
당연히 표적은 도망치는 고블린이었다.
“괜찮으십니까?”
다리에 힘이 탁 풀리면서 주저앉자, 한국인과 외형이 크게 다르지 않은 청년이 다가와 물었다.
“네,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고블린 세 마리 중 두 마리가 화살에 사살되고 돌에 맞았던 한 마리는 살아남아 숲으로 도망쳤다.
고블린을 상대로 꽁지 빠지게 도망치는 꼴이 찌질해 보이지만 어쩌겠는가.
아직 이 현상에 대해 파악된 것이 적은 만큼 게임 마인드로 설치는 것보단, 몸을 사리는 것이 현명하다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