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
꿈 속 퀘스트 보상은 현실에서 002
1. 이상한 꿈 (1)
-스스스스
나뭇잎 부대끼는 소리가 귓가를 자극하는 울창한 숲속.
나는 맨발로 풀을 딛고 서서, 구름이 잔뜩 낀 음산한 밤하늘을 올려보았다.
“꿈?”
내게 갑자기 몽유병이 생긴 게 아니라면 이 상황은 꿈이 분명하다.
잠자리에 들었던 기억이 선명한데 느닷없이 눈에 펼쳐진 광경이 이랬으니…….
이게 말로만 듣던 자각몽이란 걸까?
“그렇다면 꽤나 감사한 상황이네.”
꿈인 만큼 부끄러운 짓을 저질러도, 악덕한 일을 저질러도 잠에서 깨는 순간 모든 것은 없던 일이 돼버린다.
더구나 자각몽에선 내가 바라는 대로 상황을 조절할 수 있다고 하니, 단 하루 동안은 신이 된 듯한 경험을 할 수 있다.
보통의 혈기 왕성한 27살의 남성이라면 예쁜 여자라도 불러 광란의 파티를 즐기겠지만, 지금은 상황이 상황이다 보니 머릿속에 떠오르는 것이라곤 전 직장의 ‘팀장과 직속상사’의 얼굴뿐이었다.
“개새끼들.”
1년 전까지만 해도 이렇게까지 다른 사람에게 적의를 드러내는 일이 없었지만, 요 근래 내 성격도 참 많이 바뀌었다.
나는 이 기회에 피의 복수를 꿈꾸며 두 사람이 눈앞에 나타나길 바랐다.
“…….”
하지만 이야기로 들은 것과 달리 내 바람은 자각몽에 아무런 영향을 주지 않았고, 그저 숲속에서 나뭇잎 부대끼는 소리만이 더욱 귓가를 자극했다.
“그럼 그렇지.”
요즘 잘 풀리는 일이 하나도 없기에 나는 조소를 흘리며 숲속에 털썩 주저앉았다.
“설마 잠에서 깰 때까지 죽치고 있어야 하는 건 아니겠지?”
그렇다면 이건 형편 좋은 자각몽이 아니라 악몽의 한 종류가 분명하다.
지루하기 그지없는 공허한 악몽.
새소리는 물론, 벌레 울음소리 하나 들리지 않는 데다가 하늘은 구름이 잔뜩 끼어있어 스산하기 그지없다.
아무리 꿈이라 해도 분위기가 이러니, 없던 공포심도 서서히 피어나기 시작한다.
나는 오래지 않아 자리에서 일어나 주변을 살폈다.
꿈이라 그런지 불빛 하나 없는 숲속임에도 생각보다 시야가 밝아서 주변 풍경을 구분하는 데 어려움이 없었다.
나는 목적의식 없이 발걸음을 놀렸고 얼마 안 있어 황당한 장면과 대면했다.
[얼룩 토끼]
[흰 토끼]
[검은 토끼]
식물 빼곤 아무런 기척을 느낄 수 없던 숲속에서 제법 너른 공터가 나오더니, 그곳에 온갖 종류의 토끼가 뛰어놀고 있는 것 아니겠는가.
더구나 토끼의 머리 위엔 게임처럼 친절하게 이름이 붙어 있었다.
“뭐야 이건?”
영문을 모르겠다.
그런데 황당함은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퀘스트 발생]
등급: 최하
내용: 토끼 5마리 사냥
보상: 최하급 보상카드, 지도
“게임이냐?”
말 그대로 아무래도 이 꿈의 컨셉은 롤플레잉게임인 모양이다.
그러나 내가 이 컨셉에 따라줘야 할 이유는 없다.
귀찮게 토끼 잡겠다고 달려드는 것보다 토끼들 덕에 으스스한 분위기가 사라진 만큼 이곳에서 죽치면서 꿈에서 깨어날 때까지 기다리는 게 어떨까 싶다.
다시 자리에 주저앉으니, 토끼 몇 마리가 주변을 배회하다 내게 다가왔다.
-부시럭
일반 RPG라면 단검이라도 쥐여줄 텐데, 맨손인 내가 이 녀석들을 사냥하려면 목을 비틀어야 한다.
박애주의자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무구한 얼굴로 뛰노는 토끼의 목을 비틀 만큼 감정이 메말라 있진 않았다.
[퀘스트 발생]
[퀘스트 발생]
[퀘스트 발생]
[퀘스트 발생]
하지만 꿈은 이런 내 행동이 내키지 않는지 눈앞에 홀로그램 메시지를 계속 띄우며 퀘스트를 종용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깔끔히 메시지를 무시했다.
이제 성질 죽이고 참는 것엔 도가 튼 나다.
내가 장단에 어울려 주지 않자, 미저리 같은 메시지는 얼마 안 가서 사라졌다.
어차피 이 꿈 자체가 내 뇌의 작용에 의한 것일 테니, 쓸데없는 짓이란 것을 깨달은 게 아닌가 싶다.
***
“뭐야 대체.”
이 이상한 꿈을 꾸고 10시간은 넘게 지난 것 같다.
꿈속의 시간이 현실과 같다고 확신할 수는 없지만, 도무지 이 환경에서 벗어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잠에서 깨기 위해 온갖 난리를 피웠지만, 신체는 말을 듣지 않았다.
그렇게 또 수 시간이 지나고, 점점 머릿속이 복잡해질 때.
[퀘스트 발생]
등급: 최하
내용: 토끼 5마리 사냥
보상: 최하급 보상카드, 지도
잊고 있던 메시지가 떠올랐다.
“이거 왠지…….”
마치 잠에서 깨고 싶으면 퀘스트를 수행하란 것 같다.
“쯧.”
짧게 혀를 찬 나는 슬그머니 주변에 모여 있는 토끼들에게 시선을 돌렸다.
“어쩔 수 없지.”
앞서 말했듯이 나는 박애주의자가 아니다.
그렇다고 감정이 메말라 있진 않지만, 필요에 따라선 얼마든지 타인의 희생을 강요할 수 있는 성격이다.
내키지 않을 뿐이지 마음만 먹으면 토끼의 목을 비트는 건 일도 아니다.
더구나 이곳은 꿈속이 아닌가.
죄책감을 느낄 필요도 없다.
나는 입고 있던 헐렁한 흰색 반팔티를 벗은 다음 끝을 묶어 포대 자루를 만들고 바로 근처에 있던 토끼들을 기습적으로 주워 담았다.
토끼들이 내 손길이 닿으면 도망친다는 것을 겪어 봤기에 이렇게 무방비하게 모여 있을 때, 최대한 많은 수를 확보해야 한다.
“이런…….”
그런데 아무리 내 움직임이 빠르더라도 짐승의 순발력에 비할 바는 아니다.
나는 겨우 두 마리를 확보했을 뿐인데. 토끼들은 순식간에 내게서 거리를 벌렸다.
“어쩔 수 없지.”
나는 잡은 토끼 하나를 꺼내 들어 목을 비틀었다.
[토끼 5마리 사냥 1/5]
다행히 RPG게임처럼 두들겨 패서 HP를 0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룰은 없었다.
따로 데미지 표시도 없고.
하지만 토끼 목을 비틀 때 감각이 너무도 리얼해서 인상이 절로 찌푸려졌다.
숲 속의 기온은 초가을 정도의 날씨.
간간이 불어오는 바람과 진한 풀 내음, 온몸으로 느껴지는 감각이 꿈 치곤 지나치게 생생했지만, 토끼 목을 비틀 땐 ‘이게 꿈이 맞나?’라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음.”
내가 토끼를 죽이고 나서부턴 아무리 기다려도 녀석들이 다가오지 않았다.
아직 3마리를 더 잡아야 퀘스트가 완료되는데, 계속 10미터 정도의 간격을 유지하고 다가가면 전속력으로 도망쳤다.
달려서 토끼를 잡기란 굉장히 힘들 것이다.
나는 서바이벌 TV프로그램을 떠올리며 포대로 쓴 옷을 찢어 나뭇가지와 함께 올가미 네 개를 만들었다.
그리고 토끼들을 그쪽으로 유인하니, 열에 하나꼴로 토끼가 걸렸고 생각보다 쉽게 사냥을 끝마칠 수 있었다.
[퀘스트를 완료했습니다.]
[보상으로 지도 기능이 활성화됩니다.]
[지혜를 활용한 퀘스트 완료. 지능이 1 향상됩니다.]
눈을 어지럽게 만드는 메시지들.
어째서인지 보상이 하나 모자랐지만, 다음 날 꿈을 이어서 꾼다는 보장이 없기에 신경 쓰지 않았다.
오로지 내 관심사는 ‘이제 꿈에서 깨어날 수 있는가.’ 뿐이다.
“어?”
잠시 후.
세상이 암전되는 것을 느끼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
눈을 떠보니 시야에 들어오는 것은 기괴한 숲속이 아닌, 익숙한 풍경을 가진 나의 자취방이었다.
새롭게 일자리를 구하지 못해 대부분 시간을 집에서 보내다 보니 홀아비 냄새가 풀풀 풍기는 10평 정도의 원룸.
“이상한 꿈이네.”
혹시 다른 세계로 떨어진 것 아닐까란 생각이 들 정도로 실감 났던 꿈인지라 잠에서 깬 지금도 얼떨떨했다.
“어?”
보통 꿈을 꾸면 잠을 깊이 못 잔 것이라 하는데, 기지개를 켜니 세상에 이렇게 개운할 수가 있을까 싶을 만큼 몸이 가벼웠다.
그리고 자리에서 일어나는데.
-탁
무언가가 바닥에 요란하게 떨어지며 시선을 끌었다.
“뭐지?”
그것은 한 장의 카드였다.
앞뒤면 모두 검은색 일통의 카드.
크기는 신용카드보다 조금 컸으며, 재질은 플라스틱 같기도 하고 금속 같기도 하다.
처음 보는 물건인지라 나는 그것을 들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런데 그때.
[최하급 보상]
검은색 카드에 느닷없이 황금빛 글귀가 새겨지고.
[퀘스트 보상 카드는 급수에 따른 아이템과 능력치를 랜덤으로 획득할 수 있습니다. 카드를 사용하시겠습니까?]
뜬금없이 눈앞에 메시지 창이 나타났다.
그에 기겁한 나는 카드를 던지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