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5.
“역시 네가 왔구나, 윤수호.”
“…….”
삼라만상의 근원을 보고 있던 윤수호는 익숙한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자신과 똑같은 인간이 서 있었다. 생김새며, 옷이며, 머리까지…… 마치 거울을 보고 있는 것처럼 말이다.
“반응이 영 심심하네. 약간은 놀랄 줄 알았는데.”
“내가 놀라야 했던 건가?”
“아니, 뭐…… 그런 건 아닌데…….”
윤수호와 똑같은 존재는 갑자기 그 자리에 앉았고 놀랍게도 그가 앉는 순간, 자연스럽게 의자가 생겨나더니 그의 앞에는 테이블마저 생성되었다.
“앉아.”
그가 자리를 권하자 마치 처음부터 그랬던 것처럼 윤수호가 앉을 의자가 생성되었다.
“서 있는 게 편하면 그러든가.”
하지만 윤수호가 권한 의자에 앉지 않고 서서 빤히 자신을 바라보자 존재는 커피 잔에 커피를 따르더니 향기를 음미했다.
“음~ 역시 커피는 ×심이지. 아, 그러고 보니 내 소개를 안 했지? 이름은 까먹은 지 오래니까 그냥 편하게 관리자 형이라고 불러.”
“관리자라면…….”
“너도 봤잖아. 네 뒤에 저거, 삼라만상의 근원 말이야. 뭐, 관리자라고 해도 하는 일은 딱히 없어. 그냥 버그 좀 찾아서 해결하다가 심심하면 다른 세상에 내려가서 놀고 오고 그게 전부니까.”
“왜 이런 짓을 꾸민 거지?”
윤수호가 본론을 바로 묻자 관리자가 씨익 입꼬리를 말아 올리더니 대꾸했다.
“내 입으로 대답이 듣고 싶은 거야? 아니면 정말로 몰라서 묻는 거야? ‘열쇠’를 완성시킨 녀석이 정말로 몰라서 묻는 것 같지는 않고…….”
“똑바로 대답하는 게 좋을 거야. 지금 나는 이성적으로 대화하고 싶은 마음이 조금도 없으니까.”
“나한테 맺힌 게 많나 봐?”
윤수호는 지난날을 떠올렸다.
“검은 회오리에 휩쓸려 영문도 모르는 세상에 떨어져 500년을 가족들만 찾아 헤맸다. 그렇게 어렵사리 집으로 돌아온 후에는 망가진 가족들의 처참한 삶을 알게 되었고 그밖에도 세상은 알 수 없는 재앙들로 인해 수많은 사람들이 고통받고 있었지. 바로 네놈 때문에!”
“그럼 더 더욱 잘됐네. 내가 네 원수라는 뜻 아니야? 죽여, 지금 이 자리에서 당장.”
관리자가 손짓하자 의자와 테이블이 사라졌다. 그는 윤수호의 앞에 서서 두 팔을 넓게 벌리며 역으로 윤수호를 도발했다.
“아, 이 모습은 죽이기 좀 그런가? 그럼 이건 어때? 두 번 죽여 본 적 있으니까 세 번은 더 쉬울 거 아냐.”
어느새 천마의 모습으로 변한 관리자가 이죽거렸다. 그리고 윤수호의 손은 어느새 천살도의 칼자루에 닿아 있었다.
그러나 윤수호가 천살도를 뽑는 일은 없었다. 누가 봐도 지금의 관리자는 진심으로 자신의 ‘죽음’을 바라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윤수호도 진심으로 물었다.
“왜 그렇게 죽음을 바라는 거지?”
“확실히 신기하네. 이 자리에 오면 그 질문은 고정 같은 건가? 아니지, 나도 전임자가 이 짓거리 할 때 병신이라고 생각했으니까 남 말 할 일은 아니네.”
“전임자?”
“왜? 지금 이 짓거리를 너랑 내가 처음 하는 것 같아 보여?”
“…….”
윤수호가 아무 대답도 하지 못하자 관리자는 피식 웃으며 그의 어깨를 다독였다.
“걱정 마. 이 짓거리는 이전에도 있어 왔고 앞으로도 있을 거니까. 내가 전임자에게 그랬고, 네가 나에게 그랬듯이. 너 역시 지금은 나를 탓하지만 언젠가는 누군가의 저주를 받으며 죽음을 애원하는 날이 오겠지. 이 자리가 그런 좆같은 자리거든.”
“널 죽이면 내가 그 자리를 대신하게 된다는 건가?”
“맞아. 처음에는 즐거울 거야. 영원한 생명. 그리고 삼라만상이 관리하는 어떤 세상에서건 넌 원하는 모습, 원하는 형태의 삶을 즐길 수 있을 테니까. 이른바 관리자의 특권이라고 해야 할까? 하지만 그 즐거움도 오래가지 못하겠지.”
지금까지 장난스러웠던 관리자의 표정이 진지해졌다.
“이 자리는 끝나지 않는 게임에서 영원히 빠져나올 수 없는 것과 같아. 처음에는 치트도 쓰니 재미있겠지만 나중에는 무슨 짓을 해도 싫증 날 수밖에 없지. 문제는 싫증 나 죽을 것 같은데도 죽을 수 없다는 거야. 시스템이 그걸 방지해 놨으니까. 차암, 시스템이란 건 삼라만상의 근원을 얘기할 때 대신 쓰는 은어니까 참고해 두도록.”
“자살이 불가능하단 뜻인가?”
“맞아. 그러니까 방법은 하나밖에 없어. 관리자를 소멸시킬 수 있는 또 다른 열쇠를 만드는 것. 그 또 다른 열쇠를 통해서 비로소 나는 진짜 자유를 손에 넣을 수 있는 거지. 너 또한 그렇게 될 거고.”
“다른 방법은…….”
“남아도는 게 시간인 양반들이야. 다른 방법을 안 찾아봤을까? 그런데도 이 짓거리가 관리자들의 전통처럼 내려오고 있다면 말 다한 거지, 뭐.”
윤수호는 무거워진 얼굴로 물었다.
“그렇다면 왜 이런 잔인한 방식으로 열쇠를 뽑는 거지? 좀 더 제대로 된 절차와 방식을 통해 육성할 수도 있지 않나?”
“피조물의 한계를 뚫고 열쇠의 가능성을 지닌 이레귤러로서 성장하는 건 평범한 방식으론 불가능하니까. 언제나 상식과 한계를 파괴할 수 있는 돌연변이들만이 이레귤러로 성장할 수 있는 법이지. 너처럼 말이야.”
“어째서 시스템은 우리 같은 존재들을 관리자로 임명한 거지?”
“그거야 시스템 마음이지. 우리 같은 계약직이 뭘 알 수 있을까? 다만 한 가지 확실한 사실은 있어.”
“확실한 사실?”
“시스템은 완벽해. 버그가 일어나는 이유도 시스템이 일부러 버그를 일으키기 때문에 발생하는 거니까. 그런 시스템의 목적은 진화야. 무엇을 위한 진화인지는 나도 잘 몰라. 하지만 완벽은 그 자체로 더 이상의 변화가 필요 없기 때문에 완벽이라 하는 거겠지. 진화와는 가장 거리가 먼 단어고. 그렇다면 진화와 가장 가까운 말은 뭘까?”
“불완전…….”
“빙고! 그래서 우리 같은 불완전한 존재들을 관리자로 두는 게 아닐까? 뭐, 그렇게 추측하고 있는 거지. 궁금한 게 풀렸으면 이제 그만 나 좀 죽여 줄래? 그리고…….”
관리자는 진심을 담아 윤수호에게 고개를 숙였다.
“미안하다. 지금까지 네게 저질렀던 모든 일들과 앞으로 네가 감당해야 할 과업에 대해서. 이건 진심이다.”
“…….”
윤수호는 한참 고민하다 마지막으로 물었다.
“내가 널 죽이지 않으면 우린 어떻게 되는 거지?”
“전임자에 말에 따르면 둘 다 소멸당한다고 하더군. 관리자가 둘 이상 존재하는 것 자체가 시스템에겐 버그나 마찬가지니까.”
“차라리 그게 낫겠네.”
“뭐가? 너, 너 설마 나랑 같이 죽으려고! 너 인마 그래 봤자 소용없어. 어차피 시스템은 공석인 관리자를 또 다시 선별한다니까?”
윤수호가 씨익 입꼬리를 말아 올리며 대꾸하자 관리자가 사색이 된 얼굴로 반박했다.
그에 윤수호는 고개를 저었다.
“내가 미쳤어, 너랑 같이 죽게? 하지만 이대로 널 죽여 봤자 역사의 쳇바퀴만 돌리는 꼴인 거잖아. 그렇다면 쳇바퀴를 우리 손으로 부수는 수밖에.”
“우, 우리라고? 너야말로 미쳤어! 지금 시스템에게 거역하겠다는 뜻은 아니겠지?”
“어차피 소멸하기로 작정했다는 놈이 걱정도 많네. 그리고 관리자 둘이서 시스템에 대항한 역사는 단 한 번도 없을 거 아냐. 안 그래?”
“정확히는 현 관리자와 관리자 후보생이지. 아무튼 그건 불가능하다. 네가 가진 힘, 네 존재. 모두 시스템이 창조했다는 사실을 모르는 건 아니겠지?”
“그러니까 더 해 볼 가치가 있지. 안 되면 거기까지인 거고…….”
윤수호가 제대로 미쳤다고 생각한 관리자는 한숨을 쉬며 물었다.
“그래, 그래서 뭘 하자고? 시스템을 부수기라도 하자고? 온 우주가 개판이 되거나 소멸할지도 모르는데?”
“아니. 시스템한테 가르쳐 주는 거지.”
“뭘?”
“세상에 완벽한 존재는 없다는 걸. 우리한테 패배하면 시스템도 자신이 완벽하지 않다는 걸 인정할 거 아니야. 안 그래?”
“……너 진짜 제대로 돌아이구나?”
그렇게 말하는 관리자의 표정은 어느새 웃고 있었다.
“좋아. 시부레, 기왕 이렇게 된 거 어디 한 번 제대로 엎어 보자고. 어차피 네 손에 죽나, 시스템한테 소멸당하나 이 지긋지긋한 영생에서 벗어나는 건 마찬가진데, 뭐. 너한테 빚진 것도 많은데 이런 식으로 갚게 돼서 다행이네.”
“그것 참, 퍽이나 고맙다.”
두 사람은 삼라만상의 근원을 바라보며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 * *
“그, 그래서 어떻게 됐어요?”
“아 뜸들이지 말고요. 삼촌!”
“어떻게 되긴 뭘 어떻게 돼? 그럼 너희들 앞에 있는 나는 귀신이겠냐?”
“아. 맞네?”
“‘맞네’는 무슨…… 고기 탄다. 빨리 먹어. 이야~ 그나저나 오늘 날씨 진짜 좋네.”
내리쬐는 태양. 부서지는 파도 소리, 푸른 바다와 새하얀 해변까지…….
뜨거운 여름, 휴가를 맞아서 해변가에 놀러 온 윤수호의 가족과 친구들이 바비큐를 구워 먹었다.
“너희도 얼른 와서 먹지 그래? 고기 탄다!”
“아직 한 점 남았어요! 읏차!”
“이제 그만 포기하시지! 어차피 내 캐논 스파이크 한 방이면 끝날 텐데!”
“경기는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닙니다, 선배!”
비치발리볼에 목숨을 거는 치우팀 팀원들과…….
“여기 있었구나!”
“수호 공!”
“어, 왔어?”
이제는 환계와 인계를 자유롭게 왕래 가능하게 된 미르 일행까지…….
“자, 모두 모였으면 다같이…….”
“건배!”
짠!
잔이 부딪히며 시원한 맥주 거품이 흩날린다.
이 세계에 더 이상 재앙종이 출현하는 일은 없었다. 그리고 알터들 역시 모두 평범한 사람들로 돌아와 세상이 잠깐 혼란에 빠졌던 적은 있었다.
그러나 누가 그랬던가? 사람은 변화의 동물이라고. 갑작스럽게 변화한 사회에도 사람들은 잘 적응하며 하루하루를 살아갔다.
알터 대원들도 지금은 평범한 군인으로서 나라에 이바지했으며, 수호문도 지금은 심법이 포함되지 않은 온전한 무술만을 가르치는 곳으로 변모했다.
그럼에도 윤수호는 만족했다.
가족들의 얼굴에는 여전히 미소가 마르질 않았고 친구들은 여전히 즐겁게 떠들었으니까.
그날 밤.
쏴아아아아아…….
파도치는 밤바다 앞 모래사장을 윤수호와 오혜연이 거닐었다.
“밤바람도 찬데 뭐 한다고 나오셨어요.”
“걱정 마. 이 정도로는 끄떡도 없으니까. 요즘 등산회 나가면 이 엄마가 친구들 한두 명쯤 번쩍 업어서 정상까지 갔다 온다니까? 정말로.”
“그래도 항상 건강 조심하세요. 연세도 있으신데.”
“아무렴. 우리 아들 장가가는 것도 보고 손주 태어나는 것도 보고, 그 손주가 결혼하는 것도 꼭 볼 거다.”
“하하하하…….”
장가 얘기가 나올 때마다 윤수호가 할 수 있는 건 어색한 웃음밖에 없었다. 예전 같았으면 이 정도쯤에서 물러나던 오혜연이었지만 오늘은 그럴 생각이 없는 모양이었다.
“대체 누구야?”
“갑자기 뭐가요?”
“네가 마음에 들어 하는 처자 말이다. 주변 여자들이야 다 널 마음에 두고 있는 걸 네가 모를 리가 없고. 너도 영 마음에 없는 눈치는 아닌 것 같은데 도통 누굴 마음에 두었는지 감이 안 잡힌단 말이지.”
꿀꺽…….
저 멀리 바위 뒤에서 유난히도 복수의 마른침 삼키는 소리가 들린 것 같은 건 기분 탓이었을까?
그에 윤수호는 피식 실소를 터트리더니.
“어머니. 저 사실…….”
“그래, 누구니? 이 엄마한테만 살짝 귀띔해 줄래? 비밀은 꼭 지키마!”
“선호가…….”
그 순간, 이선호의 이름이 튀어나오자 바위 뒤쪽에서 선화, 박여진, 오수영이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며 놀라 외쳤다.
“선호라면 이선호 선배요?”
“수호 공, 혹시 그런 취향이셨나요!”
“안 돼요! 이선호 선배랑 그렇고 그런 사이라니……! 절대 안 돼요!”
세 여자의 필사적인 만류에 윤수호가 한숨을 쉬며 고개를 저었다.
“무슨 소리에요? 이번에 선호가 소개팅 자리 있다고 같이 나가자고 해서 그거 말씀드리려고 했던 건데. 근데 세 분은 왜 거기 숨어…….”
“아무튼 그것도 안 돼요!”
“결사반대! 소개팅 반대!”
“휴……. 그래도 다행이네요. 수호 공이 그렇고 그런 취향이 아니라서…….”
“풉…… 푸하하하하!”
세 여성의 반응에 결국 참지 못한 윤수호의 입에서 박장대소가 터져 나왔다.
언젠가는 인연이 닿아 결혼도 하고, 가족도 만들고, 자식도 생기겠지만…….
당분간은 이런 소소하고 즐거운 일상을 지켜 나갈 수 있길…… 윤수호는 마음속 깊이 진심으로 바랐다.
《검신이 돌아왔다》 마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