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2.
“여기구먼.”
사라진 천마가 다시 모습을 드러낸 곳은 놀랍게도 윤수호의 집 앞이었다.
그는 마치 초대받은 손님처럼 거리낌 없이 정문으로 다가가더니 초인종을 눌렀다.
띵동, 띵동~!
경쾌한 벨소리가 울려 퍼지고 잠시 후…….
덜컥.
철문이 열리자 천마는 당연하다는 듯이 계단을 올라 윤수호의 집에 들어갔다.
“계십니까?”
“계시는 줄 빤히 알면서 찾아온 녀석이 그런 건 뭐 하러 물어?”
천마를 맞이한 사람은 다름 아닌 윤수호였다. 5년의 폐관 수련을 마친 윤수호가, 놀랍게도 자신의 집에서 천마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천마가 들고 있던 과일 바구니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면서 물었다.
“이건 뭐냐?”
“뭐긴 뭐야, 선물이지. 나 팔 떨어진다. 빨리 받아라.”
그렇게 윤수호에게 과일 바구니를 멋대로 안겨 준 천마는 거실로 들어서 집을 구경하기 시작했다.
“생각보다 깔끔하고 좋네. 검신의 품위를 생각하면 좀 좁긴 해도. 가족은?”
“다들 너처럼 한가한 사람들은 아니거든?”
“야, 인마. 나도 나름 바쁜 몸이야. 너 이기고 나면 내가 할 일이 얼마나 많아지는 줄 알아?”
“네, 네, 아무렴요. 밥은?”
“아직인데. 설마 차려 줄 거냐?”
“집에 라면이랑 찬밥은 있다.”
아마 무림인들이 지금 이 상황을 봤으면 입에 게거품을 물지 않았을까?
다른 누구도 아닌 검신과 천마가…… 철천지원수라고 해도 이상하지 않을 두 사람이, 마치 오랜만에 만난 친구처럼 격 없이 얘기를 나누었다.
그렇다고 해서 두 사람이 마지막 전투 이후 중간에 따로 만난 것도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을 서로를 막역하게 대하며 심지어 라면까지 함께 끓여 먹는 게 아니겠는가?
후루룩~ 쩝쩝.
“오~ 이거 뭐냐? 되게 맛있네?”
“당연하지. 내가 다른 건 몰라도 라면 하나는 기가 막히게 끓이거든. 밥은?”
“당연히 말아야지.”
그렇게 라면 국물에 밥까지 야무지게 말아 먹은 두 사람은 후식으로 커피까지 끓여 마셨다.
“뭐야, 이건? 영약이나 보약도 아닌 것이 왜 이렇게 써? 우웩~!”
“그게 요즘 이 세상의 트렌드란 것이다. 정 쓰면 우유라도 타 줄까?”
우유를 타고 나서야 인상을 조금 펴는 천마.
“음~ 이제 좀 먹을 만하네. 그래, 그토록 돌아오고 싶었던 세상에 돌아와서 요새 어떻게 지내고 있었냐? 맘 같아서는 고생도 빡세게 하고 불행하게 살고 있었다는 대답을 들으면 기분 좋을 것 같은데…….”
“왜? 그럴 것 같냐?”
천마는 집 여기저기에서 느껴지는 사람의 따뜻한 온기에 피식 실소를 터트리며 고개를 저었다.
“안타깝게도 그건 아닌 것 같네.”
“사실 돌아오자마자 일이 좀 있긴 했지. 가족들이 모두 힘든 일을 당하고 있었으니까.”
윤수호는 커피를 마시면서 이곳으로 돌아와 겪었던 일들에 대해 천마에게 얘기해 주었다.
천마는 그런 윤수호의 이야기를 들으며 공감하기도, 분노하기도, 비웃기도, 감동하기도 하는 등, 그의 얘기에 푹 빠져 있었다.
“그렇게 해피엔딩으로 끝날 수 있었겠지. 어디 사는 누군가가 찾아와서 지금 전 세계를 상대로 깽판만 치지 않았어도.”
“푸하하하하! 내가 네 녀석을 다시 만나려고 들인 공이 얼만데 그런 섭섭한 소리를 하냐? 네 녀석은 모르겠지만 이 몸이 또 고생이란 고생은 기깔나게 하고 왔거든. 아~ 이건 이 따위 콩 태운 물이 아니라 술이라도 한잔 진~하게 곁들여 줘야 하는데…….”
그에 윤수호는 말없이 찬장으로 가서는 양주 한 병을 꺼내 그에게 던져 주었다.
“음~ 이 정도면 뭐, 싸구려긴 해도 나쁘진 않네.”
독한 양주의 술맛이 마음에 들었던 천마는 자신이 윤수호에게 패배한 이후 겪었던 일들을 털어놓기 시작했다.
“네 녀석에게 생에 처음으로 패배를 맛보고 난 후, 나는 미련 없이 죽음을 받아들였다. 솔직히 나보다 센 놈한테 뒈진 것보다 후련한 죽음은 없었으니까. 그런데 다른 녀석은 그게 아닌 모양이더라고.”
“다른 녀석?”
“슬슬 너도 눈치채고 있을 줄 알았는데? 너와 나를 감시하고 있는 별 이상한 변태 새끼가 있다는 걸.”
“아…… 나 알 거 같다. 그 변태 새끼, 얼마 전에 한 번 만났거든.”
윤수호가 얼굴을 구기며 대꾸하자 천마가 피식 웃으며 병나발을 불었다.
“그 녀석이 나에게 새로운 기회를 주었지. 물론 평범한 세상은 아니었다. 괴수들이 바다의 모래알처럼 굴러다니고 나조차 쉽게 대적하기 어려운 강자들이 밤하늘의 별들보다 많은 세상. 내가 눈을 뜬 곳은 바로 그런 세상이었다.”
“뭐야? 그 정도면 네 기준으로는 극락 아니냐?”
“푸하하하하! 그렇지. 그래, 역시 네놈은 날 잘 알아. 나는 그곳이 극락인 줄 알았다. 매일, 매 시간, 매 순간을 쉬지 않고 싸웠지. 아무리 싸워도 적은 줄지 않고, 아무리 강해져도 나보다 더 강한 적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나타났다. 특히, 마왕이라는 녀석들은 나조차 승패를 장담하기 어려운 녀석들이었지. 하지만…….”
천마는 이글거리는 두 눈으로 윤수호를 응시하며 힘을 담아 대꾸했다.
“마왕 중에서 가장 강하다고 알려진 놈조차 네놈이 내게 주었던 두려움을 느끼게 할 수는 없었다.”
“그걸 고맙다고 해야 하나…….”
“네놈에게는 아쉬운 일이지. 거기서 만족했다면 내가 네 녀석을 찾아올 이유가 없었을 테니까. 아니지, 다시 생각해 보니 그래도 네놈을 찾아 이곳에 왔겠구나. 어쨌든 이 몸에게 씻을 수 없는 패배를 안겨 준 무인은 네 녀석뿐이니까.”
“그냥 내가 진 걸로 하고 왔던 곳으로 얌전히 돌아가면 안 되겠냐?”
“얌전히 네놈의 목숨을 내놓는다면 한 번 생각해보지 못할 것도 없지.”
윤수호의 너스레에 천마도 똑같이 응수하자 윤수호는 가벼운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서 이길 자신이 있으니까 돌아왔다?”
“네가 얘기한 극락…… 마계에서는 마왕들의 심장을 ‘데몬 하트’라고 부른다더군. 그 천고의 영약을 열두 개나 흡수한 후에 나는 비로소 탈마의 경지를 넘어 신마(神魔)의 경지에 들어설 수 있었다.”
“어쩐지…… 네 녀석의 기운이 티끌한 점 없이 깨끗한 이유가 그거였구먼.”
“문제는 이 지경에 이르러서도 네 녀석을 이기는 내 모습이 상상이 되지 않더란 말이지. 게다가 그 변태 녀석과의 계약도 있어서 이렇게 네놈을 찾아 왔다는 말씀.”
“변태 녀석과의 계약?”
“별다른 건 아니고. 그냥 네 녀석을 죽이라더군. 그래야 이레귤러로서 완성된다나 뭐라나. 네놈도 만났다면 똑같은 얘기를 들었을 것 같은데?”
“그래, 그런 모양이네.”
자신의 시련은 천마와 달랐지만 이레귤러를 성장시키려는 그 존재의 목적은 천마나 자신이나 똑같았던 모양이었다.
“도대체 우릴 완성시켜서 뭘 어쩔 속셈인지는 모르겠지만…….”
“네놈이 죽으면 알게 되겠지, 뭐.”
핏.
그 순간, 천마의 몸에서 한 줄기 마기가 흘러 나왔고…….
콰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앙!
단지 그것만으로 거대한 빛의 돔이 퍼져 나가면서 마을 일대를 완전히 날려 버렸다.
빛이 사라지고 윤수호가 손을 휘젓자 하늘 높이 솟구치던 거대한 먼지구름이 바람에 휩쓸려 사라졌다.
그러자 천마가 만들어 낸 황폐화된 마을의 전경이 더욱 두 눈에 잘 띄었다.
그 모습을 보고 윤수호가 눈살을 찌푸리며 중얼거렸다.
“아무리 결계 안이라고 해도 집이 날아가는 건 썩 유쾌한 경험은 아니네.”
“그래도 본좌에게 조금은 감사하는 게 어떻겠느냐? 네놈이 걱정 없이 싸울 수 있도록 일부러 시간을 주었거늘.”
“그것 참…… 퍽이나 고맙다. 자식아.”
윤수호가 백설을 꺼내 들자 천마 역시 아공간에서 자신의 애병, 천살도(天殺刀)를 꺼내 들었다.
칠흑처럼 검은 도신에 황금빛 칼날과 마치 흑룡이 검을 물고 있는 것 같은 형상의 칼자루는 윤수호의 눈에도 아주 낯이 익은 것이었다.
“오랜만에 보네. 다시 그 천살도를 보게 될 일은 없을 거라 생각했는데…….”
“그러는 네놈은 칠성검(七星劍)을 어디다 팔아먹은 모양이구나. 그렇다고 본좌에게 자비를 구할 생각은 아니겠지?”
“뭘. 천마를 상대로 이 정도 핸디캡이면 적당하지.”
윤수호가 입꼬리를 말아 올리며 이죽이자…….
“그 당돌한 표정을 보고 싶었느니라.”
천마도 함께 미소를 그리며 천살도를 가볍게 휘둘렀다.
휙.
다른 사람들이 봤다면 천마가 장난을 하는 게 아닐까, 혹은 연습 삼아 허공을 베어 본 것이 아닐까 싶을 만큼 힘이 들어가지 않은 가벼운 베기였다.
그러나 거기서 파생된 결과는 결코 가볍지 않았다.
파지지지지지직!
도 끝에서 발출된 도기는 폭주하는 마기 때문에 기하급수적으로 커지더니 주체하기 어려운 마기를 뿜으며 윤수호에게 쇄도한 것이다.
처음에는 검지와 엄지 사이에 쏙 들어올 만한 크기의 도기였지만 윤수호의 코앞에 도착했을 때는 실제 초승달이 아닐까 의심될 정도로 어마어마하게 증폭하였다.
“여전하구먼.”
촤악!
윤수호는 간결하게 검을 휘둘러 초승달 형태의 도기를 베어 냈다.
다른 때 같았으면 도기의 파편이 지상에 떨어질 것을 우려해 잘게 베어 냈겠지만 이곳은 결계 안쪽의 공간.
생명체라곤 자신과 천마밖에 없는 이곳에서 건물이나 지형이 얼마나 망가지든 결계 밖에는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그 덕분에…….
콰콰콰콰콰콰콰콰콰콰콰콰콰콰……!
부서진 도기의 파편이 지상에 쏟아져 내리는 것만으로 사방 수km 일대의 대지가 완전히 초토화되었다.
문제는 천마가 그렇게 장난삼아서 휘두르는 검격이 어느새 눈에 보이지 않을 만큼 빠르고 많아졌다는 사실이었다.
혹시 초승달이 하늘에서 비처럼 쏟아져 내리는 상상을 해본 적 있는가?
누구도 그런 비현실적인 상상을 해 본 적이 없을 것이다. 그러니 일반 사람이 이곳에 있었다면 아마 현실을 초월한 광경에 기절했을지도 모르지.
정말로 검붉은 초승달들이 폭우처럼 쏟아져 내리고 있었으니까.
“하여간 힘으로 찍어 누르는 걸 좋아하는 건 여전해.”
윤수호가 부드럽게 검을 휘둘렀다.
검의 궤적을 따라 마치 잔상처럼 수백, 수천 가닥의 검신들이 꼬리처럼 궤적을 따라갔다.
그런데 환영처럼 보였던 잔상들이 어느새 물 흐르는 것처럼 흘러나가 쏟아지는 도기들 사이를 파고들었다.
검기는 실이 되고, 서로 엮이면서 어느새 그물이 되었다.
그물은 마치 물고기 떼를 가두는 것인 양 쏟아지는 도기들을 한데 묶었고…….
꽈악!
콰아아아아아아아앙!
윤수호가 반대 손을 위로 뻗어 주먹을 말아 쥐자 그물이 촘촘하게 뭉치면서 가두어 두었던 도기들을 남김없이 부숴 버렸다.
콰콰콰콰콰콰콰콰콰콰콰콰콰콰콰콰콰콰쾅……!
부서진 도기의 잔해들이 지상으로 흩어졌다. 여력이 넘쳐 흘리는 파편들은 지상과 충돌하자마자 거대한 폭발을 일으켰고…….
폭발이 꼬리에 꼬리를 물며 빠르게 확산되자 어느새 서울의 절반이 순식간에 불바다가 되었다.
이 광경이 진짜 서울에서 일어났다고 생각하면 아찔하기 그지없는 상황.
윤수호는 절레절레 고개를 젓고서는 천마를 쳐다보며 외쳤다.
“지금 나랑 장난치고 싶어서 여기까지 찾아온 건 아니겠지?”
“설마~ 본좌는 혹시라도 검신께서 평화에 찌들어 검이 녹슬지는 않았는지 확인해 보고 싶었을 뿐.”
“그래서, 내 검은 녹슬었나?”
“아직까지 잘 모르겠군. 하지만…….”
천마는 씨익 입꼬리를 말아 올리며 대꾸했다.
“적어도 지금의 네놈이 두렵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구나.”
검신이 돌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