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신이 돌아왔다-167화 (167/175)

167.

부모도, 형제도, 친구도, 고향도, 이름도…….

나에겐 아무것도 없었다.

이성이 생기고 가장 처음 기억에 남은 광경은 고통에 일그러진 타인의 얼굴. 차가운 칼자루, 끈적거리고 뜨거운 사람의 피와…….

“4번의 승리. 다음.”

이름이 아닌 나를 부르는 번호뿐이었다.

살고 싶은 이유도, 죽고 싶은 이유도 없었다. 그런 주제에 사람을 죽이고 나면 주어지는 맛있는 고기와 흰 쌀밥이 너무나도 맛있었다.

아마 그때 당시에 내가 살아가는 유일한 목적이 그게 아니었을까? 흰 쌀밥과 고기.

단지 그것들을 배불리 먹기 위해 죽이고 죽이다 보니 어느새 백 명의 아이들 중 나 혼자만 남게 되었다.

신경 쓰였다.

99명의 죽은 아이들이 아니라 더 이상 죽일 사람이 없으니 고기와 쌀밥도 얻어먹지 못하는 게 걱정되었다.

그러나 쓸데없는 걱정이었다.

99명의 아이들을 죽인 나는 더 넓은 세상으로 나올 수 있었다.

세상 사람들이 마교라고 부르는 마도 연합은 내가 갇혀 살던 깜깜하고 음습한 동굴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크고 화려한 곳이었다.

하지만 그곳으로 나와도 내가 하는 일은 변하지 않았다.

나는 여전히 사람을 죽였고, 대신 고기와 쌀밥보다 더 많은 것들을 손에 넣을 수 있었다.

특히 돈!

돈만 있으면 쌀밥과 고기뿐만 아니라 술과 여자 등, 배부르고 즐거운 일들도 마음껏 즐길 수 있었다.

돈을 더 벌기 위해서 마교가 시키는 대로 더 많은 사람들을 죽였다.

그렇게 죽이고, 죽이고, 또 죽이다 보니 어느새 나에게 사람은 두 부류로 나뉘게 되었다.

고개를 숙이는 자들, 그리고 칼을 들이미는 자들.

고개를 숙이는 자들은 품고, 칼을 꺼내는 자들은 가차 없이 죽였다. 그럴수록 되레 적은 더 많아졌지만 상관없었다.

내게 사람을 죽이는 것보다 쉬운 일은 없었으니까.

그렇게 평소처럼 지내다 보니 어느 날부터 사람들은 나를 천마라고 부르기 시작하며 숭배했다.

강자존이 전부인 마교에서 나보다 강한 마인은 없다나 뭐라나…….

천마가 되어 천마동의 출입을 허가받은 나는 역대 천마 조사들만이 익힐 수 있었다던 천마신공을 접하게 되었다.

딱히 지금보다 더 강해지는 것에 관심은 없었지만…… 천마신공의 놀라운 무리에 빠져든 나는 어느새 천마신공을 12성까지 달성할 수 있었다.

그러나 즐거움은 오래가지 못했다.

더 이상 흰 쌀밥에 뜨끈한 고기로 배를 채우는 것도, 술에 흠뻑 빠지고, 빼어난 미녀만 취해 주지육림을 즐기는 것도 의미 없었다.

하루하루가 지루하고 권태로웠다.

혹시 피를 보지 못해서 그런 것인가 싶어 일부러 반역하는 무리를 찾아가 직접 죽여 보기도 했지만 권태는 해소되지 않았다.

그래서 생각했다.

그때는 왜 그렇게 즐거웠을까? 왜 고기와 술이 달고, 여인의 체취가 감미로웠던 것인지 떠올려 보았다.

결론은 하나였다.

강자.

목숨을 걸고 강자와 싸워 그 모가지를 취한 뒤에 먹는 술과 고기는 더욱 각별했다.

강자와의 싸움 이후에 용광로처럼 달궈진 몸으로 부드러운 여인의 몸을 취하는 것은 극락에 오르는 것과 비슷한 희열이었단 사실을 깨달은 것이다.

결국엔 강자존. 나 역시 어쩔 수 없는 마교의 무인이었다.

그렇다면 더 강한 무인을 찾아 나서자! 마교에는 더 이상 그런 놈들이 남아 있지 않으니…….

“무림으로 간다.”

와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무림으로 출사표를 던졌다.

그러나 정작 몸을 던진 무림은 기대 이하였다.

초절정의 은둔 고수들이 바닷가에 모래알처럼 많다는 무림이었지만 적어도 내 눈에 그만한 고수는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좀 더 무림을 뒤흔들어 놓으면 나타날까 싶었지만 무림맹이 변방의 구석으로 밀려날 때까지도 그런 고수는 찾아볼 수 없었다.

“하아…… 인생사 참 지랄맞네. 이제 다시는 그 술맛과 고기 맛을 볼 수 없는 건가?”

산처럼 쌓인 무림맹 무인들의 시체 위에서 다시는 맛 볼 수 없는 고기와 술맛을 그리워하던 나에게…….

“네가 천마인가?”

“뭐냐, 너는?”

한 남자가 찾아왔다.

* * *

‘뭐, 뭐지? 이것도 예지몽인가?’

윤수호는 마치 자신이 실제로 겪고 있는 것처럼 생생한 느낌이 드는 꿈에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물론 예지몽을 꿀 때도 꿈을 꾸는 것 같지 않은 생생함은 있었지만, 이렇게 누군가의 시점으로 삶을 경험하고 세상을 바라본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무엇보다…….

‘저건 나잖아!’

시체의 산 위에 앉아서 한 남자를 내려다보는 천마. 그의 시선 끝에서 천마를 올려다보던 남자는 다름 아닌 윤수호 본인이었다.

“넌 뭐냐?”

“무림맹의 의뢰를 받았다. 너를 쓰러트리면 날 내가 살던 세상으로 돌려보내 줄 수 있다더군.”

“뭐야, 그게. 네가 살던 세상? 뭔 소린지 하나도 못 알아듣겠네.”

천마의 시선으로 자신을 바라보던 윤수호의 표정이 무거워졌다.

저때 당시의 자신도 알고 있었다. 무림맹이 천마를 쓰러트리기 위해 자신을 이용했다는 걸…….

그러나 알면서도 부탁을 들어줄 수밖에 없을 정도로 당시의 자신은 절박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화가 나 있었지. 집으로 돌아갈 길이 없다는 절망감 때문에.’

천마에게 도전한 건 어쩌면 단순한 분풀이였을지도 몰랐다.

“아무튼 기분도 꿀꿀한데 잘됐다.”

팟.

편하게 앉아 있던 천마의 신형이 사라진 순간, 어느새 그는 윤수호의 눈앞에 서 있었다.

“너 좀 강하냐?”

“…….”

쩌엉!

천마가 일장을 내질렀다.

천마수(天魔手)라는 천마신공의 기본 초식으로, 단순하지만 이 단순한 일장을 막아 낼 수 있는 무인은 무림에서도 흔치 않았다.

그런데…….

“호오?”

천마의 눈에 이채가 감돌았다. 윤수호가 자신의 천마수를 같은 일장으로 와해시킨 것이다.

물론 소림의 방장이나 무당의 장문인 정도되는 무인이라면 천마수를 이런 식으로 막아 낼 수도 있을 것이다. 다소의 내상은 감수해야겠지만.

그러나 상대는 자신이 천마수를 가볍게 내민 것처럼 가볍게 내민 이름 모를 일장으로 완벽하게 천마수에 담긴 공력을 와해시켰다.

“너…… 강하구나?”

“넌 생각보다 시끄러운 놈이군.”

“그럼 다물게 만들어 보든가!”

콰우우우우우우우!

히죽 웃은 천마가 본격적으로 내공을 끌어 올렸다.

마치 두 마리 흑룡이 그를 감싸며 승천하듯 똬리를 틀더니 공력이 나선형의 기류를 이루며 하늘로 솟구쳤다.

그의 주변으로 폭풍 같은 기세가 휘몰아쳤다.

단지 내공을 끌어 올렸을 뿐인데 그것만으로 땅이 갈라지고 먹구름 낀 하늘에서는 천둥벼락이 쏟아진다.

그 모습은 과연 이게 과연 인간의 무공인가 싶은 의심이 들 정도였다.

그 순간, 천마의 입꼬리에 맺힌 미소가 더욱 진해졌다.

자신에게는 싸우기 전 준비에 불과해도 대부분의 적들은 여기서 전의를 상실하고 무릎을 꿇거나 목숨을 구걸한다.

심지어 이런 준비를 하는 것조차 가치가 있다고 인정한 상대들뿐이었는데 말이다.

그러나 윤수호는 달랐다.

자신의 공력을 있는 그대로 느끼고 있으면서도 여전히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단순히 두려움에 몸이 굳었다거나 공포에 질려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것을 천마가 구분하지 못할 리 없었다.

굳이 표현하자면…….

“입이 시끄러운 만큼 준비도 요란한 놈이네. 그래서 준비는 그걸로 끝난 건가?”

“하하하하! 더 더욱 마음에 드는구나!”

앙천광소를 터트린 천마가 일권을 내질렀다.

콰아아아아아아아아!

주먹을 따라 발출된 공력은 검은 용의 형태를 띠고 무시무시한 기세로 윤수호를 향해 쇄도했다.

“후우…….”

가볍게 호흡은 가다듬은 윤수호. 순간, 그의 안광이 번뜩였다. 그리고 이내 경천동지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의 전투가 시작되었다.

콰콰콰콰콰콰콰!

두 사람이 충돌할 때마다 하늘이 울리고, 땅이 갈라졌다.

두 사람이 충돌할 때마다 쏟아지는 공력의 파편들이 땅을 부숴 꺼트리고 갈라진 대지가 우뚝 융기하는 등, 지형지물이 순식간에 변하기 시작했다.

“교주님!”

“우리도 가세한다!”

두 사람의 전투를 발견한 마교의 무인들은 목숨을 내던질 각오로 천마를 위해 전투에 가세하려 했다.

물론 어지간한 마인들은 쏟아지는 공력 파편에 접근만 해도 목숨을 부지하기 힘들었지만, 마교 무인들에게 중요한 건 자신의 목숨이 아니었다.

마교의 승리.

이것을 위해서라면 자신의 목숨 따위는 얼마든지 내줄 수 있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전부 물러나라!”

“교, 교주님!”

“두 번 말하지 않는다! 나와 이 녀석의 싸움을 방해하는 놈이 있다면 그놈부터 사지를 찢어 죽일 것이다!”

콰르릉! 콰콰쾅!

쏟아지는 벽력 속에서 소리치는 천마의 목소리는 마신의 포고였다.

지금 천마의 머릿속에는 마교도, 부하들도, 술과 고기도, 여인도, 그 무엇도 들어 있지 않았다.

지금 그의 눈에 보이는 건 단 한 명, 윤수호뿐이었으니까.

“크하하하하하! 이것이다! 내가 바라던 싸움이 바로 이것이란 말이다!”

자신의 무공이라면 능히 천지를 부수고 세상을 뒤엎을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그리고 실제로도 그렇게 되어 가던 와중이었다.

그런데 아니었다.

눈앞의 남자, 윤수호는 마치 끝을 모르는 하늘의 하늘처럼 자신의 공세를 담담히 받아넘겼다.

‘단순한 초식인데 완벽하다! 공방에 빈틈이 없고 기운의 수발이 자유롭다! 이건 마치 텅 빈 하늘을 향해 무공을 쏟아붓는 기분이구나! 크하하하!’

한 번의 사소한 실수로 목숨이 오가고, 잠깐의 빈틈이 치명적인 부상으로 이어질 수 있는 싸움이 몇날며칠에 걸쳐 이어졌다.

윤수호도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강하다. 그리고 더 강해지고 있다! 기운이 떨어지기는커녕 오히려 증폭하고 있는 데다 점점 내 움직임을 파악하고 대처하는 속도도 빨라지고 있다. 진짜 괴물은 괴물이로군.’

한 치의 방심도 허용할 수 없는 건 윤수호 역시 마찬가지였다.

천마의 무공은 앞을 읽는다는 게 불가능했고, 수를 읽지 못하면 즉시 대응하는 것만으론 턱없이 부족할 만큼 빠르고 강맹했다.

순간순간에 목숨이 오가고, 조금만 삐끗해도 사지가 날아갈 정도의 위기가 수시로 찾아왔다.

폭풍같은 공력은 줄어들기는커녕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강맹하고 세련되어 자신을 엄습했다.

천부공을 수련한 이후로 윤수호는 제대로 된 적수를 만나지 못했다. 모두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약했고 무림에 와서도 진심을 낼 만한 상대조차 만난 적이 없었다.

그러나 자신과 상대의 강약을 특별하게 의식해 본 적은 없었다.

누가 강하고, 누가 약하냐를 따지기에는 집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목적으로 머릿속에 가득 차 있었으니까.

그런 와중에 천마를 만났다.

녀석이 익힌 천마신공은 천부공에 비해 결코 부족한 무공이 아니었다.

같은 하늘의 무공이라고 해도, 천부공이 구름 한 점 없는 창공과 같다면, 천마신공은 별빛 한 점 없는 까만 밤과 같았다.

“네놈도 그랬겠지. 아주 지루하고 심심했을 게야! 네놈 이외에는 같은 인간으로 보이지도 않았을 테지. 벌레들 속에서 하루하루를 죽이다가 같은 인간을 만난 소감이 어떠냐? 나는 지금 무척이나 즐겁구나!”

“나는 너 같은 괴물이 아니다.”

“아니, 너 또한 괴물이다! 네가 인식하지 못했을 뿐. 시간이 지나면 자연스럽게 알게 되겠지. 물론 이 싸움에서 살아남는다는 전제 조건이 필요하겠지만 말이야. 크하하하하!”

앙천광소를 터트리는 천마의 등 뒤로 아홉 마리의 흑룡이 출현했다. 그것들 전부가 천마의 공력으로 만들어 낸 것으로 대륙을 세상에서 지워 버릴 수 있는 위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에 대항하여 윤수호는 차분히 검을 들어 올렸다.

그는 검에 하늘을 담아내며 외쳤다.

“나는 집으로 돌아갈 것이다! 네놈을 쓰러트리고 반드시……!”

검신이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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