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신이 돌아왔다-159화 (159/175)

159.

“조국을 지키기 위해 동부 전선으로 이동하시는 거 아니었나요?”

“나도 란슬롯 경이 벌써 바다를 건넜을 줄 알았는데, 설마 여기서 보게 될 거라곤 상상도 못 했습니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은 것 같습니다만?”

“여기서 돌아갈 생각이었다면 오지도 않았겠죠. 그리고…….”

알베르토는 정면을 턱짓으로 가리키며 긴장을 끌어 올렸다.

“돌아가기엔 이미 늦은 것 같습니다.”

마치 성난 맹수처럼 정면에서 달려오는 아이젠과 세뇌된 독일군을 발견한 란슬롯이 우렁차게 소리쳤다.

“후방 대원들은 인근 주민들의 수색과 피난을! 나머지 대원들은 나를 따르라!”

“전군 돌격!”

팟! 쒜엑!

땅을 박찬 란슬롯과 알베르토가 대형을 이탈해 엄청난 속도로 전방을 쇄도하자 마찬가지로 아이젠 역시 땅을 박차며 정면으로 몸을 날렸다.

공기의 벽을 몇 번이나 부수며 달려간 끝에 충돌한 세 사람.

콰아아아아앙!

거력이 충돌하며 한 차례 큰 폭발이 일어나더니 이내 세 사람은 엄청난 속도와 위력으로 공방을 주고받기 시작했다.

“절대로 죽여서는 안 돼요! 어디까지나 제압이 목적인 걸 잊지 말라고요!”

“그러는 검성이야말로 욱해서 실수하지 마십쇼! 보아하니 그럴 가능성이 다분한 것 같은데.”

“뭐, 뭐라고요?”

두 사람은 티격태격하면서도 톱텐의 명성에 걸맞은 전투를 보여 주었다.

란슬롯의 유려하고 묵직한 검술은 적의 타격을 남김없이 흘려 보냈으며, 붉은 투사, 알베르토의 폴암은 란슬롯이 만들어 낸 허점을 기가 막히게 파고들었다.

이렇듯, 두 명의 톱텐이 나서서 분발해 주니 두 사람을 따르는 병사들의 사기 또한 높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크아아아아아!”

“이런 미친……!”

한 뼘만 더 걸음을 내디뎌도 목이 달아날 판국임에도 아이젠은 겁 없이 몸을 날렸고, 그에 당황한 란슬롯이 되레 발이 꼬였다.

아이젠을 죽일 생각이었다면 이보다 쉬운 기회는 없었지만 애초에 죽일 생각이 없었기 때문에 오히려 적에게 큰 빈틈을 보인 것이다.

‘아…….’

란슬롯은 이를 악물었다. 갑옷에 오러를 집중적으로 보호해 목숨에 지장은 없겠지만 아이젠의 주먹을 생각하면 치명상은 피할 수 없을 터.

그 순간.

콰앙!

“괜찮아요?”

“고맙다고는 안 할 거예요.”

“바라지도 않았습니다.”

절묘한 타이밍에 끼어든 알베르토가 아이젠의 주먹을 튕겨 내면서 란슬롯을 구해 냈다.

“목숨을 내던지고 싸우는 적이 이렇게까지 까다로울 줄은 몰랐습니다. 아무리 그래도 본능적으로 죽음의 위기 앞에서는 움츠러들기 마련인데…….”

“그에 반해 우리는 상대를 죽일 수가 없으니 더 힘들 수밖에요.”

“도대체 언제까지 버텨야 하는 겁니까?”

“글쎄요. 그거야 위에 있는 분께 물어보면 알 수 있지 않을까요?”

란슬롯은 입꼬리를 애써 말아 올리며 슬쩍 하늘에 떠 있는 윤수호를 일별하였다.

* * *

“그래도 싹수가 영 노란 친구들은 아니었군. 그래도 아직 많이 멀었지만.”

윤수호는 피식 실소를 터트렸다.

처음부터 저랬으면 더 많은 사람들의 목숨을 구할 수 있었겠지만 지금이라도 마음을 고쳐먹었으니 영 낙제점은 아니었다.

물론 그조차도 윤수호라는 강자의 출현에 용기를 낼 수 있었던 것이지만.

“설마 저 도움도 안 되는 인간들이 찾아왔다고 안심하는 건 아니겠지?”

“뭐, 도움은 충분히 되고 있는 것 같고. 그러니 나도 내 일을 해야겠지. 혹시나 싶어 말하는데 맞다가 죽을 것 같아도 잘못했다고 용서를 구하진 마. 그러려고 살려 둔 거니까.”

“일단 그 오만한 주둥아리부터 찢어 놓고 시작해야겠구나.”

바토리가 손끝으로 윤수호를 가리키자 주변에 충만한 붉은 안개에서 거대한 박쥐들이 태어나 윤수호를 향해 날아갔다.

공기의 벽을 가볍게 대여섯 번 돌파한 붉은 박쥐들은 그 자체로 칼날과 같은 날개를 가졌으며, 무쇠도 솜사탕처럼 뚫어 버릴 송곳니를 겸비했다.

당연히 검으로 베어도 소용없고, 둔기로 내리쳐도 의미 없었다. 박쥐 자체는 붉은 안개였기 때문이다.

“안개에서 사람의 피 비린내가 진동을 하는구나.”

윤수호는 주먹을 말아 쥐고는 앞으로 몸을 날렸다. 단지 그뿐이었다.

그런데…….

콰콰콰콰콰콰콰콰콰콰쾅!

“……!”

윤수호의 몸에 충돌하는 모든 박쥐들이 허무하게 부서져 내렸다. 날개도 이빨도, 윤수호의 몸에는 생채기 하나 내지 못한 채 부서져 다시 안개가 된 것이다.

“칫!”

바토리는 방금 전의 몇 배나 되는 박쥐들을 만들어 보내며 빠르게 뒤로 빠졌다.

피그림자를 이용한 공간 이동 마법을 사용하면 단숨에 거리를 벌릴 수 있었으니 이보다 효율 좋은 이동 수단은…….

“그러고 보니 내가 얘기 안 했지? 내가 검이 아니라 주먹을 쓰면 예전부터 좀 거칠었거든? 그러니까 네가 좀 이해해라.”

“말도 안 돼! 어떻게……!”

분명 공간이동 흑마법으로 상대와의 거기를 단숨에 수km까지 벌린 바토리였다.

그런데 어떻게 피 안개에 갇혀 있던 윤수호가 자신보다 앞서 자신이 나타날 곳에서 기다릴 수 있단 말인가?

그러나 그 의문을 해소하기에 앞서 먼저 감당해야 할 것이 있었다.

바로 윤수호의 주먹이었다.

와장창!

“크윽……!”

래서 드래곤의 브레스도 막아 내는 피의 장막을 세 장이나 펼쳤지만 유리처럼 부서지면서 끝내 윤수호의 주먹이 그녀의 안면을 정확히 후려갈겼다.

슈웅…… 콰앙!

별똥별처럼 마찰열 때문에 긴 꼬리를 그리며 이름 모를 야산에 추락한 바토리.

봉우리가 부서지고, 계곡에 거대한 크레이터가 생겼지만 그 중심에서 몸을 일으킨 바토리는 큰 타격이 없어 보였다.

다만 그녀의 표정은 더 없이 잔뜩 일그러져 있었다.

“가, 감히 내 얼굴을……!”

“뭘 그 정도로 기분 나빠 하고 그래. 앞으로 더 맞을 건데.”

“이익……!”

어느새 또다시 눈앞에 나타난 윤수호에게 바토리는 손톱을 휘둘렀다. 손톱들이 피의 결정으로 강화되어 하나하나가 날카로운 세검과 같은 손톱이었다.

콰콰콰콰콰콰콰!

윤수호가 고개를 틀어 공격을 피하자, 손톱 끝에서 뿜어져 나온 여력이 산맥을 할퀴며 위성에서도 확인할 수 있을 정도의 거대한 손톱자국을 만들었다.

쩌엉!

“커억……!”

날카로운 손톱을 피한 윤수호의 주먹이 이번에는 그녀의 옆구리를 찌르자 바토리가 눈을 부릅뜨며 답답한 비명과 함께 검은 피를 울컥 토해 냈다.

‘어, 어째서……!’

바토리는 이해할 수 없었다.

자신은 고통을 느끼지 않는 존재다. 손발이 잘리거나 불에 타거나 으깨져도 감각을 느낄 수가 없었다.

그런데 어째서 윤수호의 주먹은 이렇게도 아픈 건지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물론 이것은 심검과 똑같은 무리를 가진 심권의 능력이었지만 지금 바토리에게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다.

퍽퍽퍽퍽퍽퍽퍽퍽퍽퍽퍽퍽……!

바토리의 손톱을 여유롭게 흘리며 윤수호는 그녀의 몸에 주먹세례를 꽂았다.

“이익!”

바토리의 손톱이 짧아졌다. 위력을 줄인 대신 정확도를 높인 것이다.

그녀의 손톱 끝에서 터져 나온 붉은 강기들은 그물망이 되어 윤수호를 덮쳤다.

윤수호는 손을 뻗어 그것들을 부드럽게 받아 흘렸다. 아무리 거칠게 날뛰는 붉은 강기라도, 윤수호가 만들어 내는 흐름을 거스를 수는 없었다.

결국 정신을 차려 보면 윤수호가 쏟아붓는 권영들이 시야를 가득 채울 뿐이었다.

바토리 역시 결코 체술이 약하지 않았다. 아니, 누구보다 오랜 세월을 살아온 뱀파이어 퀸답게 그녀의 체술은 인간들 중에는 그녀에 비할 자가 없었다.

그러나 윤수호에게는 통하지 않았다.

마치 무술의 달인에게 어린 아이가 재롱을 부리는 것처럼…… 그녀의 공격은 번번이 빗나갔고, 대신 윤수호의 주먹은 자신의 몸뚱이에 꽂혔다.

몸이 단단한 게 이렇게 원망스러울 수 있단 걸 처음 알았다. 그랬다면 진즉에 몸이 부서져 이 고통에서 해방될 수 있었을 테니까.

익숙하지 않은 고통은 그녀에게 공포를 심어 주었다.

공포는 피의 여군주라 불리는 그녀조차 조금씩 갉아먹었다. 점점 더 손발이 어지러워지고 숨이 가빠 왔다.

눈동자는 잘게 떨리고 도망치고 싶다는 생각만이 머릿속에 가득했다.

이미 주변은 자신이 다룰 수 있는 최대한의 붉은 안개로 충만했다.

붉은 안개는 붉은 기사로 변하기도 하고, 붉은 늑대, 붉은 박쥐 등, 온갖 붉은 몬스터로 변해 윤수호에게 끝없이 덤벼들었다.

그러나 소용없었다. 윤수호의 주먹은 그 모든 것을 평등하게 깨부쉈다.

‘아니, 애초에 붉은 안개 속에서 사람이 생존한다는 것부터 말이 안 되잖아! 보통은 안개에 피와 생기를 전부 빨리다가 고목처럼 말라 죽는다고!’

그녀는 속으로 절규했다. 붉은 안개는 자신의 분신이며 권능이자 그 자체로 생명체에게 있어 맹독이나 다름없었다.

붉은 안개를 통해 바토리는 직접 접촉하지 않아도 얼마든지 상대의 피와 생기를 흡수할 수 있었다.

즉, 이 안개 속에서 싸우면 그녀는 무적이나 다름없다는 뜻이었다.

‘그런데 왜!’

쩌엉! 콰콰콰콰콰콰쾅!

“도대체 왜!”

투콱!

“크윽……!”

부서지는 몸은 순식간에 회복됐지만 회복되는 순간 부서지길 반복했다. 이러다 보니 그녀의 몸뚱이는 망가지지 않는 샌드백이나 다름없었다.

붉은 안개를 직접 조종해 윤수호의 몸속으로 침투시켜 봤지만 그마저도 소용없었다.

아니, 오히려 몸속으로 침투한 안개가 사라지자 깜짝 놀라서 더 이상 그의 몸속으로 안개를 침투시키는 짓도 그만뒀다.

그러자 이번에는 역으로 윤수호가 먼저 크게 숨을 들이켜 안개를 빨아들이는 것이 아니겠는가?

저런 미친 짓을 자신의 안개 속에서 할 수 있는 존재가 있다는 것도 놀라웠지만, 그게 통한다는 사실도 믿을 수 없었다.

아니, 바토리는 지금 이 상황이 현실이 아닌 것만 같았다.

엉망이 된 자신의 몸도, 손을 덜덜 떨게 만드는 두려움도, 그 두려움을 안겨 준…… 붉은 안개 속에서 유유히 걸어 나오는 윤수호의 모습도 모두 거짓이길 바랐다.

하지만…….

쩌엉!

피할 수 없는 그의 주먹도, 뼈가 부서지는 고통도, 몸의 고통보다 더 큰 마음의 공포도 모두 진짜였다.

“뭘 그렇게 쫄고 그래. 괜찮아. 맞다 보면 맞는 것도 익숙해지니까.”

“죽인다! 죽여 버릴 거야!”

바토리는 비명 같은 괴성을 내지르며 두 손을 번쩍 들어올렸다.

그러자 하늘로 승천한 붉은 안개가 하늘을 감싸며 크게 회전하기 시작했다. 그 주변으로 넘쳐나는 마력이 붉은 번개를 쉴 새 없이 뿜어냈다.

안개는 점점 하나의 형태를 이루며 압축되기 시작했다.

완성된 형태는 길이만 수백 미터가 넘는 하나의 거대한 창이었다.

“피할 수 있으면 피해 봐라. 대신 이 나라는 흔적도 없이 날아갈 테니까!”

협박이 아니었다. 윤수호는 창에서 발산되는 마력을 느끼면서 그녀의 말이 사실이란 것을 알 수 있었다.

“아무튼 더 기다려 줄 필요는 없다는 거로군.”

바토리는 비웃었다. 지금까지는 그의 뜻대로 됐을지 몰라도 이 흑마법만큼은 절대로 무시해선 안 됐다.

혈마왕 노 라이프 킹의 권능을 빌려서 완성시킨 이 흑마법이야말로 자신의 상당을 아득히 초월하는 국가 소멸급 마법이었으니까.

“네놈도 이걸로 끝이다!”

거대한 크기의 창은 바토리의 의지를 받들어 빛살처럼 윤수호의 머리 위로 떨어져 내렸다.

검신이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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