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4.
촤촤!
콰콰콰쾅!
여동진과 오마르는 다섯 마리의 레서 드래고니안 수호 기사들을 상대로 치열한 전투를 이어 나갔다.
그들의 전투에 채석장은 어느새 지옥도를 방불케 하는 전장의 한복판이 되었다.
수많은 도기들이 난무하고, 화염과 강철보다 단단한 비늘, 수많은 칼바람들이 채석장을 초토화시켰던 것이다.
“어서 이쪽으로!”
“우리를 따라 오세요!”
오마르의 동료들은 경천동지할 전투에 끼어 그를 도울 수 없었다. 대신 인질들을 구출하여 빠르게 그들을 대피시키는 것으로 역할을 충분히 완수했다.
하지만…….
“쥐새끼들이 노예들을 풀어 주잖아!”
“놈들을 잡아!”
래서 드래고니안들은 사람들을 해방시키는 대원들을 발견하곤 금세 그들을 추적하여 쫓기 시작했다.
결국 채석장 여기저기서 산발적인 전투가 일어나며 상황은 더욱 암울해질 뿐이었다.
그들 역시 이곳까지 오느라 체력과 오러를 많이 소비한 상태. 그에 반해서 신전 근처의 채석장을 지키는 래서 드래고니안은 정예 중에 정예들이었기 때문이다.
“크아악!”
“커억!”
곧 대원들의 비명이 줄줄이 터져 나오면서 이집트 특무대의 숫자가 빠르게 줄어들기 시작했지만 오마르가 그들을 도울 수 있는 방법은 전혀 없었다.
“움직임이 둔해졌군. 부하들의 죽음이 신경 쓰이나? 아니면 힘이 떨어지기라도 한 건가?”
“시끄럽다!”
정곡을 찌른 켈레푸스의 도발에 오마르가 눈살을 찌푸리며 쌍도를 휘둘렀다. 그러자 수십 개의 도기가 폭풍처럼 휘몰아치며 켈레푸스를 공격했지만…….
팅팅팅팅팅팅팅……!
“간지럽군. 이게 전력인가?”
“……!”
어느새 켈레푸스의 앞을 막아선 거체의 수호 기사가 자신의 도기를 모두 막아 버렸다.
“이 정도로는 암센의 비늘에 흠집조차 낼 수 없다. 인간.”
자신을 3인칭으로 칭하는 거체의 수호 기사 암센은 켈레푸스처럼 특별한 능력이 존재하는 것은 아니었다.
아니, 능력이 있다면 있었다. 그것은 바로 녀석의 방어력이었다.
켈레푸스의 비늘도 다른 래서 드래고니안들보다 단단했지만 암센의 그것은 그런 켈레푸스의 비늘조차 월등히 초월하는 방어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 순간, 방어를 푼 암센이 기습적으로 주먹을 날렸다. 키가 3m에 가까운 암센의 주먹은 주먹의 크기만도 오마르의 머리보다 족히 두 배는 더 거대했다.
후웅!
공기의 벽을 박살 낸 암센의 주먹이 이번에는 오마르의 머리를 박살 내려던 순간!
촤악! 휘릭! 쒜엑…… 쾅!
어느새 자신의 앞을 가로막은 여동진이 특유의 촉수 팔로 녀석의 팔을 휘감아 그대로 던져 버렸다.
게다가 암센의 펀치에 실린 힘을 그대로 더해서 날려 버렸기 때문에 포탄보다 빠르게 날아간 암센이 절벽에 처박혀 와르르 무너져 내렸다.
“여동진 님!”
“괜찮으십니까?”
“저는 아직 싸울 만합니다.”
여동진은 힐끔 시선을 돌려 오마르의 상태를 확인했다.
‘한계네.’
턱 끝까지 차오른 호흡은 이미 목구멍에서만 겉돌 뿐, 폐로 전해지지 못했다. 게다가 여기저기에 생긴 크고 작은 상처들은 치명상만 면했을 뿐, 이미 중상자나 다름없었다.
무엇보다 미스틱 오러는커녕 오러 시머도 생성하지 못하는 꼴을 보아 오러도 바닥난 지 오래겠지.
지금 오마르가 버티고 설 수 있는 이유를 냉정하게 따져보면…….
‘이 도마뱀 자식들이 일부러 죽이지 않기에 살아 있을 뿐.’
전투는 고사하고 당장 치료를 받아야만 했으나 여동진이 할 수 있는 말은 이것 하나뿐이었다.
“멀쩡해 보이네요. 우리 조금만 더 버텨 보죠.”
“…….”
오마르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설마 이런 상황에서도 우릴 무시하는 건가, 괴물?”
촤촤촤촤촤촤!
“괴물한테 괴물 소리를 듣는 것도 별로 달가운 일은 아닌데?”
콰콰콰콰콰콰쾅!
언제라도 오마르는 처리할 수 있다는 자신감일까?
어느새 다섯 마리의 수호 기사들은 일제히 여동진을 합공하고 있었다.
오마르는 주먹을 불끈 틀어쥐며 피가 나도록 입술을 깨물었다.
‘제발 다리야, 움직여라! 평생을 절름발이로 살아도 상관없으니까 여기서는 제발 내 말 좀 들어!’
그러나 간절한 의지와 상관없이 경련이 일어난 다리는 돌덩이로 변한 것처럼 꿈쩍도 하지 않았다.
아니, 쓰러지지 않고 서 있는 것만으로도 기적이라 할 수 있을 만큼 오마르의 상태는 최악이었다.
오마르의 참담한 시선이 여동진의 등에 꽂혔다.
촤악! 콰직! 퍼억! 으드득……!
찢겨지고, 으깨지고, 부서지고, 부러지는 모든 끔찍한 소음들은 전부 여동진의 몸에서 터져 나오는 것들이었다.
분명 여동진도 분전하고 있었다. 아니, 톱텐과 비교해도 떨어지지 않는…… 오히려 그 이상의 저력을 발휘하며 충분히 잘 싸워 주고 있었다.
신체를 다양하게 변화시키며 적재적소에 걸맞은 형태로 적들을 압박하면서 적들의 공격에 최선의 방법으로 대응하는 그의 전투는 경이로울 정도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비록 다섯 마리의 수호 기사들에게 엉망진창으로 변해 가는 여동진이었지만 바꿔 말하면 그였기 때문에 놈들을 상대로 여기까지 혼자서 버텼다고 말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것도 이제는 끝이었다.
처음에는 잘려 나가기 무섭게 재생했던 촉수와 신체 부위들도 이제는 재생이 더디거나 재생되지 않았다.
그뿐만이 아니라 움직임과 반사 속도가 느려지니 시간이 지날수록 피해가 더 커지는 악순환이 이어질 뿐이었다.
여동진 역시 한계였다.
‘태양신이시여……. 제발 당신의 종을 굽어 살피소서. 저의 목숨을 취하시고 대신 저 훌륭한 청년을 보살펴 주소서!’
결국 이렇게 죽음만을 기다려야 하는 것일까? 오마르가 눈물을 흘리며 속으로 애타게 기도하는 순간……!
휘웅!
한 줄기 바람과 함께 기적이 도착했다.
* * *
“허허허, 당연히 전멸할 줄 알았거늘 그래도 버티고 서 있는 인간들이 제법 되는구나. 아쉽구먼, 아쉬워. 마스터의 명령만 아니었다면 깡그리 전멸했을 때 예쁘게 수거할 수 있었을 것을…….”
오마르는 놀라서 눈을 부릅떴다.
언제부터 노인이 자신의 옆에 서 있었던 것일까? 오마르는 그가 말을 꺼내기 전까지 그의 존재감을 눈치채는 것도 불가능했다.
아니, 애초에 노인이 맞긴 한 것일까?
배꼽 어림까지 이르는 하얀 수염과 긴 백미, 주름진 얼굴은 분명 노인의 그것인데, 그 육신은 마치 갑옷을 차려입은 듯 단단하고 두꺼운 근육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게다가 군데군데 찢어진 힙한 청바지와 글귀가 새겨진 흰 티셔츠의 조합은 또 뭐란 말인가?
그 글귀는 바로…….
‘I ♡ master?’
눈을 의심케 하는 노인의 존재감에 당황한 건 오마르뿐만이 아니었다.
“뭐야, 동료가 아직 남아 있었나?”
“조심해라. 평범한 노인네가 아닌 것 같으니까.”
감이 좋은 켈레푸스가 하이데른을 보고 알 수 없는 위험을 감지했지만 이런 쪽에 둔감한 암센의 반응은 전혀 달랐다.
“뭐가 됐든 적이잖아? 처뭉개 버리면 그만이지! 크하하하!”
아무리 노인의 덩치가 크다 한들 2m가 조금 넘는 아담한(?) 키였다. 3m가 넘는 자신 앞에서는 어린아이나 다름없다는 뜻이었다.
그 증거로…… 보라, 암센의 주먹이 코앞까지 다가왔는데도 노인은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노인의 머리가 부서지며 피와 뇌수가 흩날릴 상상을 하니 암센의 입가에 만족스러운 미소가 피었다.
그러나 미소는 곧 순식간에 사라지며 대신 그 자리에 황당함이 자리 잡았다.
턱.
“응? 이게 왜…….”
노인이 코앞에서 자신의 주먹을 한 손으로 잡아챈 것도 놀라웠지만 더욱 경악스러운 건 자신의 주먹이 무슨 땅에 깊숙이 박힌 것처럼 꿈쩍도 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끄응……!”
암센이 기를 쓰며 최선을 다해 주먹을 빼내려 했지만 결과는 마찬가지.
아니, 이 정도로 기운을 끌어올렸으면 설령 땅속 깊숙이 박혔다고 해도 땅거죽을 벗겨 내며 주먹을 빼냈을 것이다.
그렇게 낑낑거리는 암센을 쳐다보며 하이데른이 히죽 입꼬리를 말아 올리더니 손가락을 튀겼다.
딱.
그러자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지면을 부수며 땅속에서 솟아오르는 망자들이 비명에 가까운 괴성을 질러 주변을 공포로 물들였다.
크아아아아!
크르르르르르……!
죽음을 허락받지 못한 불사의 군대, 언데드의 출현이었다.
“어, 언데드?”
“갑자기 언데드들이 왜……?”
너무 갑작스러운 상황 변화에 머리가 따라갈 수 없던 찰나, 더욱 충격적인 일이 벌어졌다.
데스 나이트들을 필두로 언데드 군단이 인간들을 지키며 래서 드래고니안들을 철저하게 도륙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런 미친……!”
“크아아악!”
사람들을 혹독하게 고문하다 장난스럽게 죽이며 낄낄거리던 래서 드래고니안들은 언데드에 의해 자신들도 똑같은 최후를 맞을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던 모양이었다.
물론 수호 기사들은 혼란스러웠다.
언데드 군단이라면 적아를 구분하지 않고 살아 있는 생자들을 증오하는 존재들. 그런데 그런 녀석들이 인간을 지키면서 자신들을 적대한다고?
“나의 위대하신 마스터께서 분부하셨느니라. 내가 이곳에 있는 이상, 네놈들 손에 인간이 단 한 명이라도 목숨을 잃는 상황은 없을 것이다.”
콰지직, 콰직! 으드득……!
“어, 어……? 끄아아아아아악!”
푸확!
“알겠느냐? 머저리 도마뱀 녀석들아. 끌끌끌~”
주먹을 잡고 있던 암센의 팔을 뽑아내고 머리통과 함께 척추를 뜯어낸 하이데른이 아무렇게나 암센의 시체를 던져 버렸다.
그러자 찢겨 나간 암센의 시체가 스멀스멀 움직여 퍼즐 조각마냥 끼워 맞춰 지더니 다시 자리에서 일어나는 게 아니겠는가?
크아아아아아아아!
“왜, 왜 이러는 거야?”
“암센! 정신 차려!”
눈에 생기를 완전히 잃어버린 암센은 다시 부활하자마자 맹목적으로 한때 동료였던 네 기사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부활한 암센은 이전과 완전히 다른 존재였다.
언데드로 부활한 암센은 육체의 한계가 생전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더욱 더 빠르고, 더욱 더 단단해지고, 더욱 더 강력해졌다. 심지어 어지간한 상처는 여동진 이상의 스피드로 재생해 버리는데다 고통도 느끼지 못한다.
팟! 쩌엉!
“크윽!”
방어를 도외시한 암센의 일격에 회피할 여유를 찾지 못한 켈레푸스가 오른팔로 녀석의 주먹을 가드했다.
물론 당하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그는 순간에 자신이 발휘할 수 있는 최대 화력으로 암센의 오른손을 살라 버렸으니까.
그러나 아무리 암센의 내구력이라도 검게 그을려야 마땅할 오른팔은 붉게 익은 정도였고 심지어 그마저도 빠르게 재생이 되었다.
하지만 켈레푸스는 그렇지 않았다.
“크으윽……! 암센의 주먹에 맞서지 마! 사독이 침투한다!”
그렇게 외친 켈레푸스는 날카로운 손톱으로 자신의 오른팔을 날려 버렸다. 사독이 침투한 오른팔이 빠르게 썩어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대로 둔다면 아마 심장이나 뇌, 골수까지 침투했겠지. 그렇게 된다면 자신은 죽은 목숨이었을 것이다.
켈레푸스의 시선이 그 와중에도 힐끔 하이데른을 향했다.
두꺼운 팔로 팔짱을 낀 채 여유롭게 이 상황을 관전하는 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그 이상의 공포가 마음을 지배했다.
이만한 공포를 느끼게 한 존재가 있다면 그건 단 한 명. 바로 자신들의 왕뿐이었다.
‘설마 저 노인이 우리의 왕과 동급의 존재라는 말인가?’
한편, 하이데른이 건네준 포션을 마시고는 그의 뒤에서 몸을 회복하고 있던 여동진과 오마르도 얼떨떨하기는 마찬가지였다.
“구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런데 어르신께서는 대체 누구신지……?”
“나는 마스터의 충실한 종복. 흑마법사 하이데른이라고 한단다.”
“마스터라고요?”
되묻는 여동진에게 하이데른이 답했다. 윤수호가 허락한 기억의 일부를 공유할 수 있는 권속들이었기에 그 역시 여동진을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던 것이다.
“네 녀석도 알고 있을 텐데. 이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남자의 이름을 말이다.”
“서, 설마……?”
씨익~!
하이데른은 말이 아니라 미소로 대답을 대신했고 여동진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때였다.
강대한 존재감이 먼 거리를 단숨에 뛰어넘어 이들 앞에 모습을 드러낸 것은…….
검신이 돌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