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8.
화아아악!
하이데른의 라이프 베슬이 반으로 쪼개지는 순간, 터져 나온 빛이 세상을 집어삼켰다.
본능적으로 눈을 가렸던 윤수호는 빛이 사그라들자 손을 치우고 정면을 확인하였다.
‘이건…….’
달랐다. 모든 게 달라져 있었다.
녹아내린 용암의 대지도, 천둥 벼락을 폭우처럼 쏟아붓던 먹구름 낀 하늘도 보이지 않았다.
중력도, 바닥도 존재하지 않는 공간에서 윤수호는 그렇게 둥둥 떠 있었다.
주변의 칠흑 같은 암흑을 밝히는 건 바닷가의 모래알보다 많은 별빛들이었다.
수를 세는 게 무의미 할 정도로 천문학적인 은하수를 바라보며 윤수호는 자신이 우주 공간 안에 떠 있는 것 같은 착각을 느꼈다.
‘다른 사람들은?’
그는 기감을 펼쳐 일행은 찾았지만 일행의 기척은 느껴지지 않았다. 아무래도 이 공간에 소환된 건 자신뿐이었던 모양이었다.
그렇게 윤수호는 차분히 눈을 감고 여유를 즐겼다.
그러던 한순간, 윤수호의 머릿속으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생각보다 여유로워 보이는군. 이곳이 어딘지도 모르면서 당황조차 하지 않는 건가?
들려온 목소리에 눈을 뜬 윤수호는 어느새 자신의 눈앞에 나타난 형체를 확인할 수 있었다.
전신이 하얀 빛으로 둘러싸여 그게 어떠한 형체인지, 정체가 무엇인지 정확하게 알 수는 없었다.
“적이었다면 이렇게 여유로울 수가 없고, 나한테 볼일이 있는 거라면 언젠가는 먼저 용건을 꺼낼 테니 굳이 안달을 낼 이유가 없지.”
-많은 사람들이 그런 사실을 알고 있지만 그걸 자연스럽게 실천하는 녀석은 보기 드물지. 역시 너는 재미있는 이레귤러다.
“이레귤러?”
윤수호의 표정이 미묘하게 바뀌었다. 상대가 자신을 잘 알고 있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물론 그것은 윤수호라는 이름, 나이, 거주지 따위를 알고 있다는 뜻이 아니었다.
그보다 훨씬 본질적인…….
자신이 어떻게 이런 존재가 된 것인지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보아하니 너는 네 존재에 대해 상당한 의문을 품고 있는 것 같구나. 그럴 만도 하지. 평범했던 인간이 어느 날 다른 세계에 떨어져 초인이 되어 돌아왔으니…….
“알면 길게 질문할 필요도 없겠군. 설마 날 그쪽 세계로 날려 보낸 존재가 당신인가?”
-반은 맞지만 반은 틀리다고 해 두지.
“그게 무슨…….”
-내가 유니버스 레코드에 입력한 건 이레귤러 프로토콜뿐이다. 분명 그건 내 의지로 입력한 게 맞지만 이레귤러의 가능성이 존재하는 인간들을 선별하여 프로토콜을 실행한 건 유니버스 레코드지. 물론 가능성이 존재할 뿐, 너처럼 완벽하게 각성한 경우는 네가 처음이자 마지막 존재지만 말이야.
“유니버스 레코드? 이레귤러 프로토콜?”
빛의 설명을 들을수록 윤수호의 머릿속은 오히려 더 뒤죽박죽으로 엉키는 것만 같았다. 하지만 빛은 모든 걸 설명해 줄 생각이 없는 듯싶었다.
-시간이 다 됐군. 짧은 만남이었지만 즐거웠다. 네가 궁금해하는 것들은 이대로 망가지지 않고 완벽한 각성을 이룬다면 싫어도 알게 될 사실들이다. 그날을 고대하고 있도록 하지.
“잠깐! 난 아직 아무것도…… 크윽!”
윤수호가 손을 뻗는 순간, 빛이 폭발하면서 다시금 우주 공간을 집어삼켰다.
그는 또다시 손으로 눈을 가려 빛을 막아 냈고, 빛이 사그라들자 익숙한 광경이 시야에 들어왔다.
“위원장님!”
“위원장님! 괜찮으십니까?”
“갑자기 멍하니 서 계셔서 얼마나 놀랐는지 아세요? 잘못되신 줄 알고 간 떨어질 뻔했다고요.”
오수영이 가슴을 쓸어내리며 건넨 말에 윤수호는 대충 자신의 정신만 그 공간에 다녀왔음을 눈치챌 수 있었다.
‘…….’
아마도…… 아니 어쩌면 높은 확률로 사람들이 ‘신’이라 부를 수 있는 존재와의 짧은 만남에서 윤수호는 한 가지 확실한 사실을 알게 되었다.
‘적어도 내가 이 힘을 가진 게 우연은 아니라는 거겠지.’
“미안하다. 너희는? 어디 다친 곳은 없고?”
“사망자 0명. 큰 부상자는 없고 포션으로 회복도 마쳤습니다. 아무 이상 없습니다. 위원장님께서는…….”
“나? 설마 지금 내 안위를 물어본 건가?”
피식…….
“쓸데없는 걱정이었군요.”
공승환은 자신의 실수를 인정하고는 그 결전에서도 상처 하나 입지 않은 윤수호의 모습에 다시 한 번 전율을 느꼈다.
아니, 공승환뿐이 아니었다.
‘윤수호…….’
텐겐은 방금 전의 싸움을 머릿속으로 떠올렸다. 그것만으로 말랐던 등허리가 식은땀으로 축축하게 젖었으며 손바닥도 땀으로 흥건했다.
경천동지?
그런 미지근한 사자성어는 윤수호와 하이데른의 전투를 수식하기에 한참 부족했다.
멸망…… 그래, 멸망이었다.
마치 세계의 멸망을 걸고 싸우는 것처럼 두 존재는 땅과 하늘이 좁다 하며 자웅을 겨루었다. 아니, 겨루었다는 것도 사실상 무례한 표현이었다.
한쪽에게 압도적으로 일방적인 싸움이었으니까.
자신은 감히 같은 전장에 서는 것조차 벅찬 괴물을 상대로…… 눈앞의 청년은 시종일관 그 괴물을 압도했다.
마지막에 하이데른이 필사적으로 완성한 마법, 아마게돈은 보는 것만으로도 죽음을 떠올리게 만들었다.
자신이 절대 방어의 성역에 보호받는다는 사실도 망각할 정도로…….
‘아마 조금만 더 실력이 뛰어났다면 죽었을지도 모르지. 내가 살아남은 건 오로지…….’
그저 다리가 풀려 도망칠 수 없었기 때문이었으니까.
그리고 윤수호의 칼끝이 빛으로 지평선을 그었다.
그것으로 끝이었다.
세상에 종말을 고할 것 같았던 검은 태양은 반으로 잘려 촛불처럼 사그라들고, 불타오르던 하이데른의 육신이 소멸함과 동시에 라이프 베슬이 반으로 쪼개졌다.
완벽…… 그리고 압도적인 승리.
그 어디에서도 윤수호의 고전을 찾아볼 수 없는 압도적인 승리에 희열보다 먼저 찾아온 감정은 끝없는 공포였다.
그래서였을까?
탑에서 내려와 멍하니 서 있는 윤수호를 보는 순간, 동료들의 부름에도 아무 대답 없이 그저 서 있는 윤수호를 본 텐겐의 본능이 소리쳤다.
지금뿐이라고…….
의식적으로 한 행동이 아니었다. 아니, 이성적으로는 그 순간까지도 윤수호가 은인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윤수호에 대한 끝 모를 두려움과 공포가 그의 손을 움직였다.
그 순간.
-검호가 다스려야 할 것은 검뿐만이 아니라네, 젊은 친구.
자신의 머릿속으로 흘러 들어온 텔레파시에 텐겐의 손가락 끝이 움찔했다. 그는 시선을 돌려 엘도라드를 바라보았다.
엘도라드는 자신을 슬쩍 지켜보다가 시선이 마주치자 입꼬리만 살짝 말아 올린 후에 다시 윤수호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하아…… 아직 갈 길이 멀구나.’
텐겐은 진심을 담아 엘도라드에게 고개를 숙였다.
자칫 잘못했으면 돌이킬 수 없는 실수를 저지를 뻔했다. 만약 자신의 계획이 성공했건 실패했건 상관없이…… 아마 자신은 검을 더 이상 쥐지 못했을 것이다.
두려움에 잡아먹힌 검호가 검을 제대로 쥘 수 있을 리 없을 테니까.
“감사드립니다, 수호 님. 덕분에 본국이 큰 국가적 재난에서 무사할 수 있었습니다. 수호 님과 한국 특무대 여러분, 그리고 다른 귀하신 분들의 도움이 아니었다면 지금쯤 본국이 어떻게 됐을지…… 상상만 해도 아찔하군요.”
분위기가 어느 정도 정리되자 생각을 마친 텐겐이 윤수호에게 다가가 직접 머리 숙여 고마움을 전했다.
그러자 윤수호는 고개를 저었다.
“대가를 받고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게다가 결과적으로는 우리나라를 위해서도 필요한 일이었으니까 저도 만족스럽습니다. 그리고 아사쿠라 씨 역시 목숨을 걸고 싸우지 않으셨습니까? 수고 많으셨습니다.”
작전이 끝나자 윤수호는 다시 텐겐에 대한 말투를 바꾸었다.
작전이 끝난 이상, 그는 더 이상 자신의 팀원이 아닌 일본의 톱텐이자 알터들의 정점, 검귀 아사쿠라 텐겐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오히려 윤수호의 존대에 텐겐은 손사래를 치며 그의 존대를 거부했다.
“말씀을 낮춰 주십시오. 몰랐다면 모를까, 수호 님에게만큼은 존대가 오히려 저를 더 부끄럽게 만듭니다. 제발 부탁드립니다.”
어찌 반딧불이 태양 앞에서 감히 빛을 자랑할까?
텐겐은 검귀라는 허명조차 윤수호의 앞에서는 그저 어린아이 재롱 같아 고개를 들 수 없을 지경이었다.
진심으로 부끄러워하는 텐겐의 모습에 윤수호는 뒷머리를 긁적이며 대답했다.
“그렇게까지 말한다면 뭐…… 어쩔 수 없지.”
윤수호는 손을 내밀었고 텐겐이 그의 손을 마주잡았다.
“고생했다, 아사쿠라 텐겐.”
“수고 많으셨습니다, 검신(劍神).”
‘검신이라…….’
윤수호는 자연스럽게 자신을 검신이라 칭하는 텐겐의 말에 피식 실소를 터트렸고 텐겐이 당황해 어쩔 줄 몰랐다.
“아, 죄송합니다! 마음속에 있는 말이 그만 불쑥 튀어나와서……. 수호 님이라면 응당 검신이라는 호칭에 부족함이 없다 생각했기에…… 언짢으셨다면 사과드리겠습니다!”
“아니. 그저 오랜만에 옛 생각이 났을 뿐이다.”
“옛 생각요?”
그때도 자신을 검신이라 부르던 자들이 있었다. 물론 그들이 말하는 검신은 세상에 모든 두려움이 집약된 단어였다.
하지만 텐겐이 말하는 검신은 어딘가 비슷하면서도 느낌이 달랐다.
‘썩 나쁘진 않군.’
“그럼 나가기 전에 마지막으로 아이템이나 수거해 볼까?”
* * *
탑 외부에 존재하던 언데드 몬스터들은 모두 전멸했다.
윤수호의 검격에도 끈질기게 부활하던 녀석들이 하이데른이 소멸하자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그대로 소멸한 것이다.
그런데…….
“서, 설마 이게 다 아이템이야?”
오수영은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언데드 몬스터들이 소멸하면서 남기고 간 아이템 탓에 한 발자국을 내딛기도 힘들었던 것이다.
“마법 등급 이하는 전부 버려. 포션도 최상급 포션만 골라서 챙겨라!”
공승환의 지시에 사람들이 빠르게 아이템을 수거하기 시작했다. 최상등급 품질의 아이템들만 골라서 담고 있음에도 인벤토리가 금방 포화 상태에 이르렀다.
“아오~ 이거 아까워서 어떡하지? 정말 이 많은 걸 전부 버리고 가라고?”
“그러게. 최상급만 골라서 모았는데도 티도 안 나네. 젠장…….”
“던전을 몇 번이라도 왕복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이 정도면 대충 1년은 왕복해야 겨우 다 수집할 것 같은데?”
사람들은 남아 있는 아이템들을 보고 아쉬움을 감추지 못했다.
최상급들만 골라서 수집했다고는 해도 눈만 돌리면 아직 쓸 만한…… 아니, 매우 좋은 아이템들이 천지에 깔려 있었기 때문이다.
한편, 윤수호도 하이데른이 소멸한 자리로 다가가 아이템을 수집했다. 2단계 던전의 보스 몬스터답게 녀석이 드롭한 아이템은 최소가 레어 등급부터였다.
그중에서도 윤수호의 이목을 잡아끈 것은 당연히…….
[하이데른의 소울 트럼프] (영웅)
-제약이 걸리지 않은 하이데른(100%)을 쓰러트린 용사가 획득할 수 있는 소울 트럼프. 이 트럼프 카드를 통해 카드 주인에게 충성하는 하이데른을 소환 혹은 역소환할 수 있다. 역소환되거나 소환된 하이데른이 소멸했을 경우, 24시간의 재사용 대기시간을 가진다.
역시나, 제약이 걸리지 않은 하이데른을 쓰러트린 만큼 녀석의 소울 트럼프가 드롭되었다.
윤수호는 소울 트럼프를 입수하고는 곧장…….
“소환, 하이데른.”
하이데른을 소환하였다.
검신이 돌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