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1.
지독하다.
이 한마디 외에 지금의 모든 감정과 상황, 전투를 표현할 수 있는 말은 없을 거라고 텐겐은 확신했다.
지면이 녹아 부글거릴 정도의 지독한 독의 대지 위로 독 연기가 끊임없이 피어오른다.
비단 독에 오염된 것은 땅뿐만이 아니었다.
으어어어어어…….
녹아내리는 살점과 근육, 뼈를 앞세우며 달려드는 포이즌 언데드들 역시 무시하지 못할 난적이었다.
일단 오러를 품은 검이라고 해도 마치 진흙을 베는 것처럼 녹아내리는 녀석들의 몸을 베기는 어려웠으며 접근하는 순간, 독기가 뿜어져 나와 몸속에 침투했다.
정신이 어지럽고 오러의 컨트롤도 점점 더 힘들어졌다. 침투해 들어오는 독기들을 제어하느라 체력과 오러의 소모도 장난이 아니었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윤수호가 자신에게 붙여 준 두 전력.
‘환수족이라고 했던가?’
콰앙!
돌을 휘감은 파르토의 주먹이 대지를 강타하자 지면이 뒤집히며 거대한 돌판들이 말 그대로 언데드들을 뭉개 버렸다.
다른 쪽에서는 풍태술이 부채를 휘둘러 몬스터들을 상대하고 있었다.
그가 부채를 휘두를 때마다 거센 돌풍과 회오리가 일어나 일대에 모여 있는 몬스터들을 남김없이 빨아들여 찢어 버렸다.
둘 모두 딱히 이곳의 독에 영향을 받는 것 같지는 않았다.
‘이제는 두려움을 넘어서 경외심마저 드는군.’
공승환은 앞으로가 기대되는 인재였다. 지금 같은 성장세라면 틀림없이 톱텐에 들 만한 실력자라고 확신했다.
그렇다면 파르토와 풍태술은?
자신이 전력으로 싸운다 하더라도 둘 중 한 명을 자신해서 이길 수 있다 장담하기 어려웠다.
즉, 둘 모두 톱텐과 비슷한 능력을 지닌 강자라는 뜻이었다.
이렇듯 파르토와 풍태술이 다른 언데드들을 맡아 준 덕분에 텐겐은 오롯이 단 한 명. 독의 데스 나이트, 하르마에게만 집중할 수 있었다.
꿀꺽꿀꺽…….
해독제를 단숨에 비운 텐겐이 빈 병을 아무렇게나 던져 버렸다.
그가 마신 최고급 해독제는 지금 당장 걸려 있는 모든 독을 해독할 뿐만 아니라, 5분 동안 독에 대한 면역까지 생기게 해 주는 놀라운 효과를 가지고 있었다.
‘숨 쉬기가 한결 편해졌다.’
독에 대한 부담감을 덜어내자 텐겐은 오러를 집중하여 신체 능력을 최대한으로 끌어 올렸다.
포션의 지속 시간은 5분. 예비 포션이 몇 개 더 있긴 했지만 자신의 체력과 남은 오러를 생각하면 5분 안쪽으로 전투를 끝내야만 승산이 있었다.
“후우…….”
팟.
깊게 숨을 내쉰 텐겐의 근육이 꿈틀거리는 순간, 그의 모습이 사라졌다.
그야말로 전광석화.
순식간에 하르마와 자신 사이의 거리를 지워 버린 텐겐의 검이 하르마의 목을 갈랐다.
깡!
그러나 불똥이 튀면서 텐겐의 검이 튕겨졌다. 보통 사람들에게는 한 줄기 섬광밖에 보지 못할 공격이었지만 하르마에게는 크게 어렵지 않았던 일격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텐겐의 눈동자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언데드라는 사실을 제외하고서라도 상대가 자신보다 약하다는 생각은 애초에 버렸기 때문이다.
그는 그저 자연스럽게 다음 공격을 연계할 뿐이었다.
그 순간, 그의 검이 수십 개로 나뉘며 수많은 검영을 만들어 냈다.
검영은 순식간에 증식하며 또 다시 수백의 검영을 만들었고 그렇게 만들어진 검영이 마치 꽃처럼 흐드러졌다.
아사쿠라식 환검류, 화영(花影).
본래라면 꽃잎처럼 피어나는 검영에 취해 상대는 죽는 줄도 모르고 목이 잘려 나가는 검술이었지만 아무래도 언데드에게는 환검의 효과가 부족했던 모양이다.
카카카카카카카카카카캉……!
하르마의 녹색 검이 빠르게 움직이고, 난잡한 굉음과 함께 수많은 불꽃이 튀기며 꽃잎이 저물었다.
그리고 꽃잎의 빈자리를 하르마의 검에서 뿜어져 나온 독기가 대신 가득 메웠다.
치이익……!
팟!
텐겐은 빠르게 뒤로 물러났다. 마시는 독에는 내성이 있었지만 녀석의 검에서 피어오르는 독은 텐겐의 옷과 몸도 녹이려고 했기 때문이다.
옷은 많이 녹아 볼품없어졌지만 다행히 몸은 오러로 보호한 덕분에 별문제는 없었다. 다만 놈의 독은 옷과 몸만 녹이는 것이 아니었다.
‘미스틱 오러가 조금이라도 약해지면 놈의 독이 곧바로 내 검을 녹이겠지.’
하르마의 검에서 뿜어져 나온 독은 마치 오러 블레이드처럼 검을 감싸 강화시켰다.
포이즌 오러라고 해야 할까? 단순히 파괴력뿐만 아니라 파괴력에 걸맞은 독을 품고 있는 무기였다.
콰아아아아아!
이번에 먼저 움직인 쪽은 하르마였다. 독기를 품은 운무와 함께 쇄도한 하르마의 검이 호선을 그리며 텐겐의 가슴을 갈랐다.
하지만 녀석이 가른 것은 텐겐의 허상이었다.
‘환검이 소용없다면……!’
그 순간, 텐겐의 움직임이 달라졌다.
환검을 주로 사용하는 그였지만 그건 자신에게 맞는 편한 검술이 환검이란 뜻이었지, 쾌검을 쓸 줄 모른다는 뜻이 아니었다.
그 증거로 그의 검이 휘둘릴 때마다 허공에 수많은 실선들이 복잡하게 그려졌다가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하르마 역시지지 않고 텐겐의 검에 응수했다. 언데드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의 녀석의 검 또한 신속하기 그지없었다.
곧 두 사람의 검이 한데 어우러지기 시작하면서 수많은 검영과 검풍이 어지럽게 난무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불리한 쪽은 단연 텐겐이었다.
텐겐이 체력과 오러에 한계가 존재하는 인간인 반면에 상대는 그런 한계가 존재하지 않는 언데드였기 때문이다.
‘어떻게 해서든 놈을 쓰러트릴 방법을 찾아야 한다!’
그러나 조급함은 하르마의 독보다 훨씬 위험한 맹독이다. 다급한 마음을 애써 진정시킨 그의 눈에 별안간 특이한 현상이 목격되었다.
‘이건……?’
하르마의 텅 빈 눈구멍에서 관찰되는 작은 불빛들. 왼쪽에서는 하얀 빛이, 오른쪽에서는 검은 빛이 점처럼 나타났다가 사라졌다.
나타나는 시간도 불규칙적이었고 사라지는 시간도 불규칙적이었다. 심지어 한쪽만 나타나는가 하면 양쪽 다 불이 들어왔다가 사라지는 경우도 있었다.
언뜻 보면 아무런 의미도 없는 것 같았지만 텐겐은 직감적으로 눈치챌 수 있었다.
저 불빛이야말로 이번 공략의 핵심이라고.
‘만약 다른 두 곳도 이곳과 같은 상황이라면……!’
두 그룹은 어떤 조건을 만족했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눈동자에 불빛이라는 변칙적인 현상이 벌어지는 것이겠지.
게다가 이 현상은 한 번에 그치지 않았다. 불규칙적이긴 해도 지금까지 반복되고 있었다.
즉, 조건이 한 번 만족하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닌, 조건을 여러 번 만족할 수 있다는 뜻이었다.
지금과 같은 상황에서 여러 번 만족할 수 있는 조건이라면…….
‘언데드 몬스터를 쓰러트리는 것!’
그러나 단순히 언데드 몬스터를 쓰러트리는 것만으로 빛이 점멸하는 것이라면 적어도 윤수호 쪽이 달성하는 빛은 꺼지지 않아야 정상이었다.
‘그렇다면 평범한 언데드 몬스터가 아니겠지. 쓰러트려야 할 적은…….’
데스 나이트를 노려보는 텐겐의 눈에 안광이 번뜩였다.
조건을 만족했음에도 목표를 달성하지 못한 이유는 간단했다. 아직 만족해야 할 조건이 남아 있다는 뜻.
‘즉, 두 사람이 각각의 데스 나이트를 쓰러트렸을 때, 나 역시 이 녀석을 쓰러트려야 한다!’
어디까지나 가정이었지만 충분히 도전해 볼 만한 가치가 있는 가정이었다.
텐겐의 눈이 슬쩍 주변을 훑었다.
파르토와 풍태술은 충분히 자기 자리에서 제 몫을 다해 주고 있었다. 비록 도움의 손길을 받을 순 없겠지만 그것만으로도 차고 넘치게 감사한 일이었다.
적어도 다른 녀석들에게 신경 쓸 필요는 없다는 뜻이었으니까.
“스읍…… 후우…….”
텐겐은 검격에 힘을 덜고 그만큼 기운을 축적하기 시작했다. 단 한 방울의 힘도 흘리지 않고 오롯이 그릇에 담아낸다.
그만큼 격전은 동수를 이루었다. 방금 전까지 텐겐이 조금이나마 우세를 보였다면 지금은 다소 약세처럼 보이기도 하였다.
치명적인 타격은 없었지만 하르마의 독검기가 스치면서 텐겐의 육체를 보호하는 오러를 찢었다.
얕은 검상이었지만 독기가 침투하면서 살이 썩어 들어갔다. 검게 죽은피가 썩은 살을 타고 흘러 옷을 적셨다.
만약 포션의 효과가 아니었다면 내부로 침투한 독기에 이미 검을 놓쳤을 가능성도 매우 높았다.
그런 식으로 얕은 부상이 쌓이고 쌓이자 무시할 수 없는 대미지가 되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텐겐은 조급해 하지 않았다. 근육의 긴장을 풀고, 오러를 축적하면서 한 방울의 힘까지 모으고 또 모았다.
그 순간에도 하르마의 눈구멍에선 빛이 명멸했다.
타이밍이 맞지 않아 서로 켜졌다 꺼지기를 반복했다. 그도 그럴수밖에, 여기서는 서로 연락할 수 있는 수단이 전무했으니까.
당연히 타이밍을 맞추는 것도 불가능에 가까웠다. 아니, 애초에 서로가 공략법을 눈치채고 실천한다는 것 자체가 기적에 가까운 일이었다.
그런데 그 기적의 씨앗이…….
‘지금!’
빠르게 발아하고 있었다.
번쩍!
하르마의 두 눈 구멍에 백색의 불빛과 보라색 불빛이 동시에 들어왔음을 확인했다.
그 순간, 텐겐의 검이 빛을 뿜었다. 그동안 모으고 모았던 힘을 단 한 방울도 남김없이 모조리 폭발시켰다.
“타압!”
목을 찢는 듯한 기합성과 함께 칼날은 빛이 되어 허공에 한 줄기 사선을 그었고…….
쩌걱.
그 사선에 하르마의 머리가 걸렸다.
콰작!
사라지는 빛의 실선과 함께 부서지는 하르마의 두개골. 녀석의 두 눈 구멍에 타오르던 불빛도 함께 사라졌다.
본래라면 부서진 두개골이 재생해야 하건만…….
와르르르르…….
마치 실 끊어진 인형처럼 부서진 두개골을 시작으로 하르마의 뼈만 남은 몸뚱이가 와르르 무너져 내렸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치이익…….
그동안 끈질기게 재생하던 포이즌 언데드들 또한 그대로 녹아내려 흔적도 없이 소멸하였다.
“후욱, 후욱……!”
“하아, 하아…….”
파르토와 풍태술은 거칠게 숨을 몰아쉬면서도 긴장을 늦추지 않았다. 언제, 어디서 다시 녀석들이 재생할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 그들이 긴장의 끈을 놓을 수 있었던 건 포털이 생기고 난 후였다.
“확실히 끝난 모양이군.”
“수고들 하셨습니다, 두 분 모두.”
텐겐이 다가와 두 사람에게 고개 숙여 감사를 표했다.
함께 등을 맡기고 사선을 넘은 세 사람이다. 비록 함께 한 시간은 짧았지만 어느새 세 사람 사이에는 끈끈한 동료애가 자리 잡고 있었다.
“가장 큰 성과는 검귀 공이 이루지 않았소. 정말로 고생했소. 역시 검귀 공을 믿길 잘했구려.”
환수족의 언어는 의념을 바탕으로 한다.
즉, 소리는 매개체일 뿐, 그 안에 담긴 감정과 뜻을 받아들여 해석하기에 말이 다른 건 대화에 아무런 장애도 되지 않았다.
“다른 이들도 무사하면 좋으련만…….”
“수호 공에 대한 걱정은 접어두더라도 엘도라드 공 일행은 조금 걱정이 되는군요. 엘도라드 공이야 원체 강한 검수이지만 치우팀 여러분은 조금 위험할 수도 있으니.”
풍태술의 걱정에 파르토가 고개를 끄덕이며 동감했다.
“우리도 챙길 것만 챙겨서 서둘러 이동하도록 하죠. 다른 분들이 걱정하실 겁니다.”
“그러지요.”
텐겐의 의견에 파르토와 풍태술이 쓰러진 언데드 몬스터들로부터 아이템들을 정리해 수집하는 사이, 텐겐도 자신이 쓰러트린 데스 나이트를 찾아가 녀석이 드롭한 아이템들을 챙겼다.
‘정말 어마어마하군…….’
이름을 부여받은 네임드 몬스터답게 아이템의 양도, 품질도 다른 일반 몬스터들과는 수준이 달랐다.
그중에서 텐겐의 눈을 사로잡은 건 하르마가 드롭한 그의 검이었다.
[하르마의 베놈 블레이드](전설)
-포이즌 데스 나이트 하르마의 애병. 생명체에 치명적인 독을 내포하고 있다.
검을 손에 쥐는 것만으로 치명적인 맹독이 몸속을 침범하는 게 느껴졌다.
텐겐은 깜짝 놀라 검을 곧바로 인벤토리에 수납한 뒤, 서둘러 해독 포션을 마셨다. 그러자 내장부터 골수까지 녹아내리는 것 같은 끔찍한 고통이 깔끔하게 사라졌다.
‘잠깐이나마 욕심을 부렸던 대가치고는 상당히 끔찍한 고통이군.’
애초에 자신이 욕심 부릴 기물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깔끔하게 인정한 텐겐은 말끔히 욕심을 씻어낼 수 있었다.
“다 됐으면 저희도 이동하죠.”
그렇게 알짜배기 아이템들을 모두 수거한 텐겐 일행도 포털을 이용해 다음 장소로 이동하였다.
검신이 돌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