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0.
포털을 타고 전혀 새로운 장소로 이동한 윤수호의 눈앞에 삭막한 보랏빛 대지가 펼쳐졌다.
그렇게 차가운 땅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땅에서 올라오는 한기는 피부를 뚫고 뼛속까지 침범하였다.
‘평범한 한기가 아니군. 이건 굳이 따지면 사기(死氣)에 더 가까운가.’
그 순간.
쿠쿠쿠쿠쿠……!
땅이 흔들리며 땅거죽이 부서지기 시작하더니 수많은 언데드 군단이 지면을 뚫고 모습을 드러내었다.
‘스켈레톤 솔저에 워리어…… 저건 슬래셔 나이트고 듀라한에 나이트메어 워커도 있잖아?’
“이건 뭐, 언데드 박물관이 따로 없군.”
하급 언데드 첨병들부터 시작하여 중상급으로 분류되는 강한 언데드 몬스터들까지 다수 포진되어 있었다.
그중에서도 가장 눈에 띄는 녀석을 꼽으라면 단연코 이 녀석이었다.
[데스 나이트, 샤르지아가 출현했습니다.]
‘데스 나이트…….’
자신을 향해서 온갖 증오와 분노를 쏟아 내며 금방이라도 뛰쳐나올 것 같은 언데드들의 머리 위로, 유령마를 타고 있는 데스 나이트가 돋보였다.
녀석은 텅 빈 동공으로 윤수호를 내려다보더니 허리춤에 차고 있던 검을 꺼내 들었다.
꺄아아아아아아아악!
그러자 벤시의 울부짖음과 동시에 검에서 여성이 산 채로 찢겨 죽어날 때나 들어 볼 법한 끔찍한 비명이 터져 나왔다.
그 순간, 윤수호가 눈살을 미묘하게 찌푸렸다.
벤시의 울음, 죽은 땅에서 올라오는 사기, 그리고 검의 비명이 한데 어우러지면서 수많은 부정적인 기운들이 몸속을 침범하기 시작한 것이다.
‘저주인가?’
언데드 몬스터들 중에서도 자아를 유지할 수 있는 상급 언데드들의 원념은 중급 이하 몬스터들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때때로 그들은 사기를 이용해 자신의 원념을 상대방에게 씌울 수 있었는데 그것이 바로 언데드의 저주와 빙의였다.
문제는 지금처럼 사기가 넘치는 땅에선 녀석들의 저주가 훨씬 더 큰 효력을 발휘한다는 것이었다.
그중에서도 샤르지아라는 이름의 데스 나이트…….
‘조용하지만 녀석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저주는 벤시 같은 것들과 수준이 다르다.’
특히 녀석의 검에서 느껴지는 강력한 저주의 기운은, 살아 있는 모든 생명체를 죽음으로 내몰면서 반대로 언데드 몬스터들을 강화시켰다.
‘운이 좋았다고 해야 할지, 나빴다고 해야 할지, 다른 쪽 상황을 모르겠으니…….’
만약 다른 포털을 탄 일행들이 이곳과 똑같은 환경이라면 그야말로 최악의 상황일 터였다. 강약에 상관없이 놈은 살아 있는 모든 것들의 상극이 될 테니까.
하지만 그렇지 않다고 한다면…….
화아악!
그 순간, 윤수호의 몸을 침범하던 저주가 비명을 지르듯 밖으로 빠져 나왔다. 윤수호의 몸을 수호하는 천부의 기운을 감히 저주 따위가 감당하지 못한 탓이다.
“그나마 내가 이곳의 적임자라고 할 수 있겠지. 안 그래?”
샤르지아에게 친근하게 말을 건네며 그가 미소를 그렸다.
그 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것일까? 아니면 감히 살아 있는 자가 자신의 앞에서 여유를 부리는 것이 탐탁지 않았던 것일까?
-가라.
샤르지아가 검을 들어 윤수호를 가리켰다.
크워어어어어!
캬아아아악!
그러자 다종다양한 언데드 몬스터들이 사납게 울부짖으며 거친 파도처럼 밀려들기 시작했다.
피식…….
그 모습에 윤수호는 입꼬리를 살짝 말아 올리더니 검을 뽑아 들었다.
순백의 검, 설은 이런 죽음의 땅에서도 스산한 백광을 뿌리며 위용을 과시했다.
번쩍!
윤수호가 검을 횡으로 그었다. 그러자 공간에 하얀 실선이 생기더니 그 실선을 따라 광풍이 휘몰아쳤다.
수백, 수천 개의 검기를 품은 광풍은 파도처럼 밀려드는 몬스터들에게 쇄도하여 그들을 순식간에 집어 삼켰다.
언데드에게 유리한 저주로 강화되고, 땅에서는 언데드에게 활기나 마찬가지인 사기가 흘러넘치다 못해 폭발할 지경이다.
여기서는 하급 언데드조차 바깥의 중급 언데드를 이길 수 있을 정도로 육신이 강화되었다.
하지만…….
콰콰콰콰콰콰콰콰콰콰콰콰콰!
그런 게 무슨 소용이 있을까?
아무리 강화된다 한들, 아무리 단단해진다 한들, 아무리 빨라진다 한들, 아무리 사나워진다 한들…….
수천 개에 달하는 검풍은 언데드들을 남김없이 찢어발겼다. 그나마 덩치가 큰 좀비 자이언트는 일격을 버텨 내긴 했다.
그런데 두 번째 검기는? 세 번째는? 네 번째는? 계속해서 이어질 수천 개의 검기를, 과연 모두 감당할 수 있을까?
그건 불가능했다.
쿠워어어어어어어!
상급 이하 가장 강한 내구력을 자랑하는 좀비 자이언트조차 괴성을 지르며 자신의 몸이 썰려 나가는 것을 무력하게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
콰콰콰콰콰콰콰콰콰콰콰!
그러나 샤르지아는 달랐다.
아무리 수백 마리의 언데드 몬스터들을 쓸어버리느라 검기가 많이 소비되었다고 해도 아직 수백 개의 검기가 남아 있었다.
녀석은 다른 상급부터 최상급 언데드들을 부려 길을 막더니 자신의 마검을 들어 올려 검막을 펼쳤다.
몸을 던져가며 또 다시 검기를 약화시킨 최상급 이하 언데드들이 갈려 나가고 남은 검기가 샤르지아의 검막을 덮쳤다.
검막은 금세 금이 가고 균열이 넓어지기 시작했다. 첫 번째 검막이 부서지기 전에 서둘러 두 번째 검막을 펼쳤지만 소용없었다.
촤촤촤촤!
이윽고 미완성된 두 번째 검막마저 부서지며 남은 검기가 샤르지아의 몸뚱이를 훑고 지나갔다.
샤르지아와 유령마의 몸뚱이가 조각조각 잘려 나가 바닥에 흩어졌다.
이것이 윤수호가 단 한 번 검을 휘둘러 만들어 낸 풍경이었다. 실제로 상대가 살아 있는 생명체들이었다면 더없이 끔찍한 광경이었을 테지.
하지만…….
놈들은 언데드(Undead). 죽음에게 버림받은 망자들이었다.
덜거덕, 덜거덕…….
처음 광풍에 휩쓸려 먼지 수준으로 갈려나갔던 언데드부터 몸이 조각난 샤르지아까지 구분 없이 빠르게 육체가 회복되기 시작했다.
첫 번째 스테이지에서 보았던 언데드를 부활시키는 뱀장어…… 영령어의 도움 없이 부활하기 시작한 것이다.
언데드라고 해도 무적은 아니다.
윤수호가 알고 있기로 영령어를 쓰거나 술자가 직접 언데드를 부활시키지 않는다면 작동이 중지한 언데드는 그대로 소멸한다.
그런데 이곳에서는 눈을 씻고 찾아봐도 영령어나 술자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술자나 영령어의 도움 없이 부활할 수 있는 언데드가 있다?
그건…….
‘무적이지.’
윤수호라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 건 쓰러트릴 방법이 없다고.
이대로 공략 방법을 찾지 못하고 수백, 수천 년이 흐른다면 아무리 자신이라도 당할 수밖에 없었다.
‘설령 공략법을 알아낸다고 해도 그걸 저쪽에 알려줄 방법이 없으니……. 아니, 애초에 같은 공략법이 맞는지도 모르겠고.’
스핏.
윤수호의 검이 다시 한 번 실선을 그리며 광풍을 일으켰다.
아주 미약하게 내공을 담았다고는 하지만 그 미약한 내공조차 이곳에서는 절대 스스로 회복되지 않는다.
‘어쩔 수 없지. 동료들을 믿는 수밖에.’
그렇게 윤수호는 최선을 다해서 공략법을 찾기 시작했다.
* * *
“젠장!”
“오수영! 괜찮냐?”
“안 괜찮으면? 도와줄 거야?”
“그건 좀…… 헉!”
콰앙!
김세민은 달려드는 언데드의 공격을 다급하게 피하며 안도의 한숨을 쉬었고, 오수영은 그런 동료를 조금도 신경 써줄 수 없었다.
까강!
“크윽……!”
특기인 쌍검을 교차하여 달려드는 좀비 버서커의 공격을 간신히 막아 낸 오수영의 표정이 잔뜩 일그러졌다.
‘강해, 그리고 빨라!’
완력은 1단계 스테이지에서 만났던 스켈레톤의 몇 배. 그리고 스피드는 비교하는 게 민망할 정도로 차원이 달랐다.
하나 무엇보다 성가신 건…….
까드득!
“치잇!”
이 빌어먹을 방어력이었다.
파앗!
빈틈을 노려 공격한 오수영이 혀를 차며 뒤로 빠르게 물러섰다. 그러지 않았다면 좀비 버서커의 뼈도끼에 그녀의 머리통이 쪼개졌을 터였다.
뼈도끼뿐만이 아니었다. 뼈갑옷에 뼈투구, 뼈방패, 뼈각반, 뼈장화, 뼈장갑까지…….
전신을 뼈 방어구로 도배한 녀석들의 방어력은 상상을 초월했다.
“언데드가 방어구라니…… 이건 반칙이잖아!”
“불평할 시간 있으면 칼이라도 한 번 더 휘둘러, 이 자식아!”
평범한 오러로는 흠집 조금 내는 게 전부, 오러 시머 정도는 돼야 뼈 방어구를 손상시킬 수 있었으며 퍼펙트 오러를 써야만 놈들에게 확실한 타격을 줄 수 있었다.
하지만 타격을 주면 뭘 하겠는가?
콰아앙!
“젠장…….”
공승환의 폭검을 맞고 부서진 언데드처럼 시간이 지나면 다시 부활할 뿐이었다.
게다가 문제는 언데드 몬스터만이 아니었다.
촤악!
“큭……!”
김세민이 몬스터들의 합공을 피하며 발을 내딛다 날카로운 뼛조각에 종아리를 베였다. 집중력이 흐트러져 종아리 쪽을 보호하던 오러가 잠시 사라졌기 때문이다.
지금 그들이 서 있는 곳은 백골의 대지 위였다. 밟는 것도, 보이는 것도 오로지 뼈뿐인 곳이었다.
그 탓에 날카롭게 부러진 뼈나 얼기설기 얽힌 뼈투성이라 잘못하면 뼛조각에 베이거나 얽힌 뼈 구덩이에 빠져 발을 묶이는 경우도 허다했다.
‘무슨 이런 미친 곳이 다 있어?’
‘새삼 위원장님이 존경스러워지네. 어떻게 이런 곳을 혼자 공략하신 거지?’
쾅쾅쾅쾅쾅쾅!
공승환의 검이 바쁘게 움직일 때마다 그의 주변으로 수많은 폭발이 일어났다.
최대한 오러를 아끼면서 싸우고 있음에도 거의 마나 포션을 달고 싸우지 않으면 전투가 진행되지 않을 정도였다.
그는 고전하는 동료들을 향해서 크게 외쳤다.
“포기하지 말고 끝까지 버텨! 스승님께서 반드시 공략법을 찾아내실 거다!”
“예!”
두 사람은 굳은 각오로 소리쳐 대답했다. 굳이 공승환의 말이 아니더라도 이 자리에서 가장 큰 짐을 지고 있는 사람이 누군지는 잘 알고 있었다.
“골치 아픈 놈이로고…….”
콰곽!
엘도라드의 황금빛 검이 풀 드레이크 본 아머를 갖춰 입은 데스 나이트의 머리통을 완전히 깨부쉈다.
드레이크의 본 아머는 다른 본 아머와 차원이 다른 방어력을 자랑했음에도 엘도라드의 검을 버티지 못한 것이다.
그러나 소용없었다.
까드득, 까득……!
요상한 소리와 함께 부서진 두개골과 투구가 재생되면서 언제 당했냐는 듯이 녀석이 본 테일 소드를 휘둘러 엘도라드를 공격했다.
마치 꼬리뼈처럼 채찍처럼 변칙적인 투로를 비집고 들어오는 녀석의 검술은, 일견 보기에도 대단히 위협적이고 위력적이었다.
하지만 상대는 황금의 고블린 왕. 엘도라드였다.
까앙!
그는 가볍게 테일 소드를 튕겨 내며 데스 나이트를 압박하였다.
그 와중에도 데스 나이트가 흑마법을 부려 뼈의 대지에서 뼈 창이나, 뼈 쐐기, 뼈 장벽 등을 이용해 엘도라드를 공격했지만 소용없었다.
콰콰콰쾅!
엘도라드가 휘두르는 황금의 검은 그 모든 것들을 부숴 버리며 데스 나이트를 몰아붙였다.
하지만 그의 표정은 좋지 못했다.
‘아무래도 안 되겠구나.’
“나의 기사들이여!”
엘도라드의 부름에 응답한 네 명의 고블린 마스터. 듀얼, 가가널, 하펜, 누이자르가 모습을 드러냈다.
본래라면 지금 희망동의 경비를 책임지고 있을 그들이었지만 엘도라드는 과감하게 소환을 선택했다.
이대로는 2스테이지를 공략하기 전에 치우팀이 전멸당할 거라 판단한 것이다.
“저 친구들을 도와라. 절대 한 명도 죽어서는 아니 될 것이야.”
“분부 받들겠습니다.”
그렇게 네 명의 고블린 마스터가 자연의 네 가지 원소를 발현하며 전장에 합류하자 그나마 치우팀에게 여유가 생기는 듯했다.
하지만 여전히 가장 큰 문제점은 남아 있었다. 그것은 아직까지도 공략의 실마리를 찾지 못했다는 것.
그 순간!
‘응?’
텅 비어 있던 데스 나이트의 오른쪽 눈구멍에 점 같은 보랏빛 불이 들어왔다.
불은 1분 뒤에 사라지기도 하였고, 10초 뒤에 사라지기도 하였으며 빠를 땐 5초가 채 걸리지 않기도 하였다.
“옳거니, 대충 알겠구나. 네놈들을 쓰러트릴 방법을!”
콰작!
엘도라드의 검이 다시 한 번 데스 나이트의 머리통을 부쉈다.
같은 시각, 윤수호 역시 미소를 그렸다.
검신이 돌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