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8.
“보아하니 내 정체를 알고 찾아온 것 같은데, 지금 이 상황에서 우리가 마주 볼 일이 있던가요?”
스핏.
촤아아악!
윤수호가 검결지를 휘둘렀다. 그러자 그에게 달려들던 수백의 몬스터들이 반으로 갈려 피와 내장을 흩뿌렸다.
주변이 금세 피 냄새로 가득 찼다.
아사쿠라 텐겐은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방금 윤수호가 아무렇지도 않게 펼친 검술에 얼마나 많은 무리가 담겨 있는지 똑똑히 보았기 때문이다.
땅을 기는 벌레는 하늘이 가장 높다 말하지만, 정작 그 하늘을 날아다니는 새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하늘 위에 하늘과 비교조차 할 수 없는 거대한 우주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지금 텐겐이 윤수호의 검결지에서 본 것은 바로 그 우주의 편린이었다. 자신은 아무리 노력해도 닿을 수 없었던…….
아니, 상상 그 너머에 존재하던 검술이 바로 그의 손끝에서 재현된 것이다.
“솔직히 오면서 수많은 고민을 했습니다. 그대들을 막아야 할지, 아니면 한국 정부의 무리한 조건을 수용하더라도 그대들의 힘을 빌려야 할지. 하지만 아무리 고민해도 답은 한 가지더군요.”
텐겐이 검을 휘두르자 부드러운 곡선이 허공을 그리며 몰려들던 몬스터들을 일거에 양단했다.
그의 검에 걸리는 것은 그것이 무엇이든 두부처럼 갈라버렸다.
“우리 국민의 재산과 목숨보다 소중한 것은 없다. 그렇다면 제가 할 일은 하나뿐이었습니다. 바로 당신들을 도와 우리나라를 지키는 것.”
텐겐은 고개 숙여 윤수호에게 부탁했다.
“발목을 잡지는 않을 것입니다. 저도 함께하게 해 주십시오.”
“…….”
솔직히 윤수호는 조금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한 나라의 최강자, 톱텐이라는 자부심, 검성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검호들의 우상 등등…….
그를 수식할 수 있는 단어들은 수 없이 많았다.
‘그런 사람이 자존심을 내려놓고 누군가에게 고개 숙여 부탁한다는 건 좀처럼 하기 힘든 일이지.’
거목은 부러질지언정 굽히지 않는다. 무인의 자존심은…… 그것도 최강을 논하는 강자의 자존심은 한낱 거목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그것은 누구보다 윤수호 자신이 가장 잘 알고 있었다.
만약 그게 가능한 일이 있다면 그것은 자신의 목숨보다, 자존심보다 중요한 게 걸려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이자도 나나 알렉산드로와 비슷한 부류의 사람이로군.’
“상관없습니다. 다만 제 지시에는 반드시 복종해 주셔야 합니다. 불응할 시에는 적으로 간주할 텐데 그래도 괜찮으신가요?”
“바라던 바입니다.”
“좋습니다.”
그 순간, 윤수호가 인벤토리에서 꺼내 든 건 열두 자루의 설이었다.
‘오오……!’
순백의 검, 설이 모습을 드러내자 텐겐의 눈이 이채로 물들었다. 검호들의 정점이라고 불리는 그였기에 설의 대단함을 알아보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었다.
아니, 검의 극의에 이르렀기에 검의 성능을 누구보다 중요시하는 텐겐이었다. 검성에게 패배한 이유도 결국 막판에 이르러 자신의 검이 부러졌기 때문이 아니던가?
그래서 천문학적인 금액을 들여 자신의 애병, 카미키리마루를 만들었고 지금에 와서는 검성의 애병, 성검에도 결코 꿇리지 않는다고 자부했다.
하지만 눈앞의 설을 본 순간, 그는 순간적으로 마음을 빼앗겨 버렸다.
열두 자루의 설은 하나같이 모두가 카미키리마루에 버금가거나 그 이상의 위용을 드러내고 있었기 때문이다.
팟.
하늘에 둥둥 떠 있던 열두 자루의 설은 윤수호가 검결지를 휘두름과 동시에 명령을 받은 사냥개처럼 주변으로 빠르게 흩어졌다.
그리고 사냥을 시작했다.
촤촤촤촤촤촤촤촤촤촤촤촤촤……!
그 광경을 지켜보던 텐겐은 할 말을 잃어버렸다.
자신 역시 집중하면 오러로 검을 띄워 조종하는 것 정도는 충분히 가능했다.
하나 그 위력은 직접 손으로 들고 싸우는 것보다 현저히 약했고, 사거리도 짧았으며, 속도도 그렇게 빠르지 않았다.
무엇보다 그가 집중해서 조종할 수 있는 검은 단 한 자루에 불과했다.
물론 그것도 일반적인 검호가 흉내 낼 수 있는 일은 아니었다. 만약 알터 검호가 그 얘기를 들었다면 사기 치지 말라며 그 자리를 박차고 일어날 수도 있겠지.
지금 텐겐이 딱 그런 심정이었다.
‘지금 이게 무슨…….’
열두 자루의 검이 1만 평 부지의 공장은 좁다는 듯 누비고 있었다.
소총의 평균적인 격발 시 총알 속도는 약 초속 600m/s. 텐겐도 전력으로 임하면 700m/s의 속도로 검을 조종할 수 있었다.
그러나 지금 열두 자루의 검이 날아다니는 속도는 어림잡아도 초속 9km/s. 즉, 1초에 9km를 이동할 정도의 말도 안 되는 속도라는 뜻이었다.
오러를 이용하여 전력으로 안력을 강화하면 날아다니는 총알도 달팽이처럼 보이는 텐겐조차 날아다니는 설의 움직임을 전혀 보지 못했다.
그가 설의 움직임을 확인할 수 있는 건, 설이 지나간 후에 남은 불꽃과 유성의 꼬리같은 흔적들뿐이었다.
그만한 스피드와 에너지를 감당할 수 있는 설이었기에 고작 스쳐 지나가는 것만으로도 공단이 깨끗하게 청소가 되었다.
관통당한 몬스터는 물론이고 그 주변에 몰려 있던 몬스터들까지 순식간에 사라져 버렸기 때문이다.
텐겐이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설의 움직임에 방해가 되지 않도록 그저 그 자리를 지키고 서 있는 것만이 그가 할 수 있는 전부였던 것이다.
그 사실이 수치스럽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경외심마저 들었다.
지금 자신이 저 검들 중에 단 한 자루라도 상대할 수 있을까? 그는 내심 고개를 저었다. 자신이 없었다.
100% 몸을 회복한 후, 전력을 다한다면 쉽게 지지 않을 자신은 있었지만 이긴다는 생각은 전혀 들지 않았다.
하물며 열두 자루? 꿈도 꿀 수 없었다. 그런데 더욱 경악스러운 건 열두 자루의 검은 다루는 윤수호의 모습이었다.
하아~.
마치 지루한 숙제를 끝내는 것처럼 한쪽 주머니에 손을 찔러 놓고 다른 손으로는 입을 가린 채 여유롭게 하품하는 상대의 모습은 이 상황과 너무나도 이질적이었다.
‘저런 괴물을 이대로 둬도 되는 것일까? 만약 저자가 다른 마음을 품는다면 일본은…… 이 나라는 무사할 수 있을까?’
텐겐의 마음 속에서 쓸데없는 불안과 공포가 피어올랐다.
그가 그 감정을 최대한 이성적으로 억누르는 사이, 어느새 공단 청소가 완료되고 얼마 안 있어 일행이 집결했다.
“임무 완료했습니다.”
“그런데…… 헉! 혹시 아사쿠라 텐겐 씨?”
“아사쿠라 텐겐이면 일본의 톱텐 검귀 아사쿠라? 어, 맞네! 진짜 아사쿠라 텐겐이다!”
치우팀이 아사쿠라 텐겐을 알아보고 놀란 것과 다르게 환수족은 무덤덤하게 다음 지시를 기다렸다.
그들은 텐겐이 누군지, 얼마나 대단한 인간인지 크게 관심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치우팀은 마치 아이돌을 만난 팬처럼 잔뜩 상기된 얼굴이었다.
국적을 떠나 톱텐에 이를 만큼 대단한 강자를 만난다는 건 알터들에게 있어 대단한 영광이자 명예였기 때문이다.
“치우팀의 팀장, 공승환입니다. 3년 전, 친선 교류 차 만나 뵙긴 했지만 기억하실지는 자신 없군요. 검귀를 다시 만나 뵙게 되어 진심으로 영광입니다.”
“예전이라면 뿌듯했겠지만 지금은 조금 부끄럽군요. 진짜 강자 앞에서 허명으로 불리는 것이 이렇게도 창피한 일인 줄 몰랐습니다.”
치우팀을 대표해서 공승환이 영어로 악수를 건네자 텐겐도 영어로 답했다. 그러면서 텐겐은 손을 마주잡은 공승환을 깊은 눈빛으로 살펴보았다.
‘중국, 러시아와는 다르게 한국의 최강자라고 하기에는 다소 수준이 낮은 것도 사실이었다. 그래서 신경조차 쓰지 않았는데 어떻게 고작 3년 만에 이런……!’
물론 그렇다고 공승환이 톱텐의 실력을 가졌다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텐겐이 보기에 이 정도 성장 속도라면 공승환이 그 자리에 오르는 것도 시간문제처럼 보였다.
하지만 진짜 문제는 따로 있었다.
텐겐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윤수호에게 향했다.
‘이제까지 신경조차 쓰지 않았건만…… 한국의 저력이 이렇게까지 커져 있었던가?’
그러나 텐겐의 놀람은 이제 시작에 불과했다.
“소환, 엘도라드.”
번쩍!
윤수호가 꺼내 든 트럼프에서 밝은 빛무리가 번쩍이더니 금빛 찬란한 갑옷을 갖춰 입은 고블린이 대소를 터트렸다.
“크하하하! 드디어 과인이 나설 차례인가? 기다리다 목이 빠지는 줄 알았다네, 마스터.”
“그만큼 날뛰게 해 줄 테니까 투덜거리지 마.”
“그 약속, 기대하고 있지. 크크큭!”
텐겐은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정면으로 보나 모로 보나 몬스터가 확실한 존재.
그 존재가 윤수호와 정답게 대화를 주고받고 있었다.
더욱 황당한 사실은 몬스터에게서 느껴지는 기운이었다.
고작 1급 재앙종이나 될까? 아무리 좋게 봐줘도 10살 소년의 체구를 크게 벗어나지 않는 몬스터에게서 믿기 힘든 기세가 자연스럽게 흘러나왔다.
‘웨일로스라는 이름을 가진 그때의 리저드맨과 호각…… 아니, 어쩌면 그 이상일지도…….’
혼자서 자신과 제자들을 상대했던 괴물. 운이 없었다면 자신은 이 자리에 있을 수도 없었던 그 끔찍한 괴물과 맞먹는 괴물이라니…….
텐겐은 자연스럽게 경각심을 끌어 올리며 언제든지 출수할 준비를 마친 뒤 물었다.
“윤수호 씨, 이자는 누굽니까?”
“아,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이 친구는 제 동료입니다. 지금 당장은 믿기 힘드시겠지만요.”
“이, 이자가 동료라고요?”
하마터면 괴물이라는 말이 자연스럽게 나올 뻔했던 텐겐의 모습에 엘도라드가 혀를 차며 고개를 저었다.
“쯧쯧쯧, 그렇게 겁이 많아서야. 검호여, 두려워하지 마라. 과인에게 약자를 괴롭히는 취미는 없으니. 뭐, 그대가 부지런히 노력하여 지금보다 훨씬 강해진다면 관심이 좀 생기겠다만.”
‘야, 약자?’
“너무 신경 쓰지 마세요. 스승님의 눈에는 위원장님 빼곤 전부 그저 그런 약자들이니까요.”
“스, 스승님요?”
황당해 하는 텐겐에게 공승환이 다가와 씁쓸하게 웃으며 심심한 위로를 건넸다. 그러나 공승환의 위로보다는 그가 엘도라드를 칭하는 호칭이 더 경악스러웠던 텐겐이었다.
“서로 인사는 이쯤하고 슬슬 들어가 볼까. 준비는? 혹시라도 다친 곳은 없고?”
“죄송합니다, 위원장님. 물론 만전입니다.”
“가자.”
윤수호가 앞장서서 가자 텐겐을 비롯한 일행이 그의 뒤를 따랐다.
* * *
포털을 찾아 던전으로 입장하는데 성공한 일행이 시야를 되찾자마자 주변을 둘러보았다.
“여긴…….”
“풍경 한번 살벌하네. 냄새도 고약하고…….”
오수영은 눈살은 찌푸렸다.
정면에는 죽은 나무 군락지가 삐쩍 말라붙어 있었고, 갈대밭 아래에는 발목까지 잠기는 검은 늪지대가 혼탁했다.
[던전, ‘더럽혀진 망자들의 안식처’에 입장하셨습니다.]
“정말로 안내 창이 뜨잖아?”
윤수호에게 사전에 설명을 듣긴 했지만 처음 보는 안내 창에 사람들은 신기한 느낌을 감출 수 없었다.
“더럽혀진 망자들의 안식처라…… 이거 어쩐지 예감이 불길한데…….”
“모두 발밑을 조심해라.”
윤수호는 검은 수면 위를 마치 지면처럼 밟아 걸으며 앞장섰다.
수면을 밟고 걷는 윤수호의 모습에 다들 경악을 금치 못했으나 상대가 윤수호였기에 다들 그러려니 이해하는 모습이었다.
그러나 수면 아래의 환경은 정말로 최악이었다.
“늪지대라 그런가…… 발이 푹푹 빠져서 걷는 것도 힘들어.”
“젠장, 더럽혀진 망자들의 안식처라고 한 건가?”
가뜩이나 걷는 것도 힘든데 한 걸음 걸을 때마다 발에 차일 정도로 물속에 가라앉은 사체들의 숫자가 장난이 아니었다.
반쯤 썩어가는 사체들의 흉물스러운 모습은 둘째치고 사체에서 올라오는 독한 가스와 냄새 때문에 숨을 쉬는 것만으로도 머리가 어지럽고 속이 메스꺼웠다.
그런데…….
-안식의 훼방꾼들이여, 망자들의 분노를 감당할지어다!
검신이 돌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