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5.
다음 날 아침.
“이 길은…….”
“테마 파크로 가는 길 아니야, 삼촌?”
“정식 오픈 전에 마지막 점검이라 오늘은 휴일이라고 하지 않았나?”
아침을 가볍게 먹고 약속한 장소에서 모인 오가네 주막 멤버들이 승합차를 타고 도로를 달렸다.
자주 가는 길을 알아본 은지연이 먼저 윤수호에게 묻자 운전대를 잡은 윤수호가 입꼬리를 말아 올리며 대답했다.
“보면 알아.”
“……?”
“엄마랑 탁준 아저씨는 뭔가 아는 것 같은데?”
“삼촌이 얘기했잖아. 보면 안다고.”
윤수아와 강탁준은 윤수호가 준비한 것이 뭔지 알고 있는 듯 보이자 일행들의 의문은 더욱 깊어질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차는 테마 파크 정문에 도착했다.
예상했던 대로 입구에는 휴일 팻말이 걸려 있었고 입장 시간이 다 되어 가는 와중에도 손님은 단 한 명도 찾아볼 수 없었다.
그런데…….
“들어가자.”
말을 남기고 앞장서는 윤수호의 모습에 사람들은 서로를 쳐다보며 고개를 갸웃하거나 어깨를 으쓱였지만 일단 속는 셈치고 윤수호의 뒤를 따라갔다.
그렇게 테마 파크에 입장한 사람들은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이, 이게……!”
“헐…….”
“삼촌!”
분명 휴일이라 텅텅 비어 있어야 할 테마 파크에는 한복을 차려입은 사람들로 가득했다.
“자~ 철그릇이 다섯 개에 열 냥! 쌉니다, 싸요!”
“다른 곳에서는 돈 주고도 못 구하는 한정판 저고리 팝니다! 거기 언니, 구경이나 하고 가~!”
“시원한 식혜 팔아요! 맛있는 떡도 있어요~!”
모습이나 하는 모양새들이 전부 직원들이었다. 심지어 거리를 돌아다니는 사람들조차 관광이 아닌, 주어진 역할을 충실하게 수행하는 모습이 역력했다.
즉, 이곳에 손님은 윤수호 일행뿐이라는 뜻이었다.
“설마 이거 정상 영업은 아닌 거지?”
“그런 거 물어볼 시간에 나 같으면 옷부터 갈아입을 것 같은데.”
“고마워, 삼촌!”
“고맙습니다!”
“그럼 저희도 가 보겠습니다!”
“아침 막걸리가 또 그렇게 죽여준다고…….”
아이들이 환복을 위해 빠르게 포목점으로 뛰어가자 조춘영과 이선호도 짠 듯이 주막으로 달려갔다.
그 모습에 오혜연이 짐짓 미안한 얼굴을 하며 말했다.
“뭐 하러 이런 걸 준비했어. 딱 보니 돈도 엄청 썼겠구만.”
여기서 일하는 사람들은 모두 연기자 지망생이나 단역 배우들이었다. 덕분에 그들의 섭외 비용으로 꽤나 돈을 쓰긴 했지만 그만큼 퀄리티가 올라간 것도 사실이었다.
“괜찮아요. 이 정도는 별로 돈 쓴 티도 안 나니까. 그리고 제가 언제 가족들한테 돈 아낀 적이 있던가요.”
“그래도…….”
“그동안 장사만 하시느라 제대로 놀지도 못하셨잖아요. 이번 기회에 우리도 마음껏 즐겨 보죠.”
윤수호는 어머니의 손을 잡고 포목점으로 향했다. 마찬가지로 윤수아도 아버지 윤지석의 손을 잡고 함께 포목점으로 이동했다.
“오~ 완전…….”
“어때? 나도 차려입으니까 양반집 규수같지?”
“완전 양반집에서 옷 훔쳐서 입고 신난 산적 딸내미…….”
퍽!
“뒈질래?”
“그럴 거면 때리기 전에 말을 하든가.”
“이번에는 네가 심했다, 지한아.”
딱히 예쁜 옷에 관심 없는 은지한이나 권성하와 달리, 여성진은 예쁜 한복에 눈을 반짝이며 시착을 쉬지 않았다.
“이건 색이 너무 예쁘잖아.”
“와~ 되게 부드럽다! 주막에서 일 할 때 입었던 모시 한복이랑은 완전 다른데?”
“이것 좀 봐봐. 이 치마, 선화 언니한테 딱 어울릴 것 같지 않아?”
특히 평소에는 입기 어려운 옷이 한복이었기 때문에 더욱 열성을 가지고 예쁜 옷들을 고를 수밖에 없었다.
“성하야, 우리 그냥 조용히 튈까?”
“걸리면 감당할 자신은 있고?”
“아니, 대체 왜 우리가 자기들 옷 입은 걸 구경해 줘야 하는 거냐고!”
“그 말을 네 누나 앞에서도 당당히 할 수 있으면 인정이다.”
은지한이 입에서 불을 뿜었지만 권성하는 조용히 한숨을 쉬며 고개를 저었다.
두 사람의 임무는 여성진이 옷을 갈아입고 나올 때마다 리액션을 해 줘야 하는 것. 물론 기계적으로 하다간 잔소리를 듣기 십상이었으니 열과 성을 다해야 했다.
‘왜 할머니라면 누구보다 끔찍하게 생각하시는 할아버지조차 쇼핑만큼은 같이 안 가시는 지 잘 알겠네.’
‘이거 끝나기는 하는 걸까?’
결국 긴 시간에 걸려 옷을 갈아입은 사람들이 본격적으로 테마 파크를 즐기기 시작했다.
“가자!”
한옥 마을 테마 파크에서는 여러 가지 다양한 오락과 행사들을 즐길 수 있었다.
특히 오락 마당이라고 해서 우리의 옛 놀이를 통해 다양한 상품을 획득하거나 떡방아 찧기, 엿 만들기, 연 날리기, 자수 등, 다양한 체험을 지원했다.
“인절미를 직접 만들어 먹으니까 되게 쫄깃쫄깃하고 맛있다!”
“한 냥만 추가하시면 직접 만든 떡을 포장해 드립니다. 어떻게 하실까요, 아가씨?”
“당연히 포장요!”
여성진들이 주로 떡을 만들어 먹거나, 널뛰기를 하거나, 그네를 타거나, 쇼핑에 중점을 두는 반면…….
“으랏차!”
“홍샅바 승!”
“은지한이라고 했나? 대단한데? 아직 학생인 것 같은데도 몸 쓰는 실력이 장난 아니잖아.”
“벌써 10연승째 아니야?”
남성진은 주로 씨름이나 축국, 자 치기, 기마전 같은 활동적인 행사들을 즐기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그렇게 각자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약속한 시간에 맞춰 약속한 장소에 도착한 일행들.
그들의 눈앞에 떡 하니 버티고 서 있는 건 다름 아닌 경복궁의 입구, 광화문이었다.
“와…… 퀄리티 대박.”
“진짜 서울에 있는 광화문이랑 똑같이 생겼다.”
광화문을 지나 안쪽으로 더욱 더 걸어 들어간 끝에 근정전을 마주한 일행들.
그때였다.
“나의 궁궐에 잘 찾아왔노라. 친애하는 벗들이여!”
“미르!”
근정전의 문이 열리며 그곳에서 모습을 드러낸 사람은, 중간에 일이 있다며 조용히 사라졌던 미르와 선화였다.
“미르 대박!”
“진짜 공주님 같아~!”
공주 옷으로 갈아입은 미르의 모습과 분위기는 궁궐과도 썩 잘 어울려 사람들의 감탄을 자아냈다.
미르도 감탄하는 사람들의 모습에 나름 자신감이 상승했는지 윤수호와 눈을 마주치자 입꼬리를 씨익 말아 올렸다.
‘반응이 좋구나, 수호 공!’
‘잘 어울려.’
그 모습에 엄지를 척하니 치켜세워 주는 윤수호.
사실 이번 이벤트는 윤수호와 미르, 그리고 선화가 일행을 위해 사전에 기획해 둔 이벤트였던 것이다.
“내 친히 나의 벗들을 위하여 내 궁궐을 안내해 줄 생각이 있는데 따라오겠느냐?”
그렇게 일행은 미르를 따라 모조 경복궁을 관람했다.
사실 모조라고 해도 경복궁을 복사 붙여 넣기 한 수준이라 진짜 경복궁과 거의 다름없는 퀄리티를 자랑했지만 말이다.
그러나 관람은 그게 끝이 아니었다.
뿌우……!
관람을 마치고 다시 근정전 앞으로 도착한 사람들의 귀에 뿔피리 소리가 울려 퍼졌다.
“어머!”
“이게 무슨 소리야?”
그에 사람들이 깜짝 놀라며 소리가 들린 곳으로 시선을 돌리자 궐의 문이 열리며 복장을 갖춰 입은 사람들이 열을 맞춰 입장하기 시작했다.
“이건…….”
“종묘제례악?”
“세상에…….”
공연이 시작되자 내시 역을 맡은 직원들이 순식간에 자리를 마련했다. 일행은 그들이 마련한 자리에 앉아 공연을 관람하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금세 종묘제례악이 주는 신비함과 웅장함, 그리고 차분함에 매료되어 깊이 빠져들었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윤수호의 입가에 흐뭇한 미소가 걸렸다.
가족과 친구들을 위해 오늘의 이벤트를 기획하면서 과연 그들이 좋아해 줄까 걱정을 했던 것도 사실이었다.
하지만 막상 오늘 이들의 표정을 보니 아무래도 그날의 걱정은 기우로 끝날 듯싶었다.
그런데…….
“위원장님.”
전화를 받고자 잠시 자리를 비웠던 박여진이 심각한 얼굴로 윤수호에게 돌아왔다.
그리고는 귓속말로 무언가를 전하자 윤수호의 얼굴이 순식간에 굳어졌다. 그러다 이내 표정을 풀면서 피식 웃었다.
“호사다마로군. 어쩐지 요 근래 나답지 않게 너무 행복하더라니…….”
“죄송해요…….”
“아냐, 박 팀장이 미안할 게 뭐 있다고. 가지.”
가족들에게는 잠시 볼일이 있어서 자리를 비운다고 양해를 구한 윤수호는 차를 타고 곧장 청와대로 향했다.
* * *
“오셨습니까, 위원장.”
“요새 들어 불미스러운 일들로 자주 찾아뵙는군요, 대통령님.”
“미안합니다. 얼마 전에 큰일을 겪은 사람에게 또다시 이런 부탁을 하게 돼서……. 그것도 위원장이 가족들과 좋은 시간을 가지고 있는 이때 말이죠.”
“나쁜 일이 어디 예고하고 찾아오는 것도 아니고 그게 대통령님의 잘못은 더 더욱 아니죠.”
선우진이 자리를 권하자 윤수호가 자리에 착석했다.
“상황은 오면서 박 팀장에게 대충 전해 들었습니다. 일본이 심각한 상황이라고요?”
“아무래도 일본에 두 번째 던전이 출현한 모양입니다. 첫 번째 던전을 공략하지 못한 탓에 일본의 특무 자위대의 전력이 큰 타격을 입은 것으로 파악하고 있습니다. 특히 일본이 공식적으로 발표하지는 않았지만 일본의 톱텐, 아사쿠라 텐겐의 부상이 심각한 것으로 우리 정부는 추정하고 있지요.”
“그래서 현재 출현한 두 번째 던전을 해결할 능력이 부족한 거군요. 그래서 우리 정부에 도움을 요청한 겁니까?”
윤수호의 물음에 선우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일본 첩보 부대의 역량은 세계적으로도 대단히 뛰어난 수준이라 알고 있습니다. 아무래도 북한을 조사하면서 위원장의 정체도 알게 된 게 아닌가 싶군요.”
“두 번째 던전이라…….”
윤수호는 팔짱을 끼고 생각에 잠겼다.
만약 이대로 대한민국에 던전이 출현하지 않는다면 조만간 일부러 던전을 찾아서 공략할 생각이 있었던 윤수호였다.
세상 모든 사람들에겐 던전이 지옥문일지 몰라도 윤수호에게는 보물 창고로 통하는 문이었으니까.
‘포션도 수급해야 하고……. 문파를 생각하면 유용하게 사용할 수 있는 아이템도 많을수록 좋겠지.’
하나 고심하는 윤수호의 모습을 다른 뜻으로 해석한 선우진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아무리 위원장님이라 하셔도 쉽지 않은 결정이란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심지어 우리나라도 아닌 타국을 위해서 위험을 감수한다는 건 무척 힘든 일이니까요. 그러니 편하게 거절하셔도 상관…….”
“하죠.”
“예?”
“일본에 출현했다는 두 번째 던전 말입니다. 몇 가지 조건만 충족한다면 제가 대신 해결해 드리겠습니다.”
“조건이라 하시면…….”
윤수호는 일본에게 전달할 조건들을 천천히, 그리고 상세하게 선우진에게 전했다.
1분 1초를 다투는 일이다.
선우진은 그 자리에서 즉시 일본 총리에게 연락해 윤수호의 요구 조건을 전달했다.
“우리의 요구 조건은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던전에서 획득하게 되는 모든 재화는 공략자에게 귀속시킬 것. 둘째, 공략자가 요구하는 지원 물품에 대해 일본 측은 무조건적으로 수용할 것. 셋째, 선수금 3조. 공략 성공 시 나머지 7조의 의뢰금을 한국 정부에 완납할 것. 넷째, 공략자에 대한 일본 정부와 군의 일체 간섭을 삼갈 것. 다섯째, 독도와 관련된 모든 억지 주장을 교과서 및 공문서에서 수정할 것. 차후 이를 어길 시, 발견되는 오류마다 1조원의 배상금과 일본 정부의 공식적인 사죄를 포함할 것. 이하의 조건을 담은 문서를 곧바로 보내도록 하겠습니다.”
-……알겠습니다. 일단 우리 측에서도 신중하게 검토해 보도록 하지요.
일본 총리의 무거운 대답을 전해 들은 윤수호는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말이 ‘신중’이지 일본에 선택지는 없었다. 받아들이지 않으면 일본의 멸망은 사실상 확정된 미래나 다름없었으니까.
검신이 돌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