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4.
‘윽…….’
사람들의 시선이 집중되자 은지연의 표정이 단번에 굳어졌다.
친구들과 함께 노래방을 찾은 적은 많았지만 지금처럼 가족들이나 아는 사람들 앞에서 마이크를 쥐어 보긴 처음이었던 것이다.
정확히는 마이크 대신 숟가락이었지만.
그렇게 관객들의 기대어린 눈빛들이 집중되자 점점 더 긴장하던 은지연의 어깨를 은지한이 다독였다.
“힉!”
“뭘 그렇게 긴장하고 있어. 누나답지 않게.”
“하, 하지만……!”
“걱정하지 마. 누나 노래 잘해. 안 그랬음 부르지도 않았어. 나 봐, 그러니까 사회 맡아서 안 부르는 거잖아.”
은지한이 히죽 웃으며 용기를 북돋아 주자 은지연의 마음이 한층 차분해졌다.
미우나 고우나 동생은 역시 동생이었던 것이다.
“후우…….”
깊이 숨을 고른 은지연이 이내 무언가를 결심한 듯 임수현에게 다가갔다.
“나 좀 도와줘.”
“나? 나는 왜?”
“그거 부를 거니까.”
“뭐? 진짜? 너 제정신이야?”
“연중에 오늘만큼 정신이 맑은 날도 드물걸. 하여튼 빨리! 우승하면 상금 반띵할게.”
상금을 나눈다는 말에 군말 없이 자리에서 일어난 임수현이 소품으로 구비되어 있던 장구를 가져왔다.
본래라면 통기타가 필요했지만 아쉬운 대로 장구를 핸드 드럼처럼 사용할 생각인 것이다.
그렇게 은지연의 옆에 자리를 잡은 임수현이 준비가 끝났다는 의미로 고개를 끄덕이자 은지연이 숟가락을 입으로 가져갔다.
“오늘도 비가 내렸어. 널 닮은 빗방울에 나 짜증 내다 그렇게 하염없이 널 그리워했어~!”
청아한 목소리, 달콤한 가사, 매력적인 리듬…… 그 삼박자가 고루 갖춰지자 청중은 어느새 두 사람의 노래와 연주에 흠뻑 빠져들었다.
“와…….”
“노래 대박인데?”
“지연이한테 이런 재주가 있었단 말이야?”
“수현이라고 했나? 쟤도 연주 실력이 꽤 상당한데?”
청중의 호평이 끊이지 않을 만큼 두 사람의 노래 실력이 굉장히 뛰어났다.
윤수호도 적잖이 놀란 얼굴로 은지한을 쳐다보았다. 그러자 은지한이 엄지를 치켜 올리며 마치 자기 일처럼 자랑스러워했다.
‘녀석…….’
“……어제의 눈물아 안녕.”
잠깐의 침묵.
짝짝짝…….
그리고 조금씩 이어지는 박수 소리.
짝짝짝짝짝……!
박수는 이내 갈채가 되었고…….
“와아아아아!”
“앵콜! 앵콜!”
큰 함성과 환호가 되었다.
노래가 끝나고 사람들의 기립박수와 함께 앙코르 시그널이 터져 나오자 그때까지 담담하게 노래를 부르던 은지연의 얼굴이 홍당무처럼 붉게 물들었다.
노래에 집중하기 시작했을 때부터 보이지 않았던 청중들이 그제야 눈에 들어왔기 때문이다.
은지연이 꾸벅 고개를 숙이고 임수현과 함께 도망치듯 자리로 돌아오자 윤수호가 그녀의 어깨를 가볍게 다독이며 물었다.
“잘했어.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잘 부르던데? 가수인줄.”
“그냥 뭐…… 친구들이랑 노래방 가서 어깨 좀 펴고 노래 부를 정도는 되죠.”
은지연이 쑥스럽다는 듯이 농담처럼 대꾸하자 윤수호의 입가에 부드러운 미소가 감돌았다.
“그런데 노래는 무슨 노래야? 요즘 나온 신곡인가? 듣기 좋던데.”
“아~ 그거 수현이가 작사 작곡한 곡이에요.”
“정말?”
눈을 크게 뜬 사람들의 시선이 자신에게 집중되자 임수현은 화들짝 놀라 더듬거리며 대답했다.
“그, 그게…… 그냥 공부하고 쉬는 시간에 할 것도 없어서 대충 재미삼아 써 본 건데 지연이가 필요 없으면 자기 달라고 해서…….”
“어디서 따로 배운 건 아니고?”
윤수호의 질문에 임수현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에 윤수호의 생각이 깊어졌다.
‘어디서 배운 것도 아닌데 이런 노래를 혼자서 작사, 작곡했다고? 게다가 지연이의 노래 실력도 그렇고…….’
어쩌면 삼촌으로서 팔불출 같은 생각일지도 모른다는 편견에 윤수호는 지금 당장 입 밖으로 말을 꺼내지는 않았다.
하지만 확실한 건 두 사람 모두 재능이 없는 건 아니었다.
만약 두 사람이 원한다면 윤수호는 제대로 그쪽 분야에 대해 배울 수 있도록 지원을 아끼지 않을 생각이었다.
“오늘의 노래 자랑, 우승자는…… 은지연, 임수현 팀입니다. 축하드립니다!”
“진짜로 1등 했잖아? 꺄아악! 어떡해! 수현아!”
“반띵하기로 한 거 까먹으면 뒈짐.”
참가자들의 무기명 투표를 통해 뽑힌 1등 팀은 은지연, 임수현 팀이었다. 2등과도 압도적인 차이로 1등에 뽑힌 두 사람의 앙코르 공연과 함께 그날 밤은 막을 내렸다.
* * *
사이타마 현 던전 발생지 부근.
현재 이곳은 던전에서 출몰하는 몬스터들과 일본 특무 자위대의 전쟁으로 한 폭의 지옥도를 연출하고 있었다.
끊임없이 출현하는 몬스터들을 상대하며 일본의 능력자들을 결코 뒤로 물러나지 않았다. 자신들이 물러나는 순간, 도쿄가 위험해지기 때문이었다.
“부상자는 걸리적거리지 말고 빠져!”
“지원군은? 아직이야?”
“의료 물자도 전부 바닥났습니다! 야전 병상도 만석이라 더 이상 환자를 받을 수 없습니다!”
“기왕 이렇게 된 거…… 내 목숨으로 한 마리라도 더 끌고 가면 다행인 거겠지.”
각오를 마친 일본의 특무 자위대원 한 명이 몬스터들을 향해 몸을 날렸다.
수많은 몬스터들의 발톱이 몸통에 박히고, 이빨이 사지를 물어뜯는 것도 개의치 않고 그는 검을 휘둘렀다.
“이나시로!”
동료들은 그의 이름을 애타게 불렀지만 그는 동료들의 목소리를 듣지 못했다.
서걱! 서걱!
피와 내장을 뿌리면서도 그의 검이 자신의 몸을 물어뜯는 몬스터들의 머리를 쉴 새 없이 베어 갔다.
이내 검에서 오러가 사라지는 순간, 그의 눈동자도 빛을 잃어버리며 몬스터의 아가리 속으로 삼켜졌다.
목숨의 대가로 혼자서 한 마리도 상대하기 힘든 몬스터들 다섯을 함께 길동무 삼아 끌고 간 것이다.
그러나 상황은 절망적이었다. 이나시로의 희생이 덧없다고 느껴질 만큼 쏟아지는 몬스터들의 숫자는 끝이 없었다.
그들은 경험을 통해 알고 있었다. 이 몬스터들은 특정 조건을 만족시키지 않는다면 무한히 생성된다는 사실을…….
“공략대는 아직이야?”
“젠장, 우리가 전멸하면 사이타마는 물론이고 도쿄까지 위험하다. 꾸물거릴 시간이 없단 말이다!”
현장에서 뛰는 요원들은 애가 탔다. 몰려드는 몬스터들의 숫자는 무한한데 자신들의 숫자는 한정되어 있었다.
“이렇게 버티고 막아서는 것도 길어 봤자 하루 정도겠지…….”
그러나 공략대를 편성하는 사령부도 골치 아프기는 마찬가지였다.
“지난 첫 던전 사태에 투입된 오버 알터들의 숫자도 상당히 많았습니다. 심지어 그들조차 전멸을 피할 수 없었고 그 대가로 터무니없는 괴물들이 던전에서 튀어나왔지요.”
“만약 여기서 오버 알터 부대를 던전에 투입했다가 또다시 전멸하고 괴물들이 튀어나온다면 더 이상 가망이 없습니다.”
“러시아의 경우를 봐도 알 수 있듯이 확실하게 던전 안에서 격퇴하려면 검귀 공의 힘이 없이는 불가능하다고 봐야겠지요.”
“검귀 공은 지금 어떠한가?”
“그게…….”
한 장성의 질문에 부관이 망설이다 결국 대답했다.
“첫 번째 던전에서 출현한 괴물들을 토벌하실 때 입은 부상이 아직 완전히 회복되지 않으셨다고 합니다. 물론 정부의 명령이라면 얼마든지 던전에 들어가겠다고 말씀하셨지만…….”
“만약 부상을 아직 미처 회복하지 못한 검귀 공이 던전에 들어갔다 참변이라도 당한다면…….”
“이 나라의…… 일본의 최후가 되겠지요.”
“…….”
검귀(劍鬼)가 누구인가?
비록 영국의 톱텐에게 밀려 검성이라는 칭호는 양보해야 했지만 검만큼은 검성과 양대산맥을 이루는 일본의 톱텐이 아니던가?
그러나 현실은 최악이었다.
중국의 톱텐 천장은 중국식 물량 공세를 쏟아부어 던전에서 출현한 몬스터를 큰 부상 없이 제압하는데 성공했다.
러시아는 애초에 위험을 감수하고 던전에 직접 알렉산드로가 쳐들어가 던전을 공략했다.
그리고 미국은 특유의 화력전을 이용해서 자국 톱텐의 피해를 최소화하는 데 성공했다. 결과적으로 가장 많은 자금을 쓰게 되긴 했지만 말이다.
그러나 일본은 달랐다.
중국처럼 투입할 물량도, 러시아처럼 먼저 던전을 공략한 것도, 미국처럼 화력전이 가능한 것도 아니었다.
그러다보니 던전 공략에 실패해서 출몰한 몬스터들을 토벌하는데 검귀의 역할이 그만큼 클 수밖에 없었다.
결국 토벌전에서 심한 부상을 입은 검귀는 일본 최고 의료 센터에서 천문학적인 거금을 들여 가며 치료에 전념하고 있었지만 아직 완벽히 부상을 회복하지는 못한 것이다.
“그럼 정말로 방법이 없는 겁니까? 이 나라가 이대로 멸망해 가는 광경을 두 눈 뜨고 지켜볼 수밖에 없냐는 말입니다!”
“시간이 없습니다. 어서 결정해야 해요. 지금도 사이타마에서는 우리 대원들이 매분, 매초마다 안타까운 목숨을 잃고 있습니다. 그들의 고귀한 목숨을 모두 바친다 해도 우리에게 남은 시간은 하루가 안 될 겁니다.”
“크흠……!”
“허허…….”
뚜렷한 해답 없이 장성들이 침음만 흘리고 있을 때, 한 사람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저기…… 방법이 없는 건 아닐 것 같습니다만.”
“……?”
방법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이 상황에서 가장 충격적인 발언을 터트린 사람에게 모든 장성들의 시선이 집중되었다.
그는 다름 아닌 동아시아 첩보부 부장, 하타케 소장이었다.
“하타케 소장? 그게 무슨 말이오? 방법이 있다니? 그게 정말이오?”
“본론을 말씀드리기에 앞서, 최근 북한이 김정언 최고위원장을 탄핵하고 새 정부를 세웠다는 사실을 여러분들께서도 잘 알고 계실 겁니다.”
“답답하구먼! 지금 같은 상황에 북한은 무슨……!”
“쉿! 조용하고 얘기를 마저 들어 봅시다.”
하타케의 이야기가 이어졌다.
“북한은 저희가 파악한 던전 출몰 지역입니다. 그 탓에 김정언도 나라를 버리고 러시아로 망명했지요. 그런데 새 정부를 세운다는 게 현실적으로 가능한 일입니까? 그에 저희는 북한으로 급히 요원을 파견했고 북한이 전에 없던 일상을 회복했다는 사실을 분명히 확인했습니다.”
“그, 그게 무슨……? 북한에 던전에서 출몰한 몬스터들이 있었다면서요? 설마 북한에 그런 저력이 숨겨져 있었단 말입니까?”
“그런 힘이 있었다면 애초에 김정언이 러시아로 망명하지도 않았겠지요.”
“그 말인즉…….”
“북한을 구원하고 새 정부 수립에 도움을 준 배후 세력이 존재한다는 뜻이겠군요.”
하타케는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가 한 일은 당연히 아니었습니다. 조사해 보니 미국의 소행도 아니었지요. 북한의 우방국인 러시아나 중국이 움직인 정황도 포착되지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남은 곳은…….”
“남한뿐이군요. 하지만 남한 정부가 움직였다면 모르려야 모를 수가 없었을 텐데?”
“남한 정부가 아니었습니다.”
“남한 정부가 아니라면……?”
하타케는 자신이 조사한 모든 내용들을 장성들에게 공개했다. 그 정보들을 확인한 장성들은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남한에도 던전이 발생했었다고요?”
“하지만 그런 정보는 전혀…….”
“파악되지 않을 수밖에요. 거의 출현과 동시에 공략됐으니까. 바로 이 사람.”
화면에 윤수호의 사진이 크게 올라오자 장성들의 모든 시선이 사진으로 집중되었다.
“윤수호에 의해서…….”
검신이 돌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