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1.
알렉산드로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잔인하게 찢겨 죽은 군인들의 시신과 그들이 빠져 있는 피 웅덩이가 차갑게 식어 가고 있었다.
“고바노프 중장, 군을 후퇴시켜 주겠소? 어차피 이곳에 남아 있어 봐야 방해만 될 것 같으니.”
“……알겠소.”
고바노프는 뼈를 깎는 심정으로 대답하고는 군대를 후퇴시켰다.
어쩌다 러시아의 강군들이 이처럼 장애물 취급만 받게 되었는지 통탄을 금할 길이 없었지만…….
어쩌겠는가, 알터라는 존재들이 생겨난 이후로 이게 현실인 것을.
특히 그중에서도 알렉산드로는 그런 말을 할 자격이 충분히 있었다.
지금 남아 있는 모든 전력…… 아니, 처음 생존했던 그 전력까지 전부 더한다고 해도 지금의 알렉산드로에게는 발끝도 미치지 못했으니 말이다.
그런데…….
“웃기는 녀석들이군.”
윤수호는 피식 웃더니 검결지를 휘둘렀다. 그가 노리는 건 후퇴하던 군인들이었다.
그에 군인들은 경악했고 알렉산드로는 눈살을 찌푸렸다. 자신을 무시하고 설마 후퇴하는 군인들을 노릴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기 때문이다.
팟!
생각보다 빠르게 몸이 움직였다.
어느새 군인들의 뒤를 막아선 알렉산드로가 윤수호의 검기를 막아섰다. 그의 도끼에 오러가 서리며 윤수호의 검기와 충돌했다.
그런데…….
콰아아앙!
“크윽……!”
알렉산드로는 이를 꽉 깨물며 노도와 같이 몰아치는 검기를 필사적으로 방어해 냈다.
‘정말이지, 어디서 이런 괴물이……!’
첫 일격에서도 느꼈지만 상대는 자신과 비슷한…… 아니, 자신 이상의 괴물이 틀림없었다.
그러나 상관없었다. 동료들이 후퇴할 때까지 시간만 벌 수 있다면…….
그 순간, 알렉산드로의 눈이 커졌다.
그동안 잠잠하던 윤수호의 왼손이 움직였기 때문이다.
“아, 안 돼……!”
“살려……!”
“크아아악!”
결국 군인들은 붉은 광장을 떠나지 못하고 한 명도 남김없이 전멸해 버렸다. 그 광경을 지켜보던 알렉산드로가 윤수호를 죽일 듯이 노려보며 말을 씹어 뱉었다.
“이미 승패가 분명한 전투였다. 그대에겐 패자에 대한 아량조차 없는가!”
“나는 저들에게 살 수 있는 기회를 주었다. 그리고 삶과 죽음 중에서 죽음을 선택한 건 저들이지. 그리고 이제는 너에게 그 선택권을 주려고 한다. 너는 어떤 선택을 할 생각이지, 알렉산드로?”
“뻔한 것을 묻는군.”
쿠구구구구구구구……!
그 순간, 알렉산드로의 몸에서 항거하기 힘들 정도의 거센 기운이 노도와 같이 흘러나왔다.
기운은 순식간에 압축되어 그의 몸을 휘감고, 이내 그가 쥐고 있던 두 개의 도끼 자루를 빛으로 물들였다.
‘이건……?’
윤수호는 단번에 알아보았다. 이건 알렉산드로의 힘만이 아니었다.
그가 착용한 반지와 목걸이 등에서 흘러나오는 기묘한 기운. 이건 틀림없는 아이템의 효과였다.
무슨 효과인지까지는 알 수 없었지만 그의 몸에 스며드는 것으로 봐서는 분명 알렉산드로에게 이로운 효과겠지.
“그렇군. 아이템을 사용한다는 건 러시아는 던전을 공략한 건가.”
“그걸 알아보는 걸 보니 네 녀석도 던전을 클리어한 게 분명하구나.”
대꾸한 알렉산드로의 도끼가 하나는 불도 사를 것 같은 홍염 빛으로, 하나는 고드름도 얼려 버릴 것 같은 쪽빛으로 물들었다.
딱 봐도 그가 가지고 있는 아이템 중에서 가장 높은 등급의 아이템인 듯 보였다.
“이것은 내 조국 러시아를 수호하기 위해 동료들의 목숨을 바쳐 손에 넣은 힘이다. 지금부터 그 힘의 무게를 똑똑히 가르쳐 주마.”
자신의 실력으로는 윤수호를 감당할 수 없다는 걸 방금 전의 격돌로 깨달았다.
그러나 상관없었다.
동료들의 희생을 바탕으로 던전을 공략하여 손에 넣은 이 힘까지 사용한다면 반드시 승산은 있다.
알렉산드로는 그렇게 믿어 의심치 않았다.
쾅!
그가 땅을 박차는 순간, 핏물과 부서진 땅거죽이 허공으로 분산되면서 그의 모습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윤수호와 자신 사이에 놓여 있던 거리를 단번에 지워 버린 알렉산드로의 도끼가 난무했다.
수십 개의 잔영이 춤을 추고, 열기와 냉기의 폭풍이 쉴 새 없이 휘몰아치며 윤수호를 압박하기 시작했다.
콰콰콰콰콰콰콰콰콰콰콰콰콰콰콰쾅……!
두 사람이 제대로 격돌하기 시작하자 붉은 광장이 자연재해라도 일어난 것인 양 크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꽤나 쓸만한 아이템인 것 같군.’
윤수호는 자신의 검기에도 부서지지 않고 오히려 지지 않으려는 듯이 검기를 튕겨 내는 알렉산드로의 무기에 제법 감탄하고 있었다.
이곳으로 돌아와 자신의 검기로 베지 못한 것은 귀수산을 닮은 8급 재앙종 거북이와 이 도끼뿐이었으니까.
게다가 뿜어내는 냉기와 열기도 상당히 괜찮았다.
아마 다른 적이었다면 열기를 마시고 내장부터 익었거나, 냉기를 마시고 폐부가 얼어 죽었겠지.
한편 상대하는 알렉산드로는 놀람을 넘어 경악하고 있었다.
두 개의 도끼, 썬 플레어와 문 프로즌을 손에 넣은 뒤로 8급 재앙종조차 혼자서 어렵지 않게 사냥했던 자신이다.
그런데 8급 재앙종의 단단한 껍질도 푸딩처럼 썰어 버리던 도끼가, 상대방의 손가락 하나를 어찌하지 못하고 매번 튕겨져 나온다.
그런데 두 도끼뿐만 아니었다.
각종 신체 능력을 향상시켜 주는 아이템의 버프를 활용해도 상대방의 움직임에 대응하는 게 고작이었다.
문제는 상대방의 모습에서 적지 않은 여유가 느껴진다는 사실이었다.
‘아니, 솔직히 말하자면 아직 시작도 하지 않은 것 같은…….’
알렉산드로는 곧장 머리를 털어 생각을 떨쳐 냈다. 그렇게 생각했다간 너무나도 큰 절망감에 몸이 멈춰 버릴 것 같았기 때문이다.
콰아앙!
두 사람의 충돌로 강한 폭발이 일어나며 발생한 충격파가 중앙광장과 크렘린궁의 일부를 집어삼켰다.
충격파의 영향을 받은 궁전과 광장이 무너지며 형체를 완전히 잃어버렸지만 알렉산드로는 거기까지 생각할 여유가 없었다.
“인정하지. 너는 내가 이곳으로 돌아와 만난 인간 중 가장 강하다.”
“기뻐해야 할지, 화를 내야 할지 모르겠군.”
알렉산드로는 입안에 고인 핏물을 모로 뱉어 냈다. 그럼에도 아직 진탕된 내부에서는 끊임없이 핏물이 역류하려 했다.
그런데…….
스윽.
“……!”
알렉산드로의 눈이 커졌다. 윤수호가 인벤토리에서 꺼낸 한 자루의 검 때문이었다.
황홀할 정도로 요사스러운 순백의 검에 알렉산드로는 순간 시선을 빼앗기고 말았다.
“지금부터 눈에 똑똑히 새겨 두어라. 이것이 너를 죽인 검수의 검이 될 테니까.”
“오너라. 그 검과 함께 머리통을 반으로 쪼개 줄테니.”
알렉산드로는 입꼬리를 말아 올리며 대꾸했지만 사실 허세에 가까웠다.
그가 낼 수 있는 전력은 이미 전부 선보였다. 두 전설급 무기에 톱텐만이 발현 가능한 미스틱 오러를 더해 몰아붙였음에도 상대를 쓰러트리지 못했다.
그런 상황에서 적은 지금껏 사용하지 않았던 무기까지 꺼내 들었으니…….
‘확실히 검사는 검사로군. 검을 들지 않았을 때도 그 모습이 한 자루의 검과 같았건만…… 검을 들고 있으니 전혀 다른 사람 같다.’
알렉산드로는 자신의 죽음을 직감했다.
바로 그 순간!
전장에 난데없이 드론 한 대가 출현했다. 날아온 방향을 봐서는 크렘린 궁에서 보낸 드론인 듯싶었다.
두 사람이 드론을 확인하자 드론에서 사람의 목소리가 들렸다.
-조잡하게 정체를 감추고 있지만 나는 네가 누구인지 안다. 굳이 내 소개를 따로 할 필요는 없겠지. 중요한 건 네가 지금 당장 돌아가지 않으면 네가 사랑하는 가족, 친구, 연인, 조국이 한순간에 불바다가 될 거란 사실이니까.
알렉산드로는 눈살을 찌푸렸다.
목소리의 주인이 볼기예프라는 사실은 그도 잘 알고 있었다. 문제는 그가 하는 말의 내용이었다.
“네가 마음만 먹으면 그런 일이 가능하다는 뜻인가?”
윤수호가 당황하지 않고 평소처럼 나직하게 물었다. 그 모습을 드론의 카메라 너머에서 지켜보고 있던 볼기예프가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어차피 이쪽은 네놈을 멈추지 못하면 죽을 목숨이지 않은가? 그렇다면 나 혼자 전부를 잃는 건 너무 억울하지. 다행스럽게도 이쪽은 충분히 내 말을 실현시킬 수 있는 힘이 있거든. 설마 눈앞의 알렉산드로가 우리 러시아의 전력이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핵미사일을 너무 과신하는 모양이군.”
-이곳에 있는 네놈이 그걸 막을 방법은 없으니까. 아니, 설령 네놈이 본국에 있었더라도 마찬가지겠지. 물론 그걸 사용하게 되는 순간, 우리도 조금 힘들어지긴 하겠지만 그뿐, 내가 목숨을 잃는 것에 비교할 수는 없지. 나만 살아 있으면 러시아는 언제든 회복할 수 있으니까.
볼기예프의 말이 궤변이라는 사실은 누가 들어도 알 수 있었다. 하지만 무시할 수도 없었다.
지금 당장 목숨이 경각에 달린 마당에 그가 어떤 선택을 할 지 나라와 가족의 운명을 도박판의 판돈으로 사용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으니까.
그러나!
“해 봐.”
-……뭐?
“자신 있으면 해 보라고. 그게 뭐가 됐든 전부 박살 내고 네 목을 따러 갈 테니까.”
콰작!
드론이 파괴면서 산산이 조각난 드론의 파편이 바닥으로 떨어져 내렸다.
윤수호는 검을 들어 올렸다.
더 이상 장난은 끝이다.
이번 일격으로 알렉산드로를 쓰러트린 후, 크렘린 궁으로 쳐들어가 볼기예프 목을 딸 작정이었다.
그 순간.
스윽…….
“이건 무슨 뜻이지?”
윤수호의 눈매가 좁아졌다.
알렉산드로가 몸을 돌려 옆으로 비켜섰기 때문이었다.
“이유는 나중에 들어도 늦지 않다. 설마 이제 와서 내 목숨이 아까워 길을 비켜 주는 거라 생각하는 건가?”
“…….”
윤수호는 피식 웃더니 그대로 모습을 감추었다.
사라진 윤수호의 모습에 알렉산드로는 고개를 돌려 크렘린 궁을 쳐다보았다.
문득 그의 입에서 나직하게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리 그래도 도를 넘었소, 볼기예프. 내가 지키는 건 당신이 아니라 내 조국의 안녕과 국민이오. 설령 대통령이라 해도 조국에 위해가 되는 행동을 묵과할 수는 없소.’
알렉산드로가 아는 볼기예프는 야심 있는 능력자였다.
야심만큼이나 뛰어난 능력을 가진 그는 실제로 러시아의 국익을 꽤나 많이 끌어 올렸다.
때문에 알렉산드로는 목숨을 걸고 그를 지켰다. 그를 지키는 것이 곧 러시아의 국익으로 이어진다고 생각했으니까.
그러나 그가 핵미사일을 가지고 한 나라를 협박한다면 얘기는 달라진다.
그것도 미국의 동맹국인 한국을 핵으로 공격한다? 3차 세계 대전이 일어나도 이상하지 않을 일이었다.
문제는 볼기예프의 성격상 한다면 한다는 것이었다. 그것도 자신의 목숨이 걸린 일이라면…….
* * *
“이런 빌어먹을……!”
볼기예프는 화면으로 길을 비켜서는 알렉산드로의 모습을 보고는 혀를 차며 케이스를 다급히 들었다.
케이스 안에 들어 있는 대륙 간 핵탄두 미사일의 비상 발사 장치야말로 지금 자신의 목숨을 지켜 줄 수 있는 유일한 방패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푹!
“커헉……!”
볼기예프는 놀란 눈으로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그의 떨리는 두 눈에 심장에 박혀 있는 순백의 검이 보였다. 경호원들도 너무 놀라 허둥거리는 사이, 정면에서 윤수호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이게 그쪽이 원하던 결말인가?”
“너, 너……!”
경호원들이 다급하게 무기를 꺼내 들고 윤수호의 앞을 가로막았지만 소용없었다.
그들도 오버 알터에 이른 능력자들이었으나 윤수호의 손짓 한 번에 목이 잘려 쓰러질 뿐이었다.
그 와중에도 볼기예프는 자신의 몸이 차갑게 식어 가는 것을 느꼈다.
그런데…….
‘웃어?’
윤수호는 죽어가는 와중에도 한쪽 입꼬리가 미묘하게 비틀려 올라가는 볼기예프의 모습에 섬뜩한 광기를 느꼈다.
그 순간.
-위원장님!
착용하고 인이어 너머에서 박여진의 다급한 외침이 들렸다.
검신이 돌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