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8.
“그래서, 작전은 실패했다고?”
“죄송합니다, 각하.”
볼기예프는 자신에게 고개 숙이는 부하를 향해서 대충 손을 저었다.
“아니, 됐다. 전의 전력이 그만큼 뛰어났다는 거니까. 물러가 봐.”
거수경례를 올린 부하가 물러가자 그때까지 초조한 기색을 가까스로 참고 있던 김정언이 마침내 속내를 내비쳤다.
“이러면 어떻게 되는 것이오, 볼기예프 동지? 탐색에 실패했으니 설마 우리의 조약을 나 몰라라 하는 것 아니겠디요?”
볼기예프는 안달이 나서 할 말, 못할 말, 구분하지 못하고 내뱉는 눈앞의 돼지가 진심으로 마음에 들었다.
이렇게 무능하면서 욕심이 많은 인간만큼 컨트롤하기 쉬운 상대도 없었기 때문이다.
“걱정 마세요, 김 동지. 우리 혈맹은 이 정도로 결코 포기할 생각이 없으니까.”
볼기예프의 대답에 벌레 씹은 표정을 하고 있던 김정언의 표정이 대번에 풀어졌다.
“그럼……!”
“북조선은 가까운 시일 안에 반드시 제자리를 찾을 겁니다. 그때부터 김 동지가 할 일이 많아질 테니 오늘은 그만 가서 푹 쉬는 게 좋겠군요.”
“알겠소. 그럼 내 볼기예프 동지만 믿고 오늘은 이만 물러가리다.”
몇 마디 더 하려던 김정언은 조금 찝찝했지만 볼기예프의 명백한 축객령에 어쩔 수 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렇게 김정언이 떠나자 볼기예프는 국방성에 전화를 걸어 특무대 사령관을 호출하였다.
“부르셨습니까, 각하.”
“오랜만이군, 세르비찬 사령관. 그대도 한잔하겠나?”
“각하가 따라 주시는 보드카를 마다할 리 없지요.”
세르비찬은 볼기예프가 따라 주는 보드카를 단숨에 들이켰다.
식도를 타고 위장으로 흘러내리는 강한 술기운이 느껴질 정도였다.
“각하의 안색이 좋지 않으십니다. 최근 김정언 북조선 동지가 주제도 모르고 각하의 심기를 건든다는 소문이 사실입니까?”
“두 눈 뜨고 나라를 뺏긴 지도자의 설움일세. 혈맹국의 지도자 된 입장에서 투정 좀 들어 주는 거야 어려운 일이 아니지.”
“하여튼 각하의 관대함과 자비로움에는 매번 놀라움을 느끼는 것 같습니다.”
“하하하! 금칠은 그 정도만 하게. 내가 자비로워서 그 친구에게 인정을 베푸는 것 같은가?”
볼기예프는 단번에 표정을 바꾸었고 세르비찬도 그런 볼기예프의 속내를 대충 짐작하고 있었다.
“한데 오늘 부르신 용건은…….”
“자네도 알다시피 북조선에 파견한 대원들의 연락이 두절되었다는군. 십중팔구는 임무에 실패하고 놈들에게 붙잡혔겠지.”
“혹독하게 훈련을 받은 친구들입니다. 실수는 없었을 겁니다.”
만약의 경우에는 스스로 목숨을 끊도록 세뇌에 가까운 훈련시켜 두었기 때문에 세르비찬은 자신할 수 있었다.
“자네는 그들 배후에 누가 있을 거라 생각하나?”
“북조선의 새 정부 말씀이시라면…….”
세르비찬은 곰곰이 생각하더니 자신의 의견을 입에 담았다.
“아무래도 가능성이 가장 높은 곳은 남한이겠군요.”
“내 생각도 그렇다. 미국이 이번 일에 참견해서 얻을 이득보다는 발각됐을 때 잃게 될 리스크가 너무 크거든.”
볼기예프가 생각하는 미국은 절대 손해 보는 장사에는 투자하지 않는다.
“겉으로는 국제 경찰이니 세계의 정의와 질서니 떠들어 대도 막상 뚜껑을 열어 보면 그 모든 행위들은 자신들의 이익과 반드시 연관이 있거든. 그런 녀석들이 이제 와서 인권을 위해 북조선을 돕는다? 지나가던 개가 웃을 일이지.”
볼기예프가 이렇게까지 얘기하는 건 인권 외에 미국이 북한을 도울 수 있는 그 어떤 구실도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가장 가까운 나라는 중국, 남한, 일본이 될 텐데…….”
“중국은 논외로 치고 일본도 북한을 도울 이유가 없습니다. 오히려 자신들의 안전을 위해서 북한의 패망을 누구보다 바라는 녀석들이니까요.”
“나도 같은 생각으로 남한을 조사하던 도중, 최근 눈에 띄는 존재가 있더군.”
“그게 무슨…….”
세르비찬이 의문을 가지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볼기예프 직속 정보기관은 전 세계에 퍼져 있는 러시아의 스파이 부대였다. 그들의 존재와 그들이 다루는 정보에 대해서는 볼기예프만이 알고 있었던 것이다.
“존재 자체가 남한의 국가 기밀인 인간. 불과 1년 전까지 실종되어 있다가 갑자기 나타나서는 국가 기밀급 중요 인사가 되었더군.”
“그런 자가 있단 말입니까?”
“그래, 그런데 그자에 관해서 수집된 정보 중에 너무나도 터무니없는 게 포함되어 있어서 말이지. 이걸 곧이곧대로 믿어야 할지, 아니면 남한의 정보 교란인지 구분하기가 힘들더군.”
“제대로 알아봐야겠군요.”
세르비찬은 볼기예프가 왜 자신을 호출했는지 알 것 같았다.
볼기예프의 스파이들은 자신들의 자리에서 절대 움직이지 않는다. 그것이 그의 스파이들이 오래 살아남아 임무를 완수할 수 있는 이유였다.
그렇기 때문에 이처럼 특정 인물이나 사건을 조사할 때는 발이 묶여 움직일 수 없는 경우가 많았다.
이럴 때 필요한 것이 러시아 국방성에서 특수하게 육성한 첩보 부대 대원들이었다.
“곧바로 조사해서 보고 올리겠습니다.”
“부탁하지.”
* * *
과연 SNS의 홍보 효과는 대단했다.
이벤트 둘째 날.
아침 일찍 점심 장사를 위해 출근한 주막 직원들은 테마 파크 입구에서부터 이미 장사진을 이루고 있는 수많은 대기자들을 확인하곤 혀를 내둘렀다.
그러나 그건 시작에 불과했다.
둘째 날 테마 파크가 개장하고, 점심시간이 가까워 올수록 오가네 주막 앞에는 벌써부터 대기 행렬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져 있었던 것이다.
“이게 무슨…….”
“헐…….”
“오늘 잘못하면 죽겠는데?”
그렇지 않아도 최근 가장 핫하다고 할 수 있는 희망동 테마 파크에서 가장 큰 이슈이자 맛집으로 손꼽히고 있는 오가네 주막.
그 유명세가 퍼지기 시작하면서부터 각종 SNS 인장이나 유명 BJ, 연예인 들도 소문을 듣고 찾아오기 시작한 것이다.
“배에 힘주고 각오 단단히들 해. 손님이 많다고 해서 한 명이라도 허투루 대접할 생각은 없으니까. 우리 오가네 주막에서 손님은 뭐다?”
“가족이다!”
“각자 위치로!”
“라저!”
오혜연의 힘찬 연설과 함께 각오를 다진 직원들이 바쁘게 자기 자리로 돌아갔다.
점심 장사는 철저히 주막 콘셉트를 유지했기 때문에 선화도 인간의 모습으로 완벽히 둔갑하고 일손을 거들었다.
“와, 국물 미쳤는데?”
“만두도 겁나 맛있어.”
“바비큐 직접 구운 것도 존맛. 그냥 입에 넣으니까 씹지도 않았는데 사르르 녹음.”
SNS 홍보를 보고 기대감을 한껏 끌어 올린 채 찾아온 사람들도 대부분 만족하는 눈치였다.
윤수호는 음식을 맛보며 행복해하는 사람들을 보고 내심 흐뭇한 미소를 감출 수 없었다.
요리에 누구보다 진심인 어머니가 몇 날 며칠 동안 꼬박 밤을 새워 가면서 준비한 음식들이다. 손님들의 기대감이 충족되지 않을 리가 없었다.
그렇게 점심에는 요리의 퀄리티에 놀란 손님들이 저녁에는 콘셉트 퀄리티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어서 오세요. 오가네 요괴촌입니다!”
전날의 경험을 교훈 삼아 점심 장사가 끝난 순간부터 분위기를 완전히 새롭게 전환한 오가네 요괴촌은 그야말로 대박을 쳤다.
전날 다녀간 사람들의 경험과 후기가 SNS에서 미친 듯이 퍼져 나가자 심지어 러시아나, 일본, 중국, 대만, 동남아 등지에서 관광객들이 비행기를 타고 이곳을 직접 찾아오기도 했던 것이다.
그리고 이런 분위기는 러시아에서 찾아온 특수부대 대원들에게도 침투에 상당히 유리한 환경이 되었다.
“좋은 시간 보내세요!”
티켓을 확인 후, 자연스럽게 테마 파크에 입장하는 사람들 틈에 한 연인이 섞여 있었다.
겉보기에는 연애를 시작한 지 이제 얼마 지나지 않은 알콩달콩한 커플이었지만 주 사람의 시선은 쉴 새 없이 주변을 훑고 있었다.
“여기가 코드 시크릿이 기획한 테마 파크라는 거지?”
“그래, 나 참…… 무슨 능력자인지 아무튼 대단하군. 실종되었다가 돌아온 지 1년 만에 이런 어처구니없는 곳을 만들다니. 설마 재벌의 후계자는 아니겠지?”
“이 정도 규모의 테마 파크를 건설할 수 있는 재벌의 후계자라면 우리가 파악하고 있지 않을 리가 없잖아. 게다가 이 테마 파크의 용도가 이곳의 복지 사업에 투자하기 위한 비용이라고 하더군.”
“그게 사실이라면 코드 시크릿은 대단하신 자선 사업가쯤 되겠군. 그런 인간이 북한은 또 왜 간섭하고 지랄이래?”
“그걸 알아보러 우리가 여기 온 거잖아. 목적지에 도착했다.”
오가네 주막 근처에 도착한 두 사람은 바로 표정을 바꿔 커플 연기를 자연스럽게 시작했다.
줄이 긴 것은 차라리 다행이었다. 인파에 묻혀 멀리서도 주막 내부를 관찰할 수 있었으니까.
“오가네 요괴촌에 어서 오세요!”
그러다 차례가 오자 자연스럽게 자리에 착석하여 윤수호를 관찰하기 시작했다.
물론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는 외국인이 한옥 마을 테마 파크를 신기해서 구경하는 것 정도로 대수롭지 않게 생각할 만큼 매우 자연스러웠다.
두 사람도 어색하지 않게 윤수호에게만 시선을 두지 않고 여러 곳을 훑으며 많은 것들을 관찰했다.
그러면서도 윤수호의 일거수일투족을 관찰하는 스킬은 과연 두 사람이 고도로 훈련받은 정예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야, 이선호.”
“왜?
“아까 전부터 저 두 사람, 시선이 이상하지 않아?”
“뭐가?”
“아까 전부터 수호 형님을 자꾸 관찰하는 것 같다고나 할까? 분위기도 평범한 손님이랑 다른 것 같고…….”
조춘영의 말에 이선호는 그가 가리킨 커플을 확인하고는 그의 어깨를 가볍게 다독이며 만류했다.
“춘영아, 애인도 있는 녀석이 그러지 말자. 아무리 여자가 예뻐도 그렇지, 애인도 있는 놈이 그것도 남의 애인을…….”
“미쳤냐? 죽을래?”
“보아하니 삼촌의 외모 때문에 관심을 갖는 건 아닌 것 같고, 다른 목적이 있는 건 확실한 것 같은데요?”
“지한아!”
그때였다. 때마침 옆을 지나가던 은지한이 조춘영의 얘기에 무게를 실어 주자 조춘영의 기가 한껏 살아났다.
“분명 삼촌도 눈치채셨을 거예요. 그런데도 신경 쓰지 않는다는 건 무슨 이유가 있으신 거겠죠.”
“일단은 지켜볼 수밖에 없다는 뜻이네.”
은지한의 예상처럼 윤수호는 두 사람이 커플이 아니라 자신에게 목적이 있는 요원들임을 단번에 알아보았다.
평범한 관광객들 사이에서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는 약간의 흥분, 고양, 설렘 등의 그 어떤 감정도 없이 잘 재련된 광석처럼 자연스럽게 가라앉은 두 사람의 분위기.
오히려 그 어색할 만큼 자연스러운 분위기가 윤수호의 이목을 자극했던 것이다.
‘아무래도 러시아 쪽에서 냄새를 맡은 것 같군. 차라리 잘됐다.’
-이선호, 조춘영.
-예, 형님.
윤수호는 전음으로 두 사람에게 말을 걸었고 두 사람 역시 어렵지 않게 전음을 사용하여 대답했다.
-영업이 끝나면 저 두 사람을 따라가라. 가급적이면 생포하고 위험할 것 같으면 제거해도 상관없다.
‘……!’
윤수호의 명령이 떨어지자 두 사람이 눈을 크게 떴다. 그리고 각오를 다졌다.
이것은 특무대가 아닌, 수호문의 문인으로서 처음 문주에게 받은 명령이었다.
그만큼 두 사람이 이번 임무에 임하는 각오는 남다를 수밖에 없었다.
-문주님의 명을 받들겠습니다.
-알겠으니까 표정 관리 똑바로 하고. 누가 보면 목숨 걸고 전 부치는 줄 알겠네.
검신이 돌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