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4.
“이벤트?”
오랜만에 집으로 돌아온 윤수호에게 서류 한 장을 건네받은 오혜연은 서류에 적힌 내용들을 쭉 읽어 나가더니 난색을 표했다.
“어휴, 이 나이 먹고 이벤트는 무슨……! 남사스러워서 난 못 한다. 그냥 다른 사람 구해서 해.”
오혜연에게 다가간 윤수아가 엄마에게 서류를 건네 받아 읽더니 곧바로 내용을 알아보았다.
“뭔데 그래? 어디 보자, 주막 이벤트라면…… 아, 한옥 마을 테마 파크에서 진행하는 그거? 오빠도 이거 보고 딱 엄마가 떠올랐구나. 나도 그랬는데.”
“뭐야, 한옥 마을 테마 파크 이벤트는 또 뭔데?”
거실에서 과일을 먹으며 듣고 있던 은지연이 관심을 가졌다. 은지연뿐만 아니라 다른 가족들 역시 무슨 일인지 꽤나 궁금한 모양이었다.
그러자 윤수아가 대신 설명했다.
“이번에 한옥 마을 테마 파크 론칭 기념으로 조선 시대를 재현하는 이벤트를 기획 중이거든.”
“조선 시대를 재현한다면…….”
“한복을 입으면 입장료는 무료. 테마 파크 안에서 사용하는 화폐들은 전부 엽전으로 통일되고 상점이나 식당들도 모두 조선풍으로 꾸미는 거지. 일종의 조선 시대 간접 체험이라고 할까? 그밖에 공연이나 관람객이 직접 참가할 수 있는 다양한 이벤트도 할 생각이야.”
“그거 재밌겠네. 근데 주막은 또 무슨 말이야? 설마 정말로 주막을 운영하는 거야?”
“당연하지. 아, 이거 울 엄마 손맛이면 그냥 살아 있는데…….”
괜히 오버하며 엄마를 부추기는 윤수아였지만 오혜연은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됐어! 게다가 손님이라도 많이 오면 일만 더 커지고 귀찮아. 골병들어.”
“손님이 많이 올 거라는 확신은 있으신가 봐요?”
“그럼~ 내가 누군데.”
윤수호가 은근한 말투로 떠보자 오혜연은 씨익 웃으며 자신 있게 대답했다.
이로서 확실해졌다. 오혜연은 전혀 마음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그저 나이 먹고 이런 젊은 사람들이나 즐길 법한 이벤트에 참가한다는 것이 쑥스러웠을 뿐.
가족들 모두가 그 사실을 느끼고 슬슬 오혜연을 비행기 태우기 시작했다.
“에이~ 그러지 말고 같이 해요, 할머니. 자주 하는 것도 아니고 이번이 처음이자 마지막이 될 수도 있는 기횐데.”
“준비된 일꾼, 손자 지한이 대기 중입니다, 할머니.”
“엄마는 말로만 떠들어도 충분해. 나머지는 우리가 전부 알아서 할게. 그러니까 다 같이하자. 응?”
은지연도, 은지한도, 윤수아도 모두가 오혜연에게 달라붙어 간곡히 부탁하자 오혜연의 마음에도 살랑살랑 바람이 불어왔다.
윤수호는 그저 평소처럼 말없이 고개를 끄덕여 어머니를 지지해 주었다.
마지막으로 오혜연의 시선이 남편, 윤지석에게 향했다.
“당신 생각은 어때요?”
한평생을 함께 살아온 사람, 이제는 세상 누구보다 가깝고 소중한 사람이었으며 그만큼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만약 남편이 남사스럽다고, 나이와 체면을 생각해서 다시 한 번 생각해 보라고 얘기한다면 오혜연은 과감하게 이번 일을 포기할 생각이 있었다.
하지만…….
“너희들 엄마가 한복 입으면 얼마나 곱고 예뻐지는지 모르지? 아마 이번에 보면 깜짝 놀랄 거다.”
“수호 아빠, 당신…….”
“할아버지!”
“아빠!”
윤지석까지 흔쾌히 찬성하자 오혜연은 결심을 굳힐 수 있었다.
“너희들 다 각오해. 안 할 거면 모를까, 기왕 할 거면 아주 제대로 할 거니까.”
“옙! 주모님!”
* * *
주막 이벤트를 하기로 결정하자 긴급 가족 회의가 개최되었다.
가족들 모두 거실에 모여 과일을 사이에 두고 각자 의견을 제시했다.
“먼저 해결해야 할 안건은 역시 무슨 음식을 파느냐인데…….”
“조선 시대가 콘셉트라면서? 조선 시대면 당연히 한식 아니야?”
윤수호의 안건 상정에 가장 먼저 윤수아가 대답하자 윤수호는 고개를 저었다.
“콘셉트은 조선 시대지만 음식 콘셉트까지 강제할 생각은 없어. 모두가 똑같이 한식을 하는 것보다 어떤 주막에서는 피자를 팔고, 어떤 주막에서는 햄버거를 만들어 파는 것도 재미있잖아.”
“하기야, 콘셉트에 먹혀 콘셉트를 강조하다 보면 오히려 사람들은 불편함만 느끼고 즐기지도 못할 것 같아요.”
“그런 거지.”
은지한이 자신의 생각을 정확히 맞추자 윤수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콘셉트은 어디까지나 무대일 뿐이야. 그 위에서 즐기는 건 배우들…… 즉, 관객들 마음이지. 그렇다고 해도 콘셉트가 조선 시대인 만큼 다른 주막들은 한식을 준비할 가능성이 매우 많아.”
“하지만 콘셉트가 주는 효과도 무시할 수는 없잖아요. 저라도 조선 시대 콘셉트의 테마 파크라면 다른 것보다 한식을 먹을 것 같은데.”
은지연의 의견도 일리는 있었다.
이후에도 여러 가지 의견이 나왔고…… 이제 모두의 시선은 오혜연에게 집중되었다.
결국 주막의 대소사 결정권은 오롯이 그녀의 몫이었기 때문이다.
장고를 거친 끝에 오혜연이 마침내 입을 열었다.
“우리는 국밥으로 간다!”
“국밥요?”
“으음…….”
“결국 정면 돌파인가…….”
국밥.
서민들의 음식이자 조선 시대에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었던 주막의 대표 메뉴라고 할 수 있었다.
즉, 이번 콘셉트 주막에서 사람들이 가장 많이 준비할 것으로 예상되는 품목이 바로 국밥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오혜연은 오히려 긴장하는 가족들에게 입꼬리를 씨익 말아 올리며 자신감을 표출했다.
“너희, 설마 내 손맛을 못 믿는 건 아니겠지? 국밥이라고 다 같은 국밥이 아니란다. 특히나 이 오혜연표 국밥은 말이야.”
“뭐, 엄마가 이렇게까지 자신하는데 나야 반대할 이유가 없지.”
“나도 찬성.”
“그럼 국밥 말고 사이드 메뉴는 뭘로 할까요?”
“사이드는…….”
그렇게 가족들의 회의는 밤이 새벽이 지날 때까지 계속되었다.
* * *
다음 날 새벽.
아직 동 트기도 전인 이른 아침부터 윤수호는 강탁준이 가지고 온 냉동 트럭을 타고 마장동으로 향했다.
“이른 아침부터 연락드려서 죄송합니다. 강 실장님. 가뜩이나 금쪽같은 휴일이실 텐데.”
“아이구, 아니어유. 윤씨 집안 행사가 어디 남의 일인가유. 부담 갖지 말고 얼마든지 부려먹어 주세유.”
뻥 뚫린 도로를 달려 마장동 축산시장에 도착한 두 사람.
이제 막 해가 뜨는 이른 시간이었지만 시장은 벌써부터 사람들의 활기로 피부가 후끈할 정도였다.
입구에서부터 오늘 도축한 축산물의 경매가 진행되고 있었고 다른 쪽에서는 경매에 낙찰된 상품들이 빠르게 옮겨졌다.
조금 더 안쪽으로 걸음을 옮기자 그곳은 그야말로 고기의 세상이었다.
갖가지 종류의 수많은 고기들이 선홍빛 자태를 드러내며 붉은 조명 아래에서 자신들의 존재감을 드러냈다.
많은 고기들이 상등의 품질이었지만 그 이상의 특상품을 찾기 위해 두 사람은 열심히 발품을 팔았다.
“고기들이 상태는 좋은데…… 가격들도 만만치 않네유.”
“얼마 전에 또 강원도에 있는 축산업체 한 곳이 재앙종의 습격을 받았다더군요. 아무래도 쉽게 대피가 불가능한 축산업체는 재앙종의 출현에 그만큼 피해가 클 수밖에 없는 법이죠.”
강탁준이 기겁할 만한 한우 가격에 혀를 내두르며 고개를 젓자 윤수호가 씁쓸한 현 사태에 대해 얘기했다.
그러한 탓에 그 역시 농사 외에도 목축업의 병행을 고려하고 있었지만 아직은 구상 단계일 뿐, 실현하려면 좀 더 확실한 계획이 필요했다.
“이게 좋겠군요.”
“동감이에유. 고기 때깔이 아주 예술이구먼유.”
수많은 가게들을 둘러본 끝에 결정을 내린 윤수호는 가장 품질이 좋은 고기를 파는 정육점에서 소와 돼지를 구입하여 냉동 트럭에 실었다.
* * *
“우와!”
“세상에…….”
내장이 깨끗하게 손질된 돼지 한 마리와 소 반 마리의 위용은 꽤나 대단했다.
“자, 그럼…….”
윤수호는 마당에 너른 테이블을 두고 그 위에 소 반 마리를 올려 둔 뒤, 식칼을 집었다.
그 뒤로 시작된 퍼포먼스는 그야말로 발골의 예술이었다.
“우와…….”
딱히 소나 돼지의 발골 기술을 배운 것은 아니었지만 그의 손끝에서 식칼이 움직일 때마다 소에 붙은 살과 뼈, 근막, 지방들이 빠르게 분리되기 시작했다.
그렇게 소 반 마리를 불과 3분 만에 손질한 윤수호는 돼지도 마찬가지로 빠르게 손질을 끝마쳤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은지연이 말했다.
“이거…… 손님들 앞에서 공연처럼 보여줘도 괜찮을 것 같은데요?”
“발골하는 걸?”
“네, 이 정도 퍼포먼스면 충분히 수요가 있을 거예요. 요즘에는 이런 장인의 기술들을 찍어서 SNS에 올리는 게 유행이니까.”
은지연의 의견에 윤수아가 난색을 표했다.
“흐음……. 하지만 손님들 앞에서 발골한 후에 음식을 조리하면 너무 늦지 않을까? 특히 사골 육수는 거의 하루가까이 끓여야 할 텐데.”
“그럼 메뉴를 추가하면 되죠. 발골한 후에 즉석에서 구워먹을 수 있는 바비큐도 나쁘지 않을 것 같은데…….”
“으음…….”
윤수호는 잠시 생각하다 입을 열었다.
“나쁘지 않을 것 같은데?”
“뭐? 정말?”
“그래, 어차피 나야 미리 고기 손질만 해주면 크게 할 일은 없으니까. 바비큐 같은 경우는 크게 요리 솜씨가 필요한 것도 아니고 콘셉트도 잘 맞을 것 같은데?”
좋은 숯불을 구해서 굽는다면 그것만으로도 상당한 시각적 효과를 불러올 수 있다. 게다가 고기 굽는 냄새를 통해 주변 손님들까지 끌어들일 수 있으면 더 좋았다.
“아니, 뭐, 오빠가 그렇다면…….”
그렇게 또 다른 메뉴가 추가되는 사이, 오혜연은 손질된 고기와 뼈, 그리고 각종 채소들과 한약재들을 한데 모아 거대한 가마솥에 끓이기 시작했다.
* * *
일주일 후…….
“자, 다 됐다!”
“…….”
“엄마, 이제 그만……. 아무리 그래도 이건 너무하잖아.”
“잘못했어요. 할머니…….”
“수호 엄마, 나는 오늘 속이 좀 안 좋아서…….”
“할머니, 저희 딱 한 끼만 피자나 치킨 좀…….”
“지금부터 우는 소리 하는 나약한 녀석들은 두 그릇씩 먹을 줄 알아.”
“…….”
요리 연습을 위해서 삼시 세끼 내내 국밥만 먹어야 했던 가족들은 테마 파크의 개장과 더불어 드디어 국밥 지옥에서 해방될 수 있었다.
* * *
“이것 참 상황이 난처하게 되었소. 김정언 동지.”
“면목이 없습네다, 볼기예프 동지.”
크렘린 궁의 심처, 블라디미르 볼기예프 러시아 대통령과 1 : 1로 비밀 면담을 가진 김정언의 어깨는 꽤나 좁아져 있었다.
“설마 반동분자 새끼들이 그런 짓을 저지를 줄은 내래 정말로 몰랐소. 그놈들이 미치지 않고서야 어떻게 그런 짓을…….”
“그래서 어쩔 생각이시오? 이미 북조선은 김정언 동지를 버린 것 같던데.”
“헛소리 하지 마시오! 내가 곧 북조선이오!”
자기도 모르게 광기에 찬 목소리로 울분을 토해 냈던 김정이 자신의 실수를 깨닫고 다급히 사과를 건넸다.
“미안하오. 내래 침착하지 못하게 감정이 먼저 나오고 말았소.”
“아니, 괜찮소. 오히려 그 모습을 보고 나는 안심했소. 조국은 김정언 동지를 버렸어도 김정언 동지는 아직 조국을 버리지 않았구려.”
“미안한 얘기지만 혹시 나를 도와줄 수 있겠소? 내 나라를 찾기 위해 도와만 준다면 볼기예프 동지의 은혜를 결코 잊지 않겠소.”
“우리는 말로 은혜를 갚지 않소. 도움을 주는 것이야 상관없지만 북조선에게는 꽤나 뼈를 깎는 고통을 동반할 텐데 그래도 괜찮겠소?”
“물론이오. 내 나라를 다시 되찾을 수만 있다면…….”
이미 광기와 탐욕에 물든 김정언을 말릴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아니, 오히려 볼기예프는 그의 광기와 탐욕이 더욱 마음에 들었다.
“하면 방법을 생각해 봅시다, 북조선을 불법 점거한 반동분자들을 어떻게 처단할지.”
“고맙소, 동지.”
볼기예프와 김정언의 입가에 잔인한 미소가 맺혔다.
검신이 돌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