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0.
“홀리…….”
자칼은 눈앞에 드러난 광경에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뒤집어지고, 꺼지고, 부서지고, 솟아오른 땅으로 인해 눈이 닿는 평원 대부분이 크게 망가져 있었다.
모르는 사람이 봤다면 이곳에서 전쟁이 일어나거나 지각변동이 발생했다고 생각했을 터였다.
만약 자신에게 이 광경이 단 두 사람의 싸움으로 인해 만들어진 것이라 누군가 얘기한다면?
자칼은 그 사람의 뺨을 후려갈기며 정신 차리라고 얘기했겠지.
“잘 찍었어?”
“아니, 뭐…… 그러려고 온 거긴 한데…….”
“한번 보자.”
어느새 다가온 윤수호에게 순순히 카메라를 넘겨주는 자칼. 그가 촬영한 영상을 확인한 윤수호의 입꼬리가 슬쩍 말려 올라갔다.
“데려온 보람이 있네. 잘했어. 이 정도면 충분하겠다.”
“충분하긴 개뿔이…… 반의반도 못 담았구먼.”
자칼은 실제로도 상당히 불만족스러웠다. 자신의 역량이 부족한 탓에 평생에 단 한 번도 찍기 힘든 엄청난 전투를 제대로 카메라에 담아 내지 못한 탓이다.
“아니, 이 정도면 충분해. 오히려 제대로 찍었으면 그건 그것대로 조작 의심을 샀을 테니까. 물론 정밀 분석을 하게 되면 아니라는 걸 알게 되더라도…….”
“대중은 그렇지 않지. 전문가도 아닐뿐더러 한 번 의심을 사게 되면 쉽게 자신의 실수를 인정하지 않는 법이니까.”
“잘 아네. 안 그랬으면 내가 그런 연출을 할 이유도 없었겠지.”
“연출? 그게 무슨…….”
자칼은 의문이 가득한 얼굴로 윤수호를 쳐다보았다. 그러자 영상을 확인하던 윤수호가 시선만 슬쩍 돌려 그를 쳐다보더니 씨익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그에 자칼이 사색이 된 얼굴로 입을 벌렸다.
“서, 설마……?”
“한 방에 끝내 버리면 누가 봐도 조작 같잖아. 조작이라 선동하기도 쉬울 테고. 그렇다면 상대가 진짜 천장 유기라는 사실을 한눈에 봐도 알아볼 수 있는 게 좋지 않겠어?”
“이, 일부러 쉽게 끝낼 수 있었으면서도 가지고 놀았다는 말이야? 다른 사람도 아닌 톱텐의 천장 유기를?”
윤수호는 부정도, 긍정도 하지 않았지만 자칼은 이미 답을 알고 있었다.
부상은커녕, 땀 한 방울 흘리지 않고 숨결 하나 흐트러지지 않은 모습.
그의 어디에서 방금 전에 톱텐과 싸운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단 말인가?
“말도 안 돼!”
“사기 치지 마라! 이 빌어먹을 자식!”
그때마침 자칼의 마음을 대변하기라도 하듯, 파르토의 양손에 각각 포박당한 남궁귀와 학선이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물론 윤수호는 두 사람을 깔끔하게 무시했지만 자칼은 그럴 수 없었다.
“저 친구가 그러더군. 저 두 사람은 죽이지 말고 생포해 두라고. 설마 두 사람을 풀어 줄 생각은 아니겠지?”
“맞는데?”
“제정신이야? 그러다 중국 정부에게 찍히면 이 땅에서……!”
자칼은 말을 하다 말았다.
너무 현실성이 없어서 자꾸 깜빡하지만, 눈앞의 괴물은 천장 유기를 단숨에 쓰러트릴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가지고 놀다 처리한 괴물 중에 괴물이었다.
지금 중국 정부에서 윤수호를 쫓으면 과연 누가 더 손해일지는 세 살배기 애들도 쉽게 예측할 수 있을 터였다.
그때였다.
크르르르르!
콰우우우우우우……!
그동안 회복을 끝낸 1701이 사납게 으르렁거리며 기운을 폭발시키자 그의 주변으로 태풍이 휘몰아치며 대기가 요란하게 진동하였다.
“얘기는 나중에 하자. 일단 필요한 것부터 마저 챙기고.”
그렇게 얘기한 윤수호는 무슨 조약돌을 주우러 가듯이 가벼운 걸음으로 1701을 향해 걸어 나갔다.
물론 이성이 사라진 1701은 상대가 누군지 알지도 못하고 관심도 없었다. 녀석은 자신에게 다가오는 모든 생물들을 적이라 판단하는지 감지하는 즉시 행동했다.
쒜에에엑!
양손을 모두 합쳐 수십 다발의 촉수가 꼬챙이처럼 뾰족한 끝부분을 앞세우며 공간을 꿰뚫었다.
먹어치운 능력자들의 오러를 모두 흡수한 녀석의 기운은 재생하기 전보다 훨씬 더 강해져 있었다.
하지만…….
“아 참, 이건 오프 더 레코드다, 자칼.”
그렇게 말한 윤수호가 검결지를 휘둘렀다.
그에 손가락 끝에서 뿜어져 나온 검기의 줄기가 마치 굶주린 뱀처럼 촉수 다발을 휘감아 그대로 졸라 버렸다.
촤촤촤촤촤촤촤촤촤촤촤……!
무형의 검기에 순식간에 조각조각 나뉘어 바닥으로 후드득 쏟아져 내리는 촉수의 파편…….
“저, 저게…….”
“허허…….”
그 모습을 지켜보던 남궁귀와 학선은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맨몸으로, 그것도 손가락 두 개로 차원이 다른 기운을 응축시켜 자유자재로 다루는 것도 말이 안 되는데, 그 위력이 자신들의 상상을 아득히 초월한 탓이었다.
-크아아아아!
“시끄러워.”
쩌엉!
촉수가 조각나 비명을 지르는 1701의 눈앞에 어느새 거리를 지워버리고 등장한 윤수호가 그대로 다리를 들어올려 1701의 몸통을 짓밟았다.
콰콰콰콰콰콰콰콰콰콰콰콰……!
1701이 땅속 깊히 파묻히고, 그를 중심으로 거미줄 같은 균열이 사방 수 km까지 뻗어나갔다.
균열을 따라 땅이 부서지고 꺼지는가 하면, 반대로 융기되었다가 박살 나 돌무더기가 되어 쏟아지는 것도 있었다.
단 한 번의 발 구름으로 만들어 낸 광경이라고는 믿을 수 없는 신위에 사람들은 할 말을 잃어버렸다.
“이제야 좀 조용해졌네.”
유기의 기습에도 정신을 잃지 않았던 1701이 윤수호의 발 구름 한 번에 돌 맞은 개구리처럼 늘어져 완전히 정신을 잃어버렸다.
윤수호는 녀석을 어깨에 걸쳐 메더니 자칼과 파르토를 향해 고갯짓했다.
“챙길 것도 다 챙겼으니 이제 그만 가자고.”
“예, 선생님.”
남궁귀와 학선을 놓아준 파르토는 자칼이 장비를 챙기는 걸 기다려 주었다가 그를 안아 들었다.
그사이에도 윤수호나 파르토는 풀어 준 남궁귀와 학선을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남궁귀와 학선 두 사람도 그 사실을 눈치채고 매우 깊은 수치심과 분노를 느꼈다.
하지만 더욱 부끄러운 사실은 두 사람의 의도처럼 자신들이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는 것이었다.
당장 유기를 가지고 놀던 괴물을 제외하고서라도 눈앞의 덩치…… 파르토에게조차 자신들이 전력을 다해 덤볐지만 간단히 제압당하지 않았던가?
부우웅!
결국 자칼을 안아 든 파르토가 날개를 펼쳐 날아오르자 살아남은 생존자들은 그들이 날아가는 모습을 그저 하염없이 지켜봐야만 했다.
* * *
“1701……!”
새로운 연구소에서 1701을 다시 만난 장채림의 두 눈이 크게 흔들렸다.
1701은 자신이 만든 끔찍한 죄악의 형태이자 속죄의 대상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다른 걸 생각할 여유가 없었다.
“어서 연구실로!”
그녀는 1701이 아직 살아있음을 확인하고는 서둘러 그를 연구실로 이송했다.
“백신의 완성까지 얼마나 걸릴 것 같습니까?”
“정확한 검사 결과가 나올 때까지는 저도 확신할 수 없어요. 다만…….”
“다만?”
“그동안 1701의 몸이 엄청난 변이를 거쳤다는 건 한눈에 봐도 알 수 있어요. 그 변이가 항체의 진화에도 영향을 끼쳤다면 분명 제 예상보다 빨리 백신을 개발할 수도 있을 것 같아요.”
“부탁드리겠습니다.”
장채림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장채림과 헤어진 윤수호는 곧장 왕명과 따로 만났다.
“고생 많으셨습니다. 자칼에게 영상을 받아 먼저 확인했습니다. 정말이지 위원장님의 무력에는 언제나 경외심만 갖게 되는군요.”
“지부장님께서도 고생 많으셨습니다. 솔직히 이런 규모와 시설을 갖춘 연구소를 이렇게 빨리 준비하실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으니까요.”
“저야 뭐, 버려진 제약 회사의 공장을 조금 손본 것에 불과하니까요. 위원장님의 업적과는 비교가 불가능하죠. 아무튼 이 영상 말씀입니다만…….”
윤수호가 손가락을 튀기자 문이 열리더니 자칼이 한껏 인상을 찌푸린 채 옷매무새를 가다듬으며 안으로 입장했다.
“나 참, 이제 와서 무슨 비밀 얘기가 남아 있다고…….”
“각설하고, 이 영상 말이야. 표면적으로 공개하지는 않을 거다.”
“…….”
윤수호의 단호한 선언에 자칼이 심각한 얼굴로 고민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나랑 생각이 똑같네. 사실 이 정도 폭발력을 가진 핵폭탄이라면 당장 터트리는 것보다 가지고 있는 게 더 효과가 좋은 법이긴 하지.”
자칼의 말에 윤수호가 살짝 미소를 그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돈 냄새에 민감한 유능한 기자답게, 정보력의 가치를 잘 알고 이용할 줄 알았던 것이다.
“기자님의 말씀처럼 지금 당장 이 영상을 공개해 봤자 중국 정부 측에서 조작이라 우겨 버리고 은폐하면 별다른 힘을 못 쓰고 사장될 겁니다. 하지만 지금은 이 영상 외에도 중국 정부에 타격을 줄 수 있는 다른 무기들이 여럿 있는 상황이죠.”
왕명의 말에 자칼이 눈빛을 번득이며 검지와 엄지를 동그랗게 말았다.
“돈이 되는 기사라 함은 확신이 아닌, 사람들에게 의심을 주는 기사지. 사람은 비로소 자신의 머리, 자신의 가치관으로 기사를 씹어야 흥미와 재미를 느끼는 법이거든. 정보는 거기에 바르는 양념 같은 거고.”
윤수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중국 정부는 발칵 뒤집혔겠지. 1701을 정체도 모르는 의문의 인물에게 강탈당한 것도 모자라 그 놈에게 자국 최대 전력이라 불리는 톱텐까지 당했으니까. 아마 당분간 중국 전역을 이 잡듯이 뒤져서 우리를 찾아내려고 할 거야. 그러니까 당분간은 몸을 좀 사리자고.”
두 사람은 고개를 끄덕여 그의 말에 동의했다.
* * *
수많은 전문가들이 예견한 것처럼 전염병은 시간이 지날수록 가라앉기는커녕 점점 더 악화되었다.
이제는 중국 전역을 넘어 전 세계적인 팬데믹 사태로 확산되자 수많은 정부와 전 세계 사람들이 중국을 성토하기 시작했다.
전문가들은 입을 모아 이번 일의 원인을 제대로 분석, 검증하고 대책을 강구해야 한다며 목소리를 높였지만 중국은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들을 향해 중국을 모함한다고 역으로 손가락질하며 자국과의 무역을 인질 삼은 협박이나 갑질도 마다하지 않았던 것이다.
사람들은 그런 중국의 만행에 분노했지만 안타깝게도 조치할 수 있는 방안 역시 마땅치 않았다.
실제로 지금에 와서는 수많은 나라들의 국익이 중국과 밀접한 연관을 가진 것도 사실이었고 차이나 머니의 파워는 절대로 무시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오죽했으면 미국 외에 다른 나라들은 이번 일을 중국과 관련시키는 것조차 엄금했을 정도였으니 말이다.
결국 각 나라는 이번 전염병의 백신을 개발하기 위해 노력했지만 큰 효과는 없었다.
바이러스의 변이가 너무 빨라서 기존에 연구한 백신들은 금방 쓸모가 없어져 폐기 처분되었기 때문이다.
윤수호도 중국과 한국을 오가면서 최대한 가족들과 자주 연락하며, 되도록이면 집밖으로 나오지 말고 집 안에 있으라고 당부했다.
그렇게 전 세계가 고통에 시달리며 오로지 백신만을 바라고 바라던 그때.
“서, 성공했어요!”
“성공이라면……?”
“1701을 연구한 결과, 바이러스의 모든 변이에 99.998%로 대응하는 항체를 발견할 수 있었어요. 그 항체를 추출해서 백신을 완성하는 데 성공했다는 뜻이에요!”
장채림은 울면서 백신에 대해 설명했다.
바이러스가 창궐한 지 반년이 지나서 이룬 쾌거였다.
검신이 돌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