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6.
북경 모처의 비밀 회의실.
극소수의 사람들을 제외하면 존재조차 알려지지 않은 이곳에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그들은 모두 정·재계에서 세 치 혀만으로 중국의 운명을 좌지우지할 수 있는 중국의 거물급 인사들이었다.
그런 그들조차 한 사람의 등장에 모두 자리에서 일어나 칼 같이 경례를 올렸다.
어지간한 사람들은 벌레 보듯 하는 이자들이 존경과 두려움이 담긴 경례를 올릴 수 있는 사람은 오로지 한 명.
중국의 주석, 서진빙이었다.
“다들 자리에 앉지.”
먼저 자리에 착석한 서진빙이 말하자 사람들이 동시에 착석하였다.
서진빙은 비서진이 건네준 태블릿 PC를 훑어보면서 눈살을 찌푸리더니 입을 열었다.
“사는 게 왜 재미있는 줄 아는가? 이제는 내 뜻대로 되겠거니 싶은 위치와 권력을 손에 넣어도 실상 내 맘대로 되는 일이 하나도 없기 때문이지. 안 그런가들?”
서진빙이 좌중을 스윽 훑어보았다.
“크흠!”
“흐음…….”
사람들은 헛기침을 하거나 목을 가다듬으며 애써 서진빙의 시선을 피했다.
“쯧쯧쯧…….”
서진빙이 혀를 찼다.
“전인대를 2년 앞둔 상황에서 국내에 의문의 바이러스가 창궐이라……. 심지어 평범한 감기 바이러스도 아니고 사람을 괴물로 만드는 끔찍한 바이러스라지? 자네들이 나한테 이 정도로 불만이 쌓였을 줄은 몰랐군. 이렇게까지 내 실각을 기대할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는데 말이야. 허어, 참…… 마음이 쓰리구먼.”
서진빙은 후회와 한탄이 섞인 말투로 마치 자기반성의 뜻이 담긴 것처럼 얘기했지만 실상은 전혀 달랐다.
서진빙은 큰 체구, 푸근한 인상 덕분에 중국에서는 대부로 불리며 많은 존경을 받았지만 그를 아는 사람들은 그게 얼마나 거짓된 모습인지 잘 알고 있었다.
설령 가족이라 하더라도 자신의 앞길에 방해가 되면 용서 없이 자르고 버리는 비정한 정치가.
그게 바로 서진빙이라는 인물이었다.
지금 이 상황이 그에게 얼마나 불리하고 불쾌한 상황인지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아마 다음에 이 같은 자리가 마련된다면 여기서 몇 명이나 다시 볼 수 있을 지 아무도 장담할 수 없었다.
“전염 경로는 어떻게 됐는가? 더 이상 덮을 수 없을 만큼 퍼진 것으로 알고 있는데?”
서진빙의 시선이 죽은 견모항의 뒤를 이어 개조 인간 연구의 책임자가 된 하후단에게 돌아가자 하후단이 식은땀을 닦으며 대답했다.
“그것이…… 이미 감숙성의 전염율은 40%를 돌파했고 감숙성 외에도 전국에서 확진자가 늘어나고 있는 추세입니다. 심지어 해외에서도 확진자로 추정되는 다수의 변종들이 발견되었다는 보고를 오늘 아침에 받았습니다.”
“대처는?”
“당장 모든 언론을 통제하고 공영 방송에서 새로운 유형의 재앙종으로 인한 바이러스 감염 사태라고 공표할 예정입니다. 정부에서도 이에 대한 대책 마련에 총력을 기울이고 있다는 식으로 보도할 생각입니다.”
중국의 최대 공영 방송국 국장이 일어나 대답하자 서진빙은 고개를 주억인 후에 다시 질문을 던졌다.
“현재 백신의 진척 상황은?”
“그게…… 이전 견모항 소장이 바이러스에 대한 연구 자료들을 전부 폐기하거나 은닉하는 바람에 남아 있는 정보가 거의 없는 상황입니다. 그래서 처음부터 다시 만드는 것이나 다름없는 상황이기에…….”
“하후단 연구소장.”
“예? 예! 각하!”
“나는 변명 말고 백신의 진척 상황을 물었다만?”
정색한 서진빙과 마주한 하후단은 자신의 심장이 싸늘하게 얼어붙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빠르면 1년…… 제대로 임상 실험을 거치고 안정성을 확보하려면 최소한 2년은 걸릴 것으로…….”
“나라가 망한 후에나 백신이 나온다는 말이군. 소장은 좋겠구려. 적어도 나라가 망하는 꼴을 직접 보지는 않을 테니까.”
“……!”
그의 말의 속뜻을 이해한 하후단은 기겁하며 곧바로 대답했다.
“1701! 탈출한 1701만 확보하면 기간을 1년 안으로 단축할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아니, 할 수 있습니다! 더불어 1701의 유전자 데이터만 확실히 분석할 수 있다면 향후 우리나라의 미래를 수호할 인민병의 양산도 차질 없이 진행할 수 있을 것으로 확신합니다.”
“거참, 오랜만에 쓸 만한 대답을 듣는군. 그래서 곽 국장, 그 1701의 행방이 아직도 묘연하다고?”
“죄송합니다. 각하.”
공안 특무대 국내보위국 국장 곽부기는 서진빙에게 고개를 숙였다.
“처음에는 놈의 행방을 어렵지 않게 쫓을 수 있었으나 그 후로는 놈도 학습했는지 몸을 숨기는 재주가 제법 늘어나서…….”
“아니, 아니, 그런 건 다 핑계에 불과하지. 요는 군인들이 제 할 일을 제대로 수행하지 않기 때문 아닌가?”
“…….”
“1701과 접촉하면 괴물이 된다. 그 두려움이 우리 위대한 인민 전사들의 발을 묶고 있다는 걸 잘 아오. 그것은 인민의 전사가 할 짓이 아니지. 겁쟁이야.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겁쟁이. 곽 국장은 들으시오.”
“예, 각하.”
“1701에 대한 수색 병력을 다섯 배로 늘려 주겠소. 또한 수색에 소극적인 대원들이 있다면 군법으로 엄히 다스리시오. 그리고 1701이 발견되는 즉시 놈을 생포하시오. 한데 놈의 전투력이 예상보다 뛰어나다고?”
“그렇습니다. 바이러스를 제외하고서라도 놈의 전투력은 저희 특무대의 부장급 열 명 이상의 능력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녀석의 특성과 능력을 고려하면 실제 놈을 제압하는 데 필요한 전력은 부장급 서른 명이나 금의대, 혹은 동창대의 지원이 필요할 것으로 추정됩니다.”
공안 특무대의 부장은 특무대 실무팀 최고 직급이었으며 최상급 알터에 비견되는 상당한 강자였다.
또한 금의대와 동창대는 한국의 치우팀처럼 중국의 특수 정예 능력자 부대를 칭하는 말이었는데 이들의 최소 능력은 오버 알터 이상이었다.
그리고 보위국장인 곽부기조차 이들을 지휘하기 위해서는 서진빙의 허가가 필요할 정도의 강력한 전력이라고 할 수 있었다.
“하후돈 소장. 전에 말한 면역제는 완성되었나?”
“그렇습니다! 알터들의 특수 면역 체계를 강제 활성화시켜 일반인들에게는 효과가 없지만 뛰어난 능력자일수록 바이러스에 대한 면역력이 일시적으로 크게 증가하는 효과를 보였습니다. 부장급만 하더라도 최소 40분에서 최장 한 시간까지 면역이 가능한 것으로 확인되었습니다.”
“그렇다면 금의대나 동창대는 넉넉잡고 최소 한 시간 이상은 버틸 수 있겠구먼. 현재 1701의 수색 인원을 열 배로 늘이고 발견 즉시 금의대와 동창대의 투입을 허가하겠소. 금의대와 동창대의 지휘는 천장(天將)에게 맡기도록 하지.”
“처, 천장까지 투입하시겠다는 말씀이십니까?”
사람들이 놀라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천상의 장군이란 뜻을 가진 천장은 중국의 톱텐, 유기의 이명이었기 때문이다.
“이것은 우리나라의 국운이 걸린 명백한 전시 상황이오. 천장을 투입해서라도 하루 빨리 이 문제를 해결 할 수 있다면 그보다 좋은 일은 없을 터. 맡은 바 임무에 모두가 목숨을 걸어야 이 위기를 헤쳐 나갈 수 있음을 명심하십시다. 다들 잘 알겠소?”
“예! 각하.”
“그럼 다들 일 봅시다.”
서진빙이 먼저 자리에서 일어나 나가자 그의 모습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모든 사람들이 그에게 거수경례를 올렸다.
* * *
“선생님,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괜찮습니다. 들어오세요.”
윤수호가 허락하자 왕명이 문을 열고 방으로 들어왔다. 바이러스 자체는 그녀의 체내에 잠복해 있다가 엘릭서와 함께 소멸했으니 크게 문제는 없었다.
“분석이 완료되었습니다. 함께 확인해 보시겠습니까?”
윤수호는 장채림에게 시선을 돌렸다. 이번 사태의 책임자인 장채림 역시 당연히 동석할 권리가 있었기 때문이다.
“저도 함께 가도 될까요?”
“물론입니다.”
눈치를 읽은 장채림이 먼저 요청하자 윤수호는 그녀와 함께 거실로 향했다. 거기에는 브리핑을 위한 모든 준비가 갖춰져 있었다.
분석한 정보들은 장채림의 이야기를 뒷받침하는 물적 증거들이었다.
다만 한 가지, 아쉬운 사실은 있었다.
“자칼의 데이터 칩 말입니다만…… 다운로드와 동시에 암호화가 되도록 록이 걸려 있었습니다. 암호를 해제하려면 저희 측 전문 암호 해독 기관으로 가져가도 최소 몇 달은 걸릴 것 같다는 전문가의 의견이 있었습니다. 어떻게 할까요, 선생님.”
“역시 프로 기자는 뭐가 달라도 다르다는 거군요.”
윤수호는 피식 입꼬리를 말아 올렸지만 크게 상관하지 않았다. 데이터 칩의 내용이야 원하던 결과의 부산물일 뿐, 그의 목적은 따로 있었기 때문이다.
“상관없습니다. 애초에 그건 미끼였으니까요.”
“미끼요?”
“네, 지금쯤 애타는 심정으로 자칼이 그 데이터 칩을 기다리고 있겠죠.”
“자칼이 선생님을 만날 거라고 보십니까?”
“그가 정말로 지부장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돈 냄새를 잘 맡는 기자라면 그렇게 되겠죠. 그런데…….”
윤수호는 옆에서 심각한 표정으로 이야기를 듣고 있던 장채림을 쳐다보았다. 그녀는 윤수호와 눈이 마주치자 살짝 놀라며 고개를 갸웃했다.
“백신을 완성하기 위해서 필요한 게 1701이 끝입니까?”
“물론 1701도 중요하긴 하지만 당연히 백신을 연구하기 위한 연구소도 필요해요. 조력자는 있으면 좋지만 없어도 상관없고요.”
“부탁드려도 될까요? 지부장님.”
“곧바로 준비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럼 저도 슬슬 낚싯대를 건져 올리도록 하죠.”
윤수호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 * *
“선배, 누가 보면 욕구불만인 줄 알겠어요. 아니면…… 정말로 그런 거예요?”
“닥쳐!”
분개한 목소리로 자칼이 소리치자 실비아가 모른 척 커피를 마시며 능청을 떨었다.
쪽지에 적힌 장소에 약속한 시간보다 먼저 도착한 자칼은 헛웃음을 터트렸다.
건설이 중단된 아파트 단지. 그중 한 동의 12층에 어울리지 않는 테이블과 다과 세트가 번듯하니 준비되어 있었던 것이다.
자칼은 의자에 앉아 어제 있었던 일을 떠올렸다.
정말로 유령이든, 괴물이든, 사람이든, 그게 뭐가 됐든지 간에 그런 건 크게 중요하지 않았다.
중요한 건 그 존재가 보여 준 압도적인 강함. 초월적인 능력이었으니까.
‘섣불리 판단하는 건 금물이지만 그럼에도 내 코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이 괴물은 이전에도, 이후에도 상상하지 못 할 터무니없는 괴물이라고.’
냄새가 났다. 그 어느 때보다 강렬하고 위험한 돈의 냄새가…….
그렇게 약속한 시간이 되자 누군가가 자칼의 눈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늦지 않게 왔군.”
“당신…….”
가우창의 모습으로 자신을 찾아온 윤수호를 보고 자칼이 눈을 가늘게 떴다.
“뭐야, 정말로 사람이었어? 아쉽네요. 전 정말로 돌아가신 우리 할머니가 지켜 주신 줄 알았는데…….”
실비아의 헛소리를 가볍게 무시한 자칼이 자신의 앞에 앉은 윤수호에게 직설적으로 물었다.
“당신이지? 우돈의 비밀 연구소에서 모습을 감추고 우리를 도와준 도둑놈이.”
“애초에 그쪽도 뻔뻔하게 따져 물을 입장은 아닐 텐데? 좀도둑.”
윤수호는 자연스럽게 영어로 상대방의 말을 반박하며 가볍게 자칼을 이죽거렸다.
“목적이 뭐지? 데이터 칩이 그쪽한테는 싸구려 초코칩보다 못 하다는 걸 깨닫기 전부터 나를 이쪽으로 불러낸 걸 보면 내가 훔친 기밀문서가 목적은 아닌 것 같고.”
자칼의 추측에 윤수호는 한쪽 입꼬리를 비틀며 물었다.
“듣자하니 네가 돈 냄새를 잘 맡는다고 하더군. 어때? 나한테서도 돈 냄새가 나나?”
그에 마찬가지로 한쪽 입꼬리를 말아 올리며 대답하는 자칼.
“돈 냄새가 나냐고? 돈 냄새가 풍기다 못 해 코를 찌를 지경이야. 아주 어질어질해. 그래서 그런지 정신을 차리고 보니 여기 있더군. 이 정도면 만족할 만한 대답이 됐나?”
“돈과 명예를 위해서 목숨도 걸 수 있나?”
“목숨보다 가치가 있다면 얼마든지.”
‘으으으…… 엄마, 아빠, 여기 미친놈들이 있어요. 그것도 둘씩이나요. 흐흐흑…….’
실비아는 서로를 마주 보며 웃음을 흘리는 두 악마의 모습에 속으로 눈물을 흘렸다.
검신이 돌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