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0.
적을 짓밟는 것과 은혜를 베푸는 것의 공통점이 있다면 무엇일까?
그것은 다른 생각이 나지 않을 정도로 확실하게 해야 한다는 것이겠지.
지금의 윤수호가 그랬다.
선화는 자신이 보기에 중요도가 상당히 높은 인물이었다.
미르의 측근이면서, 동시에 서로간의 유대 관계가 끈끈한 인물이었고 신뢰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게다가 미르의 말로는 환수족 술사 중에서도 상위에 속하는 실력자라고 하니 실력에는 의심의 여지도 없었다.
이런 사람에게 은혜를 베풀어 두면 앞으로 필요할 때 유용하게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그게 아니더라도 윤수호는 미르에게 도움이 되는 선화를 그냥 두고 볼 생각이 없었지만 말이다.
그러나 윤수호의 예상을 살짝 빗나간 사실이 있다면…….
‘이거 엄청난데?’
본래대로 회복한 여우 구슬은 윤수호의 선기를, 말 그대로 굶주린 아귀처럼 먹어치우고 있었다.
윤수호는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선기를 계속해서 구슬에 쏟아붓는데도 구슬은 밑 빠진 독처럼 한계를 모르고 선기를 흡수하였다.
‘이거 은혜 좀 입히려다 기둥뿌리 뽑힐 수도 있겠는데?’
윤수호는 속으로 겸연쩍게 웃으며 여우 구슬을 바라보았지만 여기서 포기할 생각은 없었다.
앞서 말한 이유도 있지만 이 작은 구슬 하나 때문에 포기하고 싶지 않은 것도 사실이었다.
‘그래, 어디 한번 해 보자고.’
한마디로 지금부터는 오기의 영역이었다.
콰우우우우우!
하늘 높이 승천한 윤수호는 1단계 봉인을 너머 2단계까지 단숨에 해제했다.
본래라면 자연스럽게 뿜어져 나오는 기운 만으로도 주변 일대가 요동치고, 폭풍이 일어야 정상이었지만 밤하늘은 잠이 든 듯 고요했다.
윤수호가 기운을 갈무리한 게 아니다. 구슬이 뿜어져 나오는 선기를 모두 흡수하는 탓이었다.
‘아무래도 미르의 안목이 맞았던 것 같군.’
미르가 얘기하길 선화는 깨달음도, 도술도 부족함이 없지만 선기가 충천하지 못 하여 선인이 되지 못했다고 한다.
그만큼 여우 구슬이 선기에 굶주려 있었던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마치 지금까지의 한을 풀려는 듯이 여우 구슬은 윤수호의 선기를 아낌없이 흡수하였다.
하지만…….
파지직! 파직!
아무리 여우 구슬이라 해도 한계는 있었다.
그 어떤 깊은 우물이라도 바다를 담을 수는 없는 것처럼 여우 구슬 또한 이내 만복의 신호를 알리며 흡수되지 않은 선기를 외부로 분출하였다.
“진짜 많이도 처먹었네.”
피식 웃은 윤수호는 구슬을 가지고 지붕으로 내려섰다.
어차피 여우 구슬이 흡수한 선기야 자신이 가진 선기의 극히 일부에 불과했고 심지어 그마저도 금방 회복할 수 있기 때문에 그의 입장에서는 아쉬울 것도 없었다.
“괘, 괜찮으세요?”
하지만 그 사실을 모르는 선화는 윤수호를 걱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사실 선기를 나눠 준다는 것은 신선들조차 극히 꺼리는 행위였기 때문이다.
윤수호는 모르고 있었지만 사실 선기는 내공처럼 그렇게 간단히 회복할 수 있는 기운이 아니다.
단지 그가 익힌 천부공이 특별할 뿐이지.
“조금 뻐근하긴 한데, 뭐 신경 쓸 정도는 아닙니다. 그보다…….”
윤수호는 살짝 엄상을 떨며 그녀에게 여우 구슬을 건네주었다.
처음에는 진주처럼 반투명하게 빛나던 여우 구슬이었지만 지금은 오색 빛깔로 아름답게 물들어 오묘한 기운을 발산하고 있었다.
“이게…….”
꿀꺽…….
선화는 저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켰다.
자신이 알고 있던 여우 구슬의 선기는 아무리 노력해도 바닥에 가까웠다. 지금처럼 충만하다 못해 넘쳐흐를 것 같은 모습은 그녀도 처음 봤던 것이다.
“부담 갖지 말고 받아 주세요. 선화 씨를 위한 일이기도 하지만 미르를 위한 일이기도 하니까.”
선화는 무겁게 고개를 끄덕인 뒤 여우 구슬을 조심스럽게 손으로 인도하였다.
구슬은 마치 스스로 의지를 가진 것처럼 선화가 손으로 집지 않아도 그녀의 손을 따라 자연스럽게 그녀의 가슴 속으로 흡수되었다.
그 순간!
파앗!
순간 엄청난 빛이 터져 나와 윤수호가 주변 일대를 강기 막으로 가려 버렸다.
그러지 않았다면 순간 밤이 낮으로 바뀐 줄 안 가족들이 깜짝 놀라 밖으로 뛰쳐나올 수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만큼 선화의 몸에서 터져 나온 빛은 엄청났다.
빛은 순식간에 사그라들었지만 그녀의 몸에서는 화수분처럼 선기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그동안 공부와 술법이 닿았어도 선기가 부족하여 얻지 못 했던 깨달음을 차례차례 자신의 것으로 만들기 시작하는 선화.
화악!
그녀의 등 뒤로 길고 폭신해 보이는 여우의 꼬리가 펼쳐졌다. 그 숫자는 세 개. 본래 그녀가 가지고 있던 꼬리의 숫자였다.
그런데…….
스르르르…….
빛의 아지랑이가 모이면서 조금씩 형체를 이루더니 놀랍게도 또 하나의 꼬리를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게 끝이 아니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선화의 꼬리가 한 개씩 늘어나기 시작했다.
처음 세 개를 시작으로 네 개는 다섯 개가 되고, 곧 여섯 개가 되더니, 그 뒤로도 멈추지 않고 새로운 꼬리가 생겨났다.
그녀의 깨달음에 선기가 닿을 때마다 하나씩 꼬리가 늘어가고 있던 것이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자 이내 휘몰아치던 선기가 안정을 되찾으며, 꼬리의 개수도 더 이상 늘어나지 않았다.
선화는 부채처럼 펼쳐진 아홉 개의 꼬리를 살랑거리며 눈을 떴다.
여우의 눈처럼 길고 뾰족한 눈동자에서 깊은 안광이 흘러나왔지만 금세 갈무리하였다.
“이, 이게……?”
선화는 불신이 가득한 눈으로 자신의 모습을 돌아보았다. 특히 풍성하고 아름다운 아홉 개의 꼬리는 현실보다 꿈에 가까운 광경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구미호선을 달성한 호선은 역대 호선족 중에서도 그 숫자가 손에 꼽을 정도였기 때문이다.
“마음에 들어요?”
“……!”
윤수호의 목소리를 듣고 그제야 현실을 자각한 선화가 눈을 크게 뜨며 그 자리에서 즉시 윤수호에게 큰절을 올렸다.
그 모습에 윤수호는 감탄을 금치 못했다
아홉 개의 꼬리를 마치 치마폭처럼 감싸 우아하게 절을 올리는 그녀의 모습은, 아름답다 못해 아찔한 기분마저 들 정도였다.
‘구미호에게 빠지면 혼까지 털어다 준다는 게 거짓이 아닐 수도 있겠어.’
“호선족의 삼미호선…… 아니, 구미호선 선화. 수호 공에게 목숨으로도 갚지 못 할 은혜를 입었습니다. 미르 공주님에게 해가 되는 일만 아니라면 은인께서 명령하시는 모든 일들에 본녀는 목숨을 아끼지 않을 것입니다.”
원하던 것 이상의 결과가 나오자 윤수호는 애써 함박웃음을 감추며 그녀를 자리에서 일으켜 세웠다.
“저는 제가 할 수 있는 일을 했을 뿐, 지금의 결과는 오롯이 선화 씨의 노력과 재능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신경 쓰지 말라고 말씀드려도 들은 척조차 하지 않으실 테니 일단은 그 마음만 받겠습니다.”
그렇게 윤수호는 예상했던 바를 아득히 초월하는 든든한 아군을 손에 넣을 수 있었다.
* * *
“그게 그렇게 된 일이었구나. 축하한다. 참으로 축하하노라!”
“고맙습니다, 공주님.”
다음 날 아침.
선화에게 일어난 경사를 알게 된 미르가 그녀의 품에 폴짝 뛰어들어 그녀를 축하해 주었다.
마치 자기 일처럼 눈물까지 흘리며 기뻐하는 모습에 그녀를 꼭 끌어안은 선화도 참았던 눈물을 주체할 수 없었다.
“구미호선? 내가 잘 몰라서 그러는데 그게 그렇게 대단한 거야, 오빠?”
두 사람이 기뻐하는 모습은 보기 좋았지만 구미호선이 무엇인지 정확히 그 사정을 알지 못 하는 윤수아나 가족들 입장에서는 살짝 이해하기 힘든 것도 사실이었다.
그에 윤수호는 그들의 상식선에서 납득할 수 있을 만한 비유로 설명해 주었다.
“만약에 네가 서울역 노숙자였다가 하룻밤 만에 ×마존 CEO가 되면 어떤 기분일 거 같아?”
“……그 정도라고?”
“그 이상의 비유가 생각나는 게 없더라고.”
“…….”
어느 정도 진정된 미르는 선화의 품에서 내려오더니 윤수호에게 다가와 눈물을 닦고 다소 진지한 표정으로 그에게 고개를 숙였다.
“먼저 감사를 표하마. 이미 그대에게 받은 은혜가 바다와 같은데 또다시 하늘과 같은 은혜를 입었으니 이 은혜를 어찌 다 갚아야 할지 가늠조차 되질 않는구나.”
“신경 쓰지 마. 내가 하고 싶어서 한 일이니까.”
“그치만…….”
결국 참고 참던 미르가 눈물을 글썽이며 울먹였다.
너무 고맙고 미안한데, 뭐라도 해서 조금이라도 은혜를 갚고 싶은데…… 자신의 손으로는 아무것도 해 줄 수 없는 것이 그저 답답했기 때문이다.
그런 미르의 예쁜 마음씨가 눈에 보였던 윤수호는 살짝 미소를 그리며 미르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정 그렇게 은혜를 갚고 싶다면 쥬신의 공주로서 제대로 환수족을 이끌어 봐. 네가 열심히, 그리고 올바른 길로 그들을 이끄는 게 결과적으로 나에게도 이득이 되는 일이니까.”
“알았다. 내 신명을 바쳐 나의 백성들을 올바른 길로 인도하겠노라.”
사명감에 불타오르는 미르의 모습은 이런 말이 어떨지 모르겠지만 그저 귀여울 뿐이었다.
* * *
아침 식사 후.
윤수호와 미르, 그리고 주말을 맞아 학교를 쉰 은지한까지 모두가 함께 도악산을 찾았다.
은지한이 친구들과의 약속까지 취소하면서 자청하여 도악산을 찾은 이유.
그것은 어쩌면 윤수호를 제외하고 대한민국 최강자를 가리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대단한 대결을 직관하기 위해서였다.
“준비됐어요, 선화 씨?”
“네, 언제든지.”
“그럼…… 소환, 엘도라드.”
엘도라드를 소환하자 빛이 걷히면서 황금빛 찬란한 무구를 갖춘 황금 고블린이 모습을 드러냈다.
“크하하하! 드디어 과인을 불러 주었구나. 내 어젯밤부터 이 순간을 어찌나 고대했는지. 감사하다, 마스터!”
“시끄러워. 어젯밤부터 잠도 못 자게 수시로 싸우게 해 달라고 쫑알거렸던 것만 생각하면 선화 씨가 아니라 내가 상대해 주고 싶은 기분이니까.”
“그것도 좋지만 나중으로 미루도록 하지. 지금은 마스터보다 저 여인에게 더 관심이 있으니 말이야.”
엘도라드 또한 트럼프 속에서 선화의 기운을 느꼈다.
그때부터 윤수호에게 선화와 싸울 자리를 마련해 달라고 떼를 쓰는 바람에 하는 수 없이 선화에게 양해를 구하여 이런 자리를 만들었던 것이다.
사실 마음만 먹었다면 강제로 엘도라드의 입을 다물게 할 수도 있었지만 그렇게 하지 않은 건 다름 아닌 선화 때문이었다.
선화 역시 달리진 자신의 힘을 시험해 볼 상대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듣던 대로…… 아니, 그 이상으로 강하신 분이시군요. 엘도라드 공, 이거 힘을 조절할 고민을 덜 수 있어서 다행이네요.”
“크하하하! 좋다. 진정한 강자라면 과인을 눈앞에 두고 그 정도 배짱은 부릴 줄 알아야지!”
파앗! 슉!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엘도라드가 땅을 박차며 모습을 감추고, 동시에 선화 역시 도술을 사용하여 모습을 감추었다.
검술과 도술.
서로 장르는 다르지만 두 사람 모두 하늘에 닿을 정도의 강자라는 건 변함없는 사실이었다.
엘도라드는 자신이 익힌 검술을 극한까지 활용하여, 선화는 그동안 배우고도 선기가 닿지 못해 사용할 수 없었던 깨달음의 상승 도술을 아낌없이 사용하며 서로 맞부딪쳤다.
“우아악!”
“세상에…….”
경천동지라는 말로도 부족한 두 사람의 싸움에 미르는 혼비백산하며 윤수호의 뒤로 숨어서 고개만 빼꼼 내밀었다.
은지한 역시 오러를 끌어 올려 자리를 지키고는 있었지만 그게 전부였다. 자신이 마치 부딪치는 두 개의 태풍 앞에 선 개미 같아 허탈함마저 느낄 지경이었다.
한편, 윤수호는 두 존재의 대결을 지켜보면서 미소를 그렸다.
승부는 백중지세.
누가 위고, 누가 아래라고 나눌 수 없을 만큼 팽팽하게 이어졌다.
‘믿을 만한 녀석들이 늘어간다는 건 역시 기분 좋은 일이군.’
그렇게 윤수호의 영향력은 점점 더 커져 가고 있었다.
검신이 돌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