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9.
“맛이 있구나! 궁에서 요리사들이 해 준 음식들도 맛있지만 할머니가 해 준 음식들도 너무 맛이 있다!”
“공주님도 참~ 할머니라니……. 남들이 들으면 오해하겠네.”
“여보, 왜 그렇게 몸을 꼬아요? 남들이 보면 공주님이 아니라 당신을 오해하겠어요.”
“아, 그게 나도 모르게 그만…….”
오혜연은 겸연쩍게 웃었다.
물론 그녀의 웃음과 행동의 의미를 모를 사람들은 없었다.
미르가 집을 찾아오고 난 이후로 온 가족의 웃음꽃이 활짝 피었다.
특히 오혜연은 미르를 아예 자신의 옆에다 앉혀놓고 이것저것 챙겨 주기 바빴다. 마치 자신의 친손녀처럼…….
미르도 그런 오혜연의 손길이 싫지 않은지 할머니라고 부르면서 잘 따르고 있었다.
“왜?”
윤수호는 식사를 하다가 옆에서 팔꿈치로 옆구리를 콕콕 찌르는 동생에게 슬쩍 시선을 돌렸다.
그러자 윤수아는 엄마와 미르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밥을 우물거리며 심드렁하게 얘기했다.
“오빠 빨리 장가가야겠다. 주변에 괜찮은 여자 없어? 없으면 소개시켜 줄까?”
“뜬금없이 무슨 장가 타령이야.”
“지금 저 모습을 보고도 그런 말이 나와? 난 저러다 엄마가 공주님을 우리 호적에 올리자는 소리가 나와도 전혀 이상하지 않을 거 같은데?”
“손주라면 지연이 지한이도 있잖아.”
윤수호의 말에 윤수아는 작은 한숨을 쉬며 대답했다.
“물론 지연이, 지한이도 엄마의 소중한 손주들이 맞지. 근데 그거랑 이거랑은 전혀 달라.”
“확신해?”
“이보세요, 윤수호 씨. 이래봬도 제가 두 아이 엄마입니다. 지연이가 결혼해서 아이를 낳았다고 내가 지한이 아이를 포기할 것 같습니까? 천만의 말씀이지요. 만약 지연이가 좋은 남편 만나서 아이까지 낳았는데 지한이는 애는커녕 장가도 안 갔다? 그건 뭐, 천하의 불효자식이지. 엄마 속이 새까맣게 타들어 가는 줄도 모르고 말이야.”
“……잘 먹었습니다.”
어째서인지 윤수호, 윤수아 남매의 대화에 은지한만 죄지은 듯한 얼굴로 급히 식사를 마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윤수호는 어깨를 축 늘어트린 채 멀어지는 은지한을 쳐다보며 나직하게 입을 열었다.
“지한이도 내일 당장 누구라도 붙잡고 결혼할 것 같은데?”
“뭐? 그게 무슨 소리야? 지한이가 결혼한대? 누구랑? 아니, 얘가 여친이 생겼으면 엄마한테 말을 하든가. 게다가 뭐? 결혼? 아니, 상식적으로 너무 빠르잖아!”
“하아…….”
이럴 때만 눈치를 엿 바꿔 먹은 것 같은 동생의 모습에 윤수호와 은지연은 서로를 마주 보더니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 * *
저녁을 먹고 거실에서 가족이 모두 모여 다과를 즐기면서도 가족들의 얼굴에는 웃음꽃이 떠나질 않았다.
-아기 고래~ 뚜루루뚜루~ 귀여운~ 뚜루루뚜루~ 깊은 바다~ 뚜루루뚜루~ 아기 고래!
재생된 동요에 맞춰 열심히 율동을 추는 미르의 모습에 윤지석, 오혜연은 함박웃음을 터트리며 손뼉을 쳐 주었고, 다른 가족들 역시 같이 손뼉을 치면서 미르를 응원했다.
물론 미르가 동요를 알고 맞춰서 율동을 출 리가 없었기 때문에 다소 우스꽝스럽고 재미있는 모양새가 되었지만 그 모습이 또 어찌나 귀여웠던지…….
“하암~ 졸리구나.”
“그럼 할머니, 할아버지랑 같이 코 잘까? 선화 씨, 그래도 될까요?”
“나는 상관없다만…….”
“아, 물론이죠!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미르는 물론이고 선화까지 허락하자 미르는 졸린 눈을 비비며 두 사람의 손을 잡고 방으로 들어갔다.
그렇게 자리가 정리되고 찾아온 개인 시간.
옥상에 마련된 벤치에 앉은 선화가 가슴 어림에 손을 얹었다. 그러자 옅은 빛과 함께 가슴에서 무언가가 빠져 나왔다.
선화의 손바닥 위에 놓인 그것은 빛을 잃고 금이 간 여우 구슬이었다.
“하아…….”
선화의 시름이 깊어졌다.
물론 그때 당시의 상황은 정말로 어쩔 수가 없었다. 자신이 전력을 다하지 않는다면 절대로 미르를 지킬 수 없었던 상황이었으니까.
다만…….
“여기서 뭐 하세요?”
“수호 공.”
윤수호는 자연스럽게 비어 있는 그녀의 옆자리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았다. 그러자 선화는 다급히 여우 구슬을 품속에 숨겼다.
“별이 참 아름답죠?”
“예?”
윤수호는 당황하는 선화에게 손가락으로 하늘을 가리켰다. 하늘에는 많은 별들이 저마다의 자리에서 빛을 발하고 있었다.
“불과 20년 전만 하더라도 서울에서는 꿈도 못 꿀 야경이었어요. 사람들의 숫자가 크게 줄고, 이 도시가 어둠속에 가라앉으면서 밤하늘은 다시 빛을 찾았죠. 하지만 최근 들어 다시 밤하늘에서 별빛이 사라지고 있습니다. 그만큼 지상의 빛이 다시 밝아지고 있다는 소리죠.”
“도시가 다시 예전처럼 돌아왔다는 말씀이신가요?”
“지금 당장은 불가능하더라도 조금씩 노력하다 보면 언젠가는?”
선화는 윤수호의 심심한 위로에 살며시 미소를 머금었다.
“그렇다면 저희도 언젠가는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겠죠? 꾸준히 노력한다면…….”
“돌아갈 수 있습니다, 언젠가 반드시. 그런데…….”
윤수호가 호기심 섞인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며 물었다.
“아까 다급히 숨기시던 게 혹시 여우 구슬입니까?”
“여우 구슬에 대해서 아세요?”
선화가 깜짝 놀라서 되물었다.
“미르에게 들었습니다. 선화 씨에게서 여우 구슬의 선기가 느껴지지 않는다고. 혹시 자기 때문에 여우 구슬이 상한 건 아닌지 걱정하고 있더군요.”
“공주님께서요? 하지만 그런 기색은 한 번도…….”
“그런 녀석이잖아요, 미르는.”
윤수호가 미소를 그리며 대꾸하자 선화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이 걱정할까 봐 미르는 걱정하는 모습을 철저히 숨기고 최대한 밝은 척 노력했을 것이다. 미르는 그런 아이였으니까.
“실례가 안 된다면 한 번 볼 수 있을까요?”
윤수호의 조심스러운 부탁에 선화는 여우 구슬을 꺼내 그에게 건네주었다.
금이 가고 빛이 바랜 여우 구슬은 금방이라도 깨질 것처럼 위태로워 보였다.
‘정말로 선기가 티끌만큼도 느껴지지 않는군.’
미르는 여우 구슬이야말로 호선(狐仙)의 정수라고 하였다.
여우 구슬로 도를 닦아 신선의 경지에 이르러 선계로 입선하는 것이야말로 모든 호선들의 꿈이라고…….
“미르를 지키는 데에 여우 구슬의 힘을 모두 소비한 건가요?”
“네……. 하지만 후회는 없습니다. 몇 번이고 그때로 돌아간다 하더라도 저는 같은 선택을 할 테니까요. 다만…….”
“다만?”
“아쉬움은 좀 있어요. 더 이상 제 손으로 공주님을 지켜드리는 건 불가능할 테니까요…….”
선화가 자조 섞인 미소를 그리며 고개를 떨궜다.
입선이 불가능해졌다는 사실도 괴로웠지만 그보다 더 괴로운 건 더 이상 자신의 손으로 미르를 지켜 줄 수 없다는 사실이었다.
여우 구슬이 없는 여성 호선은 평범한 남성보다 조금 더 신체조건이 강한 일반인에 불과했으니까.
“물론 저보다 강한 전사들께서 공주님의 곁을 지켜 주실 테니 저로서는 정말로 다행스러운 일이지만요.”
“하지만 본인의 손으로 미르를 계속 지키면서 수행하고자하는 소망 또한 사실인 거죠?”
“…….”
선화는 부정하지 않았다. 하지만 방법이 없는 것도 사실이었다.
“여우 구슬은 한 번 효력을 상실하면 다시는 돌아오지 않아요. 깨진 그릇에는 폭포수를 부어도 차지 않는 것처럼, 한 번 깨진 여우 구슬에는 선기가 깃들지 않으니까요.”
“여우 구슬은 다시 만들 수 없는 겁니까?”
선화는 무거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여우 구슬은 호선이 가지고 태어나는 단 하나의 정(靜)이에요. 소멸하거나 망가진다면 두 번 다시 고칠 수 없죠.”
“그렇군요. 그럼 하나 시험해 보도록 하죠.”
“네? 시험요?”
“소지품 창.”
윤수호는 그 자리에서 바로 소지품 창을 열었다.
그러자 그의 눈앞에 그만이 볼 수 있는 소지품 창이 열리면서 거기에 보관된 무수한 아이템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윤수호는 그중에 하나를 꺼냈다.
“그, 그게 뭔가요? 혹시 수호 공도 공주님처럼 아공간의 술법을……?”
선화는 윤수호가 갑자기 허공에서 물건을 아무렇지 않게 꺼내자 깜짝 놀라 묻자 윤수호가 고개를 저었다.
“미르에게 배우긴 했는데, 아직 실전에서 써먹을 수준은 안 됩니다. 이건 소지품 창이라고 해서 던전을 클리어해 손에 넣은 능력이죠. 그리고 지금 꺼낸 건 감정 주문서라는 겁니다.”
“감정 주문서요?”
“네, 던전에서 얻을 수 있는 아이템의 성질과 기본적인 정보를 제공해 주죠. 비단 아이템뿐만 아니라 현실의 사물을 대상으로도 사용이 가능하더군요.”
윤수호가 감정 주문서를 사용하여 여우 구슬을 확인한 결과, 여우 구슬의 아이템 분류는 ‘보석류 잡화’로 취급되었다.
즉, 무기도, 방어구도, 장신구도 아니라는 뜻이었다.
‘보석류 잡화라면 속성 스크롤은 주문 부여가 불가능하고…… 그렇지, 이게 좋겠다.’
윤수호가 다음으로 인벤토리에서 꺼낸 것은 작은 상자였다.
“그건……?”
“광택제라는 아이템입니다. 보석류 잡화의 광택을 한층 더 업그레이드시켜 주는 아이템이죠.”
윤수호는 광택제를 사용하여 망가진 여우 구슬에 적용시켰다. 그러자 놀랍게도 빛바랜 깨진 여우 구슬에서 빛나는 깨진 여우 구슬로 변화하였다.
“다행히 광택제는 적용이 되네요.”
“하지만…….”
선화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아이템이란 기물을 사용해서 빛바랜 구슬이 다시 빛을 되찾은 것은 나쁘지 않았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아무것도 달라지는 게 없었기 때문이다.
“걱정 마세요. 진짜는 지금부터니까.”
“네?”
윤수호가 마지막으로 인벤토리에서 꺼낸 아이템.
이것이야말로 윤수호가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광택제를 여우 구슬에 바른 이유였다.
“던전 밖의 물질은 아이템으로 취급되지 않지만 이런 식으로 마법 주문서를 부여하면 해당 물건 역시 아이템으로 취급되죠. 그리고…….”
윤수호는 적당히 홈이 뚫린 투구 하나를 꺼내 여우 구슬을 홈에 박았다. 아이템화된 여우 구슬은 저절로 크기가 작아지더니 투구의 홈에 꼭 맞게 들어갔다.
“이런 식으로 보석류 잡화를 박을 수 있는 홈이 뚫린 투구에 구슬을 박는 것도 가능해집니다.”
“…….”
선화는 윤수호가 무슨 일을 하려고 하는지 도저히 감도 잡히지 않았다. 그가 보여 주는 것들 전부가 그녀의 상식을 아득히 초월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빠드득!
윤수호는 일부러 손아귀에 힘을 주었다. 그러자 여우 구슬이 박힌 투구가 금이 가면서 내구도가 크게 떨어졌다.
“지금부터가 중요합니다. 사실 저도 이렇게 수리해 보는 건 처음이라서요.”
“수, 수리요?”
“네, 잘됐으면 좋겠네요.”
윤수호는 소지품 창에서 아이템을 하나 더 꺼내 들었다.
그가 꺼내 든 것은 망치였다. 다만 평범한 망치는 아니고 대장간에서 쓸 법한 망치인데 망치 자루에 대장장이의 신이 그려진 다소 진귀한 망치였다.
‘제발 성공해라!’
깡!
윤수호는 망설임 없이 망치로 투구를 내리쳤다.
번쩍!
[대장장이의 신, 헤파스토의 망치를 사용하셨습니다. 해당 장비의 내구도를 100% 회복합니다.]
안내음성과 함께 터져 나온 빛이 사그라들자 망가졌던 투구가 처음 꺼냈던 것처럼 깨끗하게 수리되어 있었다.
하나 윤수호가 바라는 건 투구 따위의 수리가 아니었다.
“보석 제거.”
윤수호가 투구에 박힌 보석을 제거하자 홈에서 빠져나온 여우 구슬이 그의 손바닥 위로 굴러 떨어졌다.
그 순간.
“아아……!”
“다행히 제 생각대로 성공한 모양이네요.”
선화의 두 눈에 그렁그렁 맺힌 눈물이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윤수호의 손바닥 위에는 실금 하나 없이 말끔하게 복구된 여우 구슬이 신묘한 빛을 발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정말 감사합니다! 이 은혜를 어떻게 갚아야 할지…….”
“아직 인사하기는 이릅니다.”
“네?”
“선물이 하나 더 남았거든요.”
그 순간, 여우 구슬을 움켜쥔 윤수호의 몸에서 폭발적으로 선기가 흘러나왔다.
그렇게 터져 나온 선기가 그대로 여우 구슬에 흡수되었고 선화는 그 광경을 경악에 찬 눈으로 지켜보았다.
검신이 돌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