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8.
“이곳이 정말로 그대의 집인가?”
“마음에 들어?”
윤수호의 질문에 눈을 초롱초롱 빛내던 미르가 정신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윤지석의 손길이 곳곳에 닿은 마당은 이제 완연히 아버지의 색깔로 물들어 있었다.
“정원이 무척이나 예쁘구나. 품격 있고 우아한 정원이다.”
“아버지가 열심히 배우고 가꾸신 정원이거든. 내가 우리 집에서 제일 좋아하는 곳이기도 하고.”
화려하진 않지만 정갈하고, 품격 있으며, 눈을 편안하게 하는 정원은 윤지석이 전문 정원사들에게 가르침받고 여러 시행착오를 거치며 완성시킨 곳이었다.
“어서 오세요. 우리 집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어쩜! 이런 말을 해도 될지 모르겠지만 듣던 것보다 훨씬 귀여우세요. 공주님!”
정원 구경을 끝내고 집안으로 들어서자 오혜연과 윤수아가 손님들을 반갑게 맞이해 주었다.
“화, 환대해 주셔서 감사하오! 환수족 쥬신의 공주, 미르라고 하오.”
“미르 공주님을 모시는 선화라고 합니다. 초대해 주셔서 다시 한 번 감사드립니다.”
미르와 선화는 가족들에게 쥬신의 예법을 따라 인사했다.
윤수아는 미르의 귀여운 모습에 저도 모르게 폰을 들어 그 모습을 촬영하려다가 윤수호의 눈치를 받고는 슬그머니 폰을 주머니로 집어넣었다.
“갈 곳 없는 저희 두 사람을 받아 주어 진심으로 감사하오. 수호 공에게는 갚지 못 할 많은 은혜를 입었는데 갚을 길 없이 빚만 늘어 가는구려.”
‘정말로 이런 말투를 쓰는구나. 너무 귀여워!’
윤수호에게 언질을 받긴 했지만 상상하는 것과 직접 보고 듣는 것의 차이는 대단했다.
“어휴, 우리 수호가 좋아서 하는 일인데요. 뭘. 그러니까 공주님은 그런 거 신경 쓰지 말고 그냥 편하게 지내다 가요. 내 집이다 생각하면 더 좋고.”
“오빠에게 어느 정도 얘기는 전해 들었어요. 그동안 너무 고생 많으셨어요. 두 사람 다…….”
윤수아는 두 사람의 노력과 고생을 위로하며 미르와 선화를 끌어안아 주었다.
처음에는 흠칫 놀라며 당황한 두 사람이었다.
하지만 이내 자신들을 위해서 눈물을 흘리며 위로해 주는 윤수아의 따뜻한 마음씨를 느끼고는 고마움에 그녀를 같이 안아 주었다.
‘이런 가족이 함께 있으니 수호 공이 그토록 따뜻하면서도 큰 사람이 될 수 있었던 것이구나.’
“아참, 내 정신 좀 봐. 피곤한 사람들 너무 오래 붙들고 있는 것도 예의가 아니지. 두 분 방으로 안내해 드릴게요. 혹시 몰라서 같은 방을 준비해 드렸는데…… 불편하시면 각방으로 준비해 드릴까요?”
“아, 아뇨! 방 하나만으로도 충분합니다. 아니, 정 뭣하면 저는 복도에서 자도…….”
풋!
“재밌는 분이시네요. 따라 오세요.”
잠시 웃음을 터트린 윤수아가 두 사람을 이끌고 2층으로 올라갔다.
윤수호는 그 모습을 보고 살짝 미소를 머금었다.
“오랜만에 보지? 수아가 저렇게 웃는 거.”
“요새 희망동 복지 사업 준비 때문에 눈코 뜰 새 없이 바쁠 테니까요.”
“아무리 자기가 원해서 하는 일이라고 해도 힘든 일은 힘든 일인 거야. 그러니까 네가 좀 얘기해 봐. 무리해서 강 서방이랑 같이 저녁 먹으러 꼬박꼬박 집으로 돌아올 필요 없다고. 그럴 시간에 조금이라도 더 쉬는 게 우리는 더 좋다.”
윤수아는 거의 무슨 일이 있어도 저녁이 되면 집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저녁을 가족들과 함께 먹었다.
너무 피곤하면 집에서 쉬고 아침 일찍 출근하는 경우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야근을 위해 희망동으로 돌아오는 경우가 더 많았다.
그러다 보니 가족들도 윤수아가 걱정될 수밖에…….
어머니의 안타까움 섞인 걱정에 윤수호는 어색하게 웃으며 대꾸했다.
“글쎄요. 다른 건 몰라도 그건 제 말을 들을지 좀 자신 없네요. 하하하…….”
윤수아의 가족사랑은 끔찍했다. 윤수호 역시 다른 건 다 동생에게 이겨도 그것만큼은 이길 수 있다 자신할 수 없을 만큼 말이다.
“수아가 어떻게든 시간을 쥐어짜서 한 끼라도 가족들과 함께 하려는 건 바쁘다는 핑계로 가장 소중한 사람들을 내팽개치고 싶지 않아서일 거예요. 그런 부분에서는 확실히 저보다 대단한 녀석이죠.”
“그걸 내가 왜 모르겠니. 그저 저렇게 무리하다 저 아이 몸 상할까 봐 그러지. 그러니 네가 잘 좀 챙겨 줘.”
“네, 그런데 아버지는요?”
“나무 심으러 가셨다. 요새 눈만 뜨면 나무 심으러 가신다고 아침 일찍 나가셔서 밤늦게 돌아오시잖니. 하여간 나이도 지긋하신 양반이 체력도 좋아. 너도 저녁 먹을 때까지 쉬고 있어.”
“아, 저도 도와…….”
“행여라도 엄마 도와주겠다고 부엌 들어와서 엄마의 작은 행복마저 뺏어 버리겠다면 오늘 저녁은 국물도 없을 줄 알아. 하여간 남매가 쌍으로 부엌에 안 들어오면 죽는 병이라도 걸렸나, 좀 쉬라고 해도 말도 참 더럽게 안 들어요. 에휴, 그런 고집은 누굴 닮은 건지…….”
오혜연은 부엌으로 향하며 대답했고 어머니의 단호한 엄포에 윤수호는 미소를 그리며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윤수호의 발걸음은 당당히 부엌으로 향했다.
번쩍!
“너…… 엄마가 부엌으로 들어오지 말랬지!”
“아, 그게 찻장에서 과자 좀 꺼내 가려고…….”
“…….”
날카로운 눈빛으로 흘깃하던 오혜연은 머쓱함에 헛기침을 하더니 다시 통통통통 경쾌한 칼질을 이어 나갔다.
윤수호는 그런 어머니의 귀여운 모습에 피식 웃더니 감자 칩 하나를 챙겨 자신의 방으로 향했다.
‘되게 오랜만이네.’
오랜만에 돌아온 자신의 방은 마치 방금 막 청소한 것처럼 시간의 흔적을 도저히 느낄 수가 없었다.
그만큼 오혜연이 신경을 썼기 때문이었다.
사실 저녁이라도 먹으러 돌아오는 윤수아와 달리 윤수호가 집에 돌아오지 못했던 이유는 단순했다.
바빴으니까. 말이 안 될 정도로 바빴기 때문이다.
윤수호의 하루 수면 시간은 30분 남짓. 그 외에 시간에는 희망동에 관련된 업무 처리에 모든 시간을 쏟아부었다.
어째서 도시 하나 규모의 건설 사업의 진척도가 이렇게까지 비정상적으로 빠를 수 있는지 궁금해하는 사람들도 많았다.
만약 그들이 윤수호가 일하는 모습을 봤다면 마음 깊이 수긍했을 것이다.
그렇게 바쁜 와중에 북한에서 일이 터져 버렸다. 결국 언젠가는 터질 고름이었다고는 하지만 시기적으로 좋지는 않았다.
하필 지금?
가뜩이나 바빠 죽겠는데 일거리를 늘려 준 북한의 몬스터들이 곱게 보이지는 않았다.
솔직히 인정한다. 라칸을 패던 주먹에 그런 연유로 짜증 섞인 사심이 조금은 담겨 있었다는 것을…….
하지만 오늘은 달랐다.
“에라 모르겠다!”
희망동도, 북한도, 오늘은 잠시 휴업이다.
윤수호는 침대에 누워 자신이 좋아하는 감자칩 봉지를 뜯었다.
그리고 감자칩을 먹으며 그동안 밀렸던 예능을 다시 보고 있자니 여기가 무릉도원이 아닐까 싶은 기분마저 들었다.
똑똑똑.
“들어와.”
달콤한 휴식 중에 노크가 들려 출입을 허락하자 윤수아를 선두로 미르와 선화가 차례로 방에 들어왔다.
“뭐야, 오빠. 쉬고 있었어?”
“난 좀 쉬면 안 되냐? 나도 사람이다.”
“아니, 뭐…… 오빠더러 쉬지 말라는 게 아니라 그냥 좀 신기해서. 오빠 이렇게 풀어져서 쉬는 거 진짜 오랜만에 보는 것 같은데.”
윤수아의 말에 윤수호는 일부러 몸을 크게 펼치며 대꾸했다.
“‘같은데’가 아니라 진짜 오랜만이니까. 놀고먹는 게 이렇게 편하다. 그냥 하던 거 다 때려치우고 있는 돈으로 백수 놀이나 하면서 살까?”
“퍽이나 그러시겠다. 해 봤자 사흘도 못 버티고 사서 고생 할 거면서.”
“하여간 너는 오빠를 너무 잘 알아.”
“그런데 수호 공, 이것은 무엇인가?”
“먹어 볼래?”
감자칩을 보고 호기심을 드러낸 미르에게 윤수호가 감자칩 한 조각을 건넸다.
킁킁!
이내 감자칩 냄새를 맡고 눈을 빛내던 미르가 그것을 입으로 가져간 순간.
바삭!
“이, 이것은……!”
“어때, 괜찮지?”
“너무 맛있구나아…….”
“울 정도로?”
바삭한 감자칩의 식감에 매료된 것일까? 아니면 기름에 튀긴 감자칩의 고소함에 사로잡힌 것일까?
미르는 윤수호가 몇 번 손도 못 댄 감자칩을 순식간에 다 털어 먹은 것도 모자라 봉지가 텅텅 비자 아쉬운 눈빛으로 윤수호를 쳐다보았다.
그 눈빛의 의미가 무엇인지 알기에 윤수호는 피식 웃으며 미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좀 이따 밥 먹어야 되니까 감자칩은 나중에 먹자.”
“약속인가?!”
“그래, 약속.”
“알았다! 그럼 힘들어도 참아 보도록 하지!”
“공주님!”
말과는 다르게 텅텅 빈 과자 봉지의 부스러기를 열심히 핥는 미르와 그런 미르를 다급하게 말리는 선화였다.
“다녀왔습니다!”
시간이 지나고 저녁이 되자 식목일을 마친 윤지석과 알바까지 마치고 돌아온 남매가 집으로 귀가했다.
“얘가…… 아니, 이분이 삼촌이 얘기한 그 환수족 공주님이야? 되게 귀엽다~! 공주님, 혹시 실례가 안 된다면 한 번 안아 봐도 될까요?!”
“어, 어? 아니, 뭐 안 될 건 없지만…….”
번쩍!
“꺄악! 어떡해~! 볼 살 부드러운 거 미쳤고, 무슨 인형이야. 눈도 렌즈 아니라 자연산 푸른 눈인 거죠? 머릿결은 또 왜 이렇게 좋아? 천연 녹색? 미쳤어. 말도 안 돼.”
‘아무리 공주님이 허락했다고 해도 그건 너무 심하잖아…….’
“지연이 너……!”
옆에서 지켜보고 있던 은지한은 도를 넘은 것 같은 누나의 행동에 그녀를 말려야 하나 깊이 고민하다가 엄마가 나서는 것을 보고는 한발 뒤로 물러섰다.
“너만 독점할 거야? 혹시라도 실례될까 봐 내가 얼마나 참고 있었는데!”
“…….”
은지한은 두 모녀 사이에 끼어 귀여움 당하고(?) 있는 미르를 어이없이 지켜보다가 삼촌에게 시선을 돌렸다.
“안 말려도 돼요, 저거?”
“말린다고 들을 것 같냐, 저게.”
“…….”
“그쯤하고 저녁 먹을 준비 합시다. 지한아. 할아버지 텃밭 가서 같이 먹을 채소 좀 따 올래?”
“네, 할머니.”
‘텃밭?’
그 순간, 텃밭이란 말이 눈을 빛낸 미르가 요령 좋게 두 사람 사이를 쏙 빠져나와 은지한의 앞으로 쪼르르 달려갔다.
“나도 가고 싶구나! 텃밭!”
“어, 어?”
은지한은 부담스럽게 눈빛을 초롱거리며 자신을 올려다보는 미르의 모습에 움찔했다.
고개를 돌려 삼촌을 쳐다보니 윤수호는 기분 좋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기왕 이렇게 된 거 다 같이 가지, 뭐.”
그렇게 미르를 포함해서 윤 씨 남매와 은 씨 남매가 함께 후원에 조성된 텃밭으로 향했다.
“우와~! 이 풀들을 전부 여기서 키워 낸 것이란 말이냐?”
“뭐…… 채소도 풀이라면 풀이니까 그렇지?”
“신기하구나!”
미르는 여기저기를 뛰어다니며 텃밭을 구경하는 데에 여념이 없었다. 그 모습에 윤수호가 선화에게 물었다.
“미르는 텃밭을 처음 보는 모양입니다.”
“예…… 태어나서 지금까지 궁에서만 자라셨으니까요. 아무리 공주님의 안위를 지키기 위해서라고는 해도 답답해하는 공주님을 볼 때마다 마음이 아팠는데, 이렇듯 좋아하시니 저도 기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수호 공.”
선화가 고개 숙여 감사를 표하자 윤수호는 기분 좋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렇게 고개 숙이실 필요 없습니다. 저 녀석이 웃는 모습을 보면 어째서인지 저도 기분이 좋거든요.”
“이것 보거라! 이 토마토라는 것이 참으로 달고 맛있구나! 내 이것을 왕창 따 갈 테니 잠시만 기다려라!”
미르는 은지한에게 요령을 배워 직접 따서 한입 깨물어 먹은 토마토를 들고는 흔들며 방방 뛰었다.
그 모습이 어찌나 천연덕스럽고 귀여웠던지…….
윤수호를 비롯한 가족들은 웃으며 마주 손을 흔들어 주었다.
검신이 돌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