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5.
보글보글…….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여긴 어디일까?
아니…….
애초에 난 누구였지?
수많은 의문들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하나 이 의문들조차 남자에게는 큰 변화였다.
지금까지 의식이 없었을 때는 이런 의문조차 갖지 못했기 때문이다.
보글보글…….
“1701의 상태는?”
“현재 순조롭게 적응 중입니다.”
“다른 녀석들은?”
“샘플 전원 사망을 확인했습니다. 아무래도 이번 변이약의 효력이 너무 강하다보니 기존 약품에도 적응하는 녀석들조차 버티지 못하고 붕괴하더군요.”
“새로운 변이약 실험에서도 적응한 건 역시 1701뿐인가…….”
‘1701?’
남자는 밖에서 들려오는 사람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사실 그가 담긴 용액 속에서는 그 어떤 소리도 들을 수 없었지만 남자는 그게 가능했다.
아니, 가능하게 만들어졌다는 것이 더 정확한 표현이겠지.
‘설마 내 이름이 1701인 건 아니겠지?’
아닐 터였다. 아니어야만 했다. 사람의 이름이 어떻게 숫자의 나열 따위로 이루어져 있겠는가? 부모님이 미치지 않고서야 사람의 이름을 숫자로 지었을 리는 없었다.
문제는 기억이 나질 않았다.
부모의 얼굴도, 자신의 이름도…….
‘나는 도대체 누구지?’
아무것도 기억이 나지 않는다. 어째서 자신이 의식을 되찾은 것인지도 모르겠다. 하나 엄밀히 따지자면 남자는 의식을 되찾은 것이 아니었다.
여전히 의식은 돌아오지 않았고 그를 체크하는 수많은 의료 장비들과 기계 장치들도 그의 변화를 감지하지 못했다.
지금 그가 사물을 감지하고 소리를 들을 수 있는 건…… 그의 영혼이 반쯤 몸 밖으로 빠져 나왔기 때문이었다.
자신은 죽은 것일까? 아니면 죽어 가는 것일까?
모르겠다. 그 모든 게 의문이었다. 알고 싶은 게 너무나도 많은데…… 알 수 있는 방법이 하나도 없다는 게 남자를 미치게 만들었다.
그냥 이대로 몸을 깨워 도망칠까?
남자는 고개를 저었다.
사방에 깔린 게 적이었고 자신 혼자서는 아무리 노력해도 도망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결국 남자는 침묵을 선택했다. 언젠가 기회가 올 거라 굳게 믿으며…….
이때까지 남자는 알지 못했다.
재앙과 기회의 공통점은 예고 없이 찾아온다는 사실을 말이다.
* * *
“이럴 수가…….”
“말도 안 돼…….”
전투의 마지막을 끝까지 지켜본 몬스터들은 두려움에 몸을 떨었다.
그들이 도망치지 않고 자리에 남아 라칸의 최후를 지켜본 건, 그들이 용감해서라거나 충성심 때문이 아니었다.
그저 겁에 질려 발이 떨어지지 않은 것뿐.
그 결과, 그들은 자신의 눈으로 라칸이 어떻게 죽었는지 똑똑히 지켜볼 수 있었다.
패배하는 모습이 상상이 되지 않을 만큼 절대적인 강함을 자랑하던 라칸이 그야말로 처참하게 짓밟히다 목숨을 잃은 것이다.
“대, 대왕이…… 라칸이 죽었다!”
“으아아아!”
몬스터들은 혼비백산하며 도망치기 시작했다. 맡은 구역이고 임무고 모든 걸 내팽개친 채 윤수호를 피해서 줄행랑을 치기 시작했다.
그러나…….
“시끄러운 녀석들이군.”
둥둥~!
윤수호가 손가락을 까딱하자 바닥에서 무너진 담벼락 파편 하나가 떠올랐다. 그가 손가락을 튀기는 순간, 파편이 빛살처럼 날아가더니 순식간에 자취를 감추었다.
“크아아악!”
“커헉!”
이내 사방에서 비명이 들리기 시작한지 얼마 되지 않아 주위가 잠잠해졌다.
‘대충 위험한 녀석들은 전부 정리가 끝난 건가.’
윤수호는 형제와 가족들을 부축하여 관저 밖으로 나왔다.
“위원장님!”
“괜찮으십니까? 다치신 곳은…….”
선화를 안전한 곳에 숨겨두고 다시 관저로 찾아온 김세민과 이정화는 윤수호를 다급히 살피다 피식 실소를 터트렸다.
“제가 괜한 걱정을 한 모양이네요.”
부상은커녕 의복에 먼지 한 점 묻지 않은 윤수호의 모습에 두 사람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두 분도 무사히 작전을 완수하신 것 같아 다행입니다. 그런데 선화 씨는요?”
“걱정 마십쇼. 안전한 곳에 잘 모셔 뒀으니까요.”
김세민과 이정화는 대답하면서 가족들을 부축하였다. 그동안 제대로 먹지도, 자지도, 쉬지도 못 하고 고초를 겪은 탓에 가족들과 형제의 몰골은 말이 아니었다.
게다가 윤수호가 가지고 있던 포션도 거의 다 사용하여 바닥을 보이고 있었으니…….
‘여러모로 던전을 찾을 이유가 늘었군.’
그때였다.
쿠르릉…… 쿠구구구구!
윤수호의 등 뒤로 굉음이 터지며 자욱하게 피어오른 먼지구름이 하늘로 충천하자 모두의 시선이 그곳으로 향했다.
김정언의 관저가 결국 버티지 못하고 붕괴해 버린 것이다.
“허무하구먼. 저렇게 무너질 거, 뭘 그렇게 아득바득 사람들의 피고름까지 뽑아 먹은 건지…….”
“그러면서 도망치는 건 가장 빨랐다잖아. 한마디로 답 없는 개자식인 거지.”
김세민과 이정화는 러시아에 의탁하고 있을 김정언을 떠올리며 욕을 씹어 뱉었고, 함께 있던 북한 형제와 가족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들 역시 이제는 독재 정권의 세뇌에서 빠르게 벗어나고 있는 중이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사람들이 해방되고 이 땅에도 새로운 태양이 서서히 떠오르고 있었다.
* * *
“선화!”
“공주님!”
덥석!
“다시는 그런 짓을 하지 말거라! 아무리 날 위해서라지만 내게는 선화도 내가 지켜야 할 백성 중 한 명이다! 절대로 내 허락 없이 죽어선 아니 될 것이야!”
“네, 명심하겠습니다. 그러니 눈물 뚝! 사람들도 보는데 체면은 지키셔야죠. 공주님.”
전속력으로 선화에게 달려가 그녀의 품에 뛰어든 미르가 눈물을 펑펑 흘리며 선화를 혼냈다. 그러자 선화도 미르의 눈물을 닦아 주며 그녀를 달래 주었다.
“풍태술!”
“연아? 너도 살아 있었구나.”
임무를 마치고 한 자리에 모인 전사들도 감동의 재회를 나누었다. 그들 모두 그동안 서로의 생사를 알 길이 없어 노심초사하고 있던 차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너…… 어째 예전하고 전혀 달라 보인다?”
“크흠! 사돈 남 말하고 있네. 그러는 너도 전보다 훨씬 강해진 거 아냐?”
“크크큭! 티 나냐?”
“야, 이 자식들아! 그렇게 좋냐? 어우! 배알 꼴려서 살겠나, 이거.”
윤수호에게 선기를 받고 환골탈태한 전사들은 서로 강해진 것을 알아보았다.
그리고 비록 환골탈태를 하지는 못했지만 무사히 재회한 것만으로도 크게 기뻐한 전사들이 진심으로 그들을 축하해 주었다.
하지만 환골탈태에 실패한 전사들 역시 포기한 것은 아니었다.
그들은 지금보다 더 뼈를 깎는 노력으로 동료들과의 벌어진 차이를 메우겠다고 다짐하였다.
그렇게 어수선하던 장내가 정리되어 가는 와중에 윤수호가 입장했다.
“여기 모여 있었군.”
척척!
윤수호가 입장하자 그때까지 자유롭게 행동하던 전사들이 순식간에 각을 잡고 오른손을 심장에 올렸다.
여기서 고개를 숙이는 것은 왕에 대한 예우라 할 수 없었지만 그것만으로도 외부인에게 보일 수 있는 최고의 예우였던 것이다.
“수호 공!”
폴짝.
선화의 품에서 내려온 미르가 이번에는 윤수호를 반기며 그에게 달려가 폴짝 뛰어올랐다.
“그래, 인사는 잘했고?”
“이것도 저것도 전부 수호 공 덕분이다! 수호 공이 아니었다면 전사들과 이렇게 다시 만나는 것도…… 그 악독한 놈을 쓰러트리는 것도 불가능했을 게야. 정말 너무 고맙도다!”
미르는 두 팔로 윤수호의 목을 둘러 그를 꼬옥 안아 주었다.
만약 자신에게 딸이 있었다면 이런 기분이었을까? 그는 자연스럽게 배어 나오는 미소를 그리며 미르의 등을 토닥여 주었다.
“공주라면서 이래도 되는 거야?”
“전사들이여.”
“예, 공주님.”
“내 밑으로 전부 고개 숙여.”
미르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선화와 전사들 모두 고개를 숙였다. 그러자 미르가 윤수호의 얼굴을 바라보더니 해맑게 미소를 그렸다.
“아무도 안 보니까 상관없다. 헤헤~!”
“나, 참…….”
윤수호는 자신의 품에 쏘옥 안겨 어리광을 부리는 미르의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어 주었다.
선화에게 들었다.
미르는 여왕의 딸이고 대대로 한반도의 환수족을 이끄는 여왕들은 선수(仙樹)의 열매를 먹고 그 정을 받아 잉태하여 아이를 낳는다고.
그렇게 태어난 아이는 모두 여아였고, 선기에 대한 높은 적응력과 일반적인 환수족보다 뛰어난 신체 능력을 가졌다.
즉, 왕의 자질을 타고 태어나는 것이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미르는 남들에게 다 있는 아빠가 존재하지 않았다.
[공주님은 항상 존재하지 않는 아빠의 정에 굶주려 계셨어요. 심지어 지금보다 훨씬 어리셨을 때는 가장 많이 하셨던 말씀이 자신도 아빠가 있었으면 좋겠다는 말이었으니까요. 어쩌면 미르 공주님이 수호 씨에게만 어리광을 부리는 것도 수호 씨가 아빠처럼 느껴졌기 때문이 아닐까요?]
까놓고 말해서 자신은 미르의 진짜 아빠가 될 수 없었다.
하지만…….
“그만 내려와. 무거워.”
“무, 무겁다니! 무엄하다! 숙녀에게 그런 말은 실례니라.”
발끈하면서도 아쉬움이 가득한 표정으로 윤수호의 품에서 내려온 미르. 그녀의 모습에 윤수호는 피식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뭐, 함께 있어서 즐거우면 그걸로 된 건가?’
윤수호는 미르가 웃는 게 좋았다. 만난 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벌써부터 정이 들었는지 남 같지가 않았다.
가능하다면 녀석의 미소를 끝까지 지켜 주고 싶었다.
‘당분간 아빠 노릇을 해 주는 것도 딱히 나쁠 것 같진 않군.’
* * *
북한으로 함께 온 일행 및 선화와 함께 남한으로 돌아온 윤수호.
그는 그 즉시 대통령 선우진과 천호진에게 연락을 취해 만날 약속을 잡았다.
“고생 많으셨습니다, 위원장님.”
“정말로 수고 많으셨습니다.”
선우진은 가장 먼저 윤수호와 악수를 나누며 그의 노고를 치하했다. 그리고 두 사람의 시선은 그의 뒤에 있던 미르와 선화에게 향했다.
윤수호에게 선기를 충전받아 힘을 회복한 미르는 완벽히 인간의 모습으로 둔갑하는 데 성공했지만…… 선화의 경우는 둔갑 자체가 서투른 탓에 여전히 여우 귀가 남아 있었다.
선우진은 그 모습을 신기하게 쳐다보았다. 그에 선화가 쑥스러운 듯 시선을 돌리자 선우진은 실수를 자각하고 다급하게 사과를 건넸다.
“아, 실례했습니다. 이 땅에 환수족이 존재한다는 사실도 그렇고 실물로 보는 것도 이번이 처음이라…….”
“괘, 괜찮습니다.”
“피차 마찬가지 아니겠소. 우리도 인간이 신기할 때가 많으니.”
그에 미르가 앞으로 나서며 당당하게 대꾸하자 선우진이 먼저 그녀에게 악수를 청했다.
“대한민국의 대통령, 선우진이라 합니다.”
“환수족의 공주, 미르라 하오. 만나서 반갑소, 에헴!”
어색하게 어른 흉내를 내며 악수를 나누는 미르의 모습에 선우진은 할아버지 미소를 참을 수가 없었다.
이렇듯 기분 좋은 인사를 마치고 자리에 앉은 사람들.
가볍게 서로에 대해 궁금한 점을 묻고 답하던 사람들은 분위기가 무르익었을 무렵, 윤수호가 먼저 본론을 꺼내 들었다.
검신이 돌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