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4.
구출을 의미하는 붉은 신호탄을 확인한 윤수호의 입꼬리가 슬며시 말려 올라갔다.
“그럼 지금부터 제대로 놀아볼까?”
“뭔 개소리야?”
“실력에 좀 자신 있다고 눈에 뵈는 게 없는 모양이구나.”
“봐주지 말고 단 번에 죽여 버려!”
몬스터들이 사나운 기세를 흉흉하게 드러내며 거침없이 윤수호를 향해 달려들었다.
그들이 손에 쥔 무기들, 송곳니, 손톱 등에는 날카로운 오러가 맺혀 거친 살기를 뿌렸다.
“후우.”
놈들의 맹공이 시작됨과 동시에 윤수호도 가볍게 숨을 고르더니 1단계 봉인을 해제하였다.
그 순간!
콰우우우우우!
“뭐, 뭐야?”
윤수호의 몸에서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강맹한 기운이 폭풍처럼 터져 나와 주변을 휘몰아쳤다.
윤수호는 그저 자연스럽게 흘러나오는 힘을 막지 않은 것뿐이었지만 그것만으로도 몬스터들에게는 위기감을 심어 주기에 충분했다.
뭔가가 잘못됐다.
이런 직감을 느낌과 동시에 윤수호의 오른손이 움직였다.
스핏.
짧고 간결한 동작, 그의 손가락 끝이 쾌속한 곡선을 그리는 순간, 그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던 기운이 휘감겨 주인의 뜻을 따라 공간을 할퀴었다.
그 결과는 처참했다.
콰콰콰콰콰콰콰콰……!
“크어억!”
“마, 막아!”
“젠장, 저딴 걸 무슨 수로 막느냐고!”
검기를 휘감아 발출된 폭풍이 정면에서 달려들던 몬스터들을 쓸고 지나갔다. 검풍에 휘말린 적들은 그야말로 아비규환이었다.
전력을 다해 검풍을 막아 보는 자들도 있었고 필사적으로 몸을 날려 피하는 자들도 있었지만 결과는 비슷했다.
막으면 막는 대로 몸이 분쇄되고, 피하면 피하는 대로 빨려 들어가 몸뚱이가 찢겨 나갔다.
비명과 피, 육편이 생존자들의 머리 위로 흩뿌려진다.
바닥에는 깊은 고랑이 패여 있었고, 생존자들은 피와 조각난 내장 찌꺼기들을 뒤집어 쓴 채 실감했다.
아…… ×됐다.
“후회는 아무리 빨라도 늦기에 후회라 하지.”
윤수호의 손가락 끝이 다시 한 번 움직였다.
슥슥슥.
콰우우! 콰콰콰콰……!
총 세 번에 걸친 간단한 움직임에 결코 그렇지 않은 흉포한 기운의 검풍 세 개가 전방을 삽시간에 휘몰아쳤다.
그 결과.
휘우웅…….
먼지구름이 걷히자 드러난 광경은 그야말로 처참하기 그지없었다.
피로 젖은 땅은 여기저기 검흔투성이였고, 그 주변으로 잘려 나간 육편과 내장 조각들이 가득했다.
팟!
적의 전멸을 확인한 윤수호의 모습이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퓻.
사라진 그가 다시 나타난 곳은 이곳에서 가장 강력한 기운이 느껴지는 곳.
바로 라칸의 방이었다.
“네놈이로구나, 밖에서 유난히도 소란을 떨던 불청객이.”
설마 이렇게 빨리 찾아올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 했던 라칸이 짐짓 허세를 부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거나 말거나, 윤수호의 시선은 차분히 방을 살폈다.
방 한쪽에 갇혀 있는 두 가족들과 눈앞에 피투성이가 된 채로 자신을 쳐다보고 있는 두 중년인…….
두 중년인의 얼굴은 꼭 닮아 있었고 때마침 감옥에 갇혀 있던 한 소녀가 ‘아빠 도망쳐!’라며 울고 있었다.
‘대충 어떤 상황인지 감이 잡히는군.’
“가세요.”
“네? 그, 그게 무슨…….”
“가족들에게 가세요. 가서 잠시만 기다리고 계세요. 금방 구해 드릴 테니까.”
두 형제는 두려움과 불안에 가득 찬 눈으로 윤수호를 쳐다보다 라칸의 눈치를 살폈다.
그들이 쉽게 발을 떼지 못하는 건 라칸에 대한 두려움이 아직도 두 사람의 몸과 정신을 지배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나 참…… 어이가 없군.”
자신을 완전히 무시하는 윤수호의 행태에 기가 찼던 라칸이 피식 웃었다.
“고작 인간 따위가 감히 수왕(獸王) 라칸을 무시해?”
퓻.
그 순간, 라칸의 거체가 소리도 없이 사라졌다.
3m에 가까운 덩치와 거대한 체구를 가지고도 움직임에 실바람조차 생기지 않는 것은 그야말로 신기에 가까웠다.
스핏.
라칸의 손끝이 향한 곳은 다름 아닌 두 형제였다.
자신을 무시한 윤수호의 눈앞에서 두 형제의 머리통을 부숴 그가 얼마나 무력하고 오만했는지 뼈저리게 가르쳐 줄 생각…….
턱.
후웅!
“……!”
“허억!”
“흐억!”
라칸의 손을 중간에서 잡아채자 해소되지 못한 여력이 강풍으로 변환되어 뒤에 서 있던 형제들을 가볍게 날려 버렸다.
라칸이 눈을 부릅떴다.
윤수호의 움직임을 눈치채지도 못 했을뿐더러 아무리 적당히 손을 썼다지만 이렇게 간단히 자신의 공격을 막을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기 때문이었다.
“어서 가세요. 가족들이 애타게 아빠를 기다리고 있네요.”
두 사람은 말없이 다급하게 자리에서 일어나 가족을 향해 뛰어갔다. 그러나 싸움 때문에 입은 부상으로 두 사람은 마음처럼 쉽게 가족의 품으로 돌아가지 못했다.
“이 새끼가……!”
한편 그때까지도 자신에게 시선조차 주지 않는 윤수호의 모습에 열이 받을 대로 받은 라칸이 측근들에게 눈짓으로 신호를 주었다.
그대로 가족들과 형제를 모두 몰살시키라는 신호였다.
팟!
신호를 받은 측근들이 빠르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라칸의 지척에서 그를 호위하는 정예들이다. 라칸의 부하들 중에서는 가장 강한 녀석들이다 보니 그만큼 움직임도 빠를 수밖에 없었다.
아마 가족들도, 형제도 그들의 움직임을 인식조차 못 한 채 비명 한 번 못 질러 보고 몰살당하겠지.
그런데!
쾅!
“헉!”
순간 라칸의 입에서 헛바람 삼키는 소리가 터져 나왔다.
윤수호가 자신의 손을 여전히 놓지 않고 그대로 몸을 날렸기 때문이다.
마치 그들을 제외하고는 시간이 멈춘 것 같은 상황 속에서, 윤수호는 형제들을 노리던 측근의 눈앞에 홀연히 모습을 드러냈다.
그러고는…….
콰아아앙!
‘라칸’을 휘둘러 내리 찍었다. 문자 그대로 무기처럼 라칸을 휘둘러 적을 공격한 것이다.
마치 지진이라도 난 것인 양 건물이 흔들렸다. 라칸이 처박힌 바닥 주변으로는 거미줄 같은 균열이 크게 이어졌다.
그 아래에 깔린 측근 한 마리는 완전히 뭉개져 본래의 형체를 알아보는 것조차 힘들어 보였다.
“이, 이게 지금…….”
팟!
그러나 라칸에게 쉴 시간 같은 건 처음부터 없었다. 윤수호는 종횡무진하면서 라칸을 휘둘렀고 그는 훌륭한 무기가 되어 주었다.
쾅쾅쾅쾅!
순식간에 가족들과 형제를 노리던 측근들이 몰살되고, 볼일이 끝난 라칸을 윤수호는 아무렇게나 벽에나 던져두었다.
콰아앙!
포탄의 수십 배나 되는 속도로 날아간 라칸이 벽을 부수고 건물 밖으로 뚫고 날아가자 윤수호는 먼저 사람들을 구출하였다.
“지금은 이곳이 안전하니 이곳에 얌전히 계세요. 상황이 정리되면 구하러 오겠습니다.”
“감사합네다. 참으로 감사합네다……!”
눈물을 흘리며 고마움을 표하는 사람들의 모습에 윤수호는 따듯한 미소로 고개를 끄덕였다.
퓻.
다시 한 번 사라진 윤수호의 모습이 관저 외벽까지 날아가 처박힌 라칸의 눈앞에 나타났다.
“크아아아아!”
콰아앙!
라칸은 자신을 깔아뭉개고 있던 잔해를 분노와 함께 폭발시키며 모습을 드러냈다.
‘수왕의 분노’라는 고유 기술을 발동한 그의 몸에서는 흉흉한 붉은 기운이 악마의 그것처럼 흘러나오고 있었다. 몸집도 이전에 비해 1.5배는 더 커져 있었다.
윤수호는 그런 괴물을 눈앞에 두고도 담담해 내기를 걸었다.
“보아하니 약자를 가지고 노는 게 취미인 것 같은데…… 나랑 내기 하나 할까? 지금부터 1분. 딱 1분만 버틴다면 놓아주도록 하지.”
“죽인다! 죽여 버린다, 놈!”
콰앙!
라칸의 폭발적인 발 구름에 땅거죽이 뒤집히며 충격파가 터져 나왔다.
거대해진 덩치에 비해 공기를 찢고 돌진하는 그의 움직임은 한 줄기 빛살과도 같았다.
그는 수왕 라칸이다. 모든 짐승들의 왕이자 절대자이며 군림하는 자였다.
약자들은 자신의 먹잇감이며, 장난감이었다. 자신을 즐겁게 해 주는 것 외에 존재 가치가 없는…… 하등 쓸모없는 존재들이 바로 약자였다.
그런데 눈앞의 인간이…… 누구보다 약자여야 할 쓰레기가 자신을 약자로 취급하고 무시했다.
라칸은 이 사실을 견딜 수가 없었다.
그의 분노가 한층 더 길어진 손톱에 담겨 윤수호의 머리 위로 떨어졌다.
촤아악!
손톱이 공간을 찢어 내는 위력만으로 허공에 뇌전이 발생하며 불꽃이 타올랐다. 찢겨 나간 공기는 광풍이 되어 그 자체가 어떤 보검보다 위협적으로 적을 공격했다.
단 한 수에 담긴 공격 자체가 이미 7급 재앙종을 일격에 찢어발길 위력을 품고 있었다.
그런데…….
쩌엉!
윤수호가 주먹을 휘둘렀다.
가볍게 휘두른 그의 주먹은 떨어져 내리던 라칸의 손톱을 부러트리며 그의 손과 함께 그대로 녀석의 안면에 틀어박혔다.
쿵! 쿵! 콰앙!
그러고도 남아도는 위력에 라칸의 거체가 물수제비라도 된 양 지면을 통통 튀기며 날아가더니 또다시 외벽에 부딪혀 무너져 내렸다.
하나 그건 시작에 불과했다.
어느새 라칸의 지척까지 접근한 윤수호가 괴성을 지르며 다시 일어나는 라칸의 뱃가죽에 주먹을 틀어박았다.
“커헉!”
라칸은 답답한 비명을 지르며 피를 토했지만, 이내 이겨 내고는 윤수호를 향해 손톱과 주먹을 휘둘렀다.
그 속도가 얼마나 빨랐는지 두 개의 손이 수십 개로 늘어나 보일 정도였다.
윤수호는 녀석의 공격을 정말 아무렇지도 않게 간단히 피했다.
그것은 마치 쏟아지는 소나기를 피해 걷는 것처럼 보일 정도였는데 윤수호는 그걸 아무렇지 않게 태연히 해냈다.
콰콰콰콰콰콰콰콰콰콰……!
목표를 잃고 흩어지는 여력만으로도 사방이 찢겨 나가는 것을 보면 일격, 일격의 위력이 얼마나 될지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그에 반해 윤수호는 주먹을 가볍게 말아 쥐더니…….
쩌엉!
단 한 방.
그저 묵묵히 단 한 방의 주먹을 꽂아 넣을 뿐이었다.
“끄아악!”
수십 개의 권영도 단 한 방의 주먹 앞에서 맥없이 부서졌다.
그때부터 윤수호는 라칸을 정말 개 패듯이 패기 시작했다. 뼈가 부러지고, 살이 터지고, 근육이 으깨지고, 피를 토해도 상관없었다.
윤수호는 정말로 묵묵하게 라칸을 팼다.
“제, 제발…….”
퍽!
“그, 그만…….”
으드득!
“살려 줘……. 내가…… 내가 졌으니까…….”
쩌정!
눈물을 흘리며 목숨을 구걸하는 라칸에게 윤수호가 희망을 심어 주었다.
“5초. 앞으로 5초만 더 버텨라. 그럼 딱 1분이니까.”
그 순간, 분노 때문에 흘려들었던 일방적인 내기를 기억해 낸 라칸의 눈이 희망으로 물들었다.
고작 5초. 다른 누구도 아닌 자신이 5초를 버텨 내지 못할 이유가 없었다.
그렇게 희망에 찬 얼굴로 방어를 굳히며 고개를 쳐든 라칸의 눈은 금세 절망으로 물들었다.
파지직, 파직!
어느새 윤수호의 오른팔을 뒤덮은 집채만 한 크기의 강기가 터져 나오는 기운을 주체 못 해 사방으로 방전되고 있던 것이다.
“어디 한 번 버텨 봐. 버틸 수 있으면.”
“아, 안 돼…….”
콰아아아아앙!
집채만 한 강기의 압축체는 그대로 라칸을 집어삼키며 수십 미터를 날아가 주변을 증발시켰다.
그 속에서 라칸의 흔적 같은 건 티끌만큼도 찾아볼 수 없었다.
검신이 돌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