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3.
텅텅 비다시피 한 평양 시내의 정경.
그마저도 거리를 지나다니는 사람들의 표정은 어둡기 그지없었다.
사람들은 발걸음을 재촉했고 누군가와 눈을 맞춘다거나 대화를 나누는 건 상상도 할 수 없다는 듯이 모두 땅을 보고 걸었다.
그 가운데 윤수호 일행이 평양 중심에 위치한 김정언의 관저 근처에 도착했다.
“내가 주의를 끄는 동안 선화 씨가 있는 곳을 찾아서 구출을 부탁드리겠습니다.”
“예, 위원장님도 조심 하십쇼.”
두 사람이 은밀하게 몸을 숨기자 윤수호는 망설임 없이 골목을 나와 관저로 향했다.
텅텅 빈 관저 앞 도로에는 철통같이 주변을 감시하는 몬스터들만 가득했는데, 당연히 사람이 먼저 이곳으로 다가오는 경우는 없었다.
허가를 받은 경우를 제외하고는 말이다.
“뭐지, 저 녀석은?”
“이쪽으로 다가오는데? 이 시간쯤에 오기로 약속한 인간이 있었나?”
“아니, 없는데?”
“일단 놔둬 봐. 확인해 보고 별거 아니라면 가지고 놀자고.”
그렇지 않아도 심심했던 보초들은 윤수호가 제발 정신 나간 멍청이이길 기대하며 그가 다가오는 것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그렇게 관저의 관리 영역 안으로 발을 들인 순간, 보초들은 기다렸다는 듯이 윤수호의 앞길을 막아서며 험악하게 그의 신분을 확인했다.
“거기, 인간. 그대로 정지! 무슨 용무로 찾아왔지? 소속은?”
“…….”
윤수호가 아무 말도 없이 멀뚱멀뚱 자신을 쳐다보자 몬스터의 입꼬리가 씨익 말려 올라갔다.
그것은 다른 동료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옳거니! 정신이 제대로 나간 놈이구나.’
‘죽을 때까지 가지고 놀아 주마, 놈!’
눈앞의 남자를 죽이고 이후, 인간의 고기를 뜯어 먹을 생각에 잔뜩 기대에 부푼 보초들.
그런 녀석들을 스윽 훑어보는 윤수호의 모습에 그에게 다가간 몬스터가 눈살을 찌푸리며 손을 들어 올렸다.
“이 새끼가 묻는 말에 대답은 안 하고 딴청은……!”
쒜엑!
일단 따끔한 맛을 보여 줄 요량으로 녀석은 손바닥을 강하게 내리쳤다.
물론 죽일 생각은 없었다. 다만 인간의 부드러운 볼 살이라면 자신의 가벼운 따귀에도 볼 살이 뜯겨 나가겠지만 말이다.
푸확!
“크악!”
아니나 다를까, 녀석의 팔이 떨어지는 순간 피가 솟구치며 비명이 울려 퍼졌다.
그런데 그 비명의 주인이 문제였다.
어느새 정신을 차리고 보니 따귀를 때리려던 녀석의 오른팔이 어깨 어림부터 잘려 나갔고, 그곳에서 피가 분수처럼 쏟아져 나오기 시작한 것이다.
“뭐, 뭐야?”
“무슨 일이야?”
보초들 중에서 상황을 제대로 이해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렇다고 해서 시선을 돌리거나 집중을 하지 않은 놈들도 없었다.
분명 제대로 집중해서 보고 있었는데 동료의 팔이 잘려 나가고 피가 분수처럼 쏟아져 나왔던 것이다.
“이것 참…… 기껏 재밌는 구경을 보여 줬더니 제대로 본 녀석이 한 놈도 없는 것 같군.”
윤수호는 가볍게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젓더니 검결지를 들어 올렸다.
“그럼 이번에는 최대한 천천히 보여 주도록 하지. 전원 집중해서 똑바로 지켜보도록. 그렇지 않으면 순식간에 머리가 날아갈 테니까.”
스윽.
윤수호가 가볍게 검결지를 휘두르는 순간…….
촤촤촤촤촤촤촤!
푸화학!
눈앞에 있던 녀석의 몸뚱이가 잘게 썰려 나가며 잘린 단면에서 피가 뿜어져 나왔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어어……?”
스르륵…….
“왜 내 허리가…….”
푸화학!
“크아악!”
마찬가지로 주변에 있던 보초들 역시 몸통이 잘려 나가며 피를 뿌렸는데 놈들의 비명과 피 냄새가 순식간에 주변으로 퍼져 나갔다.
“그러고 보니 아직 노크도 안 했네.”
윤수호는 오른발을 가볍게 들더니 그대로 땅을 내리찍었다.
쩌엉! 쿠구구구궁……!
한 인간의 단순한 발 구름이었을 뿐이지만 주변 일대에는 지진이 일어나고 관저는 크게 흔들려 먼지와 돌 조각들이 우수수 떨어졌다.
그때였다.
왜에엥! 왜에엥!
“적습이다!”
“전군 관저 앞으로!”
그제야 윤수호를 발견한 몬스터들이 무장을 마치고 관저 앞으로 몰려들기 시작했다.
‘수준은…… 고블린들 이상인가?’
물론 평범한 고블린들을 말하는 것이 아니었다.
윤수호가 던전에서 겪었던 정예 고블린들. 놈들의 몸에서 흘러나오는 기세는 고블린들의 강함 이상이었다.
그 증거로 놈들의 무기에는 하나도 빠짐없이 최상급 오러로 무장되어 있었다.
“확실히 보스 스테이지는 다르구먼.”
이곳에 있던 보초들조차 수용소 간부들보다 강하다. 지금 개떼처럼 몰려든 근 1천 마리에 가까운 몬스터들 역시 간수장 하심과 비슷하거나 그 이상이었다.
아마 관저 안에 대기 중인 녀석들도 비슷한 실력이겠지.
‘부디 무사해야 할 텐데…….’
윤수호는 김세민와 이정화가 무사히 작전을 성공하길 진심으로 기원했다.
* * *
한편, 김세민와 이정화는…….
‘됐다!’
주 병력들이 윤수호에게 집중된 사이, 두 사람은 수화를 주고받으며 빠르게 관저로 침입하였다.
먼저 앞장서 지시를 내리는 사람은 김세민이었다.
치우팀 중에서도 추격과 탐색을 전문적으로 공부하고 실전을 쌓아온 그였기에 이정화는 한 치의 의심 없이 그의 뒤를 쫓아 서포트하였다.
본대가 출동하고 나서도 아직 꽤 많은 경계 병력들이 남아 있었다.
하지만 김세민은 놀랍게도 그들의 사각을 잘 파고들어 관저 깊숙한 곳까지 침투하는데 성공하였다.
‘선화 씨가 갇혀 있을 만한 곳이라면…….’
사전에 구해 둔 관저의 설계도를 머릿속에 완벽히 외워 두고 있었던 김세민. 그가 생각하기에 포로를 구금할 만한 장소는 단 한 곳밖에 없었다.
바로 별관에 위치한 지하실.
‘이쪽으로.’
그러나 그가 향한 곳은 별관이 아니었다. 비교적 감시가 느슨한 본관 보일러실로 향한 그는 거기서 환풍구를 통해 기어서 이동하기 시작했다.
그 끝에 놀랍게도 도착한 곳은 별관의 지하실이었다.
으드득, 서걱!
당연히 그런 곳으로 침입자가 올 거라 예상 못 했던 보초들은 두 사람의 기습을 막을 수 없었다.
이정화와 김세민은 간단히 보초 두 마리를 처리할 수 있었다.
“이런 길이 있는 건 어떻게 알았어?”
“여기는 구 관저를 한 번 리모델링한 곳이잖아. 그래서 혹시나 도움이 될 구 관저 설계도를 보니까 이런 게 있더라고. 막혔으면 별수 없이 다른 길로 돌아갈 생각이었는데 다행히 남아 있었네.”
김세민은 속으로 구하기 어려운 구 관저의 설계도까지 구해 준 최승호에게 감사함을 느끼며 더 깊은 지하실로 향했다.
“하암~”
“밖에서는 난리가 난 모양이던데 넌 하품이 나오냐?”
“알 게 뭐야. 어차피 우리는 여기만 지키고 있으면 되는데.”
지하실 깊숙한 곳에는 감옥이 존재했다.
미약한 전등 빛이 비추는 그곳에는 감옥 앞을 지키는 여섯 명의 간수들과 감옥 안에 갇힌 한 여인이 있었다.
‘여우 귀에 어깨 어림까지 닿는 흑색 단발머리, 입고 있는 복장을 보면…… 선화 씨가 확실해 보인다.’
김세민은 이정화와 눈을 맞춘 뒤 고개를 끄덕였다. 이정화도 감옥 안에 갇힌 인물을 오정화라 판단한 것이다.
두 사람은 수화로 대화를 나누었다.
‘내가 오른쪽 세 명. 네가 왼쪽 세 명. 단숨에 목숨을 끊는다. 실패할 경우 나는 공간 확보, 너는 인질 구출로 작전을 속행한다. 이의 없지?’
‘멍청하게 실수하지나 마.’
‘누가 할 소릴.’
두 사람은 씨익 웃고는 무기를 꺼내 들었다.
김세민은 공간의 협소함 때문에 자주 사용하는 장창 대신 단창 두 자루를, 이정화는 단검 한 자루를 들고 전력으로 오러를 끌어 올렸다.
한 사람당 단숨에 세 명을 해치워야 하는 것이다. 절대로 한 번의 실수도 있어선 안 된다.
다행히 눈앞의 여섯 마리는 현재 방심 중이라는 사실이었다.
팟!
신호를 맞춘 것도 아닌데 누가 먼저라고 할 것도 없이 빠르게 몸을 날리는 두 사람.
서걱! 푸확!
누가 반응할 사이도 없이 두 마리의 목이 떨어지고…….
“어?”
“무슨…….”
촤악! 푹!
침입자의 존재를 인식한 순간 두 마리가 더 목숨을 잃었다.
“젠장!”
“침입자……!”
생존자 두 명 중 하나가 무기를 꼬나 쥐고, 하나가 무전기를 들어 올리는 사이, 김세민의 단창 끝이 무전기를 쥐려던 놈의 모가지를 꿰뚫었다.
“죽어라!”
쒜엑!
그리고 무기를 꼬나 쥔 녀석이 가까스로 반격에 성공하는 순간.
쉭. 쩌걱!
“커헉!”
푹!
이정화는 녀석의 공격을 가볍게 흘려 내며 무릎을 차올렸다.
무릎은 정확하게 녀석의 턱에 명중하였고 녀석이 가볍게 기절한 틈을 타 놈의 심장에 단검을 박아 넣어 주었다.
“후우…….”
“다행히 더 이상 적은 없는 것 같다.”
“엘도라드 스승님의 특훈이 확실히 효과가 있었네. 설마 이걸 이렇게 간단하게 성공할 거라고는 솔직히 기대하지 않았는데 말이야.”
방심했다고는 하지만 이곳에 있는 간수 여섯 마리는 하심과 동급이거나 그 이상이었다.
즉, 알터와 비교하자면 놈들의 수준은 오버 알터에 준하거나 완숙한 경지에 이른 녀석들이었다.
만약 엘도라드의 특훈을 받지 않았더라면 처음 두 마리는 단숨에 제압했을지 몰라도 다른 녀석들은 꽤나 고전하거나 실패했을 가능성이 높았을 터였다.
촤촤촤!
“이봐요, 괜찮아요?”
열쇠를 찾을 시간도 아까워 창살을 베어내고 감옥 안으로 들어간 이정화는 서둘러 선화의 상태를 살폈다.
찢어진 옷 여기저기로 드러난 피부는 짓무르고 찢겨져 피와 고름이 엉켜 있었고, 쇠사슬에 매달린 팔목은 피멍으로 물들어 있었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아직 숨은 붙어 있다는 점이랄까?
촤르륵.
이정화는 그녀의 팔을 결박하고 있던 쇠사슬을 잘라 낸 뒤, 그녀를 편하게 눕히고는 품속에서 무언가를 꺼내 들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윤수호에게 건네받은 엘릭서였다.
퐁.
이정화는 엘릭서의 뚜껑을 열고 조심스럽게 내용물을 선화의 입 안으로 흘려 넣었다.
처음에는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던 선화였다.
하지만 조금씩 엘릭서가 식토를 타고 들어가기 시작하자 엘릭서의 내용물이 맑게 변하면서 그녀의 몸에서 옅은 보랏빛의 신기한 광채가 흘러나왔다.
우우웅…….
광채는 순식간에 선화의 몸을 뒤덮더니 그녀의 부상을 말끔하게 치유하였다.
“다시 봐도 정말 기적 같은 일이군.”
“그러게…….”
엘릭서의 기적을 두 번이나 직접 목격한 두 사람은 놀람을 금치 못했다.
그사이, 정신을 차린 선화가 눈을 떴다.
“여긴……?”
“정신이 좀 들어요?”
“당신들은……!”
선화는 눈앞의 인간들을 보고 흠칫 놀라 경계했다. 그에 김세민은 미르에게 받은 편지를 대신 그녀에게 건네주었다.
“놀라지 말아요. 이건 미르 공주님으로부터 부탁받은 편지입니다. 선화 씨를 구출하면 꼭 전해 달라고 하더군요.”
“아가씨…… 아니, 공주님께서요?”
선화는 조심스럽게 편지를 건네받았고, 이내 편지를 읽더니 그것을 가슴에 깊이 끌어안으며 눈물을 흘렸다.
“공주님, 무사하셨군요. 정말 다행이에요…….”
“돌아가죠. 미르 공주님도 선화 씨가 돌아오기만을 애타게 기다리고 계실 겁니다.”
“네,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편지를 갈무리한 선화는 김세민이 내민 손을 잡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인질 구출과 탈출은 이정화의 특기 분야였다. 그녀의 활약으로 두 사람은 이정화를 쫓아 전투 때문에 어수선한 관저를 무사히 탈출할 수 있었다.
탈출에 성공한 김세민은 작전 성공을 의미하는 붉은 조명탄을 하늘로 조준하여 발사하였다.
피융…… 팡!
하늘 위에서 터져 나오는 인위적인 붉은 섬광.
그것을 확인한 윤수호의 입꼬리가 지그시 말려 올라갔다.
검신이 돌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