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1.
콰앙!
윤수호가 하심을 처리하는 사이, 또 다른 외지인이 수용소의 정문을 부수고 들어오며 크게 소리쳤다.
“다들 무사한가! 부상자나 목숨이 위급한 자가 있다면 서둘러 고하라!”
소녀의 목소리는 가냘픈 미성이었지만 왠지 모르게 당당하면서도 힘이 느껴졌다.
사람들의 이목이 그쪽으로 집중되자 환수족의 눈이 크게 떠졌다. 그들의 입장에서는 절대로 모를 수가 없는 사람이 그곳에 서 있었기 때문이다.
“미, 미르 공주님!”
“공주님이시다! 공주님이 돌아오셨다!”
환수족은 기쁨의 눈물을 흘리며 서로 얼싸안았다. 미르의 존재만으로도 그들은 구원을 얻은 듯한 기쁨을 느꼈다.
한편, 간수들과 하심이 죽었다 하더라도 아직 모든 전력이 소멸한 것은 아니었다.
“뭐, 뭐야 저건 또?”
“아까 그 괴물 같은 인간의 동료인가?”
“뭐가 됐든 일단 죽여!”
초소에서 감시 중이던 몬스터들이 일제히 뛰쳐나와 미르를 향해 달려들었다.
“흥! 감히 어느 안전이라고!”
주제도 모르고 달려드는 적들을 향해 미르가 두 손을 펼쳤다.
이전에는 바닥을 보이는 선기 탓에 눈물을 머금고 도망쳐 다녀야 했지만 지금은 상황이 달랐다.
설령 이번 싸움으로 선기가 바닥나더라도 자신의 곁에는 초고속 선기 충전기(?)가 함께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미르의 손바닥에 선기가 집중되던 바로 그 순간!
콰앙!
“커헉!”
“젠장! 파르토가 다시 날뛴다!”
“저것 좀 어떻게 해 보라고!”
같은 몬스터지만 직위가 다른 이유는 역시나 강자존의 법칙에 따른 결과들이었다.
나름 쏠쏠히 재미를 봤던 간수들과 다르게 보초들이 지루한 경계근무만 담당해 왔던 이유는 그만큼 그들이 간수들보다 약하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날뛰는 파르토를 막는 것도 무척이나 힘에 겨웠다.
“으아압!”
콰앙!
몸통 박치기 한 방에 적 한 명의 몸뚱이가 터져 나가고, 아무렇게나 휘두른 주먹에 적의 머리가 박살이 났다.
딱히 눈을 속이는 기교도, 현란한 스피드도 필요 없었다.
그저 압도적인 피지컬과 파워. 그것이 파르토의 전부이자 최강의 무기였던 것이다.
하지만 언제까지나 선전할 것 같았던 파르토 역시 정상은 아니었다. 간수들과의 전투로 입은 피해가 꽤나 컸고 체력도 많이 소모된 상태였다.
쿵!
결국 끝내 버티고 버티던 파르토가 저도 모르게 한쪽 무릎을 꿇자 적들이 안광을 번뜩였다.
“됐다! 놈이 지쳤다!”
“이대로 밀어붙여! 놈을 죽여라!”
결국 전황이 불리해지면서 슬슬 파르토가 밀리기 시작할 무렵.
“설마 나를 잊은 건 아니겠지?”
“응?”
“헉!”
파지직! 파직!
보초들은 목소리를 따라 미르를 돌아보고는 입을 떡 벌렸다. 그녀의 양손에 잔뜩 압축되어 있는 전기를 확인했기 때문이다.
“가라!”
지금 당장이라도 날뛰고 싶어 울부짖는 번개를 해방하자 미르의 양손에서 뻗어 나간 번개가 무서운 속도로 적을 향해 달려들었다.
번개는 문자 그대로 빛살처럼 달려들어 적을 집어 삼키더니 그에 만족하지 않고 주변에 있는 적들을 찾아 몸을 날리며 연쇄 반응을 일으켰다.
그런데 놀라운 것이 적들과 가까이 붙어 있던 파르토는 번개의 대상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파르토를 제외하고 순식간에 적들을 몽땅 번갯불로 튀겨 버린 미르가 그제야 뇌전을 거두었다.
“파르토!”
“공주님!”
적들을 모두 처리한 후, 자신의 전사에게 달려간 미르가 파르토의 몸을 살피며 그를 걱정했다.
“다친 덴 괜찮은 게냐? 그러길래 왜 미련하게 버티고 있던 게야. 적당히 타협하고 물러설 줄도 알아야지.”
“공주님께선 무사하신 듯 보여 다행입니다. 그런데 어째서 이 위험한 곳으로 다시 돌아오셨습니까? 다른 녀석들은…….”
“…….”
파르토는 자신을 지키기 위해 가장 먼저 희생한 전사였다. 그러다 보니 그 이후에 상황들에 대해 당연히 모를 수밖에 없었다.
하여 미르는 지금까지 어떻게 상황이 흘러갔는지 파르토에게 간략히 전해 주었다.
“그렇군요. 선화마저…….”
“걱정 말거라. 그대도 무사했으니 선화도 분명 무사할 게다.”
파르토는 시무룩한 표정으로 주군을 걱정시킨 자신의 실수를 깨닫고 얼굴을 고치며 고개를 끄덕였다.
“보아하니 바깥도 정리는 끝난 것 같네.”
“수호!”
때마침 윤수호가 돌아오자 미르가 반색하며 그에게 달려가 안겼다. 그 모습에 파르토는 적잖이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미르는 환수족의 후계자다. 엄밀히 따지면 환수족 중에서도 한반도에 뿌리를 내린 환수족의 후계자였다.
모종의 사건으로 여왕이었던 어머니가 병을 얻어 일어나지 못하게 된 이후, 어린 미르는 더 이상 아이처럼 굴지 않았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그러지 않으려고 무던히도 애쓰는 모습을 보였다.
파르토는 그런 미르가 짠하고 안타까웠지만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다. 어쨌거나 지금의 여왕이 제 역할을 다 할 수 없다면 미르가 그 자리를 채울 수밖에 없었으니까.
그런데…….
‘도대체 누구지?’
도대체 누구길래 자신들에게는 애써 어른스러운 척, 여왕인 척 연기하던 미르가 모든 걸 내려놓고 예전 모습처럼 돌아간단 말인가?
파르토는 그 모습이 신기해서 한동안 말없이 쳐다보고 있다가 자신을 대신 소개하는 미르의 말에 정신을 차렸다.
“인사하게. 이쪽은 나를 지켜 주는 최고의 방패, 파르토라고 하네. 파르토, 듣고 놀라지 말거라. 이 사람…… 아니, 이분이 바로 천부의 후계자인 윤수호 나리이시다.”
‘처, 천부의 후계자? 인간이 천부의 후계자라고?’
파르토는 말도 나오지 않았다. 천부의 후계자라는 게 어떤 의미인지 그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미르가 거짓말을 한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굳이 가능성이 있다면 순진한 미르가 속고 있을…….
“윤수호입니다. 이 녀석을 지켜 주는 방패가 이렇듯 멋지고 강한 분이라 크게 안심이 되는군요.”
덥썩.
“파르토입니다. 서역에서 쫓겨난 저를 몸소 거둬주신 분이 미르 님이십니다. 미르 님을 위해서라면 제 목숨 같은 건 아깝지…….”
우우웅……!
“……!”
파르토는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윤수호 악수를 잡은 손을 통해 엄청난 선기가 범람한 강물처럼 몸속으로 밀려 들어왔기 때문이다.
미르를 통해 선기의 편린을 느껴 본 적은 있어도 지금처럼 선기에 파묻힐 만큼 선기가 몸속을 충만히 채운 적은 처음이었다.
그 결과, 놀라운 일이 발생했다.
으드득, 으득!
그동안의 모진 고문과 매질로 어긋난 골격과 파열된 근육들이 재생하고 제 자리를 찾기 시작한 것이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쩌저적, 쩌적!
마치 껍질이 갈라지는 것처럼 살결이 찢어지다가 부스러기가 되어 바닥으로 떨어지더니 그 속에서 파르토가 새로운 모습으로 재탄생하였다.
그 모습은 마치 휘황찬란한 투구를 뒤집어 쓴 장수풍뎅이와 인간이 결합한 것 같은 모습이었다.
한데 그 모습이 몬스터처럼 이질적인 게 아닌, 본래 그렇게 존재했던 것처럼 자연스러웠다.
윤수호는 새롭게 태어나고 있는 파르토를 구경하며 입을 열었다.
“환수족이라길래 야수 같은 종족만 있는 줄 알았더니 그게 아닌 모양이군.”
“그렇다. 파르토는 서역에서도 힘이라면 당해 낼 자가 없는 ‘갑충족’의 전사였다고 한다. 그러던 어느 날, 파르토는 길거리에서 부녀자를 희롱하는 무뢰배를 보고 그를 응징했다고 하더군. 그런데 하필이면 그 무뢰배가 그 지역 유지의 하나뿐인 아들이었고 파르토는 수배자가 되어 쫓기는 몸이 되었다.”
미르의 말이 사실이라면 환계나 인계나 사람 사는 곳은 전부 비슷비슷한 모양이었다.
“결국 파르토는 현상금 사냥꾼들을 피해 한반도로 넘어오게 되었고, 굶어 죽어 가던 그를 내가 거두었다. 그에게는 괴로운 과거겠지만 나에게는 최고의 행운이었지.”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파르토의 변화도 결실을 맺으며 차분히 안정을 되찾아 가기 시작했다.
칠흑 같았던 동체는 눈부신 황금빛으로 물들어 있었는데, 한눈에 봐도 그 견고함이 예사롭지 않았다.
전체적으로 5분 전의 그와 지금의 그는 전혀 다른 존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던 것이다.
‘무인으로 따지면 환골탈태 같은 건가?’
어색하지 않게 인간의 모습으로 둔갑한 파르토. 인간의 모습으로 둔갑했음에도 그의 체구는 이전에 둔갑했을 때보다 훨씬 커져 있었다.
쿵!
2m 20cm가 훌쩍 넘는 그는 윤수호는 내려다보더니 무릎을 강하게 꿇었다.
“삼가 천부의 후계자께 불경한 의심을 품었던 죄, 진심으로 사죄드립니다!”
쩌엉!
땅에 균열이 생길 정도로 이마를 찧은 파르토.
감히 자신 따위가 천부의 후계자를 의심한 것도 모자라서 심지어 사기꾼일지도 모른다 생각했다니…….
단순무지한 자신의 생각이 너무나도 부끄러워 참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신하가 주군 대신 상대를 의심하고 경계하는 것이 당연한 의무입니다. 너무 자책하지 말고 고개를 드세요.”
“넓은 도량에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천부의 후계자시여…….”
“그런 표현은 낯간지러우니 편하게 윤수호라고 불러 주세요. 저도 편하게 파르토 씨라고 부르겠습니다.”
“말씀 받들겠습니다, 수호 공.”
그렇게 사소한 오해가 해결되자 윤수호는 본격적으로 사람들을 돌보기 시작했다.
먼저 그가 신경 쓴 사람들은 환수족이었다.
다행히도 환수족은 윤수호가 선기를 조금씩 나눠 주자 어렵지 않게 상처를 치유할 수 있었다.
‘선기 적응력이 달라서인지 미르 같은 초회복이나 파르토처럼 환골탈태를 하는 사람은 없군.’
오히려 선기를 너무 많이 흘러 넣으면 강한 멀미를 느끼거나 괴로워하는 사람들도 있었으니 일반적인 환수족의 선기 적응력은 많이 낮은 듯이 보였다.
반면, 수용소에서 노역하던 북한 주민들…… 즉, 인간들은 선기에 대한 적응력이 0에 수렴해서 거의 효과를 보지 못했다.
1,000의 선기를 주입하면 999는 빠져 나가는 느낌이랄까? 다만 남은 1만으로도 어느 정도 피로는 회복할 수 있었지만 문제는 중상자들이었다.
“진짜 위급한 사람들은 따로 있습네다, 신령님들.”
“제발 그 사람들 좀 살려 주시라요!”
“제발 부탁드리기요…….”
윤수호와 미르를 신령이라 부르며 그 자리에 무릎 꿇고 울면서 두 손을 싹싹 비는 사람들의 모습에 윤수호의 마음이 무거워졌다.
사실 윤수호는 이들의 모습을 직접 볼 때까지 이들에 대해 아무런 생각도 갖지 않았다.
그야 당연했다. 같은 민족이라고는 하나 반세기도 넘게 분단된 땅에서 서로 다른 삶을 영위하고 서로를 증오했다.
같은 말을 쓰는 남보다 못한 존재였던 것이다.
그래서 이번에 수용소를 찾아왔을 때도 환수족만 구출하면 나머지 인간들은 어찌되든 신경 쓰지 않으려 했다.
하지만…….
아들이 아버지를 지키기 위해 몸을 날리고, 은인을 구하기 위해 목숨을 거는 그들의 모습을 보며 윤수호는 생각을 고쳤다.
그들도 변화하고 있었다.
김씨 독재 정권 아래에서 무능력하게 지배받던 인간 가축들이 아닌…… 자신들의 손과 발로 살아가기 위해 변하고 싶어 하는 게 보였다.
‘만약 이들뿐만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이들과 같다면…….’
윤수호는 선택해야 할 터였다.
이들을 버릴지, 이들을 취할지.
검신이 돌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