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8.
후방 부대와 인근 병원에서 구급차와 이송 차량들이 속속들이 도착하고, 부상병과 사망자들을 구분하여 신속히 후방으로 이송하였다.
“내 이럴 줄 알았지.”
“그러게 경고했잖아. 꿀 좀 작작 빨라고…….”
“그게 인마, 목숨 걸고 싸운 전우한테 할 말이냐, 자식들아.”
어느새 정신을 차린 여진우는 김세민, 이정화의 잔소리에 움찔하며 대꾸했지만 김세민도, 이정화도 모르지 않았다.
여진우가 여기서 놈들을 막아 내지 못했다면 더 큰 희생이 따랐을 것이란 걸 말이다.
그렇기 때문에 동료들은 팔꿈치까지 뼈가 그대로 드러난 그의 왼팔이 더욱 안타깝고 가슴 아플 뿐이었다.
그런데!
“고생 많으셨습니다.”
“아닙니다, 위원장님. 덕분에 살았습니다. 감사드립니다.”
여진우는 윤수호가 다가오자 자리에서 일어서려 했고 윤수호는 그를 앉히며 대신 그에게 포션 하나를 건네주었다.
“이건……?”
정체를 알 수 없는 보라색 액체가 담긴 병이 말로만 듣던 포션이라는 사실은 알고 있었지만 실제로 보는 건 처음이었다.
게다가 자신이 알고 있는 포션의 색깔은 빨간색이나 파란색이었지 지금처럼 수상한 보라색이 아니었다.
“복용해 보세요. 효과가 있으면 좋겠군요.”
꿀꺽…….
여진우는 마른침을 삼켰다. 하지만 이내 윤수호가 자신에게 독을 줄까 싶어 눈을 딱 감고 병뚜껑을 열더니 그대로 목구멍에 들이 부었다.
꿀꺽꿀꺽…….
“어때?”
내용물을 전부 마신 여진우에게 김세민와 이정화가 걱정을 담아 묻자 입맛을 쩝쩝 다시던 여진우가 눈을 번쩍 뜨며 대답했다.
“오!”
“왜 그래? 뭐가 이상해?”
“포도 맛인데? 존 맛.”
“…….”
이정화는 진심으로 여진우의 머리통을 날려 버리기 위해 그에게 달려들었고, 김세민은 그런 그녀를 말리느라 필사적이었다.
그 순간!
우우웅!
“응?”
“뭐, 뭐야?”
윤수호를 제외한 모든 사람들의 이목이 여진우에게 집중되었다.
여진우의 몸이 은은한 보랏빛으로 물들더니 그의 몸을 뒤덮고 있던 크고 작은 상처들이 순식간에 아물기 시작했다.
하나 정말 놀라운 건 그게 아니었다.
뼈가 앙상하게 드러나 있던 왼팔이, 현대의 의료 기술로도 절단 외에는 답이 없을 것 같았던 그의 왼팔에 근육이 재생되고 새살이 돋기 시작했다.
“이건……!”
“세상에…… 말도 안 돼…….”
“오오…… 이것 참 신기한 일이로구나.”
김세민도, 이정화도, 심지어 환수족인 미르조차 그 광경을 넋 놓고 바라보았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도 않았다. 불과 5분 정도?
고작 5분 사이에 여진우의 몸이 100% 회복되었다. 찢어진 슈트와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제외하면 전투의 흔적 같은 건 찾아볼 수가 없었던 것이다.
“너, 너 진짜 괜찮아?”
“몸은? 아픈 데는 없고?”
여진우는 자신의 몸을 슬쩍 훑어보더니 마지막으로 자신의 왼팔을 들어 움직여 보았다.
방금 전까지 감각이 없었던 왼팔은 언제 그랬느냐는 듯 평소처럼 아무렇지 않게 움직일 수 있었다.
“다 나았네?”
“…….”
그제야 사람들은 윤수호에게 시선을 집중하였다.
대관절 그가 건네준 포션이 무엇이길래 다 썩어 문드러져 치료가 불가능한 부상마저 회복시킨다는 것인가?
“뭐였습니까, 위원장님! 그 죽은 사람도 부활시킬 것 같은 포션은?”
“엘릭서입니다. 실제로 죽은 사람을 부활시키지는 못하지만 죽지만 않으면 어떤 질병이든, 부상이든 완전히 회복시킬 수 있는 포션이죠.”
“와…… 던전에서 그런 것도 얻을 수 있는 겁니까?”
김세민이 놀라서 묻자 윤수호는 고개를 저었다.
“그건 저도 확신할 수 없군요. 제가 이걸 얻은 건 던전에서 어떤 조건을 달성하여 획득한 특전인지라…… 몬스터를 사냥해서 얻을 수 있다고는 장담할 수 없습니다.”
“그만큼 귀한 물건이란 뜻이군요. 그런 귀한 물건을 저 같은 녀석에게 써 주셔서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위원장님.”
이제는 병상에 누워 있는 게 되레 어색해졌는지 여진우가 멀끔한 모습으로 자리에서 일어나 윤수호에게 허리를 숙였다.
그러자 윤수호는 미소와 함께 고개를 저었다.
“신경 쓰지 마십쇼. 충분히 값어치를 했다고 생각하니까요. 가능하다면 이 포션으로 모두를 구하고 싶지만…….”
그건 불가능했다. 엘릭서는 다른 포션과 다르게 한 모금이라도 복용하는 순간 효과가 적용되며 나머지 내용물은 투명하게 변한다.
평범한 물이 되는 것이다.
해서 윤수호는 부상병들을 위해 아낌없이 포션을 지원한 후, 남은 이들과 작전 계획을 다시 세웠다.
“이곳을 습격한 짐승 인간들은 미르를 쫓던 추적병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안타깝게도 많은 정보를 가지고 있지는 않더군요. 물론 대왕이라 불리는 적 우두머리의 본거지는 알아냈지만요.”
“놈들이 그걸 순순히 불던가요?”
이정화가 놀라서 묻자 윤수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눈앞에 닥친 고통보다 앞선 공포는 없으니까요. 게다가 보아하니 우두머리의 본거지는 그리 큰 기밀도 아닌 것 같더군요. 그만큼 자신의 힘에 자신감이 있다는 뜻이겠지만.”
“곧바로 우두머리를 치실 생각이십니까?”
김세민의 질문에 윤수호는 고개를 저었다.
“대장이 당했다고 놈들이 인질들은 순순히 해방한다면 그렇게 하겠지만…… 저는 인질들의 목숨을 가지고 도박할 생각이 전혀 없습니다. 일의 순서는 인질들의 구출, 이후 적의 섬멸로 고정하겠습니다.”
“구출의 우선순위는 어떻게 설정하시겠습니까?”
여진우의 질문에 윤수호의 시선이 미르에게 향했다. 미르는 무거운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이 안건에 대해서는 서로 합의가 된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저희는 특무대고 누가 뭐래도 구출 0순위는 우리의 식구인 특무대 북파팀입니다. 다음 순위는 환수족, 그다음은 북한 주민들로 설정하도록 하겠습니다. 다만 이게 절대적인 우선순위는 아닙니다. 눈앞에 구할 수 있는 사람이 있으면 그 사람부터 반드시 구합니다. 딱딱한 사고방식에 매몰되어 제일 중요한 기회를 놓치는 어리석은 사람은 되지 맙시다.”
“무적!”
회의를 마친 일행은 여진우를 현장에 남겨 두고 DMZ로 이동했다. 혹시라도 만약의 사태를 대비해 여진우가 이곳을 계속 지키기로 결정한 것이다.
후방이 든든해야 전방도 안심하고 작전에 집중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윤수호도 엘도라드에게 희망동의 수비를 부탁한 것이다.
엘도라드라면 그 어떤 재앙종이 부지불식간에 출현하더라도 충분히 대처 가능할 테니까.
그렇게 DMZ를 넘어 북한에 도착한 일행.
“주변이 조용하네요.”
“아무래도 미르를 추적하기 위해 대부분의 추적병들을 이끌고 내려온 탓이겠지. 그래도 분명 보고를 위해 일부의 병력은 남겨 뒀을 게 틀림없어.”
추적병들을 털어 알아낸 그들의 본거지를 찾아가자……! 아니나 다를까, 김세민의 말처럼 연락책 담당 몬스터 몇 마리가 남아 있었다.
슉.
윤수호는 소리 없이 건물에 접근, 순식간에 놈들을 제압하였다.
“커억!”
“지금부터 몇 가지 질문을 하겠다. 순순히 대답한다면 고통 없이 죽여 주겠다 약속하지.”
“지랄하지 마! 내가 네놈 뜻대로 순순히 불 것 같냐?”
1분 뒤.
자신이 입은 팬티 색깔이 뭔지까지도 전부 발설하고 죽은 몬스터의 사체를 처리하는 사이, 일행이 그를 찾아왔다.
“어떻게 됐습니까?”
“이 녀석들을 관리하는 중간 관리자의 위치를 알아냈습니다. 놈을 찾아가면 훨씬 더 많은 정보를 알아낼 수 있겠죠.”
“그것 참 다행이네요.”
“하지만 정기 보고가 오지 않으면 여기서 이변이 일어났다는 사실을 놈들도 눈치챌 겁니다. 그러니 지금부터는 속도를 좀 더 내도록 하겠습니다.”
“이건 좀 불행이고요.”
윤수호가 두 팔을 벌리자 김세민과 이정화는 파랗게 질린 얼굴로 그에게 안겼다.
* * *
한 뭉치의 그림자가 빛살처럼 빠른 속도로 공간을 가로지른다. 그만한 질량에 그만한 속도로 바람을 앞지르면서도 스쳐가는 풀잎 하나 흔들리지 않았다.
자동차를 구하기엔 시간도 촉박하고, 시끄럽고, 심지어 느리다.
지금처럼 윤수호에게 안겨 이동하는 것이 수백…… 아니, 수천 배는 더 은밀하게 빠르게 시간을 절약할 수 있었다.
하지만…….
“우웨엑……!”
“으으으…….”
김세민과 이정화는 나무 둥치에 엎드려 열심히 거름을 주고 있었다.
마치 블랙홀에 빨려 들어가는 것 같은 그 기묘한 속도감에 내장이 뒤집어지는 것 같은 기분이었기 때문이다.
‘진짜 다른 세상에 사시는 분이구나. 어떻게 그런 속도로 움직일 수 있는 거지? 아니, 그런 속도로 움직이면서 몸이 멀쩡하다는 게 가능해?’
‘위원장님은 그렇다 쳐. 어떻게 미르 님도 멀쩡할 수 있는 거지?’
뇌전을 품을 수 있는 기린은, 실제로 성체가 되면 지금의 윤수호만큼 빨리 움직일 수 있다.
미르는 아직 불가능한 얘기였지만 그래도 속도에 대한 내성은 충분히 있는 상태였기에 멀쩡했던 것이다.
“힘들면 쉬고 계실래요?”
“아, 아닙니다! 움직일 수 있습니다.”
“이제 멀쩡합니다. 그럼 뭐부터 할까요?”
그들이 도착한 곳은 황해북도 평산군에 위치한 한 방송국이었다.
이곳은 과거 공산당과 김씨 정권의 위대함을 세뇌하기 위해 기능했던 방송국이었다.
하나 이제는 몬스터들의 중간 관리책이자 우두머리의 지시를 받아 남부 각 지역으로 전송하는 역할을 수행하는 곳이 되었다.
“방송국은 제가 점령하도록 하겠습니다. 두 분은 여기서 미르를 지켜 주십쇼.”
“예.”
“조심히 다녀오십쇼, 위원장님.”
고개를 끄덕인 윤수호가 돌아서려는 순간, 미르가 고사리처럼 작은 손으로 윤수호의 손을 잡았다.
“조심하거라. 그대가 다치면 나는 무척이나 슬플 것이다.”
나이에 어울리지 않는 말투와, 나이에 어울리는 표정에 윤수호는 슬쩍 미소를 그리며 미르의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어 주었다.
“걱정해 줘서 고맙다. 그럼 다녀올게.”
* * *
탄스는 곰과 인간이 결합한 것 같은 거대한 덩치의 몬스터였다.
당연히 덩치에 걸맞은 포악함과 전투력, 그리고 덩치에 어울리지 않는 간교함으로 대왕의 신임을 산 탄스.
현재 그는 이 방송국에서 지배자로 군림하며 그야말로 왕 같은 생활을 영위하고 있었다.
인간도, 환수족도, 몬스터들도. 모두 그의 한마디면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린다. 마음에 들지 않는 수컷은 죽이고, 마음에 드는 암컷은 취하며 대왕 부럽지 않은 삶을 살고 있었던 것이다.
탄스는 이런 행복이 영원히 지속될 줄 알았다.
윤수호라는 인간이 자신의 눈앞에 나타나기 전까지는…….
“네가 이곳의 책임자인가.”
“응? 건방지게 누가 감히 날……!”
아무런 인기척도 없이 나타나 다짜고짜 주먹부터 휘두르는 인간.
평소 같았으면 놈의 주먹을 잡아 으깨고 머리를 부숴 골수부터 으적으적 씹어 먹었을 것이다.
그런데…….
콰아앙!
“커헉……!”
주먹을 잡아 으깨기는커녕 주먹에 쳐맞고 날아간 탄스.
그는 벽을 부수고 그대로 옆방에 떨어졌다.
부러진 갈비뼈가 폐부를 찌르는 탓에 피와 기침이 끊이질 않았고 정신은 어질어질 했다.
어지간한 몬스터가 풀 스윙한 철퇴를 맞고도 간지러워하던 자신이 고작 인간의 주먹 한 방에 반(半)빈사 상태가 되었다는 사실이 믿기지가 않았다.
하지만 진짜 악몽은 지금부터였다.
“너는 말 안 듣게 생겼으니까 일단 좀 맞고 시작하자.”
“그, 그게 무슨……!”
그 말을 끝으로 윤수호는 정말 복 날에 대 패듯이 탄스를 잡아 족쳤다.
“이 빌어먹을 인간 새끼가……!”
탄스 역시 처음에는 반항도 하고 필사적으로 대들기도 했다.
전력을 다하면 그 대왕조차 흥미로워할 정도의 강자인 자신이 고작 인간 하나를 상대하지 못할 리가 없었으니까.
그런데…….
“어허, 자꾸 움직이면 맞은 데 또 맞는다.”
눈앞의 괴물 같은 인간에게는 그 어떤 것도 통하지 않았다.
결국 탄스가 머리를 두 손으로 감싸 쥐고 몸을 잔뜩 웅크린 채 낑낑거리자 그제야 윤수호의 주먹이 그쳤다.
검신이 돌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