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7.
쾅!
땅을 박찬 여진우의 신형이 한순간에 공간을 가로지른다.
“빠르다!”
짐승 인간들은 치를 떨었다.
그랬다. 여진우의 무기는 저 비인간적인 리치뿐만이 아니었다. 그것만이라면 짐승 인간들이 이 정도로 학살을 당하진 않았을 것이다.
문제는 저 기동성!
길고 흐느적거리는 몸짓에서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저 폭발적인 순발력이야말로 여진우의 가장 큰 무기라고 할 수 있었다.
촤르륵!
그 순간 여진우가 팔을 휘둘렀다. 강철 섬유를 꼬아 놓은 듯 유연하고 탄력적인 근육은 채찍처럼 팔을 당기며 손끝에 쥔 단검을 섬전으로 바꾸어 놓았다.
스핏!
반쪽짜리 공격이라면 모를까, 지금처럼 완성된 그의 일격을 피하거나 막은 짐승 인간은 단 한 명도 없었다.
그러니 나달이 최초였다.
까앙!
여진우의 완성된 일격을 제대로 막아낸 사람은 말이다.
“호오~ 역시 대장은 다르다 이건가?”
쾅!
지팡이로 막아 낸 여진우의 검을 나달이 튕겨 내자 폭음과 함께 여진우의 몸이 뒤로 튕겨져 날아갔다.
그게 끝이 아니었다.
“물어뜯어라, 굶주린 혼이여.”
나달이 손에 쥔 구슬 세 개를 힘주어 깨트리자 그 속에 봉인되어 있던 칠흑의 영혼들이 여진우를 향해 달려들었다.
크르릉…… 컹컹!
영혼은 마치 잘린 개의 머리처럼 형상을 갖추며 여진우를 향해 적개심을 드러냈다.
“뭐, 뭐야, 이건?”
팟!
빠른 속도로 다가오는 영혼들을 피해 몸을 날린 여진우. 그러나 영혼들은 그의 몸에 꿀이라도 발라놨는지 추적을 멈추지 않았다.
슈왁!
결국 가장 가까이 붙어 있던 영혼 하나를 베어 버린 여진우.
그런데…….
콰직!
“크윽!”
오러가 담긴 검으로도 영혼을 베어 낼 수 없었다. 오히려 개의 머리를 한 영혼이 팔을 물어뜯자 정말로 팔이 뜯겨져 나가는 듯한 격통과 함께 팔이 썩어 나가기 시작했다.
하나 그뿐만이 아니었다.
콰앙!
어느새 접근한 나달의 지팡이가 여진우의 머리를 가격했다. 다행히 검을 들어 가까스로 방어했기에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머리통이 터져 즉사했을 것이 분명했다.
“감이 좋은 놈이로군. 하지만 어디까지 버틸 수 있을 지…….”
바닥에 처박힌 여진우는 쉴 시간도 없이 벌떡 일어나 몸을 날렸다. 자신이 쓰러지건 말건 남은 두 마리의 영혼이 끈질기게 그를 향해서 달려들었기 때문이다.
까강! 깡! 촤촤촤!
“젠장!”
여진우는 답답했다.
붙어 보니 알겠다. 놈의 체술은 확실히 뛰어나다. 봉술까지 더하면 다른 짐승 인간들보다 훨씬 강했다.
하지만 그게 다였다. 시간을 들여 진득하게 붙는다면 무조건 자신이 이길 수 있었다. 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막무가내로 달라붙는 두 마리의 영혼 때문이었다.
이미 한 마리가 왼손에 달라붙어 손을 갉아먹고 있는 탓에 가끔 정신이 나갈 정도로 끔찍한 고통을 느끼고 있는 상황이었다.
그런 상태에서 나머지 두 마리를 몸에 붙이는 것은 자살행위였다. 만약 그러다 영혼이 심장이나 목이라도 물어 버린다면 즉사도 피할 수 없을 것이다.
나달도 그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여진우를 조금도 신경 쓰지 않았다.
영혼은 체력이 없다. 하지만 인간에겐 체력의 한계가 존재한다. 즉, 시간만 버티다 보면 여진우의 패배는 확정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여진우도 그런 상황을 직감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여진우는 각오를 굳혔다. 놈의 예상대로 진행되면 결국 놈이 바라는 결과밖에 나오지 않을 테지. 그렇다면 놈이 예상하지 못했던 방식대로 싸울 뿐이었다.
팟!
여진우가 나달을 향해 땅을 박차고 가속했다. 나달은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놈의 스피드는 위협적이었지만 다행이도 그 사이에 영혼이 끼어들고 있었다.
목숨이 아깝다면 돌아가는 수밖에 없었고 그렇게 되면 충분히 대응 가능할 정도로 스피드가 줄어든다.
그런데!
콰작!
“……!”
나달은 눈을 부릅떴다. 여진우가 먼저 물렸던 왼손을 뻗어 다시금 영혼에게 팔을 내준 것이다.
썩어 가는 속도는 더욱 더 빨라졌고 고통은 전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하지만!’
영혼은 아직 한 마리가 더 남아 있었다. 놈의 공격을 한 번이라도 막는다면 뒤에서 덮쳐드는 영혼은 반드시 여진우의 목을 물어뜯을 터였다.
딱 한 번. 단 한 번의 공격만 막으면 된다.
그런데…….
스핏!
“설마 실력을 숨기고……!”
“이야~ 설마설마했는데 이게 여기서 성공하네. 어떠냐, 개자식아! 억울해서 눈도 못 감겠지? 크크큭!”
“…….”
여진우가 피식 실소를 터트리자 나달은 참담한 심정으로 눈을 감았다.
그 순간, 그가 들고 있던 지팡이가 매끄럽게 잘리더니 나달의 목에서 피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결국 잘린 단면을 따라 미끄러진 나달의 머리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그와 동시에 여진우의 목을 물기 직전 개 머리의 영혼이 연기가 되어 사라졌다.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성공하지 못한 퍼펙트 오러. 그 오러의 정수가 마지막에 성공하면서 승부를 뒤집어 버린 것이다.
‘크윽, 젠장……!’
여진우는 식은땀을 흘리면서도 억지로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팔을 물어뜯던 영혼은 사라졌지만 저주는 그대로 남아 있어 지금도 팔이 실시간으로 썩어 가는 와중이었다.
심지어 손은 뼈까지 드러나 녹아내리는 살점이 바닥으로 뚝뚝 떨어질 정도였으니…… 그 고통은 이루 헤아리는 것조차 불가능하겠지.
“대장도 뒈졌는데 너희도 따라가야지. 드루와. 나도 너희들 몽땅 잡아 족쳐 버리고 밀린 낮잠이나 자야겠다.”
저주와 독기 때문에 몸이 휘청거리면서도 도발을 멈추지 않는 여진우.
그 모습에 나달이 당했음에도 다른 짐승 인간들은 살기를 드러내며 여진우를 노려보았다.
“어차피 다 죽어 가는 놈이다!”
“이대로 물러서면 우린 대왕에게 죽은 목숨이라고. 어차피 물러설 곳은 없다!”
“놈을 죽여!”
“그래, 와라. 갈 때 가더라도 네놈들 정도는 길동무로 끌고 갈 수 있으니까.”
그렇게 여진우가 죽음을 받아들인 순간.
“으아악!”
“꺄아악!”
콰아앙!
날카로운 남녀의 비명과 함께 하늘에서 운석이 떨어졌다.
“뭐, 뭐야……?”
“저건…….”
하늘에서 떨어진 것은 운석이 아니었다.
먼지구름이 걷히고 드러난 실체는 네 명의 남녀였다.
김세민과 이정화는 체면도 불사한 채 바닥에 엎드려 먹을 것을 게워 내는 중이었고, 윤수호의 등에 업혀 있던 미르도 눈이 빙글빙글 도는지 정신을 못 차렸다.
그러나.
“응……?”
금세 저주와 독기를 감지한 미르가 빠르게 정신을 차리고는 부상당한 여진우에게 달려갔다.
지원군의 도착에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았던 여진우는 미르를 알아보고는 피식 웃으며 한쪽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뭐야, 꼬맹이. 너였냐? 애써 안전한 곳으로 보내 줬더니…….”
“누군가 했더니 나를 구해 준 은인로구나. 감사의 인사는 나중에 하마. 지금은 잠시 잠들어 있거라.”
“그게 무슨……?”
미르가 여진우의 이마를 검지 끝으로 톡 찌르는 순간, 놀랍게도 여진우가 기절하듯 정신을 잃고 쓰러졌다.
조금이라도 이 끔찍한 고통에서 해방될 수 있도록 배려한 것이다.
그사이, 미르는 썩어 가는 여진우의 팔에 작은 손바닥 두 개를 향했다. 그러자 손바닥 안에서 녹색의 따뜻하고 포근한 빛이 나와 썩어 가는 팔을 감쌌다.
빛은 순식간에 저주의 진행을 억제시키더니 저주를 해주하기 시작했다.
“제법 강한 악령의 저주로구나. 영이 소멸되었음에도 남은 저주의 힘이 이 정도라니…….”
미르가 선기를 더욱 불어넣자 저주는 이내 검은 연기가 되어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그와 더불어 살을 썩히던 독들 역시 해독되어 사라졌다.
저주와 독으로 살과 근육이 녹은 탓에 왼팔은 이미 팔꿈치까지 드러나 있어 뼈가 완치되는 일은 없었다.
하지만 미르의 선술 치료 덕분에 더 이상 왼팔이 썩어 들어가는 일도 없었다.
‘선술인가.’
미르가 하는 일을 힐끔 확인한 윤수호는 그녀가 선술로 여진우의 팔을 고치고 있는 걸 확인하자 그쪽에 대한 걱정을 덜 수 있었다.
자신은 따로 해야 할 일이 있었기 때문이다.
“뭐 해? 눈앞에 환수족 계집이 나타났다! 놈들을 죽이고 계집을 탈취해라!”
자신들의 목적이 눈앞에 나타나자 짐승 인간들은 군침을 흘리며 윤수호 일행을 향해 덤벼들었다.
그들의 입장에서는 이미 반쯤 목적을 완수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던 것이다.
그러나…….
“궁금하군.”
윤수호는 때마침 자신의 발치에 굴러다니던 돌멩이 하나를 허공섭물로 들어 올렸다.
“던전을 벗어난 몬스터는…….”
슉.
두둥실 허공으로 떠오른 돌멩이가 한순간에 사라졌다.
“아이템을 드롭하는지.”
퍽퍽퍽퍽!
그 순간, 동시에 짐승 인간 네 마리의 머리가 폭발하면서 뇌수와 두개골 조각, 눈깔 등이 사방으로 튀었다.
짐승 인간들은 그 자리에 우뚝 서서 몸을 떨었다.
윤수호의 얼굴 옆에는 어느새 피를 흠뻑 뒤집어쓴 평범한 돌멩이가 둥둥 떠서 핏방울을 흘리고 있었다.
살아남은 짐승 인간들은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상상도 할 수 없었다.
그저 정신을 차리고 보니 옆에서 함께 뛰던 동료들의 머리가 터져 나가더니, 남은 시신만 널브러져 간헐적으로 꿈틀거렸을 뿐이니까.
한편, 머리가 터져 나간 시신들을 무심한 시선으로 내려다보던 윤수호.
뚜벅뚜벅 걸어 시신으로 다가간 그가 시신을 클릭해 보았지만 소지품 창 같은 건 뜨지 않았다.
“아무래도 육체를 얻어 던전 밖으로 튀어나온 몬스터들은 보상이 없는 것 같군. 즉, 위험도가 높고 패널티밖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뜻인가.”
직접 대면한 놈들은 확실히 자신이 알고 있던 짐승형 몬스터들과 모습도, 가진 기운도 많이 닮아 있었다.
물론 차이점도 분명 존재했지만 처음 만났던 고블린들 역시 평범한 고블린들과 차원이 다르지 않았던가?
그런 차이점을 고려한다면 역시 녀석들도 던전에서 뛰쳐나온 몬스터들이라고 보는 게 합당했다.
대신 던전 안에서 사냥하면 갖가지 귀중한 아이템을 드롭하는 것과 다르게 바깥에서는 아무런 보상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차이점이 있었다.
“그렇다면…….”
윤수호의 무심한 눈빛이 살아남은 짐승 인간들을 스윽 훑었다.
그의 시선이 닿는 순간, 짐승 인간들은 저도 모르게 경기를 일으키며 한 발짝 뒤로 물러섰다.
녀석들도 본능적으로 감지한 것이다.
저 인간은 죽었다 깨어나도 이길 수 없다는 사실을…….
“얻을 건 정보밖에 없겠군.”
윤수호는 짐승 인간들을 허공섭물로 둥실 띄워서는 조용하고 으슥한 곳으로 이동하면서 남은 두 사람에게 지시했다.
“현장 정리를 부탁드려도 될까요?”
“아, 예! 물론입니다.”
“다녀오십쇼. 위원장님.”
윤수호는 고개를 끄덕인 후, 전사한 군인들을 향해 짧은 묵념의 시간을 가졌다.
그 동안에도 짐승 인간들은 눈깔만 굴릴 뿐, 탈출할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그들은 오감보다 육감이 더 날카로운 녀석들이기 때문이다.
눈에 보이지는 않았지만 지금 그들이 느끼고 있는 공포는 악마가 거대한 손아귀로 자신들을 움켜쥔 채 아가리를 벌리고 있는 상황과 같았다.
이미 절망이 영혼 깊숙이 침투한 상황이라는 뜻이었다.
잠시 후…….
짐승 인간들의 끔찍한 비명이 한동안 일대에 울려 퍼졌다.
검신이 돌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