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5.
윤수호의 눈이 이채로 물들었다.
사슴의 몸통은 작지만 늘씬했고, 산양의 발굽은 옥석과 같았으며, 전신을 뒤덮은 물고기의 비늘이 황금처럼 빛났고, 용의 머리는 그 위용이 왕과 같았다.
각양각색의 동물들을 조합해 놓았으면서도 조잡하지 않고 신비로우면서 아름답기까지 한 그 모습은 마치…….
“전설이나 동화 속에서나 볼 법한 기린(麒麟) 같군.”
“그 전설이나 동화 속의 존재가 맞느니라. 옛날에는 가끔 둔갑을 하지 않고 인계로 외출한 조상들도 많았으니까. 그 모습을 보고 너희 인간들은 재미있는 동화나 전설 따위를 지어내곤 했다더군.”
“둔갑을 한다면 완벽히 인간으로 변신할 수 있는 건가?”
“개개인마다 차이가 있다. 둔갑술에 능통한 자일수록 인간과의 차이가 없지. 하지만 둔갑술에 재주가 없는 자는 거의 변신이 불가능해. 선화도 둔갑술을 열심히 익혔지만 그 귀만큼은 어쩔 수…….”
둔갑술에 대해 설명하던 미르의 입에서 자연스럽게 선화에 대한 얘기가 나오는 순간, 소녀의 안색이 급격하게 어두워졌다.
“그대에게 한 가지 확인할 것이 있다.”
다시 소녀의 모습으로 돌아온 미르는 윤수호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고 말했다.
“얘기해.”
“그대는 어떻게 실전된 천부공의 주인이 된 게냐. 신계에서도 천부공을 찾기 위해 모든 방법을 동원했지만 찾지 못했다고 들었다. 선계의 왕, 천부만이 배울 수 있다고 알려진 신의 권능을 그대는 어떻게 손에 넣은 것인지 궁금하구나.”
“짧지 않은 얘기인데 괜찮겠어?”
“상관없다. 솔직하게 얘기해 주면 그걸로 충분하다.”
그 말에 미르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에 윤수호는 자신이 어떻게 천부공을 손에 넣게 됐는지 담담하게 설명을 시작했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윤수호가 말을 마치자 미르는 더 이상 없을 경악에 가득 찬 표정으로 말까지 더듬었다.
“어, 어떻게 그런 일이……!”
“이해해. 나도 돌아왔을 때 너와 똑같은 심정이었거든.”
“신기하구나. 이 세상이 아닌, 이곳과 닮은 전혀 다른 세상에서 실전된 천부공을 배우다니……. 믿지 못할 얘기지만 그렇기에 이해가 되는구나. 그게 아니라면 선계에서도 찾지 못한 천부공을 인간이 찾아 배울 수는 없는 노릇일 테니.”
미르는 진지한 얼굴로 윤수호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물었다.
“하면 묻겠다. 그대는 진정 천부의 후계자인가?”
“첫 소개도 36대 후계라고 얘기한 것 같긴 한데…….”
“그런 그대에게 부탁이 있다. 천부의 후예여, 부디 우리 환수족을 구해 다오!”
자리에 무릎 꿇은 미르가 윤수호에게 넙죽 고개를 숙였다.
“일단 얘기부터 듣지. 지금 이게 무슨 상황인 건지.”
“아까도 얘기했지만 이 세상은 위에서부터 선계, 환계, 인계로 구분되어 있고 서로 간섭하는 일이 없다. 하지만 그건 표면적인 경계선일 뿐이고, 실제로는 각 경계에는 틈이 존재 하느니라. 하지만 그 틈이 영원히 존재하는 일은 없고, 틈이 생기면 닫히기도, 닫힌 경계에서 다시 틈이 생기기도 한다.”
“그 틈을 통해서 다른 경계를 왕래할 수 있다고?”
“그렇다. 물론 틈이 유지되는 시간은 굉장히 짧고 작기 때문에 몇 시간에서 며칠 정도가 전부에다 고작 한두 명이 지나갈 수 있는 게 전부였지만…….”
“문제가 생긴 거로군.”
윤수호의 추측에 미르는 무거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어느 날, 갑자기 미지의 기운이 인계에 발생하기 시작하면서 환계와 인계의 경계선이 심각한 타격을 받기 시작했다.”
“미지의 기운?”
“인계에 미지의 괴물들이 나타날 때 발생하는 기운 말이다.”
‘재앙종을 말하는 건가.’
윤수호도 느낀 적이 있었다. 게이트가 발생할 때 느껴지던 마이너스 에너지.
그 에너지가 게이트의 발생뿐만 아니라 인계와 환계의 경계까지 뒤흔들고 있다는 소리였다.
“그것만으로도 환계에서는 무너져 가는 경계를 복구하느라 전심전력을 다 하고 있었다. 양쪽의 경계가 무너지면 어떤 위험한 일이 발생할지 아무도 예상할 수 없었으니까. 하지만…….”
미르는 조그마한 주먹을 틀어쥐며 입술을 잘끈 씹었다.
“그러는 사이, 인계에서 지금까지와 전혀 다른 종류의 기운이 발생했다. 기존의 그것보다 더 크고 강력한 미지의 기운은 복구되어 가던 환계와의 경계를 순식간에 무너트렸다. 그리고 엄청나게 거대한 구멍을 만들어 냈느니라.”
“지금까지와 전혀 다른 종류의 기운이라면…… 던전이로군.”
확실히 던전의 입구가 발생하는 에너지는 기존의 게이트와 비교해도 그 성질과 위력이 전혀 달랐다.
즉, 던전에서 발생하는 에너지가 무너져 가던 경계선에 구멍을 뚫어 버리는 트리거가 된 것이다.
“그 구멍은 마치 굶주린 짐승의 아가리 같았다. 수많은 우리의 동족들을 집어 삼켰고, 우리 일족들은 자신의 의지와 관계없이 인계로 떨어졌다. 그리고 인계에는…….”
까드득!
“내 상상을 아득히 초월한 괴물들이 있었다. 나는 우리 동족을 구하기 위해 인계로 왔지만, 동족들을 구하기는커녕 나 때문에 더 많은 동족이 희생당했을 뿐이었다. 내가 약해서…… 내가 무능하니까……!”
어느 순간부터 미르의 두 뺨을 타고 굵은 눈물 줄기가 흘러 내렸다. 하나 그것으로도 미르가 느끼고 있는 절망과 후회와 분노를 담아내는 건 불가능했다.
“지금도 구멍은 점점 더 커져 가고 더 많은 동족들이 인계로 빨려 들어가고 있다. 나는 우리 동족들은 구하고 싶다. 천부의 후예여, 부디 나의 염원을 들어 다오. 그렇게만 해 주면 그대가 시키는 건 무엇이든……!”
툭.
윤수호는 눈물을 흘리며 애원하는 미르의 머리에 손을 얹더니 가볍게 쓰다듬어 주었다.
“애가 어른한테 그런 얘기 하는 거 아냐. 그냥 도움이 필요하면 도와 달라고 해.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니까.”
“그, 그 말은 우리를 도와주겠다는 것이냐?”
“그래.”
윤수호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 * *
몇 시간 뒤, 윤수호의 이름으로 총사령부가 주관하는 긴급회의가 소집되었다.
그 자리에는 윤수호와 함께 미르 역시 참가하였다.
아무래도 윤수호 자신이 혼자 설명하는 것보다는 당사자가 직접 상황을 브리핑하는 것이 더 설득력이 높았기 때문이다.
“허허, 인계니 환계니…… 대관절 이게 현실인지, 꿈인지도 이젠 잘 모르겠습니다.”
“재앙종이 처음 출현했을 때도 그랬지요. 중요한 건 적응입니다. 그때도 변화한 현실을 빠르게 인식하고 받아들이지 못한 탓에 얼마나 많은 피해를 입었습니까?”
“눈앞에 버젓이 환계의 후계자가 존재하고, 환계의 존재가 사실이라고 한다면 응당 그에 맞는 대책을 찾기 위해 논의해야지요.”
게이트의 발생과 던전의 출현으로 사람들의 인식도 크게 바뀌었다.
예전 같았으면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냐며 눈앞에 있는 미르의 존재조차 주작으로 치부했을 텐데 지금은 현실을 빠르게 수긍하고 대책을 세우려는 모습이 역력했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아도 북파팀과 연결이 두절된 것이 마음에 걸리던 차였습니다. 북파팀이야 임무의 성질상 사실 정기 연락 자체가 거의 불가능이나 마찬가지이기 때문에 유예를 최장 일주일 정도로 두지만…… 아무래도 이번에는 큰 문제가 생긴 게 틀림없겠군요.”
“아마도 그럴 가능성이 큽니다.”
천호진의 의견에 대북전담사령관인 방대혁이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 보니 그대들에게 줄 것이 있다.”
북파팀이라는 얘기에 생각이 떠올랐는지 미르는 허공에 손을 쑥 집어넣었다.
“오오……!”
“허공에 손을 집어넣다니? 저건 대체 무슨 요술이길래…….”
“크흠! 그렇게 뚫어져라 쳐다보지 말거라. 부끄럽지 않느냐!”
그 모습을 장성들과 장교들이 신기하게 쳐다보자 미르는 조금 쑥스러워하며 아공간 속에 보관해 두고 있던 물건 하나를 꺼내 김건희 대위에게 넘겨주었다.
“이건……?”
천호진이 김건희를 통해 전달받은 물건의 정체는 다름 아닌 데이터 칩이었다.
“나는 그것이 무엇인지 모른다. 다만 그걸 내게 맡긴 최승호라는 인간은 그것을 그대들에게 전해 달라고 부탁했다.”
“최승호? 귀하가 최 팀장과 만났단 말인가요?”
방대혁이 놀라서 묻자 미르가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그와 만난 것은 우연이었다. 구멍을 통해 인계에 처음 내려와 접촉한 인간이 그 사내였고 그를 통해 인계에 관한 많은 정보를 얻을 수 있었다. 그대들과 북녘 사람들이 단절되어 있다는 사실도. 아무튼 그가 도와주지 않았다면 나는 지금 이 자리에 없었을 것이다. 그는 틀림없는 나의 은인이다.”
“최 팀장과 다른 팀원들은 무사한가요?”
“그건…….”
미르의 표정이 어두워지자 방대혁의 표정 역시 무거워졌다.
섬멸팀이나 대테러팀 못지않게 위험한 임무를 수행하는 대북팀이었다. 그러나 대북팀이 가장 가슴 아픈 건 세 팀 중에서 시신 회수율이 가장 낮은 팀이라는 사실이었다.
즉, 가족들은 안고 슬퍼할 시신조차 없다는 뜻이었다.
“자세한 사항은 차후 관련 기관장들과 따로 의논하도록 하겠습니다. 오늘 회의는 이만 파하도록 하지요.”
천호진의 깔끔한 정리에 회의가 해산되고, 윤수호와 천호진, 미르, 방대혁이 따로 모여 최승호가 건넨 데이터 칩을 확인하였다.
거기에는 현재까지 그들이 수집한 북한 정권에 대한 상황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북한의 상황이 생각했던 것보다 끔찍하군요.”
윤수호의 감상에 천호진도 눈살을 찌푸리며 대꾸했다.
“김 씨 정권은 붕괴 직전이고 북한 주민들 역시 3년 사이에 2천만 명 이상이 목숨을 잃었다라…….”
“그간 북한의 사정을 생각해 보면 딱히 예상하지 못한 미래는 아닙니다. 예상보다 큰 변수라면 북한 주민들의 희생이 생각보다 크다는 것뿐이지요.”
재앙종이 출현하기 전부터 북한은 이미 재앙이 시작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빈곤과 기아, 부정부패와 청탁, 정부가 주도하는 압제와 폭력이 일상인 곳이었기 때문이다.
“우리가 정부는 놈들이 재앙의 출현에 맞춰 등장한 각성자들을 이용해 허튼 짓을 꾸미지 않을지 그동안 줄곧 감시하고 있었습니다. 놈들이라면 충분히 혼란스러운 정국을 틈 타 모략을 꾸며도 백 번은 더 그럴 녀석들이니까요.”
방대혁의 설명에 천호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때문에 북파팀을 조직하여 북측의 동향을 살피기 시작했지만 놈들의 예상보다 재앙종의 위기가 더욱 컸던 거지요. 결국 북한 정권도 버티지 못하고 빠르게 몰락하기 시작하더군요.”
“그런데 설마 던전까지 출현했을 줄은…….”
결과적으로 남북한에 하나씩 사이좋게 던전이 출현한 셈이었지만 그 결과는 전혀 달랐다.
“김 씨 정권은 러시아로 피난해 몸을 의탁. 현재 북한은 던전에서 출현한 몬스터들에 의해 지배당하고 있다니…….”
“인간뿐만이 아니다. 놈들에게는 인간도, 우리 환수족도 똑같은 노예일 뿐이니까.”
미르는 불끈 틀어쥔 주먹을 부들거리며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미리 말해 두지만 놈들은 강하다.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강하다. 도움을 구하러 와서 이런 말을 하는 나 스스로가 밉고 멍청하지만 신중하게 판단하는 게 좋을 게다.”
윤수호는 자신들의 도움이 누구보다 간절한 상황에서도 역으로 상대를 걱정해 주는 미르의 마음 씀씀이가 기특해서 저도 모르게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걱정 마. 이쪽도 만만한 상대는 아니니까.”
“하으윽…….”
미르는 자신의 머리를 쓰다듬는 윤수호의 손길이 창피하면서도 따뜻하고 포근해서 기분 좋았다.
검신이 돌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