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3.
“후욱, 후욱……!”
숨이 턱 끝까지 차오른다.
다리는 천근만근 무거워 땅에 붙은 발을 떼기가 여간 곤혹스러운 것이 아니었고 몸은 물 먹은 솜처럼 무거워 견딜 수가 없었다.
“아, 아가씨. 제 말 잘 들으세요. 절대 멈추지 말고 뛰세요. 아무리 힘들어 죽을 것 같아도 절대 뒤돌아보시면 안 돼요. 아셨죠?”
“아, 안 돼! 선화는? 선화 혼자 남겨 두고 나 혼자 어떻게…….”
“미르!”
그 순간, 선화의 입에서 소녀의 진명이 터져 나오자 울먹거리던 소녀가 눈을 크게 뜨며 깜짝 놀랐다.
“소리쳐서 미안해요. 하지만 우리 동족들의 운명이 지금 아가씨의 작은 어깨에 달려 있어요. 아직 어린 아가씨께 이런 짐을 지우는 것이 무엇보다 안타깝고 죄송하지만…… 그래도 아가씨밖에 없어요. 반드시 살아남으세요. 그리고 강해지세요. 아가씨가 당하시면 더 이상 일족에 미래는 없습니다.”
그녀의 단호한 설득에 미르는 입술을 잘끈 씹었다.
더 이상 선화와 같이 도망치는 건 불가능해 보였기 때문이다.
“가세요, 얼른!”
“……꼭 구하러 올게.”
미르의 기약 없는 약속에 선화는 서글픈 미소로 화답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미르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몸을 돌려 그대로 뛰어갔다.
지친 몸뚱이가 뒤뚱거리며 뛰어간다기보다는 빨리 걷는 수준에 가까웠지만, 지금 미르의 상태를 생각하면 기적에 가까운 일이었다.
“반드시 살아남으세요. 아가씨만 살아남는다면 일족은 다시 부흥할 수 있을 테니까.”
애끓는 심정으로 미르를 배웅한 선화도 몸을 돌렸다.
뒤에서 빠른 속도로 다가오는 추격자들의 기척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개처럼 우리 뒤꽁무니만 졸졸 쫓아오다 보니 많이 피곤했나 봐. 기척을 줄줄 흘리고 다니는 걸 보면.”
“상처 입은 먹잇감은 포식자의 기척조차 훌륭한 무기가 되니까.”
추격대 조장은 주위를 둘러보더니 선화에게 물었다.
“꼬맹이는 어디 숨겼지?”
“내가 말해 줄 것 같아?”
선화가 비릿하게 웃자 그녀의 얼굴 옆으로 구슬이 떠올랐다. 그에 조장이 작은 한숨을 내쉬더니 품속에서 태블릿PC 하나를 꺼내 그녀에게 던져 주었다.
빠르게 날아가던 테블릿PC는 그녀의 눈앞에서 허공에 둥둥 뜨며 멈춰 섰다.
“이게 뭐지?”
“보면 알 거다.”
조장의 권유에 PC를 손에 쥔 선화의 눈이 이윽고 부릅떠졌다. 화면 속에는 끔찍한 몰골로 고개를 숙이고 있는 사내가 쇠사슬에 묶여 있었기 때문이다.
‘설마……!’
“영상 통화다. 실시간이라는 뜻이지. 지금은 살아 있는 것 같지만 네 대답 여하에 따라 앞으로도 살아 있을지는 의문이군.”
조장의 말처럼 사내의 가슴이 미약하게나마 부풀었다 줄어들길 반복했다.
고문관은 사내의 머리채를 잡아 거칠게 들어 올렸다. 그러자 피범벅이 된 최승호의 얼굴이 그대로 노출되었다. 그 모습에 선화는 입술을 잘끈 깨물었다.
“마지막으로 묻지. 꼬맹이…… 환수족의 후계자는 어디 있지?”
“그러네. 발버둥 쳐도 소용없겠지. 어차피 너희는 포기하지 않을 테니까.”
결국 선화가 포기한 것일까? 모든 것을 내던진 듯한 선화의 발언에 다른 추격조 대원들이 미소를 머금던 찰나.
되레 조장은 미간을 찌푸렸다.
“그러니까 내 대답은 이거다.”
쒜엑!
그때 그녀의 얼굴 옆에 둥둥 떠 있던 구슬이 총알보다 빠른 속도로 날아갔다.
그 순간, 갑작스레 구슬의 숫자가 급격히 늘어나더니 주위를 빠르게 회전하기 시작했다.
조원들은 함부로 움직이지 못했다. 어느 것이 진짜인지 구별하기가 힘들었기 때문이다.
“이년이 어디서 잔재주를……!”
“구슬은 무시하고 본체를 직접 노려!”
조원 둘이 구슬을 무시한 채 선화를 향해서 달려들었다. 순식간에 거리를 좁힌 두 사람이 그녀의 목에 칼을 꽂는 순간.
훅!
선화의 모습이 사라지면서…….
퍽퍽!
동시에 구슬이 날아오자 조원 둘이 반응도 못 해도 목숨을 잃었다. 그리고는 빈 공간에서 선화가 돌연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겠는가?
“젠장, 환술인가……?”
“귀찮은 년!”
선화의 환술이 얼마나 귀찮고 대단한지는 그들이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본래 같았으면 사흘도 걸리지 않았을 추격전이 한 달 가까이 지체되었던 이유가 바로 이 환술 때문이었으니까.
‘좋아. 아무리 놈들이라도 내가 전력으로 환술을 사용하는 동안에는 쉽게 움직일 수 없다. 물론 나도 섣불리 놈들을 공격할 수는 없지만…….’
그러나 한계는 금방 찾아왔다.
남아 있던 선기도 부족한 판국에 그나마도 이런 식으로 사용해 버리니 금방 바닥을 쳤던 것이다.
‘더 이상은 버티지 못해. 그렇다면 하다못해 놈이라도 길동무로 끌고 간다!’
그런 각오와 함께 구슬이 다음 목표로 설정하여 날아간 대상은 바로 조장이었다.
하지만…….
콰앙!
조장은 별안간 번개처럼 몸을 틀더니 오러가 잔뜩 응축된 주먹을 휘둘러 뒤에서 날아오던 구슬을 정확히 후려갈겼다.
환술은 완벽했지만 살기를 지우지 못한 탓에 들키고 만 것이다.
“커헉!”
선화는 피를 토하며 그 자리에 쓰러졌다. 충격을 받은 구슬도 빛을 잃고 바닥에 떨어졌다. 구슬은 지금 당장 깨져도 이상하지 않을 금이 간 상태였다.
“완전히 정신을 잃었나…….”
조장이 확인한 선화의 상태는 지금 당장 깨울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그동안 제대로 먹지도, 마시지도 못하고 신경을 극한까지 곤두세운 채 무려 한 달이 넘는 시간 동안 도망쳐 다녔다.
그것도 어린 아이를 보호하면서…….
그런 극한을 넘어선 상황에서 여우 환수족의 정수라 할 수 있는 여우 구슬에 심각한 대미지를 입었다.
죽지 않은 것만 해도 기적이라 할 수 있겠지.
“꼬맹이의 흔적을 찾았습니다!”
“쫓아가. 반드시 놈을 잡아와라.”
조장의 명령에 조원들은 빠른 속도로 몸을 날려 미르의 뒤를 쫓았다.
* * *
“하암~!”
특무대 치우팀 소속 여진우에게는 특이한 버릇이 있었다.
“여 소령님, 오셨습니까.”
“어, 나 딱 사흘만 쉬다 갈게. 신경 쓰지 말고 일 봐.”
“예, 편히 쉬십쇼.”
“수고.”
그것은 조금만 일이 고되다 싶으면 곧바로 최전방 근무를 자처해서 지원한다는 것.
말이 최전방 근무지 치우팀인 그가 가서 할 일은 그렇게 많지 않았다. 아니, 까놓고 말해서 할 일도 없었다. 즐길 거리도 당연히 없었고.
그러나 여진우에게는 전혀 해당 사항이 없었다.
“하암~!”
그가 원하는 것은 오로지 수면. 즉, 꿀잠이었다.
좁아 터진 방이든, 허름한 관사든 그런 건 전혀 신경 쓸 바가 아니었다. 안대 하나 눈에 걸치고, 이불 덮고, 베개만 베고 잘 수 있다면 거기가 지상낙원이었으니까.
물론 집에서 자면 훨씬 편하고 아늑하게 잘 수 있을 거라 생각하지만 그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집에 있으면 언제 어디서 호출이 떨어질지 모르기 때문이다.
그러나 최전방 근무에 지원하는 동안은 모든 비상 호출에서 면제였다.
당연히 북한이 미쳐서 쳐들어오지 않는 이상 하늘이 무너져도 그의 달콤한 꿀잠을 방해할 요소는 없다는 뜻이었다.
그런데…….
-관사에서 대기 중인 여진우 소령 응답 바람. 관사에서 대기 중인…….
지금까지 한 번도 울린 적이 없던 무전기가 울리자 여진우가 졸린 눈을 비비며 무전을 받았다.
“여진우다. 무슨 일이야.”
-현재 북쪽에서 다수의 미확인 전투 병력이 접근하는 것을 확인했습니다.
“뭐?”
하늘에 실금이 가는 순간이었다.
* * *
철푸덕!
다리가 풀린 미르가 그만 앞으로 고꾸라지며 머리를 땅에 찧었다. 그런데 불운하게도 머리를 찧을 때 돌부리에 찧었는지 이마가 찢어지며 피가 흘렀다.
그러나 미르는 아픈 내색조차 없이 곧바로 일어나 정신없이 앞으로 달렸다.
이미 다리는 한계에 가까웠고, 몸은 삐걱거리며 근육이 고통에 찬 비명을 내질렀지만 상관없었다.
살아야 한다.
오로지 이 일념 하나로 움직이지 않는 다리를 채찍질하고, 턱 끝까지 차오른 숨을 억지로 삼켰다.
그렇게 작디작은 소녀는 무작정 DMZ를 돌파했다.
하지만 그조차도 한계였다.
DMZ에 매설되어 있던 수많은 지뢰들은 어떻게든 특유의 위기 감지 능력으로 피해갈 수 있었지만…….
털썩…….
다시 한 번 쓰러진 미르는 더 이상 일어나지 못했다.
‘이, 일어나야 하는데…… 도망쳐야 하는데…….’
더 이상 말라붙어 버린 체력은 회복되지 않았다. 아니, 체력을 넘어 정신력까지 긁어다 쓴 탓인지 몸을 일으키기는커녕 자꾸만 눈이 감겼다.
그나마도 정신을 잃지 않을 수 있었던 건 필사적인 염원 때문이었으리라.
하나 이젠 그마저도 끝이다. 자신이 무능해서…… 자신이 약하고 모자란 탓에 일족들을 구할 수 없었다는 죄책감이 물밀듯이 밀려왔다.
‘제발 말 좀 들어. 이 빌어먹을 몸뚱어리야!’
주륵…….
“저기 있다!”
“놈이 쓰러져 있다!”
“멍청한 놈, 이렇게 잡힐 거 괜히 번거롭게 만들고 있어.”
미르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점점 더 가까워지는 추적자들의 목소리 때문이었다.
‘미안해. 미안해요, 모두들…….’
미르는 자신의 혀를 물었다. 놈들이 원하는 것은 살아 있는 자신의 심장. 자신이 죽으면 희망도 사라지지만 저들도 원하는 것을 잃게 된다.
그것만이 지금 자신이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라는 생각에 눈을 질끈 감고 혀를 깨물려던 바로 그 순간!
“하암, 고된 격무 끝에 잠시 꿀 좀 빨아 보겠다는데 세상이 나서서 지랄이네, 지랄이.”
미르는 새롭게 들려온 목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목소리는 뒤가 아닌 앞에서 들렸기 때문이다.
거기에는 처음 보는 낯선 남자가 의욕 없어 보이는 표정으로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보아하니 남쪽에서 온 모양인데, 조용히 보내 줄 때 꺼져라. 너희가 신경 쓸 일이 아니다.”
“으음…….”
여진우는 쓰러진 채 숨만 헐떡이는 미르와 추적자들을 번갈아 바라보다 고개를 갸웃하며 대답했다.
“싫은데?”
“죽여.”
두 번의 권유는 없었다.
여진우의 즉답에 추적자 셋이 움직여 그를 포위했다. 군더더기 한 점 찾아보기 힘든 깔끔하고 빠른 속도였다.
하지만…….
쒜에엑!
소름끼치는 소성과 함께 유난히 길고 가는 그의 팔이 채찍처럼 움직였다. 그러자 접근한 적들의 목이 순식간에 떨어져 바닥을 뒹구는 것이 아니겠는가?
‘……!’
콰우우우우……!
만만한 적이 아님을 알아본 이들의 리더 격인 사내는 전력을 다하기 위해 뒤집어쓰고 있던 로브를 벗어 던지고 기운을 끌어 올렸다.
“응?”
그 모습에 살짝 고개를 갸웃하는 여진우. 사람의 말을 하기에 당연히 인간인 줄 알았던 상대는 놀랍게도 짐승과 인간을 반쯤 섞은 듯한 모습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순간!
“죽어라!”
기운을 전력으로 끌어 올린 녀석이 여진우를 향해 몸을 던졌다. 한순간에 거리를 지운 녀석의 손톱이 여진우의 심장을 할퀴려던 순간.
서걱!
여진우의 팔이 채찍처럼 움직이며 먼저 녀석의 머리를 훔쳤다.
툭, 데구르르…….
그렇게 미르를 쫓던 추적자들은 전부 싸늘한 주검이 되었다.
“사, 살려 주세요…….”
미르는 여진우를 향해 간신히 살려 달라는 말을 뱉고는 그대로 정신을 잃어버렸다.
‘이거 왠지 이 녀석을 데려가면 엄청 귀찮아질 것 같은 예감이 드는데…….’
“에이 씨, 나도 모르겠다.”
아이가 살려 달라고 목숨을 구걸하는데 고민할 이유는 없었다.
여진우는 뒷머리를 긁적이더니 그대로 미르를 업어 들고는 부대로 돌아왔다.
검신이 돌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