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2.
“아가씨!”
선화는 뛰쳐나가려던 소녀를 다급히 제지했다.
“아무래도 이곳 역시 틀린 것 같습니다.”
“그게 무슨 소리야? 저 사람들이 입고 있는 옷은 승호 아저씨와 같은 옷이잖아. 그럼 승호 아저씨랑 같은 편 아니야?”
소녀의 질문은 타당했다. 소녀 자신도 그렇게 믿었기 때문에 의심없이 다가가려 했던 것이고.
때마침 바람을 타고 온 비릿한 피 냄새가 아니었다면 선화 역시 소녀와 함께 모습을 드러냈을 것이다.
“검은 옷이라 잘 구별되진 않지만 저들이 있는 곳에서 피 냄새가 잔뜩 풍기고 있어요.”
“피 냄새?”
그제야 코를 킁킁거리는 소녀.
선화의 말처럼 미약한 바람을 타고 온 옅은 피 냄새가 코끝을 간질였다.
“정말이다. 피 냄새가 나.”
“승호 씨가 얘기했어요. 만약 거점에서 전투가 벌어지면 승패에 관계없이 다음 거점으로 이동할 거라고요. 그렇다면 당연히 저곳도 비어 있어야 하는데 승호 씨와 똑같은 복장을 한 사람이 있다는 건…….”
“함정일 거란 뜻이야?”
선화는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조용히 움직이죠. 아직 저들은 우리의 존재를 모르는…….”
그 순간, 갑작스러운 인기척에 눈을 돌린 선화의 동공이 커졌다. 순찰조 두 명이 짝을 지어 이쪽 근처를 지나는 중이었기 때문이다.
선화는 소녀의 입을 막고 자신도 한껏 숨을 죽인 채 수풀 깊숙이 몸을 숨겼다.
다행히 상대는 아직 이쪽을 눈치채지 못했다. 이대로 놈들이 지나쳐 간다면 무사히 이곳을 빠져나갈 수…….
꼬르륵…….
“……!”
“……!”
난데없는 배꼽시계에 선화가 눈을 부릅떴다. 시계의 주인공은 소녀였다.
소녀는 당황했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쫓기고 도망치느라 며칠 동안 빗물 조금으로 목숨을 연명했으니 뱃속에서 아우성을 칠 수밖에…….
그러나 문제는 소녀의 작은 배꼽시계를 놈들도 들었다는 사실이었다.
“뭐이네? 방금 무슨 소리 못 들었어?”
“임자도 들었네? 내만 들은 게 아인 거디?”
“저쪽에서 난 것 같은데 날래 확인해 보자.”
최승호와 같은 남한 특무대의 복장을 하고 북한말을 사용하는 두 명의 정찰조.
이것으로 확실해졌다. 저들은 적이다.
“후우…….”
선화는 숨을 깊게 들이 마신 뒤, 호흡을 조절하며 선기(仙氣)를 운용했다. 곧 그녀의 아랫배에서 내공과는 질이 다른 따뜻하고 신비로운 기운이 전신으로 흩어졌다.
‘조금만 더, 조금만 더…….’
두 명의 정찰조가 조심스럽게 경계하며 자신의 사정거리 안으로 들어온 순간!
‘가라!’
선화의 손이 빠르게 움직였다. 그녀의 손끝에서 뻗어 나간 건 새끼손톱만 한 구슬이었다.
구슬은 총알처럼 빠르게 날아가 왼쪽에 서 있던 사내의 목을 단숨에 꿰뚫었다.
“컥……!”
‘빨리……!’
그러나 아직 한 명이 더 남았다. 동료의 죽음을 보고 반응하기 전에 서둘러 숨통을 끊어야만 했다.
그런 주인의 절박함을 담은 구슬은 순식간에 허공에서 선회하여 남은 한 명의 이마마저 단번에 관통해 버렸다.
퍽! 털썩…….
머리에 구멍이 뚫린 두 번째 사내도 쓰러져 절명했다.
그제야 선화는 안도의 한숨을 내쉴 수 있었다.
‘사체는 금방 발견될 테지만 그때까지 이곳을 벗어나면 아무 문제없어.’
“가시죠, 아가씨.”
“응, 미안…….”
“아가씨의 잘못이 아니에요. 배고픈 건 어쩔 수…….”
“아이고, 미안하지비. 갑자기 똥뚜간이 급하게 마려워서…….”
조심스럽게 도망치려고 수풀을 나섰던 선화와 소녀, 그리고 뒤늦게 도착한 세 번째 정찰조원이 서로를 마주보았다.
순간 양쪽 모두 시간이 멈춰 버린 듯 서로를 보고 아무런 반응도 할 수 없었다.
스윽…….
정찰조원의 시신이 내려갔다. 방금 전까지 살아 있었던 자신의 동료들의 체온이 싸늘하게 식어 가는 모습이 보였다.
슈욱!
그 순간! 거두어들이려고 했던 선화의 구슬이 그녀의 의지를 받들어 다시 한 번 총알처럼 세 번째 정찰조원을 향해 날아갔다.
퍼억!
필사적으로 날아간 구슬은 그의 심장을 사정없이 관통했지만…….
삐이이이익!
이미 호각은 불린 뒤였다.
“뛰세요!”
결국 선화는 소녀의 손을 잡고 다시 금 지친 다리를 재촉하기 시작했다.
“저기다! 잡아!”
도대체 이 지긋지긋한 술래잡기는 언제쯤 끝낼 수 있을까? 죽는 것으로 끝낼 수 있을 거라면…… 어쩌면 선화는 그 길을 선택했을 지도 몰랐다.
지금 자신의 손을 꽉 쥐고 있는 이 작은 손이 환수인들의 마지막 희망만 아니었다면 말이다.
‘난 죽어도 상관없어. 어떻게든 아가씨만…… 아가씨만 무사히 살려서 보낼 수 있다면!’
그렇게 두 사람은 더욱 더 남쪽 깊은 곳으로 도망쳤다.
* * *
윤수호가 중국에서 돌아온 이후 며칠이 지난 어느 날.
윤수호는 희망동과 가장 가까운 부지 중에 농경지로 사용할만한 땅을 찾아보기 시작했다.
농사 및 부동산 전문가들과 함께 땅을 둘러보며 여러 가지 조언을 구하고 또 농경지로 사용하기에 적합한 땅을 찾았지만 마땅히 마음에 드는 곳이 없었다.
그러던 와중에 윤수호의 눈이 번쩍 뜨이는 곳이 있었다.
‘호오…….’
쪼그려 앉아 바닥에 손을 뻗은 그의 입꼬리가 묘하게 말려 올라갔다.
“여기로 하죠.”
“예?”
“하, 하지만 여기는…….”
윤수호의 갑작스러운 결정에 농사 및 부동산 전문가들도 깜짝 놀라 허둥거리며 자료를 찾기 시작했다.
하나 그들이 준비한 자료 중에서 이곳에 관한 토지 정보가 나올 리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윤수호가 선택한 땅은 유흥가였으며 농경지의 농자도 보이지 않는 땅이었기 때문이다.
“이사장님? 보시다시피 이곳은 유흥가이고 농사를 지을 환경이 전혀 되지 않습니다.”
지금 당장은 그렇겠지.
하지만 윤수호가 혹한 이유는 당장의 조건이 아니라 미래의 가능성이었다.
단단한 아스팔트, 높이 솟은 건물들, 꺼져 버린 조명들까지…….
많이 망가졌다고는 하나 유흥가는 예전의 모습을 대부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윤수호가 보는 것은 껍데기가 아니었다.
바로 땅속에서 흘러나오는 기운!
두꺼운 아스팔트와 건물들에 막혀 땅은 거의 봉쇄되어 있다시피 덮여 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 모든 것을 뚫고 나오는 땅의 기운이 윤수호의 이목을 사로잡은 것이다.
“상관없습니다. 건물이야 밀어 버리면 그만이니까요.”
“하, 하지만…….”
“저는 이곳으로 결정했습니다. 그렇게 알고 준비들 해 주시죠.”
돈은 문제가 아니었다.
중국에서 돌아온 지 며칠 후, 왕명이 수천억 원의 돈을 재단의 명의로 입금했기 때문이었다. 물론 그 돈은 쌍룡회에서 준비한 자금이었다.
그 덕분에 비서진들은 그 즉시 자리에서 토지 주인들과 연락하여 토지 매매를 완료할 수 있었다.
언제 돌아갈 수 있을지 모를 버려진 땅을 시세보다 두 배로 더 쳐준다는 말에 건물과 토지 주인들도 두 번 생각할 것 없다는 듯이 매매를 결정한 것이다.
“구매 완료했습니다, 이사장님.”
“지금 당장 철거 용역을 수배할까요?”
비서진들의 요청에 윤수호는 고개를 저었다.
“아뇨, 제가 마무리하도록 하죠. 위험할 수 있으니 여러분께서는 먼저 돌아가 주세요.”
사람들을 돌려보낸 윤수호는 주변 건물을 훑어보았다.
재앙종의 침략 때문에 대부분이 부서지고 망가진 상태였지만 농경지로 재활용하려면 정리해야 할 부분이 너무나도 많았다.
그러다 문득 그는 자신의 주먹을 내려다보았다.
대한민국에 나타난 첫 번째 던전을 세계 최초로 단일 격파하면서 윤수호가 손에 넣은 특전은 어마어마했다.
그 덕분에 윤수호는 본의 아니게 예전보다 훨씬 강해진 상태였다.
그 전에도 힘을 통제하는 게 쉬운 일은 아니었다. 그러나 특전들을 손에 넣고 나서는 더욱 더 통제하기가 어려워진 게 사실이었다.
가장 비슷한 예를 들자면 한 삽으로 태산을 뜰 수 있는 거대한 굴삭기가 있다고 하자. 윤수호의 일상생활은 그 굴삭기로 상처 없이 삶은 계란을 까는 것과 비슷했다.
그만한 굴삭기로 삶은 계란을 뭉개 버리는 것이라면 숨 쉬는 것보다 쉬운 일이겠지. 하지만 상처 없이 계란을 까는 건 그야말로 차원이 다른 문제.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다.
다시 말해서 남들은 아무렇지도 않은 평범한 일상을 영위하는 것도, 윤수호에겐 엄청난 집중력과 힘의 컨트롤이 필요했던 것이다.
결국 윤수호가 선택한 방법은 자신의 힘을 몇 단계에 걸쳐 봉인하는 것이었다.
덕분에 모든 힘이 봉인되었을 때 윤수호는 남들처럼 평범하게 생활을 영위할 수 있었다.
유리컵을 쥐면서 깨지지 않을까 걱정하지 않아도 되고, 사랑하는 가족을 안으면서 뼈가 으스러질까 걱정하지 않아도 됐다.
그리고 지금, 윤수호는 자신이 스스로 봉인한 3단계 봉인 중, 1단계 봉인을 해금하였다.
콰우우우우우우!
단지 그것만으로도 엄청난 기세가 들끓어 오르며 몸이 폭발할 것처럼 기세가 용솟음쳤다.
뿜어져 나온 기세는 폭풍이 되어 주변을 휩쓸었다. 망가진 차량이 들썩거리고, 부서진 파편들이 하늘로 솟구쳤다.
딱히 윤수호가 기운을 끌어 올린 것이 아니었다. 그저 자연체에서 뿜어져 나오는 최소한의 기운이 그 정도였던 것뿐.
윤수호는 그 기운을 자연스럽게 갈무리하였다.
겉으로 폭발시켜 해소해야 할 기운이 몸 안에 압축되자 금방이라도 육체가 터져 나갈 것 같은 기운이 강맹하게 휘몰아쳤다.
‘그럼…….’
그 상태에서 윤수호는 오른발을 가볍게 들었다.
그가 한 것은 별것 없었다. 그저 숨을 쉬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뿜어져 나오던 기세에 방향을 조절해 준 것뿐.
윤수호가 진각을 밟는 순간, 전신으로 뿜어져 나오던 기세가 오른발을 통해 뿜어져 나왔다.
쩌엉!
그 결과, 그를 중심으로 반경 200m 내에 있던 모든 것들이 휩쓸려 나갔다.
자동차도, 건물도, 가로등도, 아스팔트도, 소화전도, 존재하는 모든 것들이 마치 폭탄이라도 터진 것처럼 사라진 것이다.
딱히 그가 기운을 의도적으로 끌어 올려 행한 일이 아니었다.
콰콰콰콰콰콰콰쾅!
그러다 보니 진각뿐만 아니라 가볍게 주먹을 내뻗기만 해도, 손바닥으로 허공을 훑기만 해도, 심지어 앞으로 뛰기만 해도 비슷한 결과가 일어났다.
‘이거…….’
윤수호는 불과 5분도 안 돼서 허허벌판이 된 유흥가를 보고는 다시 자신의 손을 들여다보았다.
‘너무 강해진 걸지도…….’
콰우우우우우우!
의도적으로 압축을 해제하자 다시 숨 쉬듯 사방으로 날뛰는 폭풍 같은 기세에 윤수호는 가볍게 한숨을 쉬었다.
* * *
시간이 지나 유흥가를 중심으로 반경 수십만 평에 이르는 농경지를 확보한 윤수호.
한때 유흥가였던 땅의 기운은 확실히 엄청났다.
땅을 덮고 있던 장애물이 걷히고, 땅의 기운이 순환하면서 응축되어 있던 기운이 일대에 퍼져 나가 땅 전체가 살아 숨쉬기 시작한 것이다.
이렇듯 농경지도 확보되고 농사를 지을 인력도 대기 중이었지만 가장 큰 문제가 남아 있었으니…….
‘아직 땅을 지킬 병력이 부족하단 말이지.’
사람들을 대피시키는 것뿐이라면 대단한 병력은 필요치 않을 지도 몰랐다. 하지만 이 농지에서 지켜야 할 건 사람뿐만이 아니었다.
곡식.
사람뿐만 아니라 곡식도 함께 지키지 못하면 농사를 짓는 의미가 없었다. 그리고 당연하게도 곡식은 도망칠 수 없었다.
즉, 언제든 재앙종이 나타나면 빠른 시간 내에 토벌하는 수밖에 없다는 뜻이었다.
‘문파가 완성되려면 시간이 필요해. 지금 당장 전력으로 쓸 만한 병력을 구하려면…….’
윤수호의 머릿속에 한 가지 방법이 떠올랐다.
검신이 돌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