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신이 돌아왔다-88화 (88/175)

88.

“한옥 마을을 업그레이드 시켜 줄 화가도 영입했고, 거주 구역 외에 다른 섹션들 역시 완공을 눈앞에 두고 있는 상황에서 우리에게 부족한 게 뭐라고 생각하십니까?”

윤수호는 윤수아와 강탁준, 그밖에 실무진이 참석한 회의에서 의제를 내놓으니 많은 의견들이 쏟아졌다.

그 중에서 윤수호의 관심을 사로잡은 의견을 낸 사람은 다름 아닌 강탁준이었다.

“아무래도 고정 수입이 아닐까유? 지금이야 이사장님께서 모든 비용을 부담하고 계신다지만 언제까지고 이사장님이 이 거대한 단체를 책임지실 수도 없는 노릇이고, 또 그게 옳은 방향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으니께유.”

“저 역시 비슷한 생각입니다. 딱히 여기에 들어가는 돈이 아깝다는 건 아니죠. 하지만 제가 언제까지고 희망동에만 신경 쓸 수는 없다는 것도 사실이니까요.”

윤수호의 대답에 많은 임원들이 다소 걱정을 감추지 못했다.

“확실히 희망동이 자립할 수 있다면 그보다 좋은 일은 없겠지만…….”

“이사장님이나 하다못해 정부의 도움 없이 이 거대한 복지 도시가 자립 가능할까요?”

그들의 걱정에 윤수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가능하게 만들어야죠. 너무 어렵고 복잡하게 생각해서 방법이 보이지 않을 뿐입니다. 규모가 아무리 거대해도 조직의 성장은 지극히 단순한 법이거든요. 마치 육아처럼 말이죠.”

“육아라면…….”

윤수아가 고개를 갸웃하자 윤수호가 살짝 미소를 머금었다.

“처음에야 당연히 부모의 도움 없이 아이들은 생존할 수 없지만 부모가 지극정성으로 돌보면 아이들은 분명 바르게 성장할 수 있다고 믿습니다. 다 큰 아이들까지 부모가 먹여 살릴 필요는 없죠. 아이가 어른이 됐다면 그에 걸맞은 사회적 역할을 수행하면서 홀로 자립해야 하지 않을까요? 여기서 희망동의 사회적 역할이란 무엇일까요?”

“당연히 복지와 관련된 사업안들 아닐까요? 돌봄이 힘든 가정의 아이들이나 노약자들을 교육하여 사회적으로 공헌할 수 있다면 재단에도, 우리나라에도 큰 경제적 이익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한 임원의 의견에 윤수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맞는 말입니다. 복지 사업은 우리 재단의 최중요 목표이자 가치죠. 하지만 이만한 규모의 인적, 물적 자원들이 투입되고 또 생산되는데 인적 서비스만 제공하는 것이 재단이 할 수 있는 전부일까요?”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임원들이 궁금해하자 윤수호는 자신 앞에 놓인 차를 한 모금 마신 뒤 말을 이어 나갔다.

“예를 들어 현재 공사가 끝난 후, 인부들의 처우를 어떻게 하실 생각이신지 계획이 있는 분들이 있다면 의견을 여쭙고 싶군요.”

“그야…….”

임원들은 서로의 얼굴을 돌아볼 뿐 적당한 대답을 내놓지 못했다.

인부들의 역할이야 공사가 끝나면 자신들의 관할이 아니었으니까. 임금만 제대로 책정해서 주면 끝이지, 그 이상을 신경 쓸 필요조차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저기…….”

“네, 윤수아 씨. 편하게 얘기하세요.”

그 와중에 윤수아가 조심스럽게 손을 들자 공적인 자리였기에 윤수호는 동생에게도 존칭을 사용하며 발언을 허락했다.

“괜한 오지랖에 여기서 더 이상 이사장님께 부담을 드릴 수 있다고 생각해서 지금까지 얘기를 꺼내지 못하고 있었는데요. 공사가 끝나도 지금 일하셨던 분들 중에서 평가가 좋고 성실한 분들에 한해서 새로운 업종을 추천드리는 게 어떨까 싶은데요.”

“예를 들면?”

“저 나름 머리를 굴려 봤는데 돈이 되는 일은 결국 지금 사람들이 가장 필요로 하는 일들이잖아요. 지금 같은 세상에서 사람들이 가장 필요로 하는 건 누가 뭐래도 ‘식량’이고요.”

윤수아의 말에 임원들은 너도나도 공감했다.

재앙종 사태가 일어나기 전부터 우리나라의 식량 자급률은 50%를 넘지 못할 정도로 농촌 사회가 위험에 가까운 상황이었다.

그랬던 것이 재앙종 사태가 터지면서 보호받기 힘든 농촌은 거의 버려졌고, 수입도 힘들어지면서 식량 가격이 미친 듯이 뛰어 버린 것이다.

“재단의 명의로 농사를 지을 수 있는 땅을 구하고, 거기에 지금 인부들 중에서 뜻이 있는 사람들을 모집하여 농사를 짓게 한다면 그들도 안정된 직장을 구할 수 있고, 우리도 부족한 식량을 수급할 수 있으니 상부상조가 아닌가 싶어서…….”

“윤 이사님의 말씀에는 저도 충분이 동감하는 바입니다만 그 말씀이 실현되기 위해서는 두 가지 선결 조건이 필요합니다. 하나는 당연히 농사를 지을 풍족한 면적의 땅이고, 다른 하나는 농부들이 안심하고 농사를 지을 수 있는 환경이죠.”

“그렇죠. 현재 정부에서 엄청난 보조금을 약속해도 농부들이 밭으로 돌아가지 않는 이유는 안전에 대한 불신 때문이니까요. 희망동이야 이사장님이 소환하신 고블린 부대로 경비할 수 있다지만 도시 밖에 농지까지 커버할 수 있는지는 의문입니다. 설령 가능하다 해도 그만큼 도시의 안보에 균열이 생길 게 자명하고요.”

“물론 최근에는 상황이 좋아져서 일정 면적의 농지를 대상으로 특무대가 파견되어 농지와 농부들을 지키는 경우가 늘었다고는 하죠.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정부가 주도하는 일. 과연 희망동 한울타리 재단에서 자체적으로 주도할 수 있을 지는 의문입니다.”

“저도 비슷한 생각입니다. 당장이야 정부의 도움을 받으면 그만이라 할 수 있어도 그렇게 되면 수익의 일부를 정부와 나눠야 하기 때문에 역시나 재단의 자립에는 큰 장애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 그렇겠죠?”

현실적인 상황이 반영된 임원들의 의견도 타당하고 자신의 생각이 사실상 이상에 가깝다는 건 윤수아 본인이 잘 안다.

그렇게 윤수아가 조금 시무룩하게 고개를 떨구다 깜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누군가가 자신의 어깨를 가볍게 다독였기 때문이다.

‘오빠?’

-고개 숙이지 마. 말 했잖아. 네가 하고 싶은 게 있다면 오빠가 도와주겠다고.

머릿속으로 들려오는 오빠의 전음에 윤수아는 순각 울컥했지만 애써 눈물을 참았다.

“저도 윤수아 씨의 생각과 같습니다. 선결해야 할 문제들이 심각하긴 해도 해결 못 할 문제는 확실히 아니죠. 그건 제가 해결할 테니 여러분은 문제가 해결된다는 전제 하에 뒷일들을 추진해 주시기 바랍니다.”

“알겠습니다.”

“예, 이사장님.”

윤수아가 얘기를 꺼냈을 땐 그렇게 부정적인 반응을 보이던 임원들이 윤수호의 말에는 일언반구도 없이 과제를 받아들였다.

애초에 불가능이라고 생각했던 희망동을 가능하게 만든 사람이 윤수호다.

그가 하겠다고 하면 자신들은 그저 믿고 따르면 될 뿐이라는 걸 그들 모두가 알았던 것이다.

그렇게 회의가 끝나고 윤수아가 오빠의 집무실을 찾았다.

“오빠…….”

“어, 수아야. 왔어?”

“미안해…….”

들어오자마자 울상을 하고 고개를 숙이는 윤수아의 모습에 윤수호는 피식 웃으며 동생을 살포시 안아 주었다.

“뭐가 자꾸 그렇게 미안하대. 가족끼리 그런 말 하는 거 아니랬지.”

“그래도…… 난 오빠에게 도움 한 번 제대로 준 적이 없는데 상항 신세만 지고 어려운 부탁만 하니까…….”

“네 입장에서야 그렇지. 나한텐 딱히 어려운 부탁도 아니야. 오히려 최근 들어 몸이 근질근질했는데 잘 됐지.”

“잘됐다니, 뭐가?”

“간만에 적금 통장 깨러 갈 생각이었거든.”

* * *

“오랜만에 뵙습니다, 위원장님.”

“왕 요원께서도 잘 지내시는 것 같아 다행입니다. 얼마 전에 둘째 공주님도 얻으셨다고…… 공사다망하신 와중에 대단하십니다.”

“감사합니다. 뭐, 또 그게 부부 금슬이 좋다 보니 하룻밤만 붙어 있어도 애가 생기더라고요. 하하하!”

중국에 입국한 윤수호는 왕명이 준비한 안가에서 오랜만에 그와 해후를 나누었다.

“듣자하니 위원장님께서는 요새 국내에서 꽤 규모가 큰 복지 사업을 진행 중이라고 하시던데 일은 잘돼 가고 있으십니까?”

“안 그래도 그것 때문에 골치가 아픕니다. 분명 문제 하나를 해결했다고 생각했는데 거기서 생각하지도 못 했던 문제 열 개가 툭 튀어나오니…… 아무래도 저는 사업가 체질은 아닌 모양입니다.”

윤수호가 엄살을 떨며 한숨을 내쉬자 왕명이 크게 웃으며 그를 위로했다.

“살다 보니 위원장님께서 엄살을 부리시는 모습도 다 보는군요. 아무튼 본론으로 넘어와서 이번에 중국을 다시 방문해 주신 이유 역시 희망동과 관련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홍룡회를 무너트리면서 꽤 수입이 좋긴 했지만 아무래도 희망동에 들어가는 자금이 더 필요할 것 같아서요. 당분간 좀 여유 있게 운영해 보려고 적금 하나 깨러 왔습니다.”

“하하하하! 적금이라니…… 산천초목도 벌벌 떤다는 중국 십회를 그렇게 부르시는 분은 세상에 위원장님이 유일하실 겁니다.”

“괜찮다면 이번에도 왕 요원님의 힘을 빌리고 싶습니다만.”

윤수호의 은근한 부탁에 왕명은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히 도와드려야지요. 위원장님이 아니셨다면 저는 지금 이 자리에 없었을 테니까요. 사양 말고 얼마든지 저를 이용하시면 됩니다.”

“그것 참…… 정보상 왕 씨께서 그렇게 말씀해 주시니 참으로 든든하군요.”

정보상 왕.

현재 중국 내부에서 베일에 가려진 왕명을 부르는 호칭이었다.

“그저 위원장님께서 챙겨 주신 밑천에 있는 재주를 놀리다 보니 그렇게 됐을 뿐이지요. 돈과 정보는 밑천을 마련하는 게 어렵지, 일단 한번 굴리기 시작하면 돈이 돈을 부르고 정보가 정보를 낳는 법이니까요.”

윤수호가 흑룡회주의 칠순 잔치에서 십회의 후계자들을 털고 다니며 획득한 정보들…….

그리고 왕명 자신이 자신의 정보팀과 함께 필사적으로 십회의 동선을 추적하며 손에 넣은 방대한 양의 자료들.

그것은 정보상에게 핵미사일보다 강력한 무기가 되었다.

“정보상의 정보는 정보로만 거래합니다. 돈은 거기에 딸려 들어오는 부산물일 뿐. 그렇게 손에 넣은 정보로 더 크고, 더 은밀하고, 더 비밀스러운 정보들을 손에 넣죠. 정보는 권력자들에게 힘이자, 칼이자, 목줄이 되고요.”

홍룡회가 무너지고 세력의 판도가 바뀌면서 십회는 서로의 눈치를 살피기 시작했다.

자신들끼리 마찰 없이 어디까지 손에 넣을 수 있을지, 무엇을 손에 넣어야 더 큰 이익을 챙길 수 있을지, 어디까지 양보할 수 있을지 등을 말이다.

이 모든 상황을 결정하는 가장 큰 요소는 누가 뭐래도 정보였다.

다른 길드에서 무엇을 필요로 하고, 무엇을 내줄 수 있는지를 알아야 거래를 유리하게 이끌어 갈 수 있기 때문이다.

거기서 귀신처럼 등장한 비밀의 정보상이 바로 왕명이었다.

그들에게 왕명은 자신들의 가려운 등을 시원하게 긁어 줄 수 있는 효자손 이상이었다.

그는 순식간에 십회…… 아니, 이제는 구회가 되어 버린 중국 길드들의 중추까지 뻗어 들어갈 수 있었으며 왕명이 만질 수 없는 정보는 거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뿐만이 아니다.

정보를 따라 흘러들어온 막대한 자금. 이 돈은 오롯이 중국 정부로 흘러들어 갔다.

뇌물이었다.

타락할 대로 타락한 중국 정부에 왕명이 흘리는 뇌물은 결코 거절할 수 있는 성질이 아니었다.

결국 왕명은 탄탄한 밑천을 토대로 중국 암흑가와 정부의 고위 관료들까지 그 감시망을 뻗쳤다.

게다가 아이러니하게도 이렇듯 정보를 꽉 잡고 조종하다 보니 역으로 표면은 가장 잘 알려진 인물임에도 그 실체는 여전히 베일에 감출 수 있었던 것이다.

“위원장님의 성격상 이번에도 자신을 드러내고 다니실 생각은 없으신 것 같은데…… 혹시 준비하신 시나리오가 있다면 경청하겠습니다.”

“가장 간단하면서도 손쉬운…… 그러면서도 십회의 나머지 길드들이 오싹할 만한 시나리오가 있죠.”

“아하! 그렇군요. 대충 짐작은 갑니다. 그거야말로 모습을 바꿀 수 있는 위원장님께는 가장 부담 없는 시나리오일 수 있겠군요.”

왕명이 솔직하게 감탄하자 윤수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짐작하신 대로 이번에는 복수극을 찍어 볼까 합니다. 복수를 다짐하는 홍룡회의 잔당이라고 하면 나쁘지 않은 배우로 써먹을 수 있겠죠. 배우는 그 녀석이 적당하겠군요. 가우창이라고 했던가요? 십회의 후계자들을 잔인하게 죽이고 홀연히 사라진 희대의 암살자 말입니다.”

“저는 뭘 하면 되겠습니까, 위원장님?”

“가우창의 스토리를 만들어 주세요. 그들이 납득하지 못해도 상관없습니다. 적당히 사실과 거짓을 섞어서 그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귀신을 만들면 그만이니까요. 그리고 나머지는 그들이 원하는 대로 해 주시면 될 겁니다.”

“그들이 원하는 대로라면……? 설마!”

“정보꾼은 정보가 돈이라고 하셨죠? 이번에는 또 얼마나 벌 수 있을지 기대되는군요.”

윤수호가 섬뜩하게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검신이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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