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7.
사태가 해결된 뒤 어느 패스트푸드점에 모인 아이들.
“그래서, 사장님은 무사하다시대?”
“어, 민간인 사상자는 0명이래. 다행히 재앙종이 출현하기 전에 무사히 도망 치셨나봐. 연락이 안 된 건 깜박하고 가게 안에 폰을 두고 와서 그런 거고.”
“그래, 그나마 다행이네.”
아이들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지만 문제는 아직 남아 있었다.
“그런데 알바는 어떡하지? 지금부터 다른 알바를 찾아봐도 시간이 꽤 걸릴 텐데…….”
“게다가 성하는 몰라도 수현이는…….”
은지연은 임수현을 진심으로 걱정했다. 그녀가 지금 일하고 있는 곳도 권성하가 보증을 섰기 때문에 사장이 믿고 그녀를 고용했던 것이기 때문이었다.
요즘 같은 흉흉한 세상에 부모도 없이 쉼터에서 지내는 아이들을 믿고 써 줄 사람은 그렇게 많지 않았다.
“괜찮아. 내 알바는 내가 알아서 구할게. 오히려 지금까지 도움받은 것만 해도 염치가 없을 정도로 고마운걸.”
“야, 그게 무슨 말이야. 친구 사이에 그런 게 어디 있어. 돕고 싶었으니까 도왔던 거지. 걱정 마. 분명 무슨 방법이…….”
“있어.”
“응?”
“있다고, 방법.”
은지한의 말에 세 사람의 시선이 모두 그에게 집중되자 은지한은 폰을 가리키며 대꾸했다.
“방금 삼촌한테서 연락이 왔거든. 알바 해 볼 생각 없냐고.”
“너한테?”
“아니, 성하한테.”
은지한의 시선이 권성하에게 향하자 이번에는 권성하가 움찔하며 자신을 가리켰다.
“……나?”
“어, 아무래도 이번 일을 맡길 사람은 성하 네가 제일 적합한 모양인가 봐. 삼촌이 하는 일이니까 시급이야 나쁠 거 없을 거고. 궁금한 사항이 있다면 만나러 오라던데. 어때?”
“…….”
권성하는 잠시 생각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나야 찬밥 더운밥 가릴 때가 아니지. 알았어. 너희 삼촌이랑 만나 볼게.”
“OK, 그럼 연락한다.”
“잠깐! 우리도, 우리고 간다고 해. 허드렛일이든 뭐든 상관없으니까.”
은지연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 은지한이 윤수호에게 이 사실을 그대로 알렸다.
잠시 후.
네 사람은 패스트푸드점 앞에 도작한 차를 타고 희망동으로 향했다.
* * *
“와…….”
“세상에……!”
“희망동이란 곳이 한창 건설 중이라고 얘기는 많이 듣긴 했는데 설마 이 정도일 줄은…….”
“정말 서울 밖으로 나온 거 맞아? 아니, 어떤 의미에선 서울보다 더 대단한대?”
희망동에 도착하여 잠시 주변을 둘러본 아이들의 표정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아이들은 감탄을 금치 못하는 와중에도 권성하와 임수현은 더 당황스러운 표정으로 남매를 쳐다보았다.
“예전부터 궁금했는데…….”
“도대체 너희들 삼촌은 뭐 하시는 분이야?”
“그, 그게…….”
남매는 조금 난색을 표하며 대답을 하지 못했다.
어차피 이렇게 된 거 숨기지도 못 할 거라면 얘기해 주자. 오면서도 몇 번이나 그렇게 다짐했지만 막상 지금 이 순간까지 두 남매는 삼촌의 정체를 밝히지 못했다.
“여기 있었구나. 반갑다. 내가 지연이, 지한이 외삼촌 윤수호라고 한다.”
“아, 네…….”
“안녕하세…….”
권성하와 임수현은 윤수호와 인사를 나눈 뒤, 그가 건네준 명함을 자연스럽게 받아 들었다가 너무 놀라 눈을 부릅떴다.
“헉!”
“이, 이거 진짜예요?”
임수현이 너무 놀라 그렇게 묻는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명함에는 ‘한울타리 재단 이사장’이라는 직함이 떡하니 기재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희망동의 주인이 한울타리 재단이라는 건 대한민국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그러나 한울타리 재단의 이사장이 윤수호라는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은 드물었던 것이다.
“반응을 보아하니 정말 아무것도 모르고 온 것 같은데…… 오면서 얘기 안 해 줬어?”
윤수호가 남매를 돌아보며 묻자 두 녀석 모두 어색하게 웃으며 대꾸했다.
“그, 그게…….”
“막상 말하려고 하니까 입이 잘 안 떨어지더라고요.”
윤수호는 남매가 자신에 대해 친구들에게 설명해 주지 못한 이유에 대해 어느 정도 짐작이 갔다.
‘아마 친구들이 부담스러워해 관계가 어색해지는 걸 무의식적으로 피한 거겠지.’
윤수호는 한쪽 입꼬리를 피식 말아 올리며 권성하와 임수현에게 자신을 다시 한 번 소개했다.
“그 명함도 진짜가 맞고, 내가 저 녀석들 외삼촌인 것도 사실이야. 혹시 그게 너희와 우리 조카들 사이에 어떤 문제가 될까?”
“아, 아뇨! 그냥 조금 놀라서…….”
“다행이네. 안 그래도 그것 때문에 우리 조카들이 꽤나 불안한 모양이었으니까.”
“네?”
윤수호의 말을 듣고 고개를 돌린 권성하와 임수현. 두 사람은 윤수호의 말처럼 이쪽의 시선을 어색하게 피하는 두 친구를 확인할 수 있었다.
“참고로 내가 성하 너를 부른 건 내 조카들 친구라서가 아니라 네게 개인적으로 의뢰할 일이 있어서야. 공교롭게도 내가 원하는 능력을 가진 사람의 지인이 지한이었거든.”
“저한테 의뢰할 일이요?”
“길게 설명하는 것보다 눈으로 보는 게 더 빠르겠네. 따라올래?”
호기심이 앞선 권성하는 고개를 끄덕였고 네 친구들은 윤수호를 따라 한옥마을로 이동하였다.
“와!”
“예쁘다…….”
한옥마을의 정취를 처음 마주한 은지연과 임수현은 감탄을 금치 못했다. 두 소녀는 눈빛을 반짝이며 그 즉시 셀카 포인트를 찾아 주변을 탐색하기 시작했다.
은지한은 뭐…… 지 버릇 개 못 준다고 오자마자 탈출 동선과 은신처, 기습 루트 등을 꼼꼼하게 체크하기 시작했다.
물론 저 세 사람은 딱히 뭘 하든 윤수호가 신경 쓸 바가 아니었다.
“어때?”
“되게 예쁜 마을이네요.”
윤수호의 질문에 권성하가 솔직하게 대답하자 윤수호가 되물었다.
“정말 그게 다야? 자세히 살펴보고 솔직하게 답해 줬으면 해서.”
“…….”
윤수호의 솔직한 당부에 권성하는 심호흡을 하면서 마음을 가라앉히더니 차분한 눈으로 마을을 둘러보며 제대로 이곳을 관찰하기 시작했다.
그 결과…….
“확실히 건물도 예쁘고 마을도 깔끔한데 뭔가 좀…….”
“심심하지?”
“네…….”
권성하의 솔직한 대답에 윤수호는 고개를 끄덕이며 재차 물었다.
“그럼 내가 왜 널 보고 싶어 했는지도 대충 예상이 가겠구나.”
“설마 저더러 여기 벽화를 그리라는 말씀은 아니시죠?”
씨익.
윤수호는 말없이 미소만 그렸다. 그에 권성하는 손사래를 치며 다급하게 거절했다.
“저, 저는 못 해요! 그럴 실력도 안 되고…….”
“나는 아무 말도 안 했다. 그런데 너는 여기를 보고 심심하다 느꼈고 바로 벽화를 떠올렸지. 그 말인즉, 네가 그린 벽화가 있으면 이곳이 좀 더 생기 있게 살아날 거란 뜻이겠지?”
“저는 그런 생각으로 드린 말씀이…….”
“설령 성하 너한테 그런 생각이 없었더라도 난 그런 생각으로 널 이곳에 초대한 거야. 지한이를 통해서 네가 그린 작품들은 나도 잘 감상했다. 내가 단순히 조카 친구를 도와주려고 널 여기로 초대했을까?”
윤수호는 고개를 저었다.
“너는 모르겠지만 내가 이곳에 걸고 있는 기대는 네 상상을 아득히 초월한다. 내가 너를 여기로 초대한 이유는 조카 친구 때문이 아니야. 그저 네 도움만 있으면 이곳을 지금보다 훨씬 좋은 곳으로 바꿀 수 있을 거란 확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너에겐 그만한 능력과 재주가 있어. 네 자신감과는 별개로 말이다.”
그러면서 윤수호는 권성하의 어깨를 다독였다.
“너만 괜찮다면 나는 이 거리의 변신을 네게 맡기고 싶구나.”
“아무리 그래도 저한테는 너무 큰일인 것 같아요. 분명 저보다 더 대단하신 화가분들에게 부탁하시는 것이…….”
“아 참, 그러고 보니 시급을 아직 설명하지 않았구나. 시급은 일단 10만부터 시작해서 차차 올려 갈까 하는데, 물론 작품이 완성되면 수당은 따로 책정해 주마. 일하는 동안 4대 보험은 물론 적용해 주고.”
“……잘 부탁드립니다, 이사장님.”
그것은 자신감이나 실력을 운운하며 거절하기엔 너무 큰돈이었다.
* * *
“그래서 일을 수락했다고?”
“잘됐네!”
“축하해.”
권성하가 윤수호의 의뢰를 수락하자 친구들은 마치 자기 일처럼 기뻐했다.
“고, 고마워. 내가 잘 할 수 있을지 모르겠네.”
“그건 걱정 안 해도 돼. 잘 할 수 있는 녀석이라서 삼촌이 뽑은 걸 테니까. 자신을 가져.”
친구들의 축하에 쑥스러워하던 권성하는 조심스럽게 얘기를 꺼냈다.
“그래서 말인데…… 혹시 너희가 날 좀 도와줄 수 있을까?”
“우리가?”
“어. 물론 공짜로 도와 달라는 건 아니고. 이사장님께도 허가를 구했는데 밑그림은 나 혼자 어떻게 한다고 해도 채색만큼은 도저히 나 혼자 감당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거든.”
“하기야…….”
은지한은 권성하의 고민을 듣고 충분히 그의 걱정을 납득할 수 있었다.
한옥마을의 담벼락만 전부 이으면 수km가 넘는데 여길 전부 벽화로 채우는 것도 모자라 채색까지 입히는 건 혼자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채색 자체는 지정해 준 색으로 그림을 칠하는 것뿐이라 꼼꼼함이 중요하긴 해도 크게 어려운 작업은 아니거든. 물론 너희들이 거절한다면 다른 인부들을 붙여 주겠다고 말씀하셨고. 한두 달 걸리는 작업이 아니니까 잘 생각해서…….”
그러자 은지한은 권성하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그에게 어깨동무를 걸치며 대답했다.
“잘 생각하고 자시고가 왜 필요해. 친구가 도와 달라는데 당연히 도와줘야지. 게다가 용돈도 벌 수 있으면 일석이조 아니야? 당연히 해야지. 누나는?”
“나도 찬성. 나중에 관광객들이 오면 내가 색칠한 그림들을 보고 감탄할 거 아냐. 그것만큼 보람 있는 일이 또 있을까?”
“꼼꼼해야 한다는데…… 괜찮겠어?”
“너…… 그거 무슨 뜻이냐?”
“무슨 뜻이긴. 성질이 하도 급해서 밥도 맨날 흘리면서 먹는 여편네가 제대로 색칠을…….”
“넌 뒈졌어.”
그렇게 남매가 또다시 치고 박고 싸우는 중에 임수현 또한 권성하에게 먼저 말을 건넸다.
“나도 부탁해도 될까?”
“당연하지. 친구잖아.”
권성하는 어설프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고 임수현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물론 세 사람의 시급은 셋이 전부 합쳐도 권성하 하나만 못했지만 그래도 그들 또래가 어디 가서 받을 수 있는 임금보다는 높은 축에 속했다.
“그럼 뭐부터 할까, 대장?”
“대, 대장? 내가?”
“당연하지. 학교에서는 몰라도 여기서는 네가 우리 작업 책임자잖아. 안 그래?”
권성하는 얼떨떨했지만 모두가 수긍하는 분위기라 그냥 그렇게 넘어갔다.
“일단은…….”
권성하가 친구들에게 건네준 것은 다름 아닌 하얀 페인트가 가득 찬 페인트 통이었다.
“이걸로 벽을 전부 칠해 줄래?”
“알았어.”
“이 정도야, 뭐…….”
그렇게 세 친구가 롤러와 페인트를 가지고 벽을 새하얗게 칠하는 동안, 무엇을 그려야 할지 고민을 마친 권성하가 붓을 들었다.
‘정말 내가 그리고 싶은 그림을 그리면 되는 거지?’
벽에 다가가던 붓이 순간 멈칫했다.
엄마는 권성하의 그림을 보면 죽은 아빠가 생각난다고 자신의 그림을 끔찍하게도 싫어했다.
권성하는 그림을 좋아했지만 그 이상으로 엄마를 사랑했다. 그래서 엄마가 싫어하는 일은 되도록 하지 않으려고 했다.
그래서 그림도 엄마 모르게 조용히 취미생활로 그치려고 수없이 마음먹었다.
하지만…….
쿵쾅쿵쾅……!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이 새하얀 벽에 자신의 그림이 남겨지고, 그 그림을 수많은 사람들이 보게 될 거라 상상하니 심장이 미친 듯이 뛰고 머리가 뜨거워졌다.
‘진정하자. 이건 어디까지나 알바잖아. 이번 일이 끝나고 나면 다시는 사람들 앞에서 그림을 그릴 일은 없을 거야.’
가까스로 마음을 진정시킨 권성하가 붓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는 모르고 있었다.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 자신의 얼굴이 웃고 있었다는 걸…….
검신이 돌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