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6.
허방만과 함께 나머지 구역을 순찰하며 살펴보던 윤수호는 한 거주구역이 눈에 띄었다.
“이곳이군요. 허 대표님께서 자랑하셨던 한옥마을이.”
“그렇습니다. 이곳같은 경우는 재앙종의 피해를 너무 많이 입은 탓에 리모델링이 아니라 기존에 잔해들을 치워내고 전부 새로 건축할 필요성을 느꼈지요. 그 탓에 비용이 몇 배나 더 늘어나긴 했지만 이사장님께서 신경 써 주신 덕분에 만족할 만한 성과를 얻을 수 있었습니다.”
윤수호는 한옥마을을 둘러보다가 임의의 저택으로 들어가 내부를 꼼꼼히 살폈다.
이제 막 완공됐음에도 한옥의 정취와 깊이를 느낄 수 있는 멋들어진 건물이었다.
그러나 세부적으로는 한옥의 불편함을 최소화할 수 있도록 현대적인 시스템을 갖춰놓은 허방만의 센스가 돋보였다.
“훌륭합니다. 강 실장님도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한 이유가 있었군요. 이 정도면 희망동의 관광 특구로 지정해도 손색이 없겠는데요?”
“저도 이사장님이 그렇게 생각하실 것 같아서 계획 단계에서부터 상권의 위치까지 설정하여 공사를 진행했습니다. 입찰만 된다면 어떤 상권이든 당장 들어와 장사를 시작할 수 있도록 말이죠.”
허방만의 말처럼 거리에는 한옥 마을에 자연스럽게 녹아든 비어 있는 상가들이 곧잘 눈에 띄었다.
‘다만…….’
윤수호는 거리를 거닐며 생각에 잠겼다. 그 모습에 허방만이 조금 불안한 표정으로 그에게 물었다.
“이사장님? 혹시 무슨 문제라도…….”
“아뇨. 다른 건 다 좋은데 이대로 이곳을 관광 특구로 지정하기엔 뭔가 심심한 것 같아서요. 관광지로 지정된 한옥 마을은 이곳 말고도 여러 곳이 있잖습니까? 저는 그곳들과 조금 다른 특색을 주고 싶습니다.”
“특색이라…….”
허방만도 윤수호의 말에는 전적으로 동의했다.
안전을 제일로 전통의 멋을 고집하느라 한옥의 맛은 충분히 살아 있지만 그 때문에 도시 전체가 약간 밋밋한 감이 없지 않아 있었던 것이다.
그때였다.
윤수호의 눈에 한옥마을을 따라 고풍스럽게 휘감은 담벼락이 눈에 띈 것은.
‘잠깐, 그러고 보니……?’
누군가를 떠올린 윤수호의 입가가 가볍게 말려 올라갔다.
* * *
삼문 고등학교 방과 후.
“성하야, 알바 가자!”
“어.”
책가방을 정리한 권성하는 은지한과 함께 교실 청소를 마친 후 교문으로 향했다.
“늦어! 뭐 하다 이제 기어 나오는 거야.”
“교실 청소라고 톡 했잖아. 난 가끔 누나가 알면서 그러는 건지 모르고 그러는 건지 참 신기하단 말이야.”
“차이가 있어?”
“알면서 그런 거면 미친년인 거고 모르고 그러는 건 븅…….”
“뒈질래?”
그렇게 남매가 정답게 투닥거리는 사이, 권성하도 임수현과 어색하게 인사를 나눴다.
“아, 안녕?”
끄덕.
떨리는 목소리로 인사를 건네는 권성하와 무뚝뚝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는 임수현. 두 사람의 모습을 옆에서 지켜보던 남매가 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누가 보면 처음 보는 사이인줄 알겠네.”
“놔둬. 누나. 두 사람 성격이 그런 걸 어쩌겠어. 누나도 그 지랄맞은 성격 못 고치면서 누굴 탓 해. 안 그래?”
휙!
말을 하면서 누나의 핵꿀밤을 가볍게 피해 내는 은지한.
두 사람의 말처럼 이 네 사람은 지난 가출팸 사건 이후로 지금까지 자주 어울리고 있었다. 아니, 어울릴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정말 괜찮아?”
“뭐가?”
느닷없는 권성하의 질문에 은지한이 고개를 갸웃하자 권성하가 약간 머쓱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나 따라서 알바 가는 거 말이야.”
“아…… 혹시 우리랑 같이 일하면 불편해?”
은지한이 내심 걱정하며 물었다. 권성하의 성격상 불편해도 지금까지 내색하지 못한 채 참고 있을 가능성이 높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어지는 반응을 보아하니 그건 아닌 모양이었다.
“아, 아니! 나야 정말 좋지. 나야 너희들 덕분에 힘든 일도 즐겁게 할 수 있었으니까. 하지만 두 사람은 나나 수현이처럼 알바가 시급한 것도 아니잖아. 다른 친구들이랑 놀 수도 있는데 괜히 우리를 신경 써 주는 거 아닌가 싶어서.”
친구의 걱정을 눈치 챈 은지한은 미소를 그리며 고개를 저었다.
“그런 거 아니니까 신경 쓰지 마. 나도 누나도 스스로 용돈 벌 나이는 충분히 됐고, 가끔은 우리가 번 돈으로 가족들에게 선물을 하고 싶은 마음도 진심이니까. 그런 와중에 때마침 네가 일하던 가게에 일손이 필요했을 뿐이고.”
“맞아. 게다가 지한이야 어차피 다른 친구들이랑 PC방 가봤자 걸림돌밖에 안 되잖아. 그 시간에 알바해서 돈이라도 버는 게 가장 생산적이지. 안 그래? 브론즈 씨.”
“그래도 움직이는 과녁보다는 낫지. 본인은 돌격소총 들고 상대는 맨주먹인데 그걸 지는 게 더 어렵지 않나?”
“어쩔 수 없잖아! 그때 난 총알이 100발밖에 없었단 말이야.”
“누나가 생존 톱 텐 찍는 게 빠를지 내가 골드 올라가는 게 빠를지 내기, 콜?”
“콜!”
그렇게 남매가 평생 결과를 볼 수 있을 지 없을 지 알 수 없을 전대미문의 내기를 걸고 있을 때, 임수현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
“그래도 난 고맙게 생각해.”
“응? 나?”
권성하는 깜짝 놀랐다. 지금껏 몇 달동안 함께 다녔지만 임수현이 업무 관련 빼고 먼저 말을 건 경우는 이번이 처음이었기 때문이다.
“그래, 아빠가 감옥에 들어가고, 나도 쉼터에서 지내게 됐을 때. 솔직히 행복했지만 어딘가 공허했어. 지연이도, 지한이도 정말 좋은 친구들이지만. 그 친구들이 내 미래를 책임져 줄 수는 없으니까. 뭐라도 해야 한다고 생각했지. 하지만…….”
부모도 없이 쉼터에서 지내는 미성년자를 곱게 볼 사장은 그리 많지 않았다. 임수현은 곧 일하던 가게에서도 거의 강제로 일을 그만뒀다.
“그런데 너는 네가 일하던 가게에 나를 소개해 줬고 그 덕분에 나는 내 손으로 내 미래를 준비할 수 있게 됐어. 그 부분에 대해서는 항상 고맙게 생각해. 이런 성격이라 말로 제대로 표현할 순 없었지만.”
“하하하…… 그런 것 같네.”
고맙다는 말을 표현하는 임수현의 표정은 언제나처럼 차갑고 무뚝뚝해 보였지만 그녀의 뺨은 어느새 발그레하게 물들어 있었던 것이다.
그렇게 네 사람을 태운 버스는 가게와 가장 가까운 버스 정류장에 도착을 앞두고 있었다.
그런데…….
“예, 예. 알겠습니다.”
뭔가 무전을 받은 버스 기사는 심각한 얼굴로 정류장을 지나쳤다. 사람들은 당연히 서야 할 정류장을 기사가 지나치자 당황스러워했지만 이내 버스 기사가 상황을 설명했다.
“현재 정류장 인근에서 재앙종이 출현했다는 소식을 받았습니다. 손님 여러분께는 죄송하지만 안전상 해당 정류장은 지나치도록 하겠습니다. 양해 부탁드립니다.”
그 말을 반증하듯 정류장 인근부터 수많은 군인들이 현장을 통제하고 있었다.
“재앙종은 보이지도 않는데 군인들이 저렇게 많다고?”
“그만큼 위험한 녀석이란 뜻이겠지.”
은지연의 걱정에 은지한이 눈매를 좁히며 대답했다. 그러나 정작 사색이 된 사람은 따로 있었다.
“사, 사장님은 괜찮겠지? 무사히 도망쳤겠지?”
권성하가 가게 사장을 걱정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아이들도 일한 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알바처 사장님이 얼마나 좋은 사람인지는 잘 알고 있었다.
특히 권성하에게는 아버지이자 형 같은 존재로 일적인 부분 외에도 권성하를 많이 챙겨주는 은인 같은 사람이었다.
“걱정 마. 재앙종은 게이트가 출현하고 발생할 때까지 텀이 있다고 했으니까. 분명 무사하실 거야. 누나, 잠깐 이것 좀.”
은지한은 권성하의 어깨를 다독이고는 가방을 벗어 누나에게 맡겼다.
“뭐, 뭐 해? 너 어디 가게?”
“가서 도울 거 있으면 도와야지. 혹시라도 가게가 엉망이 되면 곤란하잖아.”
은지한은 창문을 열더니 그대로 달리는 버스에서 뛰어내렸다.
기사도, 다른 승객도 그 모습에 식겁 했지만 이내 사라져 버린 은지한의 모습에 놀란 입을 다물지 못했다.
‘저긴가.’
버스에서 몸을 날린 은지한은 빠른 속도로 현장을 향해 이동하였다. 철저하게 주변을 통제하고 있던 군인들조차 그를 알아챈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그렇게 현장에 도착한 은지한은 비로소 난리를 피우고 있는 재앙종들을 확인할 수 있었다.
“거기! 진형이 느슨하다! 긴장 안 해?”
“5급 재앙종 세 마리가 현재 북동쪽으로 도주할 조짐을 보임! 즉각 대처 바람!”
“N팀이 간다.”
크워어어어어!
별안간 나타나 눈에 보이는 것들을 닥치는 대로 파괴하는 재앙종들과 그런 재앙종들을 막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섬멸팀 대원들의 전투가 치열했다.
은지한은 곧바로 주변을 살펴보았다.
6급으로 추정되는 크기를 가진 재앙종 하나가 뼈 몽둥이를 들어올렸다. 그런데 하필이면 다른 재앙종들을 상대하느라 신경조차 쓸 수 없었던 팀의 머리 위였다.
‘다른 사람들은…….’
누구도 그들을 도와줄 여력이 되지 않았다. 게다가 이곳은 서울시에서도 중심부에서 한참 벗어난 외곽.
그렇다고 해도 지원 병력이 이렇게 늦을 수 있나 싶었지만 현재로서는 마땅한 지원 병력도 도착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생각은 짧고 행동은 신속했다.
6급 재앙종의 뼈 몽둥이가 섬멸팀의 머리 위로 떨어져 내리는 순간.
서걱!
은지한의 단검이 한 순간에 녀석의 머리를 베어 낸 것이다.
쿵! 푸화확……!
잘려 나간 머리가 둔중한 소음과 함께 땅에 떨어지고, 솟구쳐 오르는 피분수가 주변에 뿌려지자 대원들도 은지한의 존재를 대강 눈치챌 수 있었다.
하지만 누구도 은지한을 신경 쓰지 않았다. 그럴 정신도, 여유도 없었기 때문이다.
은지한도 그 나름대로 위험해 보이는 녀석들을 족족 사냥하기 시작했다.
검은 안개를 휘감은 그의 신형이 종횡무진 할 때마다 6급 재앙종들이 허무하게 목숨을 잃고 쓰러지기 시작했다.
그렇게 6급 재앙종을 모두 처리한 은지한이 5급 재앙종들의 제거에도 큰 도움을 주자 얼마 지나지 않아 현장에 출현한 재앙종들을 모두 해결할 수 있었다.
“은지한?”
그렇게 섬멸팀 대원들이 바닥에 주저앉아 거칠게 숨을 몰아쉬는 사이, 뒤늦게 현장을 찾아온 누군가가 은지한을 알아보고 반색했다.
은지한 역시 상대를 알아보고 미소를 그리며 반가워했다.
“세민이 형!”
“뭐야, 너. 특무대에 입대했으면 형한테 말을 했어야지.”
“저 아직 고1이거든요. 그런데…….”
은지한의 시선이 자신의 슈트를 훑자 김세민이 어깨를 으쓱하며 대꾸했다.
“도심지에서 이거보다 규모가 큰 재앙종이 발생해서. 뉴스 못 봤냐? 7급 재앙종이 도심 한복판에서 떴다고 아주 난리도 아니었는데.”
그의 말처럼 김세민의 슈트 여기저기에는 전투의 흔적들이 가득했다. 그의 입장에서는 오히려 그곳을 해결하고 쉬지도 않은 채 여기까지 이동한 것이겠지.
“아무튼 고맙다. 덕분에 여기도 큰 피해 없이 처리한 것 같네. 그런데 이 동네는 웬일이야? 너 여기 안 살잖아.”
“아, 그게 아르바이트 때문에요. 뭐, 지금은 그게 문제가 아닌 것 같지만.”
은지한의 눈이 폭삭 주저앉은 폐건물로 향했다. 한때는 식당이었던 그곳이 지금은 형체도 알아볼 수 없을 만큼 박살 나 버린 상태였다.
“그런데 여기 사장님은…….”
“오면서 보고받았다. 그나마 서울시 안에서 발생한 게이트였기에 초동 대처가 빨랐지. 민간인 사상자는 0명이라니까 안심해도 좋을 거야.”
“그나마 다행이네요.”
사장님을 비롯해 민간인들이 무사하다는 소식에 은지한은 가슴을 쓸어 내렸지만 기뻐하기는 일렀다.
‘성하랑 같이 다른 알바라도 구해야 하나…….’
“응?”
그때였다. 삼촌에게서 전화가 걸려온 건.
검신이 돌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