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신이 돌아왔다-84화 (84/175)

84.

멀지 않은 과거.

윤수호는 동생 윤수아, 그리고 강탁준과 함께 외식하면서 두 사람과 많은 얘기들을 나누었다.

“두 사람은 이제부터 뭘 하고 싶어? 그냥 둘이서 지금까지 못놀았던 만큼 여행도 하고 즐겁게 사는 것도 나쁘진 않을 것 같은데.”

물론 이것은 윤수호의 바람일 뿐이었다.

그의 입장에서는 동생이 더 이상 고생하지 않고 사랑하는 사람과 행복하게 여행도 다니고, 즐겁게 웃으며 살았으면 했지만…….

‘이 녀석의 성격상 작정하고 노는 것도 일주일이면 질릴 게 뻔하지.’

아니나 다를까.

“나도 그렇게 살면 얼마나 좋을까 싶지만 아마 일주일도 못 가겠지. 분명 몸이 근질근질해서 못 참을걸.”

“그렇겠지.”

윤수호는 피식 웃으며 대꾸했다.

“강 실장님은요?”

“저유?”

윤수호가 강탁준을 쳐다보며 묻자 강탁준이 살짝 놀라며 자신을 가리켰다.

“예, 강 실장님도 이제 우리 가족이나 다름없잖아요. 실장님도 하시고 싶은 일이 있으면 말씀하세요. 제가 얼마든지 도와드릴 테니까.”

“오빠, 그렇게 얘기하면 탁준 씨가 부담스러워서 아무 말도 못 해.”

“아, 그런가?”

“지, 지는 괜찮구먼유. 글쎄유, 하고 싶은 일이라…….”

곰곰이 고민하던 강탁준은 자신의 솔직한 심정을 털어 놓았다.

“솔직히 남들이 보기엔 어떨지 몰라도 지는 지금하는 일이 좋구먼유. 보시면 아시겠지만 지는 학교도 중학교밖에 못 나왔고 배운 것도, 가진 것도 없어유. 그런 제가 제 손으로 누군가를 도울 수 있다는 것도 뿌듯하고, 제 도움을 받은 사람들이 웃는 모습을 보면 아무리 힘든 일을 해도 어깨가 가벼워진다고나 할까…….”

강탁준의 따뜻한 진심은 푸근한 그의 인상에도 그대로 드러나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마음을 포근하게 만들었다.

자신이 이럴진대 윤수아야 오죽하겠는가? 이미 예비 남편에게 홀라당 빠진 윤수아는 부드러운 미소를 머금고서 강탁준의 얼굴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자 강탁준이 윤수아의 얼굴을 마주보며 대답했다.

“그러다 수아 씨를 만났쥬. 수아 씨는 제게 아침햇살처럼 밝고 아름다운 분이에유. 아무리 슬프고 힘든 일이 있어도 수아 씨만 보면 기운이 호랑이처럼 솟고 슬픈 것도 싹 다 날아가 버리니까유. 지금 제가 하고 싶은 게 있다면 수아 씨를 세상 누구보다 행복하게 만들어 주고 싶어유. 그거 말고는 바라는 게 없어유.”

“나도 마찬가지야, 오빠. 그냥 탁준 씨랑 지금까지 해 왔던 것처럼…… 사람들을 도와주면서 살고 싶어. 그 일을 하면서 세상 아무짝에도 쓸모없다고 생각했던 내가 누군가에게는 커다란 도움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배웠으니까. 가능하다면 탁준 씨와 지금까지처럼 열심이 남들을 도와주면서 살고 싶어. 정말이야.”

윤수아의 대답에 윤수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두 사람의 의지가 그렇다면 나도 한 가지 제안을 할게.”

“제안?”

“두 사람이 하고 싶다는 일. 좀 더 스케일 크게 해 볼 생각 없어?”

* * *

“그 얘기로 시작된 일이 설마 이렇게까지 커질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지.”

“그러게 말이에유. 그래도 몸이 힘든 만큼 마음은 뿌듯하네유. 어쩌면 보고도 지나칠 수밖에 없었던 어려운 사람들을 도울 수 있는 기회잖아유.”

“그건 나도 동의. 무엇보다 한울타리 재단이라는 이름도 마음에 들고.”

한울타리 재단은 윤수호가 이번 일을 구상할 때부터 생각해 두었던 복지 재단의 이름이었다.

“그런데 종합 복지 센터의 규모가 커도 너무 큰 거 아니야, 오빠?”

재앙종이 출현한 이후로 버려진 도시들은 수도 없이 많다. 심지어 치안이 비교적 안정적이라는 경기도 인근에도 사람들이 버리고 탈출한 도시가 즐비했다.

윤수호는 고심 끝에 이번에 경기도 산황시의 한 동네를 전부 재단의 명의로 구매하였다.

토지와 건물의 소유주들도 언제 돌아갈지 기약도 없는 판국에 윤수호가 팔리지도 않는 땅과 건물을 사 준다고 하니 헐값에 쉽게 구매할 수 있었다.

그가 이곳을 선택한 건 망가진 도로는 조금만 손보면 서울과의 통행도 용의했고 건물들도 멀쩡한 곳들이 많은 데다 방치되긴 했으나 쓸 만한 의료 시설도 갖춰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조금만 손보면 충분히 제 기능을 다 할 수 있는 동네야. 그런 곳을 방치해 두고 있는 건 여러모로 손해지.”

“이번에도 여러 분야의 선생님들을 고용한 덕분에 집에 돌아갈 수 없는 아이들은 물론이고 형편이 어려운 어르신들도 배움의 기회가 더 많아졌구먼유. 그분들이 기술을 가지고 사회로 진출하면 분명 우리나라에도 큰 도움이 될 거예유.”

“강 실장님의 말이 맞아. 한울타리 재단은 현재가 아니라 미래에 투자하는 사업이다. 지금은 여러모로 지출이 크겠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재단의 중요성은 더욱 더 커지겠지.”

물론 윤수호의 계획하고 있는 목적에서 재단과 문파는 서로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이기도 했다.

돌아갈 곳도 없고, 알터로 각성도 하지 못한 아이들.

세상에 멸시받고 무시당할 수밖에 없는 아이들에게 사회에서 출세하고, 나라에 이바지할 수 있는 기회가 생기는 것이다.

‘목적이 있는 녀석들보다 뒤가 없는 녀석들이 더 간절하다. 하지만 뒤가 없는 녀석들이 단 하나의 목적을 가지면 그것보다 무서운 건 없지.’

* * *

몇 달 뒤, 경기도 산황시 어느 마을.

본래는 자은동이라는 이름이 있었으며 산황시에서도 가장 번화한 동네였던 이곳이 지금은 희망동이라는 새로운 이름으로 새 출발을 준비하고 있었다.

“여러분, 공사가 다소 지연되어도 상관없으니까 최대한 안전하고 튼튼하게 부탁드릴게유.”

“예, 맡겨만 주십쇼!”

강탁준은 희망동에서 인부들과 함께 살다시피 하며 공사 현장을 점검하고 인부들의 애로사항을 꼼꼼하게 체크하였다.

비단 도시 하나를 통째로 리모델링하는 일이었기에 이번 사업에 투자된 인력과 자금은 상상을 초월했다.

물론 국가에서도 어느 정도 지원을 하긴 했다.

사실 이런 일이라면 국책 사업으로 정부에서도 주도적으로 해도 모자랄 판국이었지만 작금의 상황에서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것도 사실.

그렇기 때문에 윤수호는 복지 재단의 명의로 도시의 재건 사업을 주도했고 정부에서도 이를 적극적으로 지지하였다.

덕분에 희망동은 사실상 윤수호가 주도하고 운영하는 독립적인 자치 기관이라 봐도 무방했던 것이다.

“고생들이 많네. 차 한잔 줄까?”

“아니, 그냥 시원한 물로 부탁할게.”

“지도 찬물이면 괜찮아유.”

윤수호는 잠깐 쉬는 틈에 자신의 집무실을 찾아온 동생과 강탁준을 반갑게 맞이했다. 그는 시원한 물 두 잔을 두 사람 앞에 내려놓으며 자리에 앉았다.

“어때? 일은 좀 할 만해?”

“말도 마. 사전에 대충 필요한 교육들은 전부 마쳤다고 생각했는데 이게 실습으로 넘어오니까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문제가 많은 거 있지?”

하루에 두 시간도 자기 힘든 업무 강도 자체는 각오한 바였고 복지 사업이 일정 궤도에 오를 때 까지는 어쩔 수 없는 일이라 참을 수 있었다.

“특히 아이들 복지에 관해서는 나 혼자 해결이 안 돼. 내가 전문가도 아니고.”

“그건 걱정 마. 그쪽에 관련된 인력은 곧바로 충당할 수 있을 것 같으니까.”

“정말? 어디서?”

살짝 놀라는 동생에게 윤수호는 자신이 가지고 있던 파일 하나를 그녀에게 넘겼다.

“이건…….”

“아이들을 키우는데 경험자만큼 소중한 인력은 없지. 물론 경험자라고 모두 완벽한 건 아니지만 약간의 교육만 더 받는다면 충분히 현장 투입이 가능할 거다.”

“설마 이 사람들 전부 서울에 있는 텐트촌에서 지원을 받은 거야?”

“그래.”

윤수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이 처음 이 세상에 돌아와서 부모님을 찾기 위해 찾아간 텐트촌의 모습은 그야말로 거지촌 그 자체였다.

“괜찮겠어?”

동생이 걱정하는 바가 무엇인지 윤수호도 모르지 않았다.

세간의 인식에 텐트촌에서 사는 사람들은 올바른 사람들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좀 더 날것 그대로 표현하자면 매우 부정적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텐트촌은 서울에만 수십 곳이 넘었고, 텐트촌 주민들과 서울 시민들 간의 마찰과 알력 다툼도 위험 수위에 도달했기 때문이다.

윤수아는 분명 그런 사람들을 대거 고용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 재단에 대한 세간의 이미지마저 왜곡되는 것이 아닐까 우려했을 것이다.

하지만 윤수호의 생각은 달랐다.

“시간을 쪼개서 텐트촌 수십 곳을 돌아봤지만 그 사람들은 사회 부적응자들이나 무능력자들이 아니야. 그저 이런 세상에서 재수 없게 터전을 잃어버린 억울한 피해자들이지. 물론 그 사람들 때문에 서울에서도 여러 가지 문제가 발생하는 건 사실이야. 그 때문에 서울 시민들과 항상 마찰을 빚고 인식이 좋지 않은 것도 이해하고. 하지만 그건 그만큼 그들도 필사적이기 때문이라고 생각해.”

“저도 충분히 이해해유. 살기 위해 터전까지 버리고 도망쳤는데 정작 도망친 곳에서 굶어 죽을 수는 없을 테니까유. 물론 그게 타인에게 피해를 끼치거나 범죄에 손을 대는 걸 정당화할 수는 없지만…….”

강탁준은 윤수아를 쳐다보며 무겁게 말을 이었다.

“제가 만약 같은 처지였다면 저라도 그렇게 했을 거예유. 제가 욕먹고 고통받는 건 참을 수 있어도 가족들이 굶고 아파하는 건 절대 못 보니까유.”

“탁준 씨…….”

“나도 강 실장의 생각과 비슷해. 내가 보기에 그들에게 필요한 건 기회야. 떳떳하게 일 할 수 있는 기회, 배울 수 있는 기회, 돈을 벌 수 있는 기회, 행복할 수 있는 기회……. 그들에겐 지금까지 제대로 된 기회 한 번이 없었어. 만약 그들이 내가 생각하는 그런 사람들이라면 그들에게도, 우리에게도 서로에게 큰 도움이 될 거라 생각한다.”

“좋아. 그런 거라면 나도 찬성.”

“사실 반대할 생각도 없었으면서.”

“탁준 씨!”

두 사람이 아웅다웅하는 모습에 윤수호는 피식 한쪽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시간이 지나자 그의 예상은 정확히 맞아떨어졌다.

“오늘도 일하겠다고 텐트촌에서 노동 신청서를 제출한 사람들의 숫자가 최고치를 갱신했습니다. 이사장님, 덕분에 완공 예정 시기가 조금 앞당겨 질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보육 및 간호인 지망 신청서도 쇄도하고 있습니다. 이거 교육자 인력을 더 확보하지 않으면 예정에 차질이 생길 수도 있겠는데요?”

“예산은 신경 쓰지 말고 지금은 필요한 시설과 필요한 인력에 예산을 확실히 투입해서 문제가 생기지 않도록 관리해. 밑바닥이 부실한 투자는 반드시 대가를 치르게 되어 있으니까.”

한울타리 재단의 이사장으로 취임한 윤수호는 하루가 다르게 변화하고 있는 희망동을 빠르게 체크하고 관리하며 적절하게 지시를 내리고 있었다.

하지만 그런 그조차 예상하지 못했던 바가 있었으니…….

그것은 다름 아닌 텐트촌 사람들의 열정이었다.

기회에 굶주려 있던 그들은 희망동의 문이 열리기가 무섭게 이곳으로 몰려들었다.

“팔 한쪽이 고장 나긴 했지만 두 명 몫은 거뜬히 할 수 있습니다! 제발 뽑아 주십쇼!”

“일당은 확실히 챙겨 주는 거 맞죠? 그것만 지켜 주면 시키는 건 뭐든 다 할게!”

“힘든 게 대수야? 돈을 이렇게 많이 주는데? 이 정도면 몇 달만 개고생해도 우리 가족들이 1년은 편하게 먹고 살 수 있을 거라고!”

남성들은 몸이 힘들지언정 비교적 다른 막노동보다 일당이 높은 희망동행 셔틀 버스에 몸을 구겨 넣었고 여성들 역시 사정은 대부분 비슷했다.

“내가 이 손으로 받은 애만 마을 하나가 넘어. 애라면 눈 감고서도 볼 수 있어요.”

“치매 걸린 시부모님 제가 다 건사했어요. 어르신들 돌보는 건 저한테 일도 아니에요.”

“비록 애도 없고 어르신들을 모셔본 경험도 없지만 가르쳐 주시면 최선을 다할게요. 아니, 목숨을 걸고 일할게요. 그러니까 제발…….”

남성들이 막노동에 지원했다면 여성들은 주로 봉사직에 지원서를 쏟아 부었다. 취직만 할 수 있다면 그동안 꿈도 꿀 수 없었던 직장에 취업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렇듯 희망도, 기회도 텐트촌 사람들에게 윤수호의 희망동과 한울타리 재단은 그야말로 천재일우의 기회이자 희망일 수밖에 없었다.

검신이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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