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9.
며칠 후.
윤수호는 집 위쪽에 자리한 도악산으로 향했다.
윤수호의 사유지인 이곳은 가족 외에 외부인의 출입을 엄격히 통제하고 있었기 때문에 윤수호가 산 중턱 공터에 도착한 후에도 산은 여전히 조용했다.
그는 소지품 창에서 엘도라드의 소울 트럼프를 꺼냈다.
트럼프의 설명에 따르면 주인에게 충성하는 엘도라드를 소환한다고 나와 있었지만 만약 일이 잘못된다면 꽤나 골치 아픈 상황이 벌어질 터였다.
그러나 큰 걱정은 없었다.
윤수호는 던전을 클리어하면서 막대한 특전을 획득한 덕분에 더욱 강해진 데다 심지어 이곳은 던전 밖 현실 세계.
내공의 제한이 있던 그곳과 달리 이곳에서 윤수호의 내공은 마르지 않는 바다와 마찬가지였다.
아무리 엘도라드가 미처 날뛴다 하더라도 제압할 자신이 있었다.
“소환, 엘도라드.”
한 손에 검을 든 윤수호가 트럼프를 향해 명령어를 내렸다.
그러자 트럼프에서 밝은 빛이 터져 나오더니 이내 빛이 응축되어 형상을 이루었다.
응축된 빛은 이내 아지랑이가 되어 사라졌고 남은 것은 허리에 거적때기를 두른 황금 피부의 고블린 한 마리였다.
다시 부활한 엘도라드는 자신의 몸을 스윽 둘러보더니 이내 윤수호를 쳐다보며 파안대소를 터트렸다.
“크하하하하! 나름 멋들어진 이별을 했다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다시 그대와 재회하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솔직히 과인이라 해도 이건 조금 창피하구먼.”
“보아하니 기억은 남아 있는 모양이군.”
“그래, 딱히 설명해 주지 않아도 어떻게 된 상황인지는 잘 알고 있다. 아직 과인의 계약은 끝나지 않았다는 거로군. 그래도 그대가 과인의 마스터가 되었다는 사실은 불행 중 다행이다. 과인이 인정하지 않은 녀석이 과인을 노비처럼 부렸다면 죽기보다 괴로웠을 테니 말이야.”
엘도라드는 주변을 둘러보더니 윤수호에게 물었다.
“그런데 무슨 일로 과인을 소환한 거지? 보아하니 과인의 도움이 필요한 상황 같아 보이지는 않구나.”
“내가 그대를 소환한 이유는 두 가지다. 첫째는 이성과 기억이 남아 있는가. 사실 이성과 기억이 남아 있지 않은 꼭두각시였다면 염치불구하고 그대를 이용할 생각이었다.”
“크하하하! 솔직해서 좋구나. 과인의 능력이라면 여러모로 쓸 만한 구석이 많을 터. 이용해서 나쁠 건 없겠지. 그런데 지금처럼 과인의 이성과 기억이 남아 있으면 어쩌려고 했느냐?”
“의사를 물어보려고.”
“의사?”
윤수호는 트럼프를 가리키며 말했다.
“원한다면 이걸 부숴 줄 수도 있다. 부술 수 있다는 가정하에 얘기지만. 정 그게 안 되면 이걸 소멸시킬 수 있을 때까지 소환을 하지 않을 수도 있어.”
“……!”
그 말을 들은 엘도라드의 눈이 커졌다가 이내 의구심으로 물들었다.
“왜지? 그대도 알겠지만 그 트럼프만 있으면 설령 그대가 과인의 철천지원수라 할지라도 과인은 그대에게 맹목적인 충성을 바칠 수밖에 없다. 심지어 과인은 그대에게 적잖은 호의도 가지고 있는 바, 그럼에도 과인이 원한다면 그것을 봉하거나 파할 수 있단 말인가?”
“그래서다.”
“뭐?”
“나 역시 그대가 마음에 들지 않았거나 철천지원수에 버금가는 녀석이었다면 오히려 마음껏 그대를 부렸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황금의 왕을 인정했고, 그대는 존중받기에 걸맞은 품격과 강함을 가진 왕이다. 그런 존재를 내 아집으로 부릴 생각은 추호도 없거든.”
“……!”
윤수호의 흔들림 없는 대답에 엘도라드는 큰 충격을 받았다 이내 파안대소를 터트렸다.
“크하하하하! 그렇구먼. 역시 과인의 눈은 틀리지 않았어. 걱정하지 마라.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낫다고, 비록 이런 형태라고 해도 과인은 싸울 수 있고, 숨 쉴 수 있는 이 세상이 더 낫다. 하물며 과인의 주인이 그대라면 더 바랄 게 없지. 다만 작게나마 바라는 게 있다면…….”
엘도라드는 움켜쥔 주먹을 들어 보이며 씨익 웃었다.
“가끔씩은 과인과 붙어 주었으면 하는군. 그 어떤 고급술을 마시는 것보다, 미녀를 안는 것보다, 과인에게는 강자와의 싸움이 가장 큰 보상이자 바람이니까.”
“되레 내가 부탁하고 싶은 말이다.”
툭.
윤수호는 주먹을 말아 쥐어 엘도라드의 주먹에 가볍게 부딪혔다.
“잘 부탁한다, 마스터.”
“나야말로. 엘도라드.”
그렇게 고금최강의 고블린은 윤수호의 첫 번째 권속이 되었다.
* * *
“이걸 정말 과인에게 전부 돌려주겠다는 말인가?”
“애초에 네 것이었으니까. 그리고 알몸에 거적때기는 보기보다 흉하더군.”
윤수호는 던전에서 엘도라드를 사냥하고 획득한 전설급 장비 세 가지를 모두 원래 주인이었던 엘도라드에게 돌려주었다.
장비의 능력 자체도 하나하나가 사기적이라 아쉬울 법도 하건만 윤수호는 눈곱만큼도 아쉬움을 느끼지 않았다.
어차피 엘도라드는 자신의 권속. 그가 강해지는 만큼 자신에게도 큰 이득이었기 때문이다.
“음! 이제야 체면이 사는군.”
“역시 본래 주인이 입으니까 제일 잘 어울리네.”
자신의 무장을 되찾은 엘도라드가 황금의 왕이란 이명에 어울리는 번쩍번쩍한 모습으로 돌아왔다.
“그럼 무구도 되찾은 김에 어떤가? 마스터, 지금 당장 붙어 보는 건.”
몸이 근질근질했던 엘도라드가 입꼬리를 말아 올리며 투지를 불태우자 윤수호가 피식 웃으며 대꾸했다.
“아쉽지만 그건 나중으로 미루지. 지금은 선약이 있거든.”
“선약?”
그때였다.
“위원장님!”
“형님!”
“삼촌!”
저 밑에서부터 달려와 모습을 드러낸 사람들은 다름 아닌 치우팀과 은지한, 그리고 조춘영 이선호 콤비였다.
그렇게 윤수호를 발견하고 기쁜 마음으로 뛰어오던 그들은 옆에 있던 엘도라드를 발견하는 순간 긴장을 띄었다.
“뭐, 뭐야 이건?”
“재앙종?”
“재앙종이 왜 여기에……?”
왜 이곳에 재앙종이 있는지, 어째서 윤수호가 재앙종과 함께 있는지 의문이 가득했지만 치우팀은 본능적으로 포메이션을 구축하며 엘도라드를 경계했다.
“젠장! 실전용 전투복에 무기를 챙겨 오라고 했을 때부터 무슨 일인가 싶었는데 설마 이런 곳에 재앙종이 있을 줄은…….”
“잡소리 하지 말고 집중해! 평범한 놈이 아닌 것 같으니까.”
완벽한 전투태세를 갖추고 기세를 피워 올리며 엘도라드를 압박하는 치우팀.
그리고 그들 뒤에서 상황을 지켜보며 언제든지 싸울 준비를 마친 이선호, 조춘영 콤비.
마지막으로 치우팀과 자연스럽게 보조를 맞추며 간격을 좁히는 은지한까지…….
엘도라드는 자신에게 쏟아지는 치우팀의 거친 기세를 아무렇지 않게 받아 내며 심드렁한 말투로 윤수호에게 물었다.
“뭐지, 이 무례한 것들은? 보자마자 감히 과인을 괴물 취급 하질 않나…….”
“워낙 데인 게 많아서 그래. 괜찮다면 한번 상대해 줄 수 있을까?”
“과인으로서는 마스터와 싸우는 게 최고의 여흥이겠지만 마스터의 부탁이라면 하는 수 없지. 혹시 적당한 옷가지가 있다면 빌려주게. 이런 햇병아리들을 상대로 과인의 무구를 사용했다간 이 무구를 만들어 선물해 준 과인의 벗이 저승에서 쌍욕을 할 테니.”
윤수호는 소지품 창에서 아무런 능력도 없는 로브 하나를 그에게 건네주었다.
그 순간, 엘도라드가 입고 있던 갑옷이 황금빛 아지랑이로 변해 사라지더니 윤수호가 건넨 로브를 입고 바닥을 두리번거렸다.
놀랍게도 엘도라드가 바닥에서 주워 든 건 놀랍게도 적당한 길이의 나뭇가지였다.
그 모습에 어이가 없었는지, 아니면 재앙종이라고 생각했던 괴물이 너무나도 이성적으로 행동하고 심지어 우리말까지 하는 게 놀랐던지 사람들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위, 위원장님, 대체 뭡니까? 저 괴물…… 아니, 저 분? 아, 아니……. 대체 뭐라고 표현해야 할 지…….”
치우팀 팀장인 공승환조차 너무 놀란 탓에 말을 더듬었다.
처음에야 놀라서 상황을 살필 겨를도 없었다지만 조금 더 시간이 지나고 자세히 살펴보자 한 눈에 봐도 윤수호와 평범한 관계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었던 것이다.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윤수호에게 고정되어 있을 때, 윤수호가 피식 웃으며 그들에게 주의를 주었다.
그 순간!
촤악! 콰콰콰콰……!
사람들은 갑작스러운 소음과 엘도라드의 근처에서 뭉게뭉게 피어오르는 먼지구름에 두 눈을 부릅뜨고 경악했다.
엘도라드는 들고 있던 나뭇가지를 가볍게 휘둘렀을 뿐인데 가지 끝에서 날카로운 검풍이 튀어나오며 땅에 깊은 상처를 남겼기 때문이다.
“음, 이 정도면 쓸 만하겠군. 보아하니 방진을 형성한 모양인데 선수를 양보하고 싶어도 진형이 무너져서야 멋이 없지. 어디 최선을 다해서 과인을 막아 보게. 인간 제군들.”
슉.
그 순간 엘도라드의 신형이 자취를 감추었다.
“조심해!”
눈앞에서 사라진 엘도라드는 어느 순간, 정소담의 면전에 나타나 나뭇가지를 휘둘렀다.
“칫!”
정소담은 혀를 차며 재빨리 팔을 교차해 정면을 틀어막았다. 치우팀의 최고 탱커인 그가 작정하고 가드를 굳히면 결코 쉽게 뚫리지…….
콰아앙!
“커헉!”
“소담아!”
“진형을 유지해!”
“온다!”
고작 나뭇가지에 맞았을 뿐인데 정소담의 거구가 포탄처럼 뒤로 날아가 몇 개의 나무를 부러트리고 바닥에 처박혔다.
그사이 엘도라드의 모습은 또다시 사라졌다. 너무 빨라서 눈으로 쫓는 것조차 불가능할 지경이었다.
“세상에…….”
“와, 미친…….”
이선호와 조춘영은 그냥 입을 벌린 채 구경 중이었다. 두 사람은 치우팀과 엘도라드의 대결을 눈으로 쫓을 수조차 없었던 것이다.
한편 치우팀도 필사적인 건 마찬가지였다.
‘이건 말도 안 돼! 크기만 보면 1급…… 강해 봤자 2급 재앙종이나 다름없는데…….’
‘도대체 뭐냐고? 이 말도 안 되는 스피드와 파워는?’
치우팀조차 엘도라드의 스피드를 따라가기 바빴다. 조금이라도 반응이 늦으면 어김없이 따끔한 회초리가 작렬했다.
회초리질이 얼마나 아픈지 회초리의 대미지는 어지간한 오러도 가볍게 막아 내는 전투복과 치우팀의 오러까지 뚫고 들어와 눈물이 쏙 빠질 정도였다.
하나 그마저도 엘도라드가 적당히 봐주고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대결이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일반 치우팀 대원들은 순식간에 나가 떨어졌겠지.
그 와중에 엘도라드의 눈이 빛났다.
“영 형편없는 녀석들만 있는 건 아니었구먼.”
엘도라드가 눈을 빛낸 대상은 치우팀 팀장인 공승환, 그리고 은지한이었다.
치우팀이 압도적으로 밀리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만큼은 퍼펙트 오러를 수준급으로 구사하며 엘도라드에게 대응하고 있었던 것이다.
특히, 한 번도 합을 맞춘 적이 없는 공승환과 은지한은 마치 한평생 파트너로 활동한 것처럼 서로의 부족한 부분을 완벽히 보완해 주었다.
그 덕분에 가뭄에 콩 나듯 하긴 해도 엘도라드를 역으로 압박하는 경우도 있었던 것이다.
“좋구나. 아주 좋아! 그래도 싹수가 있는 놈들이 있었구나. 크하하하!”
엘도라드가 즐겁다는 듯이 웃음을 터트렸다. 그리고 그것으로 끝이었다.
그가 아주 조금 더 실력을 선보이자 끝까지 버텼던 공승환과 은지한도 결국엔 버티지 못하고 패배를 인정한 것이다.
“후욱, 후욱……! 졌습니다. 이렇게 완벽하게 패배한 적이 대체 얼마 만인지…….”
“진짜 말도 안 되게 강하시네요. 이렇게 강한 분은 삼촌 이후로 처음 보는 것 같아요. 하하하…….”
결국 두 사람은 모든 기력과 체력이 다 한 탓인지 그대로 뻗어 버렸다.
검신이 돌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