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7.
윤수호는 빛이 사라지고 시야가 돌아오자 가장 먼저 주변을 살폈다.
‘여긴…….’
그가 몸을 던졌던 균열은 산 정상 부근에 위치한 거대한 동굴이었으나 고개를 들어 보니 새까만 밤하늘에 쏟아질 것 같은 별들이 보였다.
동굴이 아닌, 산 정상이었기에 볼 수 있는 밤하늘이었다.
“형님!”
“위원장님!”
윤수호가 돌아오자마자 가장 먼저 노심초사하며 기다리고 있던 이선호가 부리나케 달려왔고 그 뒤를 많은 특무대 대원들이 따랐다.
“모, 몸은 괜찮으신 겁니까? 어디 다치신 덴 없고요?”
“괜찮으니까 호들갑 떨지 말고 좀 떨어져라.”
자신에게 찰거머리처럼 붙어서 어쩔 줄 몰라 하는 이선호에게서 윤수호는 강한 조춘영의 향기를 느꼈다.
“무사하셔서 다행입니다, 위원장님.”
윤수호가 이선호를 억지로 떨어트려놓자 기다리고 있던 공승환이 다가와 가슴을 쓸어내렸다.
“특별한 일은 없었습니까?”
“균열에서 발행한 몬스터들은 전부 처리 완료했습니다. 섬멸 팀이 목숨 걸고 애써 준 덕분에 말이죠.”
윤수호는 칭찬 거리가 생긴 강아지처럼 자신을 바라보며 눈을 반짝이는 이선호의 모습에 피식 웃음을 그리며 그의 어깨를 토닥여 주었다.
“잘했다. 고생했어.”
“에이~ 형님만 하겠습니까? 그 애먼 곳에 혼자 가셔서 도대체 무슨 고초를 겪으셨을지……. 그런데 진짜 그곳에서 뭘 하신 겁니까?”
“설명하려면 길다. 일단 특무대 사령부 긴급 소집부터 해야지.”
윤수호의 한마디에 꼭두새벽부터 특무대 총사령부발 긴급소집이 떨어졌다.
영관급들은 물론이고 별 이상의 장군급들도 소집된 긴급회의는 생각했던 것보다 빠르게 인원이 모여들었다.
애초에 던전 자체가 미지의 재앙이었던 만큼 특무대 전 사령관들과 대원들이 비상 대기 상태였기 때문이다.
“총사령관님 오셨습니까.”
“다른 분들도 거의 다 모이신 것 같군요.”
“대체 무슨 일입니까? 이 시간에 갑자기 비상소집이라니…….”
“글쎄요, 저도 받은 정보가 없어서……. 위원장님께서 직접 내리신 소집령이니 그분께서 오셔야 자세한 정황을 알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렇게 영관급 대원들이 외곽을 따라 쭉 둘러진 게스트석을 가득 채우고, 원탁을 둘러싼 장군들이 하나씩 차지한 가운데 윤수호가 현장에서 돌아왔다.
윤수호가 도착하자 천호진을 비롯한 장군들과 영관들이 모두 자리에서 일어나 차렷 자세를 갖췄다.
“일동 차렷! 경례!”
브리핑을 담당하는 김건희 대위의 구령에 맞춰 윤수호에게 절도 있는 거수경례를 올리는 사람들.
윤수호의 비서 자격으로 참석한 이선호와 박여진이 괜히 뿌듯한 심정으로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바로.”
자신의 자리를 찾아간 윤수호가 그들의 경례를 받아 주자 김건희의 구령이 떨어졌다. 윤수호는 자연스럽게 착석을 권했다.
“모두 자리에 앉아 주시죠. 할 얘기가 많습니다.”
“단도직입적으로 묻겠습니다. 위원장님, 대체 그것들은 무엇이었습니까?”
천호진의 질문에 다른 사람들도 모두 윤수호의 대답에 이목을 집중했다.
그에 윤수호는 한 번 숨을 고르더니 자신의 생각을 소신 있게 밝혔다.
“정확한 정체는 저도 파악할 수 없었습니다. 다만 제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이와 같은 일이 한 번으로 끝날 것 같지는 않다는 것입니다.”
“한 번으로 끝나지 않는다니요? 오늘과 같은 미지의 재앙이 또 일어날 수 있다는 말씀이십니까?”
“아마도 높은 확률로요.”
윤수호의 대답에 회의장의 공기가 단숨에 무게를 더했다. 사람들의 표정은 급격히 어두워졌고 그중에는 식은땀을 흘리는 자들도 여럿 있었다.
특히 이번 임무에 참여했던 섬멸팀 소속 대원들의 반응은 거의 절망적이었다.
“그렇게 생각하신 근거가 있으십니까?”
이금찬의 진지한 질문에 윤수호는 먼저 그곳에서 겪었던 일을 설명해 주었다.
“그곳은 현실이지만 현실이 아니었고, 이 세상과 전혀 다른 공간이었습니다.”
“현실이지만 현실이 아닌 전혀 다른 공간? 그게 대체 무슨…….”
백문이 불여일견이라, 윤수호는 말 대신 행동으로 대답을 대신하였다.
“소지품 창.”
“지금 무슨……?”
뚱딴지같이 대뜸 소지품 창이라고 말 하는 윤수호의 행동에 좌중이 의구심을 감추지 못하던 그때.
다음에 이어진 상황이 사람들을 충격에 빠트렸다.
윤수호가 아무것도 없는 허공을 손가락으로 터치하자 약한 빛 무리와 함께 무언가가 생성된 것이다.
윤수호의 손바닥 위에 놓인 그것은 붉은 액체가 찰랑거리는 투병한 유리병이었다.
“마술……은 아니겠지요?”
“아닙니다.”
윤수호는 고개를 저은 후 대답했다.
“이곳으로 오기 전, 몇 가지 실험을 통해 알아낸 사실이 있습니다. 먼저 제가 그곳에서 획득한 소지품 창과 아이템은 이곳에서도 사용할 수 있다는 것. 그리고 소지품 창과 아이템은 제가 활성화하기 전까지는 다른 분들 눈에 보이지 않는다는 것을요.”
“소지품 창과 아이템?”
“그것들을 그곳에서 획득하셨다고요? 대체 어떻게…….”
“소지품 창은 기본적으로 16칸의 소지품 창을 지급하는 것 같았습니다. 아이템은 몬스터를 잡으면 획득할 수 있었습니다.”
윤수호의 대답에 사람들은 머리가 어질어질했다.
특히 나이가 많은 장군들보다 오히려 비교적 나이가 젊은 영관들이 느끼는 충격이 더욱 컸다.
“잠깐, 소지품 창이 있고 몬스터를 잡으면 아이템을 획득할 수 있다니, 그건 마치…….”
“게임이잖아?”
영관들이 앉아 있던 좌중이 술렁이기 시작했다. 윤수호가 설명한 바에 따르면 그 공간은 영락없는 게임이었기 때문이다.
“정숙하게들.”
잠시 소란이 일었지만 천호진이 진정시키자 금세 소란은 잦아들었다.
“그래서, 그 병을 그곳에서 몬스터를 잡고 획득하셨다는 말씀이시지요? 한데 그것은 혹시 여기서도 사용 가능한 것입니까?”
“직접 확인해 보시죠.”
천호진의 질문에 윤수호는 박여진을 쳐다보자 박여진이 USB 하나를 김건희에게 넘겨주었다.
USB 안에는 윤수호가 섬멸부대가 토벌을 마치고 임시로 치료를 받고 있던 이동용 의료 센터로 찾아간 영상이 들어 있었다.
영상 속 윤수호는 지금 그가 손에 든 것과 똑같은 붉은 포션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는 뚜껑을 열어 포션을 부상당한 대원들에게 먹였다.
그러자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심각한 외상을 당한 병사들조차 병에 든 액체를 마시더니 순식간에 상처를 회복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저, 저……!”
“어떻게 저런 일이…….”
“대관절 저 액체가 무엇이길래……!”
넉넉하게 챙겨온 치유 포션은 부상당한 부상병들에게 무엇보다 큰 도움이 되었다.
심지어 죽을 위기에 처한 대원들조차 생명을 건지는 등, 치유 포션의 가치는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엄청났다.
“보시다시피 던전 안에서 획득한 아이템은 밖에서도 타인이나 다른 오브젝트를 대상으로 사용이 가능합니다. 영상 속에서 확인하셨던 치유 포션 같은 경우, 마시거나 상처에 뿌리는 것으로 효과가 나타나고 양에 따라 효력이 달라집니다.”
“예를 들어 한 병을 온전히 마시거나 뿌리면 포션의 효력을 100% 받을 수 있지만 두 사람이 나눠 마시면 50%밖에 받지 못한다는 뜻입니까?”
“그렇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영상 속에서도 포션을 상황에 따라 적절히 분배하여 사용하신 걸 볼 수 있으실 겁니다. 최상급 치유 포션의 경우, 부상이 덜 심한 부상자들에게 사용하면 경우에 따라선 열 명 이상도 한 병만으로 바로 완치가 가능하더군요. 체력까지 회복되지는 않지만요.”
그 밖에도 영상에서는 부상이 심각한 대원 한 명에게 하급 치유 포션을 다량 섭취시켜 회복시킨 경우도 있었다.
“치유 포션이란 것의 효과는 잘 알겠습니다. 하면 영상 속에 저 파란 포션은 무엇입니까? 저것도 치유 포션과 비슷한 아이템입니까?”
“저것은 마나 포션입니다. 치유 포션이 상처를 즉시 회복시켜 준다면 마나 포션은 오러를 즉시 회복시켜 주더군요. 물론 효력은 치유 포션과 같은 법칙을 따랐습니다.”
“오, 오러를 즉시 회복시켜 준다고요?”
“세상에…….”
사람들이 놀라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일반적인 알터들은 개개인에 따라 차이가 있지만 평균적으로 오러를 완전히 소모했을 때 다시 회복되는 데까지 하루 정도가 걸린다.
회복 속도가 빠른 팀장급 알터들조차 반나절, 오버 알터들도 몇 시간을 걸리기 때문에 전투 시에는 항상 신중하게 오러를 운용해야 했다.
그런데 마시자마자 오러를 회복시켜 주는 포션이라니?
특히 이 자리에 참가한 현직 알터 대원들의 열망과 욕심은 오히려 치유 포션을 봤을 때보다 더 뜨겁게 타오르고 있었다.
그래서였을까?
“위원장님의 말씀이 그렇다면 다음 던전 출몰 시에는 가능한 한 많은 대원들이 함께 가는 게 좋겠습니다. 소지품 창이란 것을 참가자 전원에게 준다면 그만큼 많은 아이템을 획득해서 돌아올 수 있을 게 아닙니까?”
어느 중장이 한껏 들떠서 의견을 내놓자 윤수호가 무거운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아무래도 그건 힘들 것 같습니다, 최보필 사령관님.”
윤수호는 그 이유에 대해 설명했다.
“제가 그곳에서 가장 먼저 마주친 몬스터는 고블린 척후병이었습니다. 그곳에서도 가장 약한 몬스터이자 고블린 병사였죠. 하지만 녀석의 강함을 재앙종으로 환산하면 아무리 낮게 잡아도 4급 이상이었을 겁니다.”
“……!”
“제가 클리어한 던전은 총 세 구역이었습니다. 척후병과 암살병들이 활개 치는 1구역, 대략 등급으로 따지면 4~5등급의 몬스터들이 등장했죠. 그리고 고블린 군단이 모여 있던 목책 앞 2구역. 그곳은 4등급짜리 병사 천 마리를 비롯해서 5~6등급의 고블린 정예들만 이백여 마리가 넘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세 번째 구역.”
윤수호는 좌중을 훑어보더니 담담하게 자신이 느낀 사실을 전해 주었다.
“이곳에 등장한 네 마리의 엘리트 몬스터는 한 마리 한 마리가 최소 7급 재앙종에 해당하는 강함을 가졌더군요. 마지막으로 그곳의 보스 몬스터인 엘도라드라는 녀석은 적어도 8급은 아득히 초월하는 강함이었습니다. 제가 9급을 상대한 적은 없지만 9급 재앙종이 있다면 녀석과 비슷하지 않을까 싶을 만큼 말이죠.”
“…….”
방금 전까지 포션과 아이템에 눈이 멀어 들뜬 기분으로 얘기를 꺼냈던 최보필이 합죽이가 되었다.
그러자 너무 절망적인 분위기에 압도당한 어느 소장이 조심스럽게 자신의 의견을 꺼내며 분위기 환기를 위해 노력했다.
“그, 그래도 위원장님께서 함께 계시면 그 정도로 위험하지는…….”
“던전은 이곳과 전혀 다른 법칙을 가진 공간입니다. 심지어 오러의 자연 회복도 불가능한 곳이죠. 던전이 정한 규칙을 따르지 않으면 저조차도 던전 클리어를 장담할 수 없습니다. 이번에 던전을 클리어할 수 있었던 건 순전히 운이었습니다.”
윤수호는 나직하게 한숨을 내쉬며 대답했다.
“아주 간단하게 예시를 들어 만약 그곳에 두 명 이상이 어떤 조건을 동시에 클리어 해야만 공략할 수 있는 던전이었다면 저는 이곳에 있지 못했을 겁니다.”
“……!”
젊은 영관들은 입을 모아 그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고 말했다.
특히 RPG에 일가견이 있는 남성 영관들 같은 경우, 만약 던전이 현실의 게임을 모방하여 만들었다면 그런 기믹들이 차고 넘치는 것도 불가능하지 않다고 말이다.
“실제로 저는 이번 던전에서 고블린 마스터 네 마리를 물리치고 그 인장을 적절하게 사용하면 보스 몬스터가 약해진다는 사실을 전혀 알지 못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대원들을 지키며 싸운다는 건 저로서도 불가능에 가깝겠지요.”
“…….”
윤수호의 말을 듣고 사람들은 깨달을 수 있었다.
던전은 분명 매력적인 보물창고지만 그만큼 위험도 도사리고 있다는 사실을…….
검신이 돌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