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6.
“끌끌끌! 과인의 완패로다. 생전에는 그토록 패배를 고대했는데…… 막상 겪어 보니 생각보다 재미가 없구나.”
“그만큼 진심이었으니까. 나도, 그대도.”
윤수호는 쓰러진 엘도라드의 앞으로 다가갔다.
점점 얕아지는 숨소리와 깨진 머리에서 흘러나오는 핏물, 더 이상 회복 불가능할 지경으로 망가진 내장까지…….
오히려 살아서 말을 하는 게 더 신기할 지경이었던 것이다.
“그런가. 아쉽구먼…… 이런 재미있는 싸움을 다시는 경험할 수 없다는 사실이 말이야.”
“동감이다.”
엘도라드는 흐려져 가는 눈을 들어 윤수호를 쳐다보았다.
자신 역시 한 시대를 풍미하며 적수가 없는 괴로운 나날을 보낸 적이 있었다. 무인에게 있어 호적수가 없다는 사실은 심장을 도려내 버린 듯한 허망함과 비슷했다.
자신이 이럴진대, 자신과는 비교도 안 될 강함을 이미 손에 넣어 버린 상대는 과연 어떨까?
“이후로도 그대는 오랫동안 쓸쓸하겠구나.”
윤수호는 두서없는 엘도라드의 말을 단번에 이해할 수 있었다.
그건 시대와 종족을 떠나 한 시대를 군림한 절대자들만이 공감할 수 있는 고독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윤수호는 피식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나도 그랬던 적이 있지. 하지만 지금은 아니야.”
윤수호의 미소를 보고 엘도라드는 그가 자신과 비슷하면서 다른 존재임을 깨달을 수 있었다.
“그런가. 그대는 강함의 끝을 추구했던 과인과 달리 그보다 더 소중한 것을 찾은 모양이로구나.”
쿨럭!
엘도라드는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피를 토해 내며 자신에게 남은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깨달았다.
“과인을 쓰러트린 선물이라고 하기는 뭣하고…… 시간이 남았으니 처음 다하지 못한 문답을 나누도록 하자꾸나. 무엇이든 물어보아라. 계약에 저촉되는 질문만 아니라면 답해 줄 테니.”
“이 공간의 주인이 누구지?”
“아쉽지만 그건 계약에 저촉되는 질문이구나. 하나 실망할 것은 없다. 설령 계약에 저촉되지 않았다고 해도 마땅한 대답을 없었을 것이니. 과인 역시 그 존재가 무엇인지 알지 못한다.”
“모르는 존재와 계약했다는 것인가?”
윤수호의 의문에 엘도라드는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이해하지 못할 만도 하지. 하지만 그대도 직접 그 존재를 보게 되면 이해할 것이다. 그 존재의 압도적인 존재감을. 그것은 과인이 추구하는 강함이나 마법사들이 추구하는 진리와도 궤가 다른…… 뭐라고 표현하면 좋을까. 그래, 절대적이라는 말이 어울리겠구나.”
다른 누구도 아닌 엘도라드가 절대적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 존재.
심지어 자신이 만든 공간 안에서 윤수호에게 제약을 걸 수 있는 존재라면 그의 말처럼 절대적이라는 수식어만큼 어울리는 단어도 없을 터였다.
“그 존재의 목적은?”
“그것도 알 수 없다. 다만 약간 들떠 보이는 듯한 느낌은 들더군.”
“들떠 보였다?”
“적어도 과인 눈에는 그렇게 보였다. 물론 착각일 수도 있지만.”
이쪽은 세상이 멸망하느냐 마느냐의 기로에 놓여 있는데 정작 이런 상황을 초래한 존재는 들떠 보였다고 한다.
윤수호의 얼굴이 무거워졌다. 그 존재에게 무슨 계획이 있건 결코 좋은 의도는 아닌 것 같아 보였기 때문이다.
“아쉽게도 방금 게 마지막 질문이었던 것 같군. 더 이상은 과인의 의식을 유지하기 힘드니 말이야.”
“그런가.”
윤수호는 떠나가는 엘도라드를 조용히 지켜봐 주었다.
‘썩 나쁜 기분은 아니군. 과인이 인정한 강자가 과인의 마지막을 지켜봐 주는 게…….’
“제약 없이 그대와 전력으로 싸울 수 있어서 영광이었다.”
‘제약?’
“나 역시 즐거웠다. 잘 가라, 황금의 왕이여.”
그렇게 마지막 인사를 마친 엘도라드가 눈을 감자 몇 개의 알람이 동시에 눈앞에 나타났다.
[업적, 최초의 던전 클리어를 달성하셨습니다. (보상 : 모든 능력치 +30% 모든 원소 저항력 +30%)]
[업적, 던전 1인 클리어를 달성하셨습니다. (보상 : 모든 능력치 +30%, 물리 저항력 +30%)]
[업적, 최초의 파티원 0데스 클리어를 달성하셨습니다. (보상 : 엘릭서 100EA, 파티원 전원 소지품 창 대확장)]
[업적, 최초의 던전 1인 클리어 보상으로 칭호, ‘던전 스트라이커’를 획득하셨습니다.]
[보상으로 받은 칭호를 확인하시려면 칭호 확인을 활성화해 주십시오.]
뭔가 여러 가지 알람이 뜨면서 윤수호는 자신의 몸이 급격하게 강해지는 것을 느꼈다.
당장은 혼란스러웠지만 일단 알람에서 지시하는 대로 윤수호는 자신이 받은 칭호부터 확인해 보기로 했다.
“칭호 확인.”
{던전 스트라이커}
-모든 능력치 +30%
-원소 저항력 +30% (원소 저항력은 최대 95%까지 적용)
-물리 저항력 +30% (물리 저항력은 최대 95%까지 적용)
-모든 저주 면역
-모든 상태 이상 면역
-체력 재생 +100%
-마나 재생 +200%
[‘던전 스트라이커’칭호를 활성화하시겠습니까?]
-Yes / No
그가 던전 스트라이커 칭호를 활성화하자 칭호에 달려 있던 모든 옵션들이 적용되면서 윤수호는 다시금 한층 더 강해지는 느낌을 강하게 받을 수 있었다.
‘무공으로 깨달음을 얻어 강해지는 것과는 확실히 다른 이질적인 힘이다.’
윤수호는 자신의 두 손을 내려다보았다.
감당하기 벅찰 정도로 내면에서부터 끓어오르는 힘이 폭발할 것만 같았다. 오히려 힘을 통제하고 억누르는 게 더 힘들고 어려울 정도였다.
그러나…….
“후우…….”
자리에 가부좌를 틀고 앉은 윤수호는 대략 세 시간 정도를 운기하면서 증폭된 힘에 적응해 나갔고…….
그렇게 힘에 적응을 완료하자 눈을 뜬 윤수호는 일단 주변부터 확인하기 시작했다.
가장 먼저 확인한 것은 당연히 보스 몬스터인 엘도라드의 시신이었다.
입가에 미소까지 그린 채 평온하게 잠든 엘도라드에게 존경과 감사의 의미로 깊이 고개 숙인 윤수호는 곧바로 그의 시신을 향해 손을 가져갔다.
그러자 아니나 다를까, 엘도라드의 시신 위로 획득 가능한 아이템 창이 열람되었다.
과연 보스 몬스터답게 획득 가능한 아이템의 숫자도, 등급도 무시무시했다.
가장 낮은 등급인 일반과 그 다음 등급인 고급은 보이지도 않았으며 마법 아이템부터 획득할 수 있었는데 그중에서 가장 높은 등급의 아이템은 다름 아닌…….
‘전설?’
엘도라드에게서 획득 가능한 전설 아이템은 총 네 가지였다.
하나는 그가 입고 있었던 황금 갑옷이고, 다른 하나는 황금 방패, 그리고 다른 하나는 당연히 황금 검이었다.
문제는 나머지 하나. 무구와 장비는 그렇다 치더라도, 엘도라드와는 전혀 관계없어 보이는 카드 한 장이 전설 등급이었다.
윤수호는 곧바로 카드를 확인했다. 카드에는 엘도라드의 모습이 그려져 있었는데, 아이템 확인을 통해 그 효과를 확인할 수 있었다.
[엘도라드의 소울 트럼프] (전설)
-제약이 걸리지 않은 엘도라드(100%)를 쓰러트린 용사가 획득할 수 있는 소울 트럼프. 이 트럼프 카드를 통해 카드 주인에게 충성하는 엘도라드를 소환 혹은 역소환할 수 있다. 역소환되거나 소환된 엘도라드가 소멸했을 경우 24시간의 재사용 대기 시간을 가진다.
윤수호는 트럼프의 효과에 대해 상당이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카드 주인에게 충성하는 엘도라드를 소환할 수 있다고? 이건 상당한 보탬이 되는 정도의 문제가 아니었다.
심지어 엘도라드가 당한다고 해도 24시간 후에 재소환할 수 있었으니 이 정도면 사기템이라 봐도 무리가 아니었다.
그밖에 눈에 띄는 건 소울 트럼프의 획득 조건이었다.
‘제약이 걸리지 않은 엘도라드라…….’
엘도라드 역시 죽기 전에 그런 말을 남겼다. 제약이 걸리지 않은 상태에서 싸울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고.
즉, 엘도라드에게 제약을 걸어 그의 힘을 약화시킬 수 있는 방법이 따로 있다는 뜻이겠지.
파티원 사망 0명 업적 보상으로 4×4에서 10×10으로 확장된 소지품 창에 엘도라드에게서 필요한 아이템을 넉넉하게 챙긴 윤수호.
소비 용품 같은 아이템들은 한 칸에 얼마든지 중첩이 가능했기 때문에 칸 소모가 그렇게 크지는 않았다.
여담으로 윤수호는 혹시나 싶어서 들고 있던 설을 소지품 창에 보관해 보려 했지만 실패했다.
소지품 창에는 오로지 던전에서 획득한 아이템들만 넣고 뺄 수 있었던 모양이다.
여기서 윤수호는 호기심이 동했다.
던전에서 얻은 아이템은 던전에서 얻은 아이템에게만 적용되는 것인지, 아니면 다른 것에도 적용되는 것인지 궁금했던 것이다.
윤수호는 시험 삼아 고블린 병사들에게도 몇 장씩 얻을 수 있는 잡템, 하급 바람 속성 강화 스크롤을 설에게 사용해 보았다.
그런데.
[미약한 바람의 기운이 ‘오브젝트’에 깃듭니다.]
놀랍게도 설을 오브젝트로 치부하며 스크롤에 담긴 바람의 기운이 설에 스며들었다.
던전에서 획득한 아이템이 아닌, 외부에서 가져온 장비에도 던전에서 획득한 아이템을 사용할 수 있었던 것이다.
더욱 놀라운 사실은 더 있었다.
스크롤을 발라 상시 미약한 바람의 기운을 내포하게 된 검을 다시 한 번 소지품 창에 보관하려 했더니 이번에는 성공한 것이다.
‘즉, 외부 오브젝트라도 던전에서 획득한 아이템을 강화하거나 인챈트하면 던전에서 획득한 아이템 취급을 한다는 건가.’
그렇게 몇 가지 사실들을 더 알아낸 윤수호가 이번에는 죽은 고블린 마스터들을 파밍하다 무언가를 발견했다.
‘이건…….’
[불의 인장] (고유)
-고블린 마스터 듀얼이 소지한 불의 인장. 이 아이템을 알맞은 장소에 사용하면 엘도라드를 약화시킬 수 있다.
듀얼뿐만이 아니었다. 다른 세 마리의 고블린 마스터도 각각 해당하는 원소의 인장을 가지고 있었으며 모두 똑같은 효과를 가지고 있었다.
즉, 네 가지의 인장을 모두 사용하면 엘도라드를 총 네 번 약화시킬 수 있었다는 뜻이었다.
‘그랬군. 어쩐지 밸런스 차이가 너무 심하더라니…….’
윤수호가 주변을 둘러보자 인장과 똑같은 문양이 그려진 화로를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었다.
문양에 맞는 인장을 맞는 화로에 던져 넣자 불과 바람, 얼음과 모래가 화로 위로 솟구치면서 춤을 추었다.
본래라면 이런 식으로 엘도라드를 약화시켜서 다 함께 사냥했어야 할 터였다.
그런데 그런 공략 지식이 없었던 윤수호는 100%의 힘을 가진 전력의 엘도라드와 진심으로 맞붙었던 것이다.
‘그 덕분에 소울 트럼프라는 유용한 아이템을 손에 넣긴 했지만…….’
만약 던전의 공략법이 다른 방식이었다면 위험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은 여전히 변함없었다.
애초에 이 공간은 자신이 알던 세상이 아닌, 어떤 존재가 어떤 목적을 가지고 만든 인위적인 공간이었기 때문이다.
푹!
윤수호는 마지막으로 검에 자신의 남은 모든 기운을 응축시킨 후 바닥에 깊이 꽂았다.
자신의 탈출로 이 공간이 소멸한다면 검도 같이 소멸하겠지만…… 만에 하나, 억에 하나라도 자신의 예상이 맞다면 이 검은 훗날 소중한 부표가 되어 줄 터였다.
그렇게 마무리까지 모두 마친 윤수호는 100칸짜리 소지품 창을 알뜰히 채운 후 마지막으로 아이템 하나를 사용하였다.
이 던전에서 오로지 엘도라드만 가지고 있던 ‘귀환 스크롤’이었다.
[귀환 스크롤을 사용하시겠습니까?]
“그래.”
윤수호가 허가하자 귀환 스크롤에서 밝은 빛이 쏟아져 나오더니 순식간에 윤수호를 감쌌다.
검신이 돌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