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5.
황금빛 갑주와 황금의 방패, 황금의 검을 두른 황금 고블린 엘도라드의 모습은 그야말로 군왕 그 자체였다.
그는 높은 단상 위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며 자신을 찾아온 적을 반갑게 맞이했다.
“드디어 왔구나, 친애하는 과인의 적이여.”
‘인간의 말을 할 줄 아는 녀석인가?’
그런 건 아닌 듯싶었다. 녀석은 자기 말로 떠들 뿐이지만 그 의미를 윤수호가 알아들었을 뿐이다.
물론 윤수호에게 그런 능력은 존재하지 않았다. 그 말인즉, 이 또한 이 공간의 특수성이라는 뜻이다.
하면 반대도 가능할 것이다. 윤수호를 그렇게 생각하고 편하게 질문을 건넸다.
“네가 이 공간의 주인인가?”
예상대로 윤수호가 편하게 한국어로 말을 걸었음에도 엘도라드는 찰떡같이 알아듣고 대답했다.
“아니, 과인은 이 공간의 주인이 아니다. 다만 이 공간의 주인과 계약으로 얽혀 있을 뿐이지.”
“계약?”
“이제는 과인이 질문할 차례로군. 이곳을 찾은 인간은 그대뿐인가? 아니면 그대만 살아남은 것인가?”
“나 혼자면 충분하다고 판단했다.”
윤수호의 대답에 엘도라드는 미간을 좁히더니, 이내 피식 웃었다.
“보아하니 계약에 대해 궁금한 모양이군. 내가 맺은 계약은 이 공간의 규칙을 지켜 적들을 섬멸하라는 것이었다. 그러면 과인과 과인에게 충성을 바친 모든 신하가 수육(受肉)하여 세상에 현현할 수 있다고 하더군. 물론 이 공간에서 죽은 신하들까지 전부 말이다.”
“그게 무슨……?”
“내가 답할 수 있는 건 여기까지. 더 이상 기다리는 건 과인이 바라는 바가 아니다. 지금부터 마지막 시험을 시작하자. 친애하는 과인의 적이여!”
텅!
엘도라드가 검집 끝으로 바닥을 찍었다.
그러자 둔중한 소음과 함께 그의 양옆에 서 있던 네 명의 기사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고블린 마스터. 듀얼이 출현하였습니다.]
[고블린 마스터. 가가널이 출현하였습니다.]
[고블린 마스터. 하펜이 출현하였습니다.]
[고블린 마스터. 누이자르가 출현하였습니다.]
붉은 쌍검에 화마를 두르며 앞장서는 듀얼, 날카로운 바람을 화살에 휘감은 가가널, 대지의 기운으로 굳건해진 도끼를 매만지는 하펜, 혹한의 매서움이 창끝에 서린 누이자르까지.
각 속성에 어울리는 붉은색, 초록색, 갈색, 청색의 갑주를 갖춰 입은 네 마리의 고블린 마스터들이 윤수호에게 접근했다.
“가라, 나의 기사들이여.”
엘도라드의 명령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땅을 박차며 공격을 시작하는 녀석들.
먼저 선수를 취한 건 불꽃의 듀얼이었다.
화르륵!
녀석의 쌍검에는 알터 오러 중에서도 일부만이 개화한다는 퍼펙트 오러가 맺혀 불꽃과 함께 어우러졌다. 어지간한 강자라도 저 화염에는 제대로 대응조차 할 수 없을 것이다.
슈웅!
그 사이, 가가널이 윤수호의 빈틈을 노리고 화살을 날렸다. 마찬가지로 퍼펙트 오러가 맺힌 화살은 돌풍을 두른 채 거칠고 사납게 적을 향해서 쇄도하였다.
하지만!
번쩍!
윤수호는 먼저 듀얼의 검을 가볍게 쳐내며 녀석을 반으로 갈라 버렸다.
하얀 실선과 함께 정수리부터 갈라진 듀얼의 몸뚱이가 양쪽으로 쪼개지기도 전에 윤수호의 모습이 사라졌다.
그리고 다시 이내 검광이 번뜩이자, 이번에는 화살을 날렸던 가가널의 머리가 몸통과 분리되어 바닥에 떨어졌다. 죽은 녀석의 표정은 자신의 죽음을 인지하지 못한 모양이었다.
우워어어어어!
그사이, 바위의 하펜이 중저음의 괴성을 지르며 윤수호를 향해 달려들었다.
고블린이라기보다는 트롤에 더 가까운 덩치를 가진 하펜은 오히려 윤수호보다 머리 하나가 더 크고, 근육질의 덩치는 보디빌더 못지않았다.
하나 덩치에 어울리지 않게 민첩한 속도로 윤수호에게 접근한 녀석이, 두 손으로 도끼를 야무지게 꼬나 쥐고는 그대로 벼락처럼 내리쳤다.
퍼펙트 오러에 더해 대지의 힘까지 불어넣은 녀석의 도끼는 다이아몬드도 두부처럼 부숴 버릴 수 있는 강도를 가졌지만…….
턱.
윤수호는 그런 하펜의 도끼를 한 손으로 붙잡더니…….
으드득…… 콰앙!
악력만으로 손쉽게 부숴 버렸다.
쩌엉!
하펜이 놀라 눈을 부릅뜨기 무섭게, 윤수호의 주먹이 녀석의 얼굴에 그대로 틀어박혔다.
콰앙!
엄청난 굉음과 함께 수십 미터를 날아간 하펜은 움막에 처박히며 그대로 절명하였다.
남은 고블린 마스터는 혹한의 누이자르뿐.
윤수호의 무심한 시선이 자신에게 닿자, 누이자르는 흠칫 놀라더니 이내 식은땀을 흘리며 자세를 낮췄다.
콰우우우우!
놈의 몸에서 엄청난 한기가 휘몰아쳤다. 단지 기세를 피워 올리는 것만 해도 대지와 공기가 얼어붙어 버릴 정도였다.
쾅!
준비를 마친 녀석이 윤수호를 향해 몸을 날렸다.
공간을 지워 버리는 녀석의 스피드는 발군이었고, 그 모습은 한 자루의 얼음 화살이었다.
녀석이 지나가는 자리를 따라 고드름이 피어올랐다. 그 혹한의 냉기는 응축되고 응축되어, 마침내 윤수호의 심장을 노렸다.
그러나!
번쩍!
놈의 창끝을 겨눠 검을 찔러 넣었을 뿐이었다. 깔끔하고, 간결하게…….
단지 그것뿐이었는데, 누이자르의 창이 박살 나고 몸뚱이가 산산조각으로 흩어졌다.
통제를 잃은 냉기가 순식간에 조각난 그의 육편과 핏물을 꽝꽝 얼려 버렸다. 혹한의 냉기에 얼어붙은 피와 육편들이 눈송이가 되어 윤수호의 주변으로 내렸다.
‘강하다.’
윤수호의 솔직한 심정이었다.
네 마리 모두 압도적으로 쓰러트려 놓고 그런 생각을 하는 게 우스울 수도 있다. 하지만 윤수호는 자신을 기준으로 네 마리의 고블린 마스터들을 평가한 것이 아니었다.
만약 상대가 윤수호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들이었다면 어땠을까?
상대는 퍼펙트 오러뿐만 아니라, 그에 준하는 원소 기술까지 사용하는 네 마리의 고블린 마스터다. 놈들을 쓰러트리려면 최소한 치우팀이 한 마리당 두 명은 붙어야만 승산이 있었다.
게다가 목책 밖에서 대기 중이던 고블린 대군은 또 어떤가? 놈들 역시 결코 만만한 전력이 아니었다.
그러나 진짜 문제는 따로 있었다.
“대단하구나! 과연 대단한 인간이야! 과인의 기사들을 이리도 간단하게 쓰러트릴 줄이야! 크하하하!”
쓰러진 고블린 마스터들을 보고도 두려워하기는커녕 오히려 대소를 터트리는 엘도라드의 몸에서 항거하기 힘든 엄청난 기세가 자연스럽게 쏟아져 나왔다.
급이 다르다. 아니, 차원이 다르다!
녀석의 기세를 몸으로 받아낸 윤수호의 머릿속에서 자연스럽게 한 존재가 떠올랐다.
“그러고 보니 들은 적이 있군. 서역의 전설 중에서 대륙을 제패한 황금 고블린이 있었다지. 이름이 엘도라드였던가. 우연이라고 생각하기에는 다소 겹치는 부분이 많은 것 같은데…….”
“오! 이 시대의 인간 중에 아직 과인을 잊지 않고 기억해 주는 인간이 있었구나. 하긴, 고작 수천 년이 지났다고 잊어버리기에는 과인의 존재감이 좀 남달라야지. 하하하하!”
‘설마 했는데…….’
어떻게 지구와 다른 세상에서, 그것도 그쪽 세상에서조차 전설 속 존재로 묘사되던 괴물이 이곳에 현신한 것인지 의문투성이였다.
하나 확실한 건 이렇게 멀리 떨어져 있어도, 그 기세만으로 피부가 따끔거릴 정도로 녀석의 강함은 진짜라는 사실이었다.
엘도라드는 대소를 터트리며 자연스럽게 계단을 내려왔다.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은 발걸음이지만, 어느새 윤수호의 앞에 선 그가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고블린답게 윤수호보다 머리 두 개는 작은 어린아이 체형이지만, 그의 눈에는 엘도라드가 결코 작아 보이지 않았다.
“강자여. 이름이 무엇인가?”
“윤수호.”
“그대의 이름을 기억하도록 하지.”
검을 빼든 엘도라드가 검을 휘둘렀다.
그리고 윤수호도 마찬가지로 검을 휘둘러 엘도라드의 검을 받았다.
두 존재의 검이 한 공간, 한 점에서 충돌했다.
그 결과…….
콰아아아아아아앙!
눈부신 섬광이 주변을 집어삼키며, 엄청난 폭음과 상상을 초월한 충격파가 삽시간에 사방을 휩쓸었다.
섬광이 사라지고 생겨난 거대한 크레이터 위에 두 존재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스핏! 파파파팟! 카카카카카캉!
윤수호와 엘도라드, 이 두 존재는 엄청난 속도로 주변을 이동하며 공방을 주고받았다.
두 존재의 스피드가 얼마나 빨랐던지 숲 여기저기서 동시에 두 존재가 맞붙는 잔상이 보일 정도였고, 그보다 많은 충격파가 두 존재의 충돌을 증명했다.
검과 검이 부딪힐 때마다 수많은 검기가 사방으로 쏟아져 숲을 초토화했다.
검이 휘둘러질수록 뿜어져 나오는 검풍이 태풍처럼 주변을 휩쓸었으며, 두 사람은 던전이 좁다고 느껴질 만큼 던전 전체를 누비면서 자웅을 겨루었다.
“크하하하하! 즐겁구나! 과연 과인이 인정한 강자로다! 그대야말로 세상에 호적수가 없어 괴로워하던 과인에게 신이 주신 선물이로다!”
엘도라드는 크게 소리치며 즐거워했다.
그와 동시에 쏟아지는 수많은 검기들을 황금의 방패로 철저하게 가드했다.
순간, 황금의 방패에서 진한 황금빛 오러가 방전되더니, 쏟아지는 수백 개의 검영을 모조리 받아 낸 것이 아닌가?
하지만 그게 끝이 아니었다.
“이건……!”
수백 개의 검영이 사라지고 남은 한 자루의 검.
그 한 자루의 검이 수백 개의 검영보다 위험하다는 사실을 눈치챈 엘도라드가 전력으로 방패를 강화했다.
그 순간.
콰아아아앙!
다시 한번 세상을 집어삼킬 듯한 폭발 뒤에 드러난 건, 산산조각으로 흩어진 방패와 머리에 피를 흘리며 씨익 웃고 있는 엘도라드의 모습이었다.
“천하를 오시할 검이로다! 과인조차 흉내 내지 못할 경지에 다다른 자로구나. 왕이기 이전에 무인으로서 진심으로 존경을 표하마.”
“그대 역시 흔치 않은 강자다. 검을 섞는 것이 즐거운 적은 참으로 오랜만인 것 같군.”
윤수호의 말은 진심이었다.
전설 속의 존재답게 엘도라드의 강함은 진짜였다. 아무리 윤수호에게 페널티가 부여됐다지만, 그와 검을 섞어 이 정도로 버틸 수 있는 강자는 드물었다.
“이제 그만 편히 쉬시오, 전설의 황금왕이시여. 내가 드릴 수 있는 최선의 자비는 그것뿐일 테니.”
윤수호는 기수식을 취했다.
소모된 내공은 회복되지 않았지만, 상대의 역량은 충분히 확인했다.
그는 엘도라드는 향해 거침없이 검을 휘둘렀다. 그 순간, 그의 검 끝에서 엄청난 기세의 강기가 뿜어져 나와 엘도라드를 향해 쇄도했다.
쇄도하던 강기는 형체를 이루기 시작했는데, 그 모습이 마치 검은 용을 연상시켰다.
“이곳에 잠드는 건 그대일세!”
그에 대응하여 엘도라드 역시 지지 않고 전력으로 검을 휘둘렀다.
그러자 눈이 멀어 버릴 것 같은 황금빛의 강기가 쏟아져 나오며 검은 용을 향해 마주 쇄도했다. 그것은 이내 황금의 독수리 같은 형상을 취했다.
이내 검은 용과 황금의 독수리가 한 공간에서 충돌하며 뒤엉키기 시작했다.
그 순간.
세상이 침묵했다.
정확히는 상상을 초월한 두 거력이 소리조차 집어삼키며 맹렬한 기세로 서로를 파괴한 것이다.
하나 끝날 것 같지 않던 힘 싸움은 이내 검은 용이 독수리의 빛을 집어삼키는 것으로 끝을 고했다.
“아아…….”
엘도라드는 기세를 잃지 않고 달려드는 검은 용을 향해 두 팔을 벌려 패배를 받아들였다.
콰우우우우우우!
그렇게 검은 용은 자비 없이 엘도라드를 집어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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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신이 돌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