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4.
윤수호는 미간을 찌푸렸다. 당최 메시지의 내용이 이해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눈앞의 몬스터에게서 보상을 획득하라니……. 놈들이 착용하고 있는 장비라도 벗겨서 가져가라는 말인가?
그러나 이 공간을 만든 존재가 쓸데없는 안내문을 준비했다고는 생각하기 어려웠다. 하여 그는 일단 속는 셈 치고 죽은 고블린을 향해서 손을 가져갔다.
그러자…….
“이, 이게 무슨…….”
윤수호가 당황했다. 어지간해서는 눈도 깜짝하지 않는 그가 이번에는 제법 크게 당황한 것이다.
그럴 수밖에.
앞서 얘기했듯, 이전에 무림에서 서역으로 건너갔을 때도 고블린 따위의 몬스터는 숱하게 마주쳐 사냥한 적이 있었다.
하지만 그때도 이런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손을 가져갔더니 대뜸 고블린의 ‘소지품 창’이 뜬 것은 말이다.
소지품 창에는 녀석이 가지고 있는 아이템 목록들이 아이콘으로 표시되어 있었다.
강화 고블린들은 착용하고 있는 장비에 걸맞게 습득할 수 있는 소지품도 다종다양했다. 녀석들이 입고 있는 장비부터 시작해서 무기와 독침, 심지어 포션까지…….
윤수호는 시험 삼아 ‘마나 포션(소)’를 클릭해 보았다.
그러자 놀랍게도 아이콘이 사라지라면서 푸른 액체가 담긴 유리병이 생성되는 것이 아니겠는가?
[습득한 아이템을 확인하고 싶으시다면 아이템 확인을, 습득한 아이템을 보관하고 싶으시다면 소지품 창 명령어를 활성화해 주십시오.]
“아이템 확인.”
*마나 포션(소)
[소량의 마나를 농축해서 보관한 포션. 약간의 마나를 회복시켜 준다.]
“소지품 창.”
소지품 창 명령어를 활성화하자, 그의 눈앞에 소지품 창이 생성되었다.
소지품 창은 마치 게임의 그것처럼 칸이 4×4로 딱딱 나뉘어 있는데, 그가 들고 있던 포션을 소지품 창에 넣자 거짓말처럼 해당 칸에 아이템이 등록되었다.
‘정말 게임 속으로 들어온 기분이군.’
물론 정말 게임 속으로 들어온 건 아닐 터였다.
다만 이 상황은 현실이고, 이런 일을 의도한 초월자의 안배에는 분명히 그만한 이유가 있을 터였다.
‘만약 같은 존재의 소행이라고 한다면, 처음에는 재앙종의 출현, 이후에는 이런 게임 같은 상황까지……. 대체 그자의 목적은 뭐지?’
지금 당장 알 수 있는 것은 없었다.
오히려 이런 상황이 우주 법칙의 이변이 아니라 어떤 초월적인 존재의 소행이라는 것을 알아낸 것만 하더라도 큰 수확이라 할 수 있었다. 이런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은 현재로선 윤수호가 유일할 테니까.
생각을 정리한 그는 다시 소지품 창에 들어 있던 포션을 클릭하였다. 그러자 소지품 창에 들어 있던 포션이 이번에도 윤수호의 손바닥 위에 생성되었다.
화르륵.
윤수호는 일부러 삼매진화를 일으켜 내공을 소모해 보았다.
바깥이었으면 이 정도 삼매진화로 소모되는 내공은 티도 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는 미미하긴 해도 내공이 소모되었으며, 가장 큰 문제는 소모된 내공을 자연적으로 회복할 수 없다는 사실이었다.
퐁.
그런 상황에서 윤수호는 포션의 뚜껑을 열어 단숨에 마나 포션을 비웠다.
그러자 소모된 내공이 순식간에 회복되었다.
‘여기서는 이런 방식으로 내공이나 오러를 회복할 수밖에 없다는 뜻이군.’
윤수호는 쓸만해 보이는 몇 가지 아이템들을 더 챙겨 이동했다.
팟!
빠르게 몸을 날려 숲을 가로지르는 윤수호.
그런데…….
‘이런 식으로 되어 있단 말이지.’
일정 거리 이상 질주하자, 윤수호의 눈앞에 거대한 회색빛 운무가 나타나 길을 가로막았다. 이곳이 모습을 드러내기 전, 주변에 가득했단 바로 그 운무였다.
윤수호는 운무 너머로 손을 집어넣었다.
마치 안개에 손을 집어넣는 것처럼 잡히는 것은 없었다. 다리를 뻗어 땅을 디뎌 보려 했지만, 손과 마찬가지로 절벽인 것인 양 밟히는 것도 없었다.
머리를 집어넣어 안력을 최대한 강화했으나, 보이는 것은 끝없이 펼쳐진 회색빛 운무뿐…….
‘즉, 특정 조건을 만족시키지 않으면 이 공간을 벗어날 방법은 없다는 건가.’
이 공간이 현대인에게 익숙한 게임을 모티브로 만든 특수한 공간이라면, 해결 방법 역시 어느 정도는 예상이 되었다.
이 공간의 정체를 어느 정도 파악한 윤수호는 다시 걸음을 돌려 숲 안쪽으로 향했다.
키이익!
숲 안쪽으로 들어갈수록 모습을 드러내는 고블린들의 수준도 굉장히 높아졌다.
고블린의 숲이라는 명칭답게 등장하는 몬스터들은 고블린뿐이지만, 그 강함은 고블린 따위와 비교가 불가능했다.
‘이건…….’
윤수호는 숲 안쪽에서 이 던전의 진짜 위험을 발견할 수 있었다.
고블린 마을 앞에 집결한 수많은 고블린.
고블린 보병대 1천, 고블린 궁수 300, 고블린 암살자 100, 고블린 기사 50에 이르는 엄청난 대군이 출전 준비를 마친 채 윤수호를 기다리고 있었다.
뿌우우우우!
고블린 나팔수가 출전의 뿔나팔을 불자 고블린 대군이 빠른 속도로 진군을 개시했다. 목적은 숲을 침범한 적의 완전 섬멸.
키이익!
케케케케!
인간의 피를 마시고 살점을 뜯을 생각에, 고블린들의 흉성이 벌써부터 미쳐 날뛰었다.
그런 녀석들의 눈앞에 윤수호가 모습을 드러냈다.
“인간이다!”
“도망치기 전에 잡아!”
녀석들은 자신들만의 언어로 소리치며 발광했다.
인간의 고기를 먹게 될 생각에 흥분한 녀석들은, 떡하니 제 발로 나타난 먹이를 놓칠 생각이 추호도 없었던 모양이다.
먼저 보병들이 빠르게 내달려 윤수호를 향해 쇄도했고, 그들의 머리 위로 궁병들이 날린 화살이 날아가 소나기처럼 쏟아져 내렸다.
윤수호는 쏟아져 내리는 화살들을 올려다보았다. 화살촉마다 오러가 맺혀 있어, 상당한 위력이 담겨 있음을 쉽게 짐작할 수 있었다.
하지만!
콰콰콰콰콰콰콰!
폭음을 터트리며 화살이 쏟아진 자리에 윤수호의 모습은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가볍게 땅을 박찼을 뿐이지만 어느새 바람을 앞질러 질주하는 윤수호의 신형은, 마주 오던 보병대의 전열과 맹렬하게 충돌했다.
그 결과는 처참했다.
콰아아아앙!
엄청난 폭음과 함께 조각난 고블린들의 육신이 사방으로 흩날렸다.
녀석들은 오러로 몸과 장비를 보호했지만, 아무런 강화도 되지 않은 설은 그런 고블린들의 육체를 무참히 찢어발겼다.
촤촤촤촤!
고블린들은 윤수호를 포위하고 한꺼번에 달려들었지만 허사였다.
그는 고블린들 사이를 자유롭게 누볐다. 그의 검이 부드럽게 곡선을 그릴 때마다 수십 마리의 고블린들이 비명을 지르며 몸뚱이가 잘려 나갔다.
검으로도, 방패로도, 갑주로도 윤수호의 검을 막을 수 없다. 반대로 자신들이 전력을 다해 덤벼들어도 윤수호의 그림자조차 쫓을 수 없었다.
‘확실히 내공을 제한당하는 건 상당히 불편한 페널티다.’
현재도 윤수호는 눈으로 좇을 수조차 없는 스피드로 종횡무진 전장을 누비며, 엘리트 고블린 보병대를 그야말로 도륙하고 있었다.
검풍이 휘몰아칠 때마다 수십 마리의 고블린들이 오체가 분리된 채 허공을 유영했다. 쏟아지는 화살들을 검으로 쓸어 담아 휘두르면, 날아오던 것보다 몇 배는 더 강해진 위력으로 주인에게 돌아와 목숨을 앗아갔다.
굳이 내공을 사용할 필요도 없었다.
윤수호가 가진 검술, 그리고 그의 육체 능력만으로도 고블린 보병대 1천 마리가 쓸려나가는 건 그야말로 순식간이었기 때문이다.
끼이익!
“서둘러!”
“다 됐다!”
그 순간, 윤수호의 눈에 저 멀리서 낑낑거리고 있는 고블린 궁수 열댓 마리의 모습이 보였다.
녀석들이 낑낑거리며 당기고 있던 것은 거대한 석궁이었다.
파지직, 파직!
놈들은 석궁에 장전된 볼트에 자신들의 모든 오러를 압축시켰다. 그 탓에 과충전된 볼트의 촉이 붉게 빛나며, 흘러넘치는 에너지를 방류하고 있었다.
“쏴라!”
콰아아앙!
석궁은 포탄 터지는 소리와 함께 볼트를 사출했고, 볼트는 직선상에 있는 고블린들을 순식간에 녹이며 공간을 관통하였다.
거기에 대응하여 윤수호가 한 일은 약간의 내공을 담아 단순히 검을 휘두른 것뿐이었다.
단지 그뿐이었는데…….
콰콰콰콰콰콰콰!
검 끝에서 발출된 폭풍 같은 기세의 검풍이 고블린들을 찢어발기며 정면으로 쇄도하였다.
검풍은 순식간에 마주 오는 볼트와 충돌했고, 놀라우리만큼 조용하고 완벽하게 볼트를 씹어 삼키며 가속했다.
결국 볼트를 사출했던 석궁과 함께 고블린 궁수 열 마리의 운명도 무참히 박살 나고 말았다.
이처럼 윤수호는 검에 살짝 내공을 싣는 것만으로도 압도적인 위용을 보여 줄 수 있었다.
이는 내공의 운용 방식이 다른 무인들과 차원이 다르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심지어 보충되지 않는다고 해도, 그가 가지고 있는 내공의 양은 그야말로 대해와 같았다.
휘몰아치는 검풍에 윤수호 자신도 폭풍이 되어 전장을 질타하자, 그 무자비한 학살에 결국 뒤에서 대기하고 있던 고블린 기사들이 참지 못하고 진군했다.
파앗!
놈들의 움직임이 예사롭지 않았다.
민첩함은 암살자와 비슷했으며, 기세는 보병대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무엇보다 놈들의 검에 맺힌 오러는 의심할 여지가 없는 최상급 오러였다.
즉, 놈들의 강함은 하나하나가 알터 최상급에 비견된다는 뜻이었다.
그런 녀석들의 숫자가 무려 50이다. 섬멸부대 대여섯 개 팀 정도는 그야말로 쌈 싸 먹을 정도의 전력이라는 뜻이었다.
물론 다른 이들에게는 재앙과도 같은 전력이지만, 윤수호에게는 단지 그뿐이었다.
콰아아앙!
윤수호의 일검에, 알터 최상급에 근접하는 고블린 기사들 다섯 마리의 목숨이 허무하게 사라졌다.
아마 뭉쳐서 덤벼들었다면 일거에 쓸어버릴 수도 있었겠지만, 놈들은 영악하게도 보병들이 어떻게 당하는지 뒤에서 충분히 지켜보았다.
고블린 기사들은 함부로 윤수호에게 접근하지 않고, 병사들을 이용하여 그의 약점이 노출되도록 유도하였다.
하지만 의미 없었다.
윤수호가 검을 휘두를 때마다 병사들과 함께 기사들의 목숨 또한 덧없이 사라졌다.
콰콰콰콰쾅!
자신들의 오러를 믿고 달려든 고블린 기사들은 갑주와 함께 전신이 찢겨 날아갔다.
검이 지나간 궤적을 따라 꼬리를 물듯 쫓아오는 검풍이 광풍을 일으키며, 범위에 걸리는 것은 닥치는 대로 찢어발겼다.
순식간에 자욱해진 먼지구름 아래로 고블린들의 처참한 시신이 빠르게 늘어갈 뿐이었다.
키에에엑!
병사들이 아무리 노력한다고 해서 약점 따위 노출될 리도 없었다.
결국 빠르게 죽어가는 병사들의 모습에 압박감을 느낀 고블린 기사들이 먼저 달려들어 갈려 나갔다.
그렇게 고블린 무리가 떼죽음을 당하고 주변이 정적을 되찾자, 변화가 일어났다.
단단히 잠겨 있던 목책이 저절로 열린 것이다.
‘안으로 들어오라는 건가?’
쉭!
윤수호는 검에 묻은 피를 털어 내고는, 열린 목책을 통해 고블린 마을로 입장하였다.
고블린 마을 한가운데에 자리한 넓디넓은 공터.
그곳에서 윤수호를 기다리고 있었던 건 다름 아닌…….
‘황금 고블린?’
황금빛 갑주와 황금빛 방패, 그리고 황금의 검을 지닌 황금 고블린이었다.
[보스 몬스터, 황금 고블린 엘도라드가 등장했습니다.]
검신이 돌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