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3.
“대체 저건 뭐지?”
“그러고 보니 재앙종이 더 이상 나타나지 않는 거 같습니다.”
“어? 그러네!”
마법진 한가운데에 균열이 발생하고 나서부터는 더 이상 재앙종이 출현하지 않았다.
그러나 숨돌릴 틈도 없이 의문은 여전했다.
“대체 이 마법진은 뭐고, 저 균열은 또 뭐야? 게다가 갑자기 재앙종이 뚝 끊긴 이유는 또 뭔데? 아, 진짜 답답해 미치겠네!”
소리치는 오수영을 뒤로하고 윤수호가 저벅저벅 균열로 다가가자, 깜짝 놀란 공승환이 외쳤다.
“위원장님!”
“여러분은 여기서 쉬면서 대기하고 계십쇼. 이다음부터는 제가 나설 문제인 것 같으니까요.”
“예? 그게 무슨……. 위원장님은 저게 무엇인지 혹시 알고 계십니까?”
공승환의 질문에 다른 치우팀 대원들도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윤수호에게 집중하였다.
그에 윤수호는 고개를 저었다.
“저도 자세히는 모릅니다. 다만 제가 알아낸 건, 저 안에 들어가서 뭔가를 해결하지 않으면 머지않아 더 큰 재앙이 시작된다는 것뿐이죠.”
“그걸 대체 어디서…….”
윤수호는 대답 대신 손가락으로 아래를 가리켰다. 정확히는 그가 밟고 있는 마법진을 가리킨 것이었다.
“여기에 그렇게 적혀 있더군요.”
“예?”
놀란 공승환은 서둘러 마법진을 향해 다가갔다. 그러자 마법진의 외곽 띠를 두르는 다양한 문자들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눈치챌 수 있었다.
‘영어도, 라틴어도, 불어도 아니다.’
심지어 그걸 찍어서 번역기를 돌려 보았지만, 어떤 언어로도 번역조차 되지 않는 미지의 언어였다.
“이 글자를 읽으셨다는 말씀이십니까?”
“그래서 저도 적잖이 놀라는 중입니다. 설마 ‘그곳’에서도 실전되었다고 알려진 문자를 여기서 보게 될 줄은 상상도 못 했으니까요.”
“그곳이라면 대체…….”
“자세한 얘기는 다녀와서 하도록 하죠. 지금은 시간이 촉박한 것 같으니. 다들 마법진 밖으로 물러나 주시겠습니까?”
“설마 위원장님 혼자 가시겠다는 겁니까? 너무 위험합니다! 저 너머가 어딘지도 모르는데…….”
분명 자신들의 힘은 윤수호에 비하면 미약하기 그지없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도 윤수호를 혼자 보낼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윤수호의 존재는 이제 이 나라의 희망이자 등불이다. 아무것도 알 수 없는 미지의 영역으로 혼자 보냈다가 영영 돌아오지 못한다면 그 손실은 이루 헤아릴 수도 없을 터였다.
“아마 크게 걱정할 필요는 없을 것 같습니다. 아무래도 이 빌어먹을 짓을 계획한 존재는 출구 없는 미로만큼 재미없는 것도 없다고 생각하는 모양이니까요.”
“예? 그게 무슨…….”
후웅!
“꺄악!”
“윽!”
그 순간, 윤수호의 주변으로 거센 돌풍이 불면서 사람들을 전원 마법진 밖으로 밀어냈다.
“그럼 다녀오도록 하죠. 이곳을 잘 부탁드립니다, 팀장님.”
“위원장님!”
윤수호는 망설임 없이 혼자서 균열로 뛰어들었다.
균열 너머에 무엇이 도사리고 있는지 모르는 만큼 변수는 적으면 적을수록 좋았다. 그래서 위험을 무릅쓰고 혼자서 뛰어든 것이다.
그가 균열 속으로 사라짐과 동시에 균열도 자취를 감추었다.
“마법진은 그대로 남아 있는데, 재앙종은 소환되지 않는 모양인데?”
“대체 이게 무슨 일인지…….”
“진짜 종말이라도 찾아오려나? 하아…….”
“종말쯤이야 이미 시작된 지 오래거든?”
답답한 마음을 풀 길 없는 사람들의 짜증만 깊어져 갔다.
그러나 윤수호가 이렇게까지 서둘러 혼자 갔다면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잡담은 그쯤하고, 우리도 움직이자. 지금 당장은 이 주변에 임시 주둔지를 설치하고 경계 근무를 철저히 서는 수밖에. 전원 위치로.”
“무적!”
치우팀이 공승환의 명령에 따라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 * *
한편, 균열 너머로 몸을 던진 윤수호는 지금 생각을 정리 중이었다.
‘내가 마법진에서 봤던 문자……. 그건 분명 서역에서도 실전되었다고 알려진 고대의 언어 마르갈이다.’
룬 문자의 기초가 되었다고 전해지는 마르갈 문자는 신들의 문자라고 한다.
찬란했던 신들의 시대가 끝나고, 신들의 문자인 마르갈 역시 서서히 역사 속에서 잊혀 가던 것을 윤수호가 우연히 접했던 것이다.
처음에는 집으로 돌아갈 방법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하여 열심히 습득했지만, 이내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너무 많은 문자가 소실되기도 했고, 그 문자를 연구하던 학자들 역시 극히 소수에 불과했기 때문이었다.
마법진에는 수많은 마르갈 언어가 쓰여 있었지만, 그중 윤수호가 알아본 문장은 세 가지였다.
[첫 번째 시련을 통과한 필멸자들이여. 혼탁의 문을 지나 두 번째 시련에 도전하라!]
[신들의 다과가 끝날 때까지 두 번째 시련에 임하지 않을 경우, 재앙은 두려움을 키워 또다시 시작되리라.]
[나약한 존재들이여. 파멸로 뛰어들어 찬란한 영광을 쟁취하라! 우리는 그 모습을 기뻐 살필 것이니.]
여기서 각 문장을 해석하자면, 첫 번째 시련이란 마법진에서 끝도 없이 쏟아져 나오던 재앙종을 일컫는 말일 것이다. 혼탁의 문이란 쏟아지는 재앙종을 뚫고 마법진까지 도착한 자들에게 열리는 균열의 이름일 테고.
‘내가 알기로 신들의 다과가 끝날 때까지는 대략 30분 정도다. 여기서 두 번째 시련에 임하지 않을 경우 재앙이 두려움을 키운다는 건, 첫 번째 시련보다 더 힘든 재앙이 시작된다는 의미겠지.’
문제는 마지막 문장이었다.
‘우리라는 건 어떤 존재들인 거지? 어쩌면 재앙종의 출현과도 관련이 있는 자들인가? 아니면 전혀 별개의 존재들인가…….’
나약한 존재, 필멸자들은 그들이 인간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파멸로 뛰어들어 찬란한 영광을 쟁취하라는 건 그들의 강제적인 요구였고.
‘즉, 그 존재들은 어딘가에 숨어서 이 상황을 지켜보고 있다는 뜻이겠지.’
마치 게임판의 말이 된 것 같아, 윤수호는 가슴 속 밑바닥에서 차오르는 혐오감과 분노를 참기 어려웠다. 그래서 그때 공승환과 대원들의 질문에 대답할 수 없었던 것이다.
어쩌면 너희는 누군가가 만들어 놓은 게임 판의 장기 말일 수도 있다는 것을 어찌 말할 수 있을까.
하루를, 한순간을 누구보다 필사적으로 살아가는 그들에게 그것보다 심한 절망과 모욕은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렇듯 윤수호가 생각을 정리하면서 고민할 수 있었던 것은, 균열에 들어선 이후 맞닥뜨린 주변 환경 때문이었다.
회색빛 기분 나쁜 운무가 윤수호의 주변에 가득했다. 바닥 역시 발을 딛고 있는 것인지, 허공에 둥둥 떠 있는 것인지 구분할 수가 없었다. 마치 다른 공간에 갇혀 있는 것처럼.
하나 이게 끝은 아닐 것이다.
이 정도로 악질적인 장난을 준비한 존재가, 고작 이런 허무한 결말을 기대하고 이런 함정을 준비하지는 않았을 테니까.
아니나 다를까.
게임의 로딩이 끝난 것처럼, 일정 시간이 지나자 운무가 걷히며 주변이 환경이 완전히 달라졌다. 다리 역시 제대로 땅을 딛고 있는 감각이 느껴졌다.
윤수호는 곧바로 주변을 살폈다.
‘여긴…….’
지금 그가 서 있는 곳은 숲이었다.
우거진 녹음 사이로 기분 좋은 바람이 청량하게 불어왔다. 신선한 바람이었다.
그런데 이상했다. 신선한 바람에 응당 내포되어 있어야 할 무언가가 단 한 톨도 느껴지지 않았던 탓이다.
자연지기(自然之氣).
만물의 탄생과 동시에 세상 어디에나 존재하는 자연의 기운이 이 녹음의 숲에서는 전혀 느껴지지 않았던 것이다.
아니, 자연지기뿐만이 아니었다.
마기(魔氣)도, 사기(邪氣)도, 그 무엇 하나 느껴지지 않았다.
윤수호는 자연지기를 뜻대로 다루는 천지인의 경지를 넘어, 마기와 사기의 구분 없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기운을 받아들일 수 있는 ‘천웅의 경지’에 이른 무인이다.
그런 윤수호가 이 공간에서는 단 한 톨의 기운도 느낄 수 없었으니, 사실상 눈앞의 나무와 풀들은 무대의 장식이나 다를 바 없다는 뜻이었다.
‘즉, 지금 내가 가지고 있는 내공만으로 이곳을 헤쳐 나가야 한다는 뜻이군.’
그때였다.
[고블린의 숲에 입장하셨습니다.]
눈앞에 떠오르는 반투명한 메시지.
정말로 가상현실 게임에라도 들어온 것일까?
마법진의 문자는 마르갈 문자로 적혀 있었는데, 눈앞에 떠오른 메시지는 한글로 번역되어 명확하게 목표를 설정해 주었다.
메시지는 윤수호가 내용을 파악하자 한순간에 사라졌다.
그는 걸음을 옮겨 주변을 좀 더 살펴보았다.
발바닥에 와닿는 흙의 촉감, 풀의 냄새, 나무의 흔들림, 바람 소리 모두 현실과 전혀 다르지 않았다.
생기가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는 것만 제외하면.
그 순간!
파앗!
수풀 속에 숨어 있던 무언가가 몸을 날려 윤수호를 습격했다. 섬전처럼 빠르고, 그림자처럼 은밀한 일격이었다.
무림의 살수 중에서도 절정 고수급의 기습에 윤수호가 반사적으로 검을 뽑아 기습을 막아 냈다.
캉!
윤수호가 ‘설(雪)’이라고 이름 붙인, 8급 재앙종의 갈비뼈로 만든 검은 너무나도 간단하게 녀석의 칼날을 부수고 나아가 놈의 몸통까지 단번에 베어 버렸다.
그런데 윤수호는 반으로 갈라져 쓰러진 기습자를 확인하고는 적잖이 놀랄 수밖에 없었다.
“고블린?”
기습자의 정체는 다름 아닌 고블린이었다.
아니, 외형은 고블린이라고 해야 맞는 말일까?
고블린은 몬스터 중에서도 최약체에 속하는 몬스터다. 거짓말 조금 보태서 훈련만 받으면 평범한 열 살짜리 어린애도 한 마리 정도는 사냥할 만큼 약한 것이다.
윤수호도 서역을 여행하면서 고블린이라는 몬스터를 질리도록 만났는데, 전투력은 어느 지역이건 거의 다 비슷했다.
그런데 눈앞의 고블린은 달랐다. 착용한 장비도 일반 고블린보다 훨씬 뛰어나고, 강함은 그야말로 차원이 달랐다.
윤수호가 죽은 녀석을 살펴보는 사이, 어느새 주변으로 수많은 기척이 몰려들었다.
동료의 비명을 듣고 찾아온 고블린 무리였다.
놈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어지간한 고수도 놈들의 접근을 알아차리기가 쉽지 않을 만큼 놈들의 행동은 은밀하고 신속했다.
파파파파파팟!
이윽고 윤수호의 주변을 촘촘히 포위한 놈들이 동시에 그를 습격했다. 전후좌우 도망칠 공간을 남기지 않고 달려드는 놈들의 단검에는 놀랍게도 오러가 맺혀 있었다.
하지만 상대는 윤수호였다.
촤악! 서걱! 스핏! 푸화학!
비록 축기가 불가능해서 내공을 아껴 써야 한다는 페널티가 있지만, 그런 건 아무런 장애도 되지 못했다.
윤수호는 놈들의 움직임을 읽고 한발 앞서 움직였다. 고블린들의 단검은 항상 한 박자 늦게 그의 움직임을 따라갈 수밖에 없었다.
그 사이, 윤수호의 검이 춤을 추었다.
내공의 도움 없이도 윤수호의 육체는 이미 초월자로서 완벽하게 완성된 상태였다. 남들에게는 무척이나 무거운 검도 그에게는 공깃돌이나 다름없으며, 맨몸으로도 바람보다 빠르고 벼락보다 강하게 고블린들을 압도할 수 있다.
게다가 설 역시 평범한 검이 아니기에, 내공은 한 톨도 쓰지 않았음에도 강화 고블린들을 처리하는 건 그리 큰 문제가 아니었다.
윤수호는 죽은 고블린들을 살펴보았다.
확실했다. 놈들은 재앙종이 아닌 몬스터였다. 그것도 자신이 잘 알고 있는 서역의 몬스터들 말이다.
그 순간, 이상한 메시지가 또다시 윤수호의 눈앞에 나타났다.
[쓰러트린 적에게서 보상을 획득하십시오.]
‘뭐? 보상?’
검신이 돌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