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9.
“…….”
임수현이 조용히 눈을 떴다.
시간은 새벽. 병원에 입원한 환자들도 모두 잠든 깊은 시각. 은은한 오렌지빛의 조명등만이 병실 안을 힘겹게 밝히고 있었다.
‘내가 왜 여기에…….’
마지막으로 기억나는 건 자신을 내려다보던 여자애들의 끔찍한 조롱과 고통이었다.
결국 그렇게 죽는가 싶어서 마음 한쪽으로 안심하고 있었는데, 왜 자신이 병실에 누워 있는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그러나 그 이유를 유추해내는 건 어렵지 않았다.
‘얘는…….’
자신이 누워 있는 침대에 기대어 깊은 잠이 든 여자애의 얼굴이 익숙했다.
학교에서 한 번밖에 만난 적 없지만, 그 한 번이 워낙 임팩트가 깊었기에 잊을 수 없는 녀석이기도 했다.
“으응…….”
은지연은 임수현이 뒤척이는 기척에 졸린 눈을 비비며 일어났다.
“뭐야, 정신이 들었어? 몸은 좀 어때?”
은지연은 임수현이 정신을 차린 걸 확인하고는 그녀의 상태를 물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임수현은 자리에서 억지로 몸을 일으키려 무던히도 노력하고 있었다.
“하아…….”
은지연은 그런 임수현의 모습에,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의 두 어깨를 양손으로 꽉 쥐고 그대로 침대에 눌러 붙였다.
“저기…… 이것 좀 놔줄래?”
“지랄 말고 가만히 있겠다고 약속하면.”
그러자 임수현은 주변을 둘러보더니 나직하게 대꾸했다.
“나한테 이런 고급 병실에서 하루라도 지낼 돈이 있다고 생각해?”
“너한테 돈 달라고 할 생각이었으면 애초에 병원으로 오지도 않았네요. 병원비는 걱정 마시고 너는 그냥 회복하는 데에만 집중하세요. 아셨죠?”
“…….”
이런 몸으로는 도저히 은지연을 뿌리칠 수 없을 거라 생각한 임수현이 결국 반항을 포기했다.
아니, 급식실에서 날아다니던 그녀의 모습을 보면 몸이 정상이었어도 그녀를 당해 낼 거란 생각은 들지 않았다.
하지만 그럴수록 더욱 깊어지는 의문이 있었다.
“목적이 뭐야?”
“목적?”
“나한테 이러는 이유가 뭐냐고. 너, 그때 학교에서 나랑 처음 본 거잖아. 그렇다고 내가 너한테 살갑게 대한 것도 아니고. 그런데 왜 이렇게까지 하냐고.”
“우리 친구는 고맙다는 말을 매우 띠껍게 하는 재주가 있구나? 너, 그 성격 안 고치면 진짜 평생 가도 친구 한 명 사귀기 힘들다? 소설이나 웹툰에서 너 같은 녀석이 등장인물로 나오면 발암캐라고 사람들이 욕 뒈지게 하는 거 알지?”
은지연이 웃으며 조곤조곤 맥이자, 임수현은 입을 다물고 고개를 돌렸다.
그 모습에 은지연은 피식 실소를 터트리며 말을 이었다.
“네가 병실에 누워 있는 동안, 너에 대해서 좀 여러 가지를 알아봤어. 그래서 나도 알아. 네가 누군가의 호의를 호의로 받아들일 수 없는 환경에서 자라 왔다는 거. 그리고 내가 평생을 살아도 이해하지 못할 아픔을 겪었다는 사실도.”
“그래서 동정한 거야? 내가 불쌍한 년이라?”
“너, 지금 번데기 앞에서 주름잡니? 불쌍한 년으로 따지면 나도 어디 가서 꿇리지 않거든?”
그러면서 은지연은 자연스럽게 자신의 어린 시절 이야기를 담담히 꺼내기 시작했다.
임수현은 처음 듣는 은지연의 이야기를 그저 말없이 들어 주었다. 듣다 보니 믿지 못할 충격적인 내용투성이였지만, 신기하게도 거짓말 같다거나 의심이 들지는 않았다.
그건 은지연의 말과 표정에 자연스럽게 녹아 있는, 지난날의 아픔과 감정들 때문일 터였다.
“그렇게 삼촌을 만나고, 난 또 다른 인생을 얻게 됐어. 하지만 난 삼촌이 나와 지한이를 동정심 때문에 구해 줬다고 생각하지 않아. 가족이니까. 한 핏줄로 이어진 소중한 가족이라서 그랬다고 생각해. 가족이 가족을 구하는 데 이유가 필요한 건 아니잖아. 안 그래?”
“그럼 나는 뭔데? 나는 가족도 아닌데…….”
“너, 삼문고등학교 1학년 5반 아니야? 나도 그런데. 그럼 같은 반 친구네? 친구가 친구를 돕는데 이유가 필요한가?”
“…….”
그게 무슨 어처구니없는 대답이냐고 표정으로 물어보는 임수현에게, 은지연은 미소를 머금고 대답했다.
“딱히 네가 특별해서가 아니야. 너 아닌 다른 누구라도 친구가 위험하거나 힘든 상황이라면 난 최선을 다해 그 친구를 도왔을 거야. 그게 네가 말하는 쓸데없는 오지랖이라고 해도. 거봐. 너도 그 쓸데없는 오지랖 덕분에 지금 여기 있는 거잖아. 안 그래?”
“딱히 살고 싶다고 생각하진 않았어.”
“하지만 그게 죽을 이유는 아니야. 그저 살고 싶은 이유를 찾지 못한 거지. 그건 나도 누구보다 잘 알고 있거든.”
하지만 이내 씁쓸한 미소를 머금은 은지연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다. 너와 난 달라. 나는 내 동생이라는 살아가야 할 이유가 있었지만, 너는 살아가야 할 유일한 이유가 없어진 거나 다름없으니까. 네 상실감을 내가 이해하고 위로하는 건 불가능하겠지.”
은지연은 자신을 빤히 바라보는 임수현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맹세했다.
“그러니까 같이 찾아 줄게. 널 구해 준 책임이 있으니까. 네가 살아갈 이유를 찾을 때까지 내가 네 옆에 있어 줄게. 만약 끝끝내 그 이유를 찾지 못하겠으면, 그땐…….”
“그땐? 그땐 뭘 어떻게 할 건데?”
“뭘 어떻게 하긴? 더 열심히 찾아봐야지.”
씨익 웃어 보이는 은지연의 미소가 허탈했던 것일까?
임수현은 피식 웃으며 핀잔을 주었다.
“뭐야, 그게.”
“어? 너, 지금 웃은 거 맞지?”
“안 웃었거든?”
“웃은 거 맞잖아. 한 번만 더 보여 주라. 딱히 귀여워서 그런 건 아니고. 이번엔 제대로 찍을 테니까 딱 한 번만!”
“웃기지 마. 사진까지 찍으려고? 너, 진짜 미쳤어?”
그렇게 두 친구가 점차 마음의 벽을 허물어가면서 가까워지는 동안, 병실 밖에서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있던 윤수호가 입가에 미소를 띠며 조용히 사라졌다.
그가 다시 나타난 곳은 병원 옥상에 마련된 정원 벤치였다. 그곳에는 은지한이 뭔가 걱정하는 표정으로 앉아 있었다.
“수현이 누나는 깨어났어요?”
“그래.”
“고생 많으셨어요, 삼촌. 항상 틈날 때마다 와서 누나를 돌봐 주셨잖아요.”
은지한의 말처럼 윤수호는 여유가 생길 때마다 틈틈이 임수현을 찾아와 기공 치료로 그녀의 회복을 도와주었다.
“나보다는 지연이가 정말로 고생이 많았지. 학교에 있는 시간 말고는 거의 집도 들어오지 않고 병원에서 지내다시피 했으니까. 그리고 수현이의 외상은 굳이 내가 손을 쓰지 않았더라도 충분히 회복할 수 있었어. 내가 정말로 걱정하는 건 임수현의 외상이 아니라 그 아이가 입었을 마음의 상처지.”
“…….”
현장을 직접 확인했던 은지한이었기에 더더욱 공감될 수밖에 없는 말이었다.
그런데…….
“하지만 큰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되겠더군.”
“네? 그게 무슨…….”
“본래 사람한테 입은 상처는 사람으로 고치는 법이거든. 지연이라면 수현이에게 최고의 친구이자 의사이자 약이 될 수 있을 거다. 그러니까…….”
윤수호는 은지한의 머리를 가볍게 헝클어트리며 피식 미소를 그렸다.
“이제 너도 그만 누나하고 화해해. 보는 내가 답답해 죽을 것 같으니까.”
“따, 딱히 누나랑 싸운 적도 없고, 어색하지도 않은데요?”
“너만 그렇게 생각하는 거겠지. 너, 집에서 초조해하는 모습을 볼 때마다 가족이 얼마나 걱정하는지 알고는 있냐?”
“가족요? 정말요?”
“그게 바로 가족의 표정이 보이지도 않을 정도로 누나와의 관계를 신경 쓰고 있다는 뜻이다, 이 녀석아.”
윤수호는 웃으며 은지한의 뺨을 가볍게 꼬집어 주었다.
다음 날.
“미안, 누나.”
학교에 도착한 은지한은 곧바로 5반을 찾아가 은지연에게 다짜고짜 고개를 숙였다.
“응? 갑자기 나타나서 대뜸 이게 뭔 짓이냐, 은지한?”
친구들의 시선이 자신들에게 쏠리자 당황과 창피함에 얼굴이 빨갛게 물든 은지연이 정색했다.
그러자 은지한이 당황하며 손사래를 쳤다.
“그, 그게, 저번에 누나한테 심하게 한 소리 했던 거 말이야. 생각해 보니까 말이 너무 심했던 거 아닌가 싶어서 사과하려고…….”
“아니, 그거야 네가 백번 천번 옳은 말 한 거라 딱히 사과할 필요는 없는데. 너, 설마 그것 때문에 지금까지 나 피해 다닌 거야? 내가 보러 갔을 때도 일부러 숨어 다니고?”
“그, 그랬지, 아마?”
“……너, 일로 와.”
“누, 누나? 우리 표정은 좀 풀고……. 끄아아아악!”
교실 뒤에서 은지연표 새우 꺾기가 작렬하고 은지한의 입에서 끔찍한 비명이 튀어나오자, 그 광경을 지켜보던 학생들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주변 학교까지 소문이 난 은지한을 모두가 괴물이라고 얘기하지만, 역시 1학년 짱은 은지연뿐이라고…….
* * *
-다음 뉴스입니다. 최근 전라남도 유읍면과 경상남도 진홍시에도 각각 6급 몬스터가 출현하여 특무대가 섬멸에 나섰습니다. 예년과 비교해도 유례없는 상위 등급 재해종의 출현 빈도에 국민들의 관심과 걱정이 큽니다. 그런 만큼 정부에서도 이번 현상이 일시적인 현상인지, 아니면 또 다른 재앙의 징조인지 빠른 조사와 특단의 대처가 필요해 보이는데요. 먼저 전문가를 만나 의견 나눠보도록 하겠습니다.
“어휴! 세상 참……. 지금도 이렇게 살기 힘든데, 더 힘들어지면 사람들이 어떻게 버틸까…….”
윤지석은 흉흉한 마음에 뉴스를 끄며 나직하게 한탄했지만, 현실은 현실이었다.
당연히 특무대에서도 이런 상황이 달가울 리가 없었다.
“최근 들어 작년 이맘때와 비교해 4급 이하는 300%, 5급은 120%, 6급조차 80% 이상 출현 빈도가 늘어났다.”
천호진의 말에 각 부대 사령관들의 표정이 심각하게 어두워졌다. 특히 섬멸팀을 총괄하고 있는 이금찬 중장의 표정은 거의 흙빛에 가까웠다.
“문제는 재앙종의 급증이 비단 우리나라만의 문제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자료를 보시죠.”
브리핑을 맡은 김 대위가 스크린에 띄운 세계 지도는 작년과 올해, 두 가지 버전으로 준비되어 있었다.
그런데 작년과 비교해 올해는 전 세계적으로 재앙종의 출현 빈도가 심하게 증가한 것을 쉽게 알 수 있었다.
“4급 이하의 재앙종 출현율이 대폭 증가한 것도 끔찍하지만, 그보다 더욱 끔찍한 사실은 6급 이상의 고위 재앙종 출현율이 매우 높아졌다는 사실입니다.”
“아프리카 같은 경우, 심지어 같은 날 7급 재앙종 두 개체가 동시에 출현하여 우탄 공화국이 궤멸에 가까운 타격을 입기도 했습니다. 비단 우탄만이 아닙니다. 비교적 알터 강대국에 속하는 네덜란드 역시 수도 암스테르담에 7급 재앙종이 출현하는 바람에 국가 비상사태까지 선포됐었고요.”
“네덜란드가 알터 강대국이라 조속한 조치가 가능했던 거지, 만약 알터 특무대원들의 숫자가 적었거나 나타난 재앙종이 8급 이상이었다면…….”
“네덜란드 역시 궤멸에 가까운 타격을 입었겠지요. 심지어 네덜란드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인접국인 벨기에, 독일, 프랑스도 무사하지는 않았을 테니까요.”
계속해서 부정적이고 암울한 얘기들만 오가는 가운데, 천호진이 무겁게 닫혀 있던 입을 열었다.
“재앙종의 출현 증가가 일시적인 현상인지, 아니면 꾸준히 증가할 것인지 예측할 방법은 없는 건가?”
“재앙종의 출현은 매년 꾸준히 조금씩 증가하는 추세지만, 이 정도로 폭발적인 증가 폭을 보인 적은 단 한 번도 없었습니다.”
“하아, 이 현상에 대해 뭐라도 알아야 국민을 안심시키든, 대처를 마련하든 할 게 아닌가? 답답하군, 답답해.”
천호진의 말에 모두가 암묵적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그의 말에 수긍했다.
재앙종의 출현은 인류 모두의 존망을 건 문제다. 이 앞에서 파벌이나 이익 싸움은 무의미했기 때문에, 모든 사람의 걱정과 바람이 하나로 뭉칠 수 있었다.
그러나 이들은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진짜 재앙의 씨앗이 어둠 속에서 조금씩 태동하고 있다는 사실을…….
검신이 돌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