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6.
“왜? 무슨 일 있어?”
한동수가 한쪽 구석에 쓰러져 있는 임수현을 보고 작은 의문성을 터트리자 김상열이 그를 쳐다보았다.
“아니, 못 보던 얼굴이 있어서. 신입?”
“아! 어제 주워 온 년인데, 생각보다 자존심이 세더라고. 얼굴 보니까 돈 좀 벌 수 있을 것 같아서 잔뜩 기대했는데, 아무래도 교육하는 데 시간이 오래 걸릴 거 같다. 왜? 먹고 싶냐?”
“내가 괴물이냐? 멀쩡한 사람이 사람 왜 먹어.”
“븅신 새끼! 너, 앞으로 내 앞에서 농담하지 마라. 뒈진다.”
한동수는 임수현에게 다가가 그녀의 상처를 살폈다.
‘생각보다 상처가 심한데? 하여간 김상열 이 미친 새끼, 도대체 사람을 어떻게 생각하면 이렇게 망가트릴 수 있는 거지?’
한동수는 지금 당장이라도 임수현에게 걱정하지 말라고, 곧 믿을 만한 사람들이 당신을 구하러 올 거라고 얘기해 주고 싶었지만 입을 다물었다.
“나 잠시 화장실 좀 쓴다.”
그렇게 화장실로 들어간 한동수는 문을 잠그고 곧바로 상황실에 문자를 보냈다.
-임수현으로 추정되는 여자애 발견. 심각한 폭행 흔적 확인. 확인 후 구출 바람.
이것으로 한동수의 임무는 끝이었다.
화장실로 들어가 문을 걸어 잠그는 것까지가 특무대에서 가르쳐 준 매뉴얼인데, 만약의 상황에 대비해 한동수가 인질로 잡히거나 위험해질 수 있는 상황을 방지한 것이었다.
‘그래도 바로 발견해서 다행이긴 하네. 설마 이렇게 바로 찾을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는데……. 라면 사고 남은 거스름돈으로 복권 사서 1등에 당첨되면 이런 기분이려나?’
자신이 누군가를 도울 수 있다는 생각에 내심 가슴 한쪽이 뿌듯해진 한동수였다.
* * *
“한동수에게서 연락이 왔습니다. 임수현으로 추정되는 여자애를 발견했다는데요?”
“그게 사실이야?”
“예! 심각한 폭행 흔적을 확인한 상태라고 합니다.”
상황실에서 보고를 접한 박여진의 시선이 윤수호에게 향했다.
그 순간.
“저!”
임수현을 발견했다는 소식에 참지 못하고 벌떡 일어난 사람은 다름 아닌 은지연이었다.
모두의 시선이 자신에게 쏠리자 잠시 움찔했던 은지연은 이내 용기를 가지고 사람들에게 부탁했다.
“민폐가 될지도 모르겠지만, 저도 함께 가도 될까요?”
“뭐? 아무리 그래도 그건 너무…….”
박여진이 은지연을 말리려 하자 윤수호가 손을 들어 그녀를 잠시 제지하고는 은지연에게 시선을 돌렸다.
“이유는?”
“솔직히 저도 잘 모르겠어요. 학교에서도 그저께 처음 만난 사이고, 그 녀석도 저를 친구로 생각하지 않는데……. 그런데도 임수현이 그런 끔찍한 곳에서 고통받고 있다는 얘길 들으니까 너무 화가 나고 짜증이 나요. 물론 삼촌이나 다른 분들이 안 된다고 하시면…….”
“지한아, 누나를 부탁한다. 만약의 상황이 발생한다면 네가 누나를 지켜 줘야 하는 거 알지?”
“네, 삼촌.”
윤수호의 지시에 은지한이 고개를 끄덕이자, 옆에서 듣고 있던 은지연이 눈을 부릅떴다.
“삼촌, 그 말씀은……?”
“다녀와라. 네 손으로 친구를 구하고 싶은 거지? 대신 몸조심하고. 위험해질 것 같으면 바로 도망쳐야 한다.”
“네!”
“다녀오겠습니다.”
그렇게 은지연이 달려 나가고, 고개를 꾸벅 숙인 은지한이 누나의 뒤를 쫓았다.
그런 남매의 뒤를 무거운 표정으로 바라보던 박여진이 윤수호를 보며 두 사람을 걱정했다.
“아무리 친구를 자신의 손으로 구하고 싶다 하더라도, 은지연 양은 일반인이에요. 물론 은지한 군이 함께 있다고는 하지만, 자칫 위험한 상황이 발생할 수도 있지 않을까요?”
“내가 두 아이만 보낸 이유는 세 가지야. 하나는 지한이라면 웬만한 돌발 변수에도 충분히 대처가 가능한 녀석이란 거고, 다른 하나는 지연이도 평범한 일반인은 아니라는 거지.”
“마지막 세 번째는요?”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다면 하고 싶은 걸 하는 게 정답이다. 그러니까 하고 싶은 게 있다면 망설이지 말고 해라. 삼촌이 도와줄 테니. 전에 내가 애들한테 해 준 말이거든. 그런데 내가 한 말을 내가 어길 순 없잖아. 안 그런가?”
윤수호의 대답에 박여진은 질렸다는 듯이 피식 웃으며 대꾸했다.
“참, 조카분들이 부럽네요. 그런 동화 같은 일이 가능한 딱 한 명의 초인이 자기들 삼촌인 거잖아요?”
“그 한 명이 자네의 직속상관이기도 하다만?”
“그렇……게 되네요?”
두 사람은 말없이 서로의 얼굴을 보며 피식 웃을 뿐이었다.
* * *
“다시 한번 말해 두지만, 누나의 목표는 수현 누나를 구출해서 빠져나가는 거야. 절대로 이걸 잊지 마.”
“알았어. 한 번만 들으면 귀에 못 박히겠다.”
은지한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알았다고 짜증 부리는 것 치고, 문 앞에 선 은지연은 도통 감정을 주체하기 힘든 것인지 잔뜩 흥분한 상태였기 때문이다.
“그럼 간다.”
“응!”
콰득!
은지한이 굳게 잠긴 반지하 방의 문을 잡아 뜯어 버리자, 요란한 소음에 방에 있던 사람들이 놀라 튀어나왔다.
“뭐야? 무슨 일이야?”
여자애들은 놀라서 숨고, 남자애들은 이런 일이 익숙했는지 반사적으로 야구 배트나 쇠 파이프 같은 연장을 챙겨 문 앞으로 몰려들었다.
“이런 ㅆ……!”
“누나!”
“……!”
그들의 얼굴을 본 순간, 속에서 분노가 폭발한 은지연이 저도 모르게 그들을 향해서 달려들려다 동생의 외침에 멈칫하였다.
“내 말 잊었어?”
“알고 있거든!”
짜증 섞인 목소리로 외치면서 꾹 참아 내는 누나의 모습을 보고 피식 웃은 은지한이 먼저 집 안으로 들어섰다.
“뭐야, 이 새끼는?”
“몰라! 그냥 제쳐!”
굳이 그들과 통성명을 나눌 마음이 없었던 은지한은, 가장 앞에 있던 녀석이 배트를 휘두르며 달려들자 가볍게 공격을 흘리며 녀석의 팔을 잡아 부러트렸다.
빠각! 퍼억! 으득! 콰작!
“크악!”
“끄어억!”
“내, 내 팔이……!”
그 녀석뿐만이 아니었다. 은지한은 달려드는 사내 녀석들을 모두 잡아 반병신으로 만들었다.
그러는 사이, 뚫린 입구를 통해서 집으로 뛰어 들어온 은지연이 주변을 빠르게 살피며 외쳤다.
“수현아! 임수현! 너, 어디 있어! 들리면 대답해!”
거실에서는 임수현의 모습을 확인할 수가 없었다.
그 순간 맞은편 방에서 작지 않은 인기척이 느껴지자, 은지연은 곧바로 방문을 열고 들어가려 했다.
하지만…….
철컥철컥.
‘잠겨 있어?’
방문은 굳게 잠겨 있었고, 당연히 가지고 있는 열쇠는 없는 상황.
하지만 열쇠가 없다고 방법까지 없는 건 아니었다.
“후우…….”
호흡을 고른 은지연은 단전에 잠든 마나를 깨워 일주천하더니, 그대로 마나를 두 손에 담아 당하게 내질렀다.
콰앙!
“꺄악!”
“아악!”
은지연의 쌍장에 나무로 만들어진 문이 박살 나며 요란한 여자아이들의 비명이 들렸다.
곧이어 방 안의 광경을 두 눈으로 확인한 은지연이 한껏 굳은 표정으로 싸늘하게 물었다.
“너희들 지금 뭐 하고 있냐?”
은지연은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너무 얻어맞은 탓에 전신에 성한 곳을 찾기 힘든 임수현의 앞에서, 한 무리의 여자애들이 각종 연장이나 오물이 담긴 그릇을 들고 서 있었기 때문이다.
인사불성이 된 채로 정신조차 똑바로 차리지 못하는 임수현의 입가에는 오물 범벅이 되어 있었다.
또한, 은지연과 가장 처음 눈을 마주친 녀석의 손에는 담배가 들려 있었는데, 임수현의 발바닥에 무수한 담뱃불 지진 자국이 선명하게 남아 있었던 것이다.
“너희가……. 진짜 사람이니?”
“뭐래, 쌍×이……!”
커터칼을 가지고 은지연의 눈치를 살피던 여자애가 곧장 임수현에게 달려들었다. 그녀를 인질로 삼아 여길 도망칠 작정이었던 모양이지만…….
퍼억!
“커헉!”
“언니!”
한순간에 거리를 좁힌 은지연이 일장을 내질렀다.
그에 반응도 못 해 보고 아랫배를 얻어맞은 녀석이 벽에 부딪혔다가 바닥에 떨어지고는, 구역질을 하며 먹을 것들을 게워 내기 시작했다.
“이런 미친×이!”
“죽여 버려!”
여자애들은 자신들 사이로 파고든 은지연을 보고 기회다 싶었는지, 가지고 있던 연장을 휘두르며 은지연을 집중 공격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건 잘못된 선택이었다.
“뭐 하니, 너희?”
슥, 콰작!
“커헉!”
공격을 피하며 잡아챈 머리를 바닥에 찍어 버리고…….
휘릭, 우드득!
“꺄아악!”
날카로운 커터 칼을 흘리면서 팔꿈치를 잡아 가볍게 비틀어 꺾었다.
무려 여섯 명이 은지연을 동시에 공격했지만, 되레 그들의 관절이 역으로 꺾이거나 뼈가 부러지면서 병신이 되는 건 그야말로 순식간이었다.
“자, 잘못했어요, 언니! 다신 안 그럴게요! 한 번만 용서해 주세요, 네?”
“그러니까 뭐 하냐고, 너희.”
“네?”
“왜 나한테 용서를 구하는 건데? 너희들이 용서를 빌 사람은 내가 아니잖아. 안 그래?”
턱.
“어, 언니! 잠시만요! 정말로 제가 잘못했으니까! 제발 한 번만……!”
으드득!
“꺄아악!”
무릎이 반대로 꺾이는 끔찍한 고통에 마지막으로 남은 여자애마저 기절해 버리자, 은지연은 그제야 자신의 실수를 자각했다.
“아!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닌데! 수현아, 괜찮…….”
그 순간, 고개를 돌린 은지연의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조금 전까지 뒤에 있던 임수현이 어딜 갔는지 보이질 않았기 때문이다.
그때였다.
“수현이 누나는 내가 방금 구급차에 실어서 병원으로 보냈어. 누나가 그 여자애들을 쓸데없이 반병신으로 만들어 놓는 사이에 말이야.”
“지한이 네가? 하아……. 난 또 누가 납치해서 도망친 줄 알고 깜짝 놀랐네. 그럼 데려간다고 먼저 말이라도……!”
안도의 한숨을 내쉰 은지연이 동생을 책망하려던 순간, 동생의 눈을 마주친 은지연은 순간 흠칫하더니 동생의 시선을 피했다.
얼음장처럼 차갑고 냉정하기 이를 데 없는 눈빛. 마치 감정을 뺀 기계가 사람의 눈을 가진다면 저런 눈을 하고 있지 않을까 싶을 만큼 두렵고 섬뜩한 눈빛이었다.
동생은 단 한 번도 저런 눈으로 자신을 본 적이 없었다.
아마 은지한이라는 이름보다는 리퍼라는 이름을 기억하는 사람들에게 더 익숙한 눈빛이기 때문이겠지.
“내가 분명 경고했지? 분노 때문에 일의 우선순위를 헷갈리지 말라고. 누나의 실력이라면 여기 있는 여자애들을 제압하는 데 10초도 필요하지 않았어. 수현이 누나를 구출하는 데까지는 1분도 걸리지 않았겠지. 그런데 누나가 1분이 넘게 한 짓을 봐.”
은지한이 턱짓으로 가리킨 곳에는 몸이 크게 망가진 채 기절해 버린 여자애들이 널브러져 있었다.
“누나는 수현이 누나를 구하러 온 게 아니야. 수현이 누나 때문에 빡친 자신의 화를 풀러 온 거지.”
“…….”
평소와 다른 동생의 신랄한 비평에, 은지연은 고개를 떨구더니 무거운 표정으로 그의 곁을 스쳐 지나갔다.
“하아…….”
은지한도 한숨을 쉬며 집 밖으로 나가니, 마침 윤수호가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너답지 않게 웬 한숨이야? 일도 잘 마무리됐는데. 지연이는 또 왜 나라 잃은 표정이고.”
“그게요, 삼촌…….”
은지한은 안에서 있었던 일을 가감 없이 삼촌에게 얘기해 주었다.
얘기를 모두 전해들은 윤수호는 피식 웃으며 조카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그에 은지한이 살짝 풀 죽은 목소리로 삼촌에게 물었다.
“제가 누나한테 너무 심하게 말 한 걸까요?”
“아니, 넌 동생으로서, 조력자로서 누구보다 훌륭하게 임무를 완수했다. 지금 지연이가 힘들어하는 건 너 때문이 아니야. 친구에 대한 미안함과 자기 자신에게 실망감이 밀려든 탓이지”
“누나가요?”
“그래, 네 누나라면 분명 잘못을 깨닫고 깊이 반성한 후에 훌훌 털고 일어날 거다.”
윤수호는 은지한을 함께 보낸 것이 정답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자신과 윤수아처럼 서로에게 버팀목이 되기도 하고, 좋은 선생님이 되기도 하는 남매가 진심으로 대견스러웠다.
검신이 돌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