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
식사를 마친 후, 저녁상을 다 같이 치우고 윤수호와 윤지석 부자가 설거지를 마친 뒤, 가족들이 다 함께 거실에 모여 TV를 시청했다.
온 가족이 함께 모여 과일을 깎아 먹으며 TV를 시청하는 이 시간이, 윤수호에게는 가장 중요한 시간이자 행복한 시간 중 하나였다.
“아, 참! 그런데 지연이, 지한이 너희는 학교생활은 어떻게 하고 있어? 친구들은 많이 사귀었고?”
“많이는 아니고, 한 명밖에 없긴 한데……. 그래도 꽤 친해졌다고 생각해요. 낙서가 취미인 녀석인데, 제가 보기에는 평범한 낙서 수준이 아니더라고요. 한번 보실래요?”
은지한이 폰에 찍어둔 권성하의 낙서를 삼촌에게 보여 주자, 화면을 넘겨 가며 낙서를 구경하던 윤수호의 눈이 점점 커졌다.
“이걸 진짜 그 친구가 그렸다고?”
“네, 삼촌이 보기에도 평범한 낙서 같진 않죠?”
“이런 종류의 낙서를 분명 어디서 본 거 같은데…….”
“미스터 듀들?”
“아, 맞네! 듀들!”
가물가물하던 기억의 정체를 동생이 깨워 주자, 윤수호가 작은 탄성을 내지르며 공감했다.
“그치? 나도 전에 한 번 봤는데, 보자마자 듀들이 떠오르더라고. 진짜 보통 실력이 아니라니까.”
“성하도 어릴 때부터 듀들이란 화가의 팬이었다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그 사람의 낙서를 따라 한 게 계기가 됐다고요.”
“처음에는 단순히 따라 한 게 계기가 됐을지 몰라도, 이건 이제 모방의 레벨이 아닌데?”
듀들은 윤수호와 윤수아가 어렸을 적, 교육 방송에서 풍경화의 빕, 종이접기의 임영만, 낙서의 듀들이라고 불렸을 정도로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던 교육 방송의 삼대장이었다.
그렇다 보니 윤수호와 윤수아 남매도 듀들의 낙서를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공간을 하나도 남김없이 가득 채운 화풍은 듀들과 흡사하지만, 카툰 베이스의 듀들과는 다르게 성하라는 친구는 민화를 베이스로 그린 건가? 듀들의 낙서를 설마 이런 식으로 재해석하는 사람이 있을 줄은……. 혹시 그 친구는 민화를 따로 배웠나?”
“돌아가신 아버지가 민화를 그리는 화가셨대요. 아버지한테 배운 건 아니고, 그냥 어깨 너머로 아버지가 작업하는 것만 봤다고 하더라고요.”
‘이건 대단한 재능인데?’
농담이 아니라 단순히 낙서로 치부하기 어려운 수준이다.
당시에도 시대를 앞서갔다는 평가가 지배적인 듀들의 미래지향적인 낙서와 우리 전통의 민화를 이 정도로 스타일리시하게 접목할 줄은 상상도 못 했으니까.
이건 거의 천부적인 재능이나 다름없었다.
“혹시 다른 사람들도 이 친구의 그림을 본 적 있어?”
“아뇨, 저도 그게 좀 안타까운데……. 성하는 낙서가 그냥 자기 취미라고만 하더라고요. 남들한테 보여 주기는 부끄럽다고. 그리고 성하 어머니도 성하가 낙서에 집중하는 걸 별로 안 좋아하세요. 성하 아버지도 그림에만 집중하다가 가세가 기울고, 결국 병까지 얻어 돌아가셨거든요.”
“그래? 안타깝네…….”
그냥 취미 생활로 묻히기엔 정말로 안타까운 실력이지만, 본인이 그렇다고 하니 더 이상 타인이 왈가왈부할 수는 없는 문제였다.
“지연이는 어때? 학교는 다닐 만해?”
“네, 생각보다 훨씬 재밌어서 깜짝 놀랐어요. 몇몇 싸가지 없는 녀석들 빼고는 애들도 전부 착하고 친절하고요.”
“착하고 친절할 수밖에 없겠지. 1학년 짱한테 어떤 멍청이가 겁도 없이 개길까.”
“야, 은지한. 뒈질래? 쓸데없는 사족은 빼라고 했다.”
“1학년 짱?”
윤수호가 깜짝 놀라서 은지연을 쳐다보자, 은지연이 뒷목을 긁적이며 시선을 피했다.
“아, 아니, 뭐……. 그러고 싶어서 그런 게 아니라……. 이상하게 아무 이유 없이 시비 거는 애들 참교육해 주다 보니까, 그냥 애들이 그렇게 생각하는 모양이더라고요. 은지한, 저 자식이 밉살맞게 가만있으니까 그냥 애들이 오해한 거예요. 신경 안 쓰셔도 돼요.”
“입은 삐뚤어져도 말은 바로 해야지. 내가 나서지 않은 게 아니라 나설 필요가 없었던 거잖아. 누나 선에서 깔끔하게 정리 가능한데, 내가 뭐 하러?”
“너, 진짜 계속 까불래?”
“그래도 누나가 친구는 많아요. 보시다시피 핵인싸잖아요. 요새는 두루두루 친하게 지내는 친구들이 많은 모양이더라고요. 최근에는 2학년 선배한테도 고백받지 않았나?”
“너, 너! 진짜 그것까지…….”
은지한은 음흉하게 입꼬리를 말아 올렸고, 은지연은 얼마나 당황했는지 얼굴이 홍당무처럼 빨개졌다.
하나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다. 은지연이 고백을 받았다는 사실이지.
“너, 너……. 그게 사실이야? 근데 왜 엄마한테도 말 안 하고 있었어? 섭섭하게!”
“그래서, 고백은 받아 줄 생각이니?”
“난 우리 지연이가 잘 생각해서 판단했으면 좋겠구나. 얼굴이 반반한 사내놈치고 품행이 반듯한 녀석은 흔하지 않은 법이거든. 크흠!”
엄마에 이어 할머니와 할아버지까지 크게 관심을 두는 듯하자, 은지연은 얼굴을 넘어 귀까지 새빨개진 채 고개를 푹 숙였다.
그러자 눈치를 살피던 윤수호가 서둘러 가족들을 제지하며 분위기를 수습하였다.
“지연이가 어련히 알아서 잘할까. 저 나이대에 연애는 성공하든 실패하든 지연이한테 큰 도움이 될 겁니다. 그러니까 우린 그냥 눈 감고 신경 꺼 주자고요. 그게 지연이한테 더 도움이 될 테니까.”
“사, 삼촌. 그런 걱정은 안 해도 될 것 같은 게……. 거절했어.”
“거절했다고? 왜? 네 스타일이 아니었어?”
윤수호가 조심스럽게 묻자 은지연은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여자 선배였거든.”
“뭐?”
“고백한 2학년 선배가 여자였다고요.”
……가족은 전원 얼빠진 표정으로 은지연을 쳐다보았다.
옆에서는 은지한만 숨죽여 끅끅거리면서 웃다가, 결국 은지연에게 제대로 새우 꺾기를 당하고 말았다.
“하, 항복! 항복! 내가 잘못했어, 누나! 이러다 진짜 동생 허리 부러져! 끄아아악!”
“죽어! 그냥 죽어, 이 웬수야!”
“그래도 지금까지 누나한테 고백한 동급생이랑 2, 3학년 선배들이 전부 여자라는 사실까지는 말 안 했……. 끄아아악!”
“제발 그냥 죽어라, 쫌!”
비명은 은지한이 지르고 있는데, 어째서 눈물은 은지연이 흘리고 있는 것일까?
“그, 그래, 이성한테 고백받으면 어떻고 동성한테 고백받으면 어떻니? 우리 지연이가 인기가 많다는 게 중요한 거지.”
“그, 그럼! 원래 네 나이 또래 여자애들은 이성보다 동성이 훨씬 멋져 보이기도 하니까.”
“그래서, 몇 명한테나 고백받았다고?”
“여보!”
“아니……. 그냥 난 지연이가 얼마나 인기가 많은지 궁금해서……. 크흠!”
사태가 정리되고 시체처럼 늘어진 은지한을 뒤로한 채, 은지연은 자리에 앉아 깊은 한숨을 내쉬더니 사정을 설명했다.
“그게…… 편입되고 나서 저한테 집적거리는 질 나쁜 남자애들이 있었거든요. 가족한테 걱정 끼치고 싶지도 않고, 무시하면 저러다 말겠지 생각해서 상대도 안 하고 있었는데, 점점 도가 지나치더라고요. 그래서 하는 수 없이…… 저도 그러고 싶진 않았지만 눈물을 머금고…….”
“내가 들은 버전이랑은 다른데? 내가 듣기로는 한 번만 더 집적거리면 뒈진다고 누나가 그래서, 그 자식들이 해 보라고 도발하니까 누나가 애들 다 보는 자리에서 잘근잘근 밟아 줬다며. 진짜 누나만 봐도 오줌을 지릴 정도로. 그거 보고 남자애들은 전부 쫄아서 말도 못 붙이고, 여자애들은 걸크러시니 뭐니, 누나한테 꽂혀 가지고 팬클럽까지 만들었다지? 그게 학교 전체에 소문이 퍼져서 이렇게 된 거…….”
부릅!
털썩.
은지연이 또다시 쓸데없는 부연 설명을 곁들이는 동생을 도끼눈으로 노려보자, 은지한은 다시 한번 기절한 척 고개를 떨구고는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지한이 말이 사실이니?”
“어, 어느 정도는? 하하하…….”
“근데 왜 말을 안 했어? 학교에서도 그만한 일이 있었으면 가족한테 연락이 왔을 법한데?”
“그게…….”
“아! 난 먼저 올라가서 숙제나 해야겠다. 저는 먼저 올라갈게요. 푹 쉬세요.”
그 순간, 은지한이 괜히 과장되게 몸짓하며 인사하고 2층으로 올라가자, 눈치를 받은 은지연 또한 입을 다물며 어색한 미소를 그렸다.
“그냥 제가 알아서 잘 처리했어요. 그것 때문에 학교에서 잘못되거나 걱정 끼칠 만한 일은 없을 테니까 안심하시고요. 그런 저도 숙제하러 올라가 볼게요. 쉬세요.”
“그래.”
“뭐, 학교 잘 다니고 친구들도 잘 사귀고 있다면 딱히 걱정할 건 없다지만…….”
“그나저나 지연이가 1학년 통이라니 정말 의외네. 난 분명 지한이가 먹을 줄 알았는데…….”
“그게 애 엄마가 할 소리니? 하여튼 너도 참…….”
자연스럽게 자리가 끝나고 각자 방으로 돌아가자, 윤수호는 잠시 바람도 쐴 겸 밖으로 나왔다.
‘저기군.’
그러고는 방향을 확인하더니 가볍게 몸을 날렸다.
* * *
“티, 팀장님! 일어나 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응? 왜, 또 무슨 일인데…….”
안대까지 쓰고 시트를 뒤로 젖힌 채 꿀맛 같은 단잠을 청하던 류한국은 부하의 호들갑에 인상을 찌푸리며 일어났다.
“아무래도 ×된 거 같습니다! 빨리 좀 일어나 보시라니까요?”
“뭔 일인데 이렇게 호들갑을…….”
부하들을 면박 주려던 류한국은 안대를 벗으며 정면을 확인했다. 그러자 류한국의 표정이 새하얗게 질리는 건 그야말로 순식간이었다.
“……×됐네.”
“지, 지금이라도 도망칠까요?”
“도망친다고 도망칠 수 있겠냐? 이 차가 로켓이라도 그건 힘들 거다.”
똑똑똑.
그사이, 어느새 승합차에 접근한 윤수호가 문을 노크하자 문이 평소보다 무겁게 열렸다.
“이, 이거, 위원장님이 아니십니까? 이런 야심한 밤에 여기는 어쩐 일로…….”
“그냥 집 근처를 잠시 산책하던 중에 낯익은 얼굴이 보이더군요.”
“집 근처 말이죠……. 하하하…….”
집 근처라고 하기에 이곳은 윤수호의 집에서 10km나 떨어진 외딴곳이다. 윤수호의 집도, 기척이 느껴지지 않는 무음 드론으로 조용히 집 주변만 관찰하던 중이었고.
“시간이 되신다면 잠깐 산책이라도 같이하시겠습니까?”
“선택권은 없는 거죠?”
윤수호는 대답 대신 빙긋 웃어 보였고, 류한국은 죄수처럼 차에서 내려 윤수호를 따랐다.
그렇게 얼마나 말없이 걸었을까? 적막을 깨고 먼저 말을 꺼낸 사람은 윤수호였다.
“밤공기도 선선하고, 분위기도 고즈넉한데, 류 팀장님의 얼굴에는 수심이 가득하신 것 같습니다. 무슨 걱정이라도 있으십니까?”
“그게…… 사실대로 말씀드려도 됩니까?”
“물론이죠.”
“경호팀에서 잘리면 어느 팀으로 들어가야 할지, 그거 고민하고 있었습니다.”
“경호팀에서 잘려요? 왜요?”
“네? 그것 때문에 절 보자고 하신 거 아닙니까?”
윤수호가 놀라서 묻자, 오히려 류한국이 놀란 얼굴로 그를 쳐다보며 되물었다.
그에 윤수호는 고개를 저었다.
“임무에 최선을 다해 주시는 것도 모자라, 저 대신 제 부족한 조카들의 뒷수습까지 도맡아 주시는 감사한 분께 제가 무슨 짓을 한다는 거죠?”
“아, 그게…….”
“박 팀장에게 얘기는 전해 들었습니다. 어차피 숨기지도 못할 거, 미리 말씀드린다고요. 총사령관님의 심정도 이해가 가고, 가족의 외출 시에만 비밀 경호를 붙이신 이유도 수긍이 됩니다. 그런데다 지한이의 친구와 지연이가 저지른 사고까지 책임져 주셨다고 들었습니다. 정말로 감사드립니다.”
자리에 멈춰선 윤수호가 자신에게 고개를 숙이며 진심으로 감사를 전하자, 류한국은 경기를 일으키다시피 놀라며 손사래를 쳤다.
“고, 고개를 들어 주십쇼, 위원장님! 위원장님께서 고개 숙이실 만큼 어려운 일도 아니었습니다! 저도 나름 이번 임무를 하면서 보람이 있었고요. 저도 지연이, 지한이보다는 어리지만 비슷한 또래의 조카들이 있다 보니 남 일 같지가 않더군요. 그래서 더 적극적으로 도움을 줬던 면도 있는 것 같습니다.”
“그렇군요. 그럼 앞으로도 제가 지켜볼 수 없는 부분에서 조카들과 가족을 부탁드려도 될까요?”
척! 팟!
그 말에 류한국은 차렷 자세로 절도 있게 거수경례를 올리더니 흔들림 없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대한민국 특수임무부대 경호대 현무팀 팀장 대위 류한국과 현무팀은 맡은 바 임무에 최선을 다할 것을 위원장님께 약속해 드리겠습니다.”
“그것참, 감사하고 또 듬직한 약속이군요.”
그렇게 긴장이 풀린 류한국과 윤수호는 조금 더 시시콜콜한 대화를 나누다가 자연스럽게 헤어졌다.
검신이 돌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