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8.
윤수호가 자신이 지내고 있는 상해 5성급 호텔 스위트룸에서 편하게 야경을 감상하며 커피를 마시고 있으려니, 때마침 손님이 찾아왔다.
“들어오세요.”
“오랜만에 뵙습니다, 선생님. 잘 지내셨습니까?”
윤수호의 허락이 떨어지자 문을 열고 들어온 사람은 다름 아닌 왕명이었다.
“그렇게 말씀하시는 왕 요원님께서는 얼굴이 반쪽이 되셨군요.”
“하하하! 그런가요? 나름 잘 챙겨 먹고 다닌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나 봅니다.”
“그만큼 바쁘셨다는 뜻이겠죠. 일은 어떻게 되어 가는 중인가요?”
“그렇지 않아도 그것 때문에 말씀드릴 것이 있어 찾아뵀습니다.”
왕명은 윤수호의 맞은편에 앉은 뒤 태블릿 PC를 꺼내 그에게 건넸다.
“부탁하신 홍룡회주의 개인 자산 말입니다. 선생님께서 홍룡회주에게 알아낸 정보들을 토대로 조사해 보니, 이게 정말이지 한 사람의 재산이 맞나 싶을 정도로 터무니없더군요.”
“개인 자산이 우리 돈으로 약 12조 7,800억이라……. 확실히 많이도 긁어모았군요.”
윤수호가 태블릿 PC에 기재된 조사 내용을 확인하며 감상을 표현하자, 왕명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도 지금 알아낸 그의 차명 해외 계좌와 부동산, 탈세와 돈세탁을 위한 페이퍼 컴퍼니, 주식, 그 밖에 환전 가능한 자산들을 처분했을 경우 당장 현금화가 가능한 자산 목록만 정리한 금액입니다. 아직 세탁되지 않은 불법 자금과 해외에 은닉 중인 고가의 예술품, 장물, 유물 등을 고려하면 절반 정도밖에 되지 않는 수준이죠.”
“당장 환전 가능한 자산은 처분하신 뒤에 제 비밀 계좌로 입금 부탁드리겠습니다. 그리고 홍룡회주가 숨겨 두고 있던 장물은 처분하신 뒤에, 왕 요원님을 비롯한 이번 일에 도움을 주신 요원분들과 함께 수고비로 챙기시면 될 것 같군요.”
“지, 진심으로 하시는 말씀이십니까?”
왕명은 진심으로 놀라 묻지 않을 수 없었다.
태블릿 PC에는 분명 장물의 가치도 함께 기재되어 있을 터. 그런데 윤수호는 무려 수천억 원에 달하는 장물을 자신들끼리 나눠 가지라고 한다.
하지만 윤수호는 대수롭지 않게 고개를 끄덕이며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이번 일은 왕 요원님을 필두로 수많은 요원분과 정보원분들의 도움이 없었다면, 저 혼자서는 절대로 이룰 수 없었던 임무였습니다. 특히 어떻게 보면 홍룡회 섬멸은 제 개인사나 마찬가지였음에도, 목숨을 아끼지 않고 협력해 주신 분들께 이 정도 답례는 충분하다고 말씀드리기도 부끄럽지요.”
‘이런 사람도 있구나…….’
이번 작전에 도움을 준 사람들은 공로와 임무에 따라 다르겠지만, 적게는 수천만 원에서부터 많게는 수십억까지 받을 수 있을 터였다.
물론 그것은 특무대의 월급이나 수당과는 전혀 다른 보너스였다.
아무리 통이 크다고 해도 수천억이나 되는 돈을, 다시는 못 볼지도 모를 요원들을 위해 고생했다는 이유만으로 하사할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알겠습니다. 그럼 선생님의 분부대로 장물을 처분한 자금은 공로와 임무에 맞게 대원들에게 분배하도록 하겠습니다.”
“부탁드리죠. 그리고 요원님께서 동료분들과 함께 모은 십회의 정보들 말입니다.”
“예.”
홍룡회는 현재 괴멸에 가까운 타격을 받았고, 얼마 남지 않은 잔당조차 완전 소탕에 가까운 공격을 받고 있었다.
그 틈을 노려 왕명은 윤수호의 지시에 따라 십회의 모든 움직임을 파악했고, 적지 않은 정보들을 입수할 수 있었다.
“이것과 함께 특무대 본부로 보내 주세요.”
“이건…….”
“제가 십회 후계자들에게서 얻어낸 정보입니다. 왕 요원님께서 수집하신 정보들과 짜 맞추면 십회에 대해서 어느 정도 전체적인 그림이 나올 겁니다.”
“……!”
왕명은 윤수호가 정리했다는 정보들을 확인하며 눈을 부릅떴다.
자신이 수집한 십회의 움직임과 규모, 그리고 윤수호가 후계자들에게서 수집한 사업 계획이나 주력 사업에 관한 기밀들을 조합하면, 이건 천문학적인 가치를 지닌 정보가 되기 때문이었다.
“그것들과 홍룡회주가 은닉해 두었던 유물들까지 함께 보내 주면 총사령관님께도 썩 괜찮은 선물이 되겠죠.”
“이, 이만한 선물을 썩 괜찮은 선물이라 표현하진 않을 것 같습니다만…….”
십회는 중국에서도 자주 회자할 만큼 골치 아픈 범죄 집단이다.
그런 십회에 대한 정보를 한국 정부가 쥐고 있으면, 중국과의 교역에서 엄청난 도움이 될 것은 자명한 사실이었다.
“어쨌거나 부탁을 드린 사람은 저고, 부탁을 호의적으로 받아 주신 분은 총사령관님을 비롯한 특무대의 높으신 분들이니까요. 이 정도 선물은 해 줘야 위원장으로서의 체면이 살지 않겠습니까?”
빙그레 웃으며 윤수호가 대꾸하자 왕명이 피식 웃었다.
“제가 선생님…… 아니, 위원장님의 정체를 파악하고 있다는 걸 알고 계셨군요.”
“처음부터 알고 계셨던 거죠?”
“사실…… 그렇습니다. 미리 말씀드리지 않아 죄송합니다.”
“아닙니다. 오히려 그 정도 눈치와 정보력도 없는 분이었다면 애초부터 이번 일을 함께하지도 않았을 테니까요. 그런 왕 요원님과 함께 일할 수 있어서 진심으로 재미있었습니다.”
“저야말로 위원장님과 함께 일할 수 있어서 진심으로 영광이었습니다.”
윤수호가 악수를 청하자, 왕명은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그의 손을 맞잡으며 진심을 담아 허리를 숙였다.
* * *
“다녀왔…… 뭐야, 아무도 없나?”
오랜 중국 출장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온 윤수호를 반겨 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 녀석들이야 학교에 있을 시간이라 쳐도, 수아랑 아버지 어머니는 어딜 가신 거지?’
다행히 가족에게 심어둔 자신의 기운이 별다른 반응이 없는 것으로 봐선 딱히 문제가 있는 것 같지는 않았기에 일단 신경을 끄기로 했다.
쏴아아아아아.
가볍게 샤워를 마친 그가 제일 먼저 향한 곳은 부엌이었다.
편한 트레이닝복 차림으로 부엌에 들어선 그는 가스레인지 위에 올린 냄비의 뚜껑을 조심스럽게 들어 올렸다.
‘그렇지!’
냄비의 내용물을 확인한 윤수호가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냄비 안에는 차갑게 식긴 했어도 매콤한 냄새가 물씬 올라오는, 어머니표 김치찌개가 새빨간 자태를 자랑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오혜연표 김치찌개 하나면 다른 반찬 없어도 밥 두 공기는 거뜬…….’
그렇게 오랜만에 집밥으로 배를 채울 생각에 한껏 들떠 있던 윤수호의 표정이 밥솥 뚜껑을 여는 순간 돌덩이처럼 굳어 버렸다.
‘찬밥도 안 남아 있네.’
찬밥에 뜨끈한 돼지고기 김치찌개면 사실상 밥상계의 치트 키나 다름없지만, 일단 그 조합은 물 건너간 상황.
윤수호의 앞에는 두 가지 선택지가 놓여 있었다.
하나는 지금 바로 밥을 하는 것. 두 번째는 즉석밥을 서둘러 사 오는 것.
사실 시간상으로 두 선택지를 비교하면 큰 차이는 없기에, 귀찮음을 고려하면 밥을 하는 게 나을 수도 있었다.
그 순간, 윤수호의 손이 재빨리 찻장으로 향했다.
하지만 다양한 종류의 과자들로 가득해야 할 찻장도 텅텅 비어 있었다.
‘할 수 없지. 즉석밥이랑 과자도 사 올 겸 나갔다 와야겠네.’
대충 지갑을 챙긴 윤수호는 차를 타고 가까운 편의점으로 향했다.
가까운 편의점이라고 해도 걸어서 20분이 걸릴 만큼, 윤수호의 집은 민가와 거리가 제법 멀리 떨어져 있었다. 집의 규모 때문이기도 하지만, 보안상 일부러 이선호와 조춘영이 이런 집을 구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차를 타고 가장 가까운 편의점에 도착한 윤수호의 눈에 들어온 건 편의점 앞에 몰려 있는 무리였다.
숫자는 일곱 명 정도 될까? 한눈에 봐도 미성년자처럼 보이는 녀석들은 추레한 몰골로, 지나다니는 사람들의 눈치를 살피며 꽁꽁 뭉쳐 있었다.
‘몰골을 보아하니 집에서 나온 지 꽤 지난 녀석들인가 보군.’
편의점을 이용하거나 주위를 지나다니는 어른들도 딱히 그런 녀석들에게 신경을 쓰지 않았다.
그리고 그건 윤수호도 마찬가지였다.
윤수호는 그들을 지나쳐 편의점 안으로 들어갔다.
그렇게 과자와 즉석밥, 그리고 과자를 씹으며 함께 마실 캔 맥주 몇 개를 고르고 있자니, 묘한 녀석이 수상한 행동을 하는 게 눈에 들어왔다.
한눈에 봐도 과할 정도로 품이 큰 외투에 깊이 눌러 쓴 모자.
녀석은 주류코너에서 은근슬쩍 카메라의 위치를 살피더니, 직원이 다른 손님들의 물건을 계산하는 틈을 노려 주류 냉장고의 문을 열었다.
그리고 신속하게 술을 꺼내 품속에 넣고는 아무렇지 않게 뒤돌아 나가려고 했다.
‘하아.’
그 모습에 윤수호는 한숨을 내쉬었다. 못 봤다면 모를까, 보고도 모른 척할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그 순간.
빡!
경쾌한 소리와 함께 뒤통수를 얼얼하게 얻어맞은 녀석이 뒤를 돌아보며 신경질적으로 소리쳤다.
“끄악! 어떤 새끼야?”
“나다, 이 새끼야.”
뒤에서 녀석의 뒤통수를 손바닥으로 후려친 범인은 다름 아닌 윤수호였다.
“좋은 말로 할 때 주머니에 있는 거 제 자리에 곱게 가져다 둬라. 예쁘게 쇠고랑 차고 싶은 게 아니라면.”
윤수호가 녀석을 심드렁하게 쳐다보며 경고했다.
그러자 얼마나 뒤통수가 얼얼했는지 눈물을 글썽거리는 녀석이 도끼눈을 뜨고 윤수호를 노려보며 소리쳤다.
“내가 지금 뭘 훔쳤다고 이러는 거야? 증거 있어?”
“증거야 CCTV에 다 찍혔을 거고. 말씨름하기도 귀찮으니까 그냥 경찰에 신고한다.”
“……!”
경찰에 신고한다는 윤수호의 엄포와 몰려드는 사람들의 시선 때문에, 결국 녀석은 훔쳤던 술들을 전부 카운터 위에 올려두고는 범행 사실을 자백했다.
“죄송합니다.”
그러고는 쏜살처럼 가게를 도망치는 녀석.
“감사합니다, 손님.”
“그냥 눈에 띄어서 지켜본 것뿐이에요. 신경 쓰지 마세요.”
“네…….”
여자 알바는 고개를 숙이며 다급하게 윤수호가 가져온 물건들을 계산했다.
방금 상황에 당황한 것인지,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었던 것인지, 윤수호의 얼굴을 보다가 후다닥 고개를 숙인 그녀의 표정이 빨갛게 물들어 있었다.
“또 오세요.”
매뉴얼과 전혀 다른 알바의 인사를 받으며 편의점을 나선 윤수호를 기다리고 있던 녀석들이 있었다.
“형, 설마 그냥 가려고? 내가 형 때문에 손해 본 돈이 얼만데, 그건 메꿔 주고 가야지?”
그를 찾아온 녀석들은 뒤통수를 후려친 녀석과 편의점 앞에서 똘똘 뭉쳐 주위를 살피던 녀석들이었다. 아무래도 녀석들 모두 한패였던 모양이었다.
‘뭐지? 이 어설픈 협박은?’
하지만 윤수호를 협박하는 모양새나 분위기가 뭔가 필사적일지언정 아주 어설프고 서투른 것도 사실이었다.
“조용히 돈 주고 끝낼래? 아니면 으슥한 곳으로 끌려가서 개망신당할래?”
“…….”
윤수호는 앞장서라는 제스처를 취하고는, 순순히 그들의 뒤를 따라갔다.
“근데 우리, 이래도 되는 거야? 어른을 협박해서 돈 뜯어 본 적은 한 번도 없었잖아?”
“그럼 어떡해? 이번에도 수금 못 맞추면 진짜로 팸에서 쫓겨날 텐데…….”
“성민이 말이 맞아. 이래 죽으나, 저래 죽으나 뭐라도 해 봐야지.”
제 딴에는 소곤소곤 얘기한다고 한 거겠지만, 뒤를 따라가는 윤수호의 귀에는 마치 옆에서 떠드는 것처럼 자세히 들렸다.
‘팸이라……. 그러고 보니 요새 가출한 애들이 모여서 무리 지어 다니는 게 문제라고 하던데, 이 아이들도 그런 모양이군.’
다만 행동거지나 분위기로 봤을 때 영 나쁜 길에 빠져든 아이들은 아닌 것 같고, 아무래도 심성 자체는 그리 나쁘지 않은 녀석들 같았다. 그저 가출해서 먹고살 방법이 없으니 어쩔 수 없이 이러고 산다는 느낌이랄까?
하지만 그런 아이들조차 윤수호의 손에 걸리면 예외는 없었다.
잠시 후…….
“하나에 내려가면서 도둑질은! 둘에 올라오면서 범죄다! 알겠나? 하나.”
“도둑질은……!”
“둘.”
“범죄다……!”
“하나.”
“도둑질은……!”
병렬로 나란히 엎드린 녀석들은 윤수호의 구령에 맞춰 푸시 업을 했는데, 그런 녀석들의 얼굴은 아주 벌 떼에게 흠씬 쏘인 듯 잔뜩 부풀어 엉망이 되어 있었다.
윤수호는 푸시 업을 하는 녀석들의 등에 누워 아이스크림을 빨며 하늘을 쳐다보았다. 등으로 녀석들의 몸이 지진이 난 것처럼 흔들리는 게 느껴졌지만, 결코 자비는 없었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끄윽……!”
“더, 더 이상은 안 돼…….”
철퍼덕!
땀이 비 오듯 흐르고 손발이 사시나무처럼 떨리던 아이 중, 결국 힘이 빠진 몇몇 녀석이 버티지 못하고 쓰러지자 윤수호가 나직하게 입을 열었다.
“둘이라고 안 했는데 벌써 올라오는 녀석은 뭐고, 쓰러지는 녀석은 또 뭐야? 에이. 쿠션이 불편해서 더 이상 누워 있기도 힘드네.”
인간 침대에서 일어난 윤수호는 쓰러져 헉헉거리는 아이들을 보며 외쳤다.
“전원 기상하는 데 3초 준다. 그 사이에 못 일어나면 푸시 업에 미련이 남은 것으로 간주하고 다시 시작한다.”
벌떡!
그 말에 놀랍게도 방금 전까지 지쳐 죽어가던 아이들이 벼락을 맞은 것인 양 1초도 지나지 않아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런데…….
꼬르륵…… 꼬륵…… 꼬르르륵……!
녀석들의 배에서 너무나도 처량하게 울리는 배꼽시계 하모니에 윤수호는 한숨을 내쉬었다.
아이들은 대부분이나 지한이나 지연이와 비슷한 또래였다. 윤수호는 이런 아이들이 벌써부터 먹고 살 걱정을 하며 범죄에 조금씩 물들어가는 모습이 꼭 남의 일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너희들, 전부 따라와라.”
“서, 설마 경찰서로 갈 생각은 아니죠? 형! 저희, 집에 가면 안 돼요! 집에 가느니 차라리 그냥 여기서 죽는 게 더 나아요. 제발……!”
집에 가느니 차라리 여기서 죽는 게 낫다는 말을 진심으로 얘기하며 손이 발이 되도록 싹싹 비는 녀석들의 모습에, 윤수호는 기가 찬다는 듯이 혀를 차며 대꾸했다.
“밥 먹으러 가자고. 형이 지금 점심도 못 먹었거든? 먹기 싫은 놈들은 그냥 꺼지든가.”
“……!”
꼬르륵…….
밥 먹으러 가자는 말에 아이들은 서로의 눈치를 살폈다. 하지만 눈치 없이 울리는 배꼽시계에, 누가 먼저라고 할 것도 없이 윤수호의 뒤를 따랐다.
검신이 돌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