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신이 돌아왔다-56화 (56/175)

56.

“대답을 서둘러야 할 거야. 공자도 알다시피 여기 있는 사람들은 지금 인내심이 그리 깊지 않으니까.”

팔극회 회주의 말처럼 어느새 홍룡회를 포위하듯이 둘러싼 사람들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대답 여하에 따라서는 당장 덮쳐들더라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이, 이건 음모요! 우리도 함정에 걸렸단 말입니다! 우리가 미치지 않고서야 어떻게 여기 있는 십회를 모두 적으로 돌릴 수 있단 말이오? 상식적으로 말이 안 되잖소?”

“흥! 오히려 그러한 맹점을 노려 이번 일을 계획했다고 해도 전혀 이상하지 않지. 이만한 면면들이 한 자리에 비무장 상태로 모이는 건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니까.”

“애초에 홍룡회라면 비겁함이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소인배들의 무리가 아닙니까? 얼마든지 이런 일을 꾸미고도 남을 족속이지요.”

“게다가 다른 길드의 후계자들은 전부 변을 당했는데 혼자 살아남아서 저런 소릴 지껄이는 건 상식적으로 말이 된다고 생각하십니까?”

“그게 무슨 개소리……!”

난무하는 억측에 공사윤이 발끈했다가 서둘러 입을 다물었다.

지금은 그들의 억측보다 그들을 비난하는 자신의 개소리라는 한마디가 수백 배는 더 위험한 발언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일까?

판단력이 저하된 공사윤은 절대로 입에 담아서는 안 될 말까지 담고 말았다.

“애, 애초에 나만 무사한 것도 아니잖소! 흑천회의 후계 예정자들 또한 무사한 것으로 아는데, 왜 나만 이렇게 몰아붙이는 것이오? 난 너무 억울……!”

“도련님!”

기겁한 마평이 빠르게 공사윤의 입을 막았지만, 이미 때는 늦었다. 멀리서 이 상황을 지켜보던 흑천회주가 그의 말을 듣고 자리에서 일어난 것이다.

‘이런 젠장!’

마평은 속으로 공사윤의 아둔함을 원망했다.

그의 말처럼 흑천회의 후계 예비자들 역시 한 명도 변을 당하지 않았다.

즉, 흑천회는 이 자리에서 회주가 직접 참여한 세 길드와 마찬가지로, 자신들의 아군이 되어 줄 수 있는 중립적인 위치라는 뜻이었다.

하지만 그들과의 결정적인 차이가 있다면, 이 연회의 주최 측이 바로 흑천회라는 사실이다. 즉, 중립적인 위치이면서 누구보다 범인 색출에 혈안이 된 그들을 공사윤은 적으로 돌리고 만 것이다.

* * *

이런 상황을 지켜보면서 소름을 느끼고 있는 인물이 한 명 있었다.

바로 이 모든 사건의 내막을 알고 있던 왕명이었다.

‘설마 선생님은 여기까지 생각하시고…….’

그때였다.

“어때요? 재미있지 않습니까? 아귀들끼리 서로 물어뜯는 모습이 말입니다.”

“선생님?”

왕명은 어느새 자신의 근처로 다가와 말을 건네는 윤수호의 목소리에 순간적으로 놀라 움찔했다. 하지만 프로답게 고개를 돌려 상대방의 얼굴을 확인하는 실수 같은 건 범하지 않았다.

게다가 다행히도 이 사건의 주최 측이자 간부인 추현곽은 이번 일 때문에 정신이 없어서, 왕명에게는 신경조차 쓰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자연스럽게 행동하시면 됩니다. 어차피 제 모습은 아무도 볼 수 없을 테고, 주변에는 제가 강기막을 펼쳐 놓아 우리가 하는 얘기를 들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으니까요.”

“그, 그렇군요. 한데 설마 여기까지 내다보시고 후계자들을 골라 암살하신 겁니까? 흑천회의 후계 예정자들을 일부러 건드리지 않은 이유도…….”

“사람은 약한 인간일수록 궁지에 몰리면 자신을 돌아보는 게 아니라 남 탓을 하기 마련이니까요. 그게 목숨이 달린 문제라면 어떻게든 빠져나가기 위해, 설령 자신의 잘못이 맞다 하더라도 상대방에게 뒤집어씌우겠죠. 하지만 정말로 자신의 잘못조차 아니라면?”

“공사윤이 그래서 흑천회를 언급했다는 말씀이십니까?”

윤수호는 작게 고개를 저었다.

“조금 다릅니다. 공사윤은 정말로 흑천회가 이번 일의 주범일 거라 믿어 의심치 않을 테니까요.”

“어째서입니까?”

“자신을 살려 둔 이유와 지금의 상황이 아귀가 딱 들어맞기 때문이죠.”

한편 공사윤의 앞에 선 흑천회주 양자간은 얼음장같이 차가운 표정으로 공사윤을 지그시 노려보며 나직하게 입을 열었다.

“지금 공 공자가 한 얘기는 흘려들을 수 없구려. 그래, 공 공자의 말은 흑천의 후계 예정자들이 무사하니, 이번 일을 우리가 꾸미고 그대들에게 덮어씌우려 하는 것이라…….”

잠시 말을 쉰 양자간의 눈빛에 칼날을 품고 말을 끝맺었다.

“그렇게 받아들여도 되겠소?”

“그, 그건……!”

“CCTV의 영상이 조작인지 사실인지 조사해 보면 금방 탄로가 날 터. 그런 싸구려 조작질로 이런 멍청한 일을 획책할 만큼 본회가 우스워 보였나 보구려. 원한다면 직접 영상의 조작 여부를 감별해 보시겠소?”

양자간은 일반인이고, 공사윤은 아직 오버 알터가 아닐지언정 알터 중에서는 최상급의 강자로 평가받는 인물이었다.

게다가 상대는 칠십 줄에 접어든 노인. 설령 공사윤이 알터가 아니더라도 그를 찍어 누르는 건 일도 아닐 터였다.

그런데 이게 어떻게 된 일일까?

공사윤은 자신보다 머리 하나가 더 작은 양자간이 태산처럼 커 보였고, 그의 기세에 숨이 막혀 숨조차 제대로 쉴 수 없었다.

‘무슨 노인네의 기백이…….’

기백에 밀려 자연스럽게 한 걸음 뒤로 물러선 공사윤에게, 다른 사람들의 흉흉한 눈초리가 더욱 깊이 박혀 들었다.

작금의 대화를 통해서 이번 사건의 주모자가 홍룡회 쪽으로 더욱더 무게추가 기울었기 때문이다.

그때였다.

앞으로 나서서 사건을 정리하다시피 종지부를 찍은 사람은 중립 측에 있던 수라회의 회주였다.

“백 보, 천 보 양보해서 이번 일의 배후가 그대들이 아니라 해도, 가우창이란 놈이 홍룡회의 사람인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일 터. 홍룡회는 그 책임을 다할 의무가 있다고 생각되는군요.”

중립적인 입장이었던 수라회마저 홍룡회를 저버리자, 그들에게 후계자를 잃은 적대 길드들은 말할 것도 없고, 다른 중립 길드 역시 슬슬 홍룡회를 적대하는 분위기였다.

그리고 그 선두에 이번 일의 책임자인 흑천회가 있었다.

“저들을 포박하라! 이번 일의 진상이 명명백백하게 밝혀질 때까지 구금하라! 절대로 풀어 줘서는 안 될 것이다!”

“존명!”

“포박할 것이 뭐 있겠소, 회주? 우리는 후계자가 그런 끔찍한 몰골로 찢겨 죽었소! 우리는 여기서 놈들의 시체를 잘게 저며 홍룡회주에게 직접 보내 줘야겠소!”

결국 유력 용의자로 지목당한 홍룡회를 다른 아홉 개의 길드들이 집중 공격하기 시작했다.

“도련님을 지켜라!”

“어서 이곳을 빠져나가!”

“공사윤이 도망친다!”

“당장 잡아!”

홍룡회 측 길드원들은 공사윤을 지키며 서둘러 연회장을 빠져나가려 했지만, 쉽지 않았다.

그들 역시 정예 병력이라지만, 그들을 덮친 아홉 길드의 전력 또한 정예를 추려 데려온 것이다.

푹푹푹푹푹푹!

“커헉!”

한 손으로 검 하나를 막는 사이 다른 여덟 개의 검이 몸통을 관통하자, 홍룡회의 정예 길드원 한 명이 입에서 피를 토하며 즉사했다.

그런 상황이 연회장 한쪽에서 치열하게 벌어지자, 멀리서 그 광경을 지켜보던 왕명이 윤수호에게 말했다.

“드디어 시작됐군요.”

“공사윤은 여기서 죽을 겁니다. 어차피 도망칠 곳은 없으니까요.”

“그런데 설마 이번 일 때문에 다시 전쟁이 시작될 수도 있을까요?”

윤수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확신할 수는 없지만 저는 그럴 가능성이 매우 크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그 전쟁은 이전과 전혀 다른 양상이 되겠지만요.”

“그 말씀은……?”

“지금까지 십회가 벌였던 전쟁은 무주공산이었던 중국 뒷세계의 패권을 장악하기 위함이었죠. 하지만 전쟁은 안정기에 접어들었고, 자신들의 구역을 공고히 한 십회는 3년 전에 전쟁을 마치며 내수에 힘을 썼을 겁니다.”

“그렇군요. 이제 이해가 됐습니다. 3년 사이에 내수가 성장했지만, 세력이 안정권이라는 건 바꿔 말하면 지난 전쟁처럼 폭발적인 성장력은 기대할 수 없다는 뜻이죠.”

왕명이 자신의 말을 찰떡같이 이해하자 윤수호는 빙그레 미소를 머금었다.

“솔직히 까놓고 말해서 저들에게 후계자의 복수 따위는 아무래도 좋을 겁니다. 중요한 건 제가 저 아귀들에게 홍룡회를 물어뜯을 수 있는 명분을 줬고, 저들은 그걸 덥석 물었다는 사실이죠.”

“공공의 적이라면 굳이 위험을 감수할 필요도 없고, 하나의 명분으로 임시적인 동맹을 맺을 수 있으니, 자신들의 희생을 최대한 줄이면서 큰 이익을 얻을 수도 있겠죠. 최소한의 손해로 홍룡회를 찢어 먹을 수 있다면 저들에게도 그보다 좋은 선택지는 없을 테니까요.”

“그런 맛 좋은 먹이를 저 아귀들이 과연 포기할까요?”

“…….”

왕명은 속으로 혀를 내둘렀다.

설마 이런 식으로 베일에 가려진 홍룡회를 추적하는 것도 모자라, 다른 십회를 사냥개처럼 부릴 수 있을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기 때문이다.

물론 되돌아보면 방법 자체는 간단했다. 각 회의 후계자들을 죽이고 이간계의 덫을 놓은 것뿐이었으니까.

하지만 그 간단한 방법을 떠올리지 못하는 건,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계획이었기 때문일 터였다.

‘도대체 이분은 누구시길래 이런 말도 안 되는 일을 가능하게 만든 건지…….’

“왕 요원님께서는 저들이 작정하고 홍룡회를 추적하기 시작할 때, 그들의 움직임과 동선을 파악해 주세요. 인력과 예산은 필요한 만큼 얼마든지 가져다 쓰세요. 제가 지원해 드릴 테니까.”

“인력과 예산을 얼마든지 가져다 써라……. 그것참! 살다 보니 그런 말도 다 들어 보네요. 알겠습니다. 믿고 맡겨 주신 만큼 최선을 다해서 기대에 부응해 보도록 노력하겠습니다.”

그 이후로 윤수호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아마도 다음 계획을 위해 자리를 옮긴 모양이다.

‘자. 그럼 나도 구경이나 하러 가 볼까?’

정작 이 사태의 원흉이나 다름없는 트로이의 목마는 그렇게 유유자적 공사윤의 최후를 구경하기 위해 걸음을 옮겼다.

* * *

“가, 가까이 오지 마! 가까이 오면 다 죽여 버릴 거야!”

“저 악마가 이제야 본색을 드러내는구나!”

“솔직히 말해라. 가우창에게 암살을 지시한 것도 네놈이나 홍룡회주의 소행이 맞지?”

어느새 부하들은 전멸하고 혼자 남은 공사윤은, 전신이 피로 범벅된 상태에서도 칼끝을 야무지게 겨누며 그들을 비웃었다.

“× 까는 소리 하고 있네. 어차피 네놈들 속셈이야 뻔하지. 이런 식으로 우리 홍룡회를 적으로 돌린 네놈들이 언제까지 무사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하나? 어? 죽고 싶은 놈들부터 들어와. 다 죽여 버릴 테니까!”

우우우웅!

공사윤이 흉흉한 오러가 피어오른 검을 거칠게 휘두르며 주변을 경계하자, 사람들도 함부로 가까이 접근하지 않았다.

그가 두려워서가 아니었다. 어차피 도망칠 곳도 없는 배 위에서 상처 입은 짐승이 버티면 얼마나 버티겠는가?

힘이 다한 공사윤이 제풀에 쓰러지길 기다리는 건 그들에게 일도 아니었다.

하지만 그조차도 용납하지 못하는 사람이 있었다.

“전가야. 네가 수고 좀 해 줘야겠구나.”

전가라 불린 흑천회주의 검은 주인의 명령에 포권을 취하더니 어느새 공사윤 앞으로 다가갔다.

‘저 녀석은…….’

‘흑천회주의 검?’

‘설마 녀석이 직접 나설 생각인가?’

“넌 뭐야? 다가오지 마! 가까이 오면 그냥은 못 죽을 줄…….”

스핏! 툭, 데구르르.

사람들은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분명 한순간도 놓치지 않고 집중했는데?’

‘젠장! 놈의 움직임을 전혀 보지 못했다!’

‘이게 그 악명 높은 흑천회주의 검인가…….’

분명 단 한 순간도 시선을 떼지 않았다.

그런데 어느새 전가는 공사윤의 뒤를 걸어 나가는 중이었고, 공사윤의 머리만 바닥에 떨어져 데굴데굴 구르고 있었던 것이다.

“놈의 머리를 잘 포장해서 홍룡회주에게 보내 주려무나.”

“시신은 어떻게 할까요?”

“놔두어라. 저들이 알아서 처리하겠지.”

양자간은 몸을 돌려 걸어 나갔다. 그의 뒤로는 죽은 공사윤의 시신을 찢어발기며 분풀이를 하는 아귀들만 남아 있을 뿐이었다.

검신이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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